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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미래

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 민음사
1.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간략한 역사



모든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천도를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324년, 세계 대제국의 지도자는 로마에서 고대 그리스 식민지이자 흑해의 관문인 비잔티움으로 천도를 단행하고 "콘스탄티노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로마'를 채우기 위해 제국 곳곳에서 예술품을 가져왔다. 그러나 황제가 거의 모든 것을 가져갔지만, 유일하게 로마 주교만은 남기고 떠났다. 황제와 교회의 분리 결과로 영국의 고전학자 어네스트 바커가 간파했듯이, 동쪽(비잔티움)은 국가의 통제 아래에 들어갔고, 서쪽(로마)은 종교의 자치권에 속하게 되었다. 아마도 서쪽에서는 자치권 경쟁이 시작되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누스의 천도 이후 1,500년간 유럽의 역사는 국가와 교회의 끊임없는 투쟁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의 불씨에서 최초로 인류 자유의 불꽃이 타올랐다.



과거의 자유와 오늘날의 자유

그리스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자유의 발생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근대의 자유(liberty)란 대부분의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자비한 국가권력, 즉 자의적인 권위로부터의 개인의 자유(free-dom)를 의미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는 민회가 무제한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다. 개인의 권리는 이론적으로도 신성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보호받지 못했다. 헤로도토스가 그리스인들이 '자유로운 인민'이라고 썼을 때, 그들이 외국의 정복이나 지배에 따른 노예가 아니라는 것 -오늘날 우리가 '국가의 독립' 혹은 '자결'이라 지칭하는 사상- 을 의미했다. 반면 로마인들은 자유의 다른 측면을 강조했다. 즉 모든 시민은 법 앞에 동등하게 취급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관점에서 로마의 자유 개념은 근대 서구적 개념에 보다 가까우며, 라틴어 '리베르타스(libertas)'가 우리가 사용하는 자유의 개념적 어원인 것이다. 3권 분립에 의한 분점 정부, 공무원 선출의 임기 제한, 그리고 법 앞에 평등으로 이루어지는 로마 공화정은 미합중국의 설립 이래로 정부의 모델이 되어 왔다. 상원, 공화국, 헌법, 장관과 같은 로마 시대의 정치 개념들과 용어들은, 오늘날까지도 서방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서유럽의 법체계는 로마의 유산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20세기 초반까지 법조인들은 라틴어에 능통해야 했다.



가톨릭의 역설

로마의 가장 실질적인 유산은 로마 가톨릭교회다. 자유의 이야기를 가톨릭교회에서 시작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나의 제도로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상의 자유는 물론이고 심지어 최근까지도 신앙의 다양성조차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부터 가톨릭교회는 집요하게 국가 권력에 저항했으며, 그 결과 전제 군주의 통치에 제한을 가할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세속적 권위와도 독립적이었으며 또 세속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최초의 주요 제도였다. 이를 통해 교회는 국가 권력의 거대한 성벽에 균열을 만들었으며, 그 파열구와 틈 사이에서 개인의 자유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로마 vs 종교 개혁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권력 투쟁은 가장 길고도 피 어린 결말을 가져왔으며, 우발적인 것이었지만 자유에 대한 혁명적인 함의를 시사한다. 믿기 어렵지만 투쟁을 선동한 사람은 작고 호젓한 도시 비텐베르크의 독실한 독일 수도사였다. 16세기 초반 유럽에는 타락하고 전례 없이 강대해진 교황권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로마의 가장 악명 높은 업적은 심지어 아직 범하지도 않은 죄에 대한 면죄부 판매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면죄부 판매금은 교회의 그칠 줄 모르는 사치를 충당하는 데 사용되었다. 교황이 새로이 계획한 것은 유사 이래 가장 크고 거대한 대성당(로마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이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벽과 복도에서 천장으로 이어지는 금제 장식, 프레스코, 벽걸이 융단을 응시하며 바티칸의 대리석 위를 걸어 본다면, 마르틴 루터의 신심어린 분노를 상상하기는 쉬울 것이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곽 교회의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고 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 가톨릭교회가 루터 사상의 유포를 엄격하게 금지하면서 대응하기 시작한 시점은 이미 인쇄기가 루터의 반박문을 유럽 전역에 배포한 다음이었다. 종교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150년의 피 어린 시간이 지난 후, 유럽의 절반은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북유럽에 있는 소수의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은 성직자들의 중재 없이 개인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젖혔다. 프로테스탄트 종파가 어떠한 성직자들도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신도 자치회에서 선출되었다. 종종 더 넓은 공동체 내의 소수 분파는 모든 소수자들이 선택한 바대로 믿고 숭배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이와 함께 소수자들은 서유럽에서 종교적 자유의 공간을 열게 되었다. 그들은 양심과 출판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성경과 같은 종교적 텍스트는 물론이거니와 이에 따라 전승된 모든 지식에 대한 비판적이며 과학적인 탐구와 관련된 근대 사상의 형성을 촉진했다. 더욱 즉각적인 프로테스탄트의 정치적 효과는 왕과 군주들이 오만한 바티칸으로부터의 권력 찬탈 -결과적으로 그들이 매우 기대한 바이기도 했던- 을 용인하게 만들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자신의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한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했다. 교황은 이를 거부했으며 헨리 왕은 스스로를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하며 바티칸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영국의 분열은 일련의 종교적 반박의 시발점이자 가장 두드러지는 사례로, 루터 이후 거의 150년 동안 사실상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휘말려 바티칸에 대항한 투쟁의 일부였다. 종교 개혁으로 촉발된 전쟁은 1648년에서야 종결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에 벌어진 80년 전쟁과 독일의 30년 전쟁을 마감한 조약)은 독일인들 사이의 30년 전쟁을 종결시켰으며 과거에 신(실제로는 교황)의 몫이었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었다. 1648년은 교회와 국가 사이를 구분하는 확실한 지점은 아니지만 서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변동을 상징한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유럽이 영적으로는 가톨릭교회가, 세속적으로 신성로마 황제가 지배하는 하나의 거대한 기독교적 공동체라는 사상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미래는 국가에 속하게 되었다.



