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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부활

페터 벤더 지음 | 이끌리오
Ⅰ. 로마 & 미국, 2,000년 차이 쌍생아



2,000년을 사이에 둔 두 전략가



로마의 전략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기원전 279년, 에피루스(오늘날 알바니아와 그리스의 북서쪽)의 왕 피로스는 당대의 가장 훌륭한 군인 가운데 하나로, 그의 군대는 50년 전에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할 때 이끌던 군대에 비견될 만했다. 로마인들은 용감히 싸워 이 피로스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며 '피로스의 승리'(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너무 큰 희생을 치른 승전을 일컫는 말로 사용됨)만을 내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로마인들은 패배자였고, 장차 패배를 내다보는 처지였다. 이때 피로스 왕이 평화와 화친을 제안한다.



한편 로마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최고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국내외 정치에서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 바 있다. 이미 나이가 들어 정치에서 물러났으나 원로원이 조약을 비준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들과 사위들의 인도를 받아 회의장으로 향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명성과 권력 둘 다를 이유로 평화 조약에 반대했다. 피로스에게 두 번 패한 지금 그와 평화 조약을 맺는다면 전 세계에 로마의 허약함을 증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노인은 평화 조약을 맺게 되면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있는 그의 동맹국 국민들, 즉 루카니아, 브루티움, 삼니움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을 독립시키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말하며, 이탈리아의 지배자는 로마임을 상기시켰다.



미국의 전략가, 존 퀸시 애덤스

1823년 가을, 미국의 먼로(James Monroe) 대통령은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영국의 조지 캐닝(George Canning) 외무장관이 영미 공동 선언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프랑스가 미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세계 제일의 해상 강국이 유럽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 외교관들은 이미 신세계의 동맹 부르봉 군주국, 즉 파리와 마드리드, 아메리카를 잇는 부르봉 왕조를 꿈꾸고 있었다. 유럽의 강대국이 곧 미국을 공격할 듯 보이는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유럽의 또 다른 강대국인 러시아는 이때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자리를 잡고