계몽 국가

계몽사상이 17세기 유럽을 관통하자 볼테르나 디드로 같은 철학자들은 정부의 "합리화"와 "근대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력한 중앙정부의 권력과 지방과 지역의 권위 약화를 의미했다. 이후 "계몽된 절대주의"라고 불리는 약간의 진보적인 요소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의 이동은 사회 내에서 왕족의 권위와 월권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제 자유는 지배자의 은총에 의존하게 되었다. 대내외적인 압력에 직면할 때, 가장 관대한 군주, 그리고 그렇지 않은 그의 후계자는 자유화를 폐지하고 이견을 진압하게 된다. 전쟁, 혁명, 내란으로 유럽의 평화가 위협받던 18세기 말, 계몽된 절대주의는 계몽주의이기보다는 절대주의적으로 변했다. 절대 군주는 루이 14세의 프랑스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루이 14세가 태양왕으로 불리는 것은 흔히 생각되는 바와 같이 그의 금제 소장품 때문이 아니라, 국가 내에서 그의 독보적인 지위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다른 모든 세력들은 힘을 잃었다.



프랑스 혁명(1789)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지만 이러한 중앙집권화의 경향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프랑스 혁명은 토지 귀족을 파괴했다. 또한 교회를 무력화했으며 지방의 영주, 교구와 은행을 약화시켰다. 혁명은 중앙 권력을 제한했다기보다는 혁명 도상에 있는 다른 모든 권력을 폐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프랑스인이 주목했던 또 다른 자유의 모델이 존재했었다. 18세기의 많은 계몽주의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몽테스키외는 정부 형식 때문에 영국을 존경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국의 정부 형태는 이론적으로 자유를 공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며 영국체제의 장점을 규명했다. 정부는 국왕, 귀족(상원), 평민(하원)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어떤 한 부분만 강력하게 성장하지 못했다. 이러한 "권력 분립"은 시민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보장한다. 몽테스키외는 정부와 헌법의 메커니즘을 맹신하지 않았으며, 그의 주요 저작에는 "법의 정신(The Spirit of the Laws)"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실제로 수세기 동안, 영국 군주의 힘은 18세기 후반까지 축소되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군주국이었지만 실제로는 토지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는 귀족 공화제였다.



자본주의의 결과

18세기 무렵, 매우 독특했던 영국의 정치 문화는 자본주의라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힘의 원천을 획득했다. 만약 교회와 국가, 영주와 국왕,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투쟁이 개인의 자유를 위한 문을 열어젖혔다면, 자본주의는 그 성벽을 무너뜨렸다고 할 수 있다. 천년 이상 지속된 경제, 사회, 정치적 삶의 양식을 파괴하며 근대 사회를 구성하는데 어떠한 힘도 자본주의만큼 강력한 추동력이 되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혈통과 가문을 강조하는 봉건제와 군주제를 파괴했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모든 선진 사회에서 지배적 세력이며 국가에 대한 의존성이 적은 독립적인 기업가 계급을 창조했다. 자본주의는 수천 년간 존재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영국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자본주의는 모든 곳에서 시작되었다. 14세기 무렵, 중세의 대부분 동안 위축되었던 무역과 상업은 다시금 유럽 전역에서 번성했다. 그리고 16세기 무렵 "재산권은 가족에게, 주권은 군주와 그의 행정관에게 귀속된다."는 동의가 유럽 전역에서 발전했다.



자본주의는 국왕으로부터 부여받은 토지가 아니라 독자적인 경제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신생 집단을 만들어냈다. 중소 귀족에서 기업적 귀족까지 이러한 영국의 '자유민(yeomen)'은 한 역사가의 말을 빌리자면, "야심적이고 공격적인 작은 자본가 집단"이었다. 이들은 최초의 부르주아지였으며, 카를 마르크스가 정의한 바와 같이 사회적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에 대한 고용주들인 산업 재산을 소유한 계급이었다. 영국 정치는 기업적 행위가 사회적 진보의 주요 수단이 되면서 혁명적으로 변화했다. 17세기에 국왕으로부터 권력을 획득하고 국가를 운영해온 하원은 이제 부유한 신흥 상인들과 무역업자들로 채워졌다. 영국에서의 귀족의 수는 18세기 말까지 200명보다 적은 정도로 항상 미미한 편이었다. 그러나 귀족 계급 아래에는 '영국 젠트리(gentry)'라고 불리는 광범위한 계급이 있었다. 이들의 대다수는 구질서와 건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공생활에 참여했으며 자유 무역, 자유시장, 개인적 권리와 종교의 자유와 같은 진보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세 명의 수상인 로버트 필, 윌리엄 글래드스톤,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모두 젠트리 계층 출신이다. 이들 신흥 권력 계급은 장원의 대저택, 모닝코트, 사냥 파티와 같은 많은 귀족 정치적인 특징을 차용했지만 귀족들보다 더욱 부드러웠다. "신사(gentleman)"는 심지어 영주들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 사회의 유행을 창조하는 사람이 되었다. 신사의 기원은 영국에서 자유의 탄생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다.



앵글로아메리카

볼테르는 "영국 시민을 부유하게 만든 상업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였으며…… 반대로 자유는 상업을 확장시켰다."라고 주목했다. 자유시장은 중간 계급을 부유하게 했으며, 이는 곧 자유를 촉진했다. 이는 일종의 선순환이었다. 영국과 가장 흡사한 지역은 영국 식민지 미국이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튜더 왕조가 영국에 남기고 온 것과 매우 유사한 정부를 설립했다. 그러나 미국은 특별했다. 미국은 봉건제 없는 영국이었다. 물론 미국은 부유한 토지 소유 가문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작위가 없었으며,태생적 특권도 없었으며 영국 상원에 필적할 만한 정치적 권리도 부여받지 못했다. 수백 년의 군주정과 귀족정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강력한 중앙정부나 구질서를 전복하기 위한 폭력적인 사회 혁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토크빌의 유명한 말마따나 "미국인들의 최대 이점은 민주주의 혁명을 감수하지 않고도 민주주의 국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평등하게 될 필요 없이 평등하게 태어났다."



19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 대부분에서 개인의 자유가 융성했으며 법 앞의 평등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두 국가 모두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1930년에 들어서야 여성에게 완전한 참정권이 주어짐으로써 영국은 모든 성인의 보통선거와 같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기준이 마련되었다. 이제 영국은 자유를 보장하고 법에 의해 지배되는 헌정적 자유주의 국가로 광범위하게 인정되었다. 미국은 영국보다 더욱 민주적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다. 미국의 초기 수십 년간 오직 백인 남성 중 일정 재산을 소유한 사람만이 투표권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체제는 미국이 전복시켰던 국가의 지배 양식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1920년에 투표권을 얻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과 미국의 법률과 권리 체계는 전 세계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헌정적 자유주의는 자유의 진전을 초래하는 민주주의를 추동했으며 이는 현실화되었다. 유럽의 나머지 국가들은 영국이나 미국보다 더욱 복잡한 경로를 거치긴 했어도 결국 자유민주주의로 귀결되었다.



2. 뒤틀린 경로



1차 대전 이후에 성립된 바이마르 공화국(1918년 11월 혁명 후 성립해 1933년 나치 정권 수립까지 독일공화국의 통칭)은 자유로운 언론과 공정한 선거를 갖춘 잘 계획된 민주주의였다. 나치당은 작은 마을과 도시들을 조직화하고 침투하기 위해 민주적 과정을 최대한 이용했다. 공황과 살인적 인플레이션에 직면하여 독일의 대중과 중간 계급은 히틀러의 강력한 지도력에 대한 약속이 조국을 다시금 부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다. 정치학자 잭 스나이더는 면밀한 연구를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인종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국가주의는 정치 생활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민주화 때문에 승리했다."라고 결론 내렸다.



왜 독일은 영국과 달랐는가?

독일의 민주주의는 직접적으로 자유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자유주의는 20세기 전반기에 실패했으며 민중주의적 권위주의는 후반기에 들어 붕괴되고 신뢰를 상실했다. 이 투쟁으로 인해 대부분 유럽의 자유민주주의의 경로가 종종 사회 혁명, 파시즘, 전쟁이라는 불쾌하고 피 어린 일화로 우회했다. 물론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같은 곳에서는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조기 발전과 같은 이유로 영국의 방식과 매우 흡사한 유형이 있었다. 그러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랑스와 같은 유럽 대륙의 거대 국가들의 역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1968년 영국 정치학자 랠프 다렌도르프는 "왜 독일은 영국과 달랐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현대의 불완전한 세계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도달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답은 복잡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독립성이란 영국적 특성이 독일에서는 부재했다는 사실이다. 산업 혁명기에 태어난 자유 무역과 재산권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부르주아 계급은 구봉건 질서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상업, 성공, 사회적 이동, 역동성과 같은 자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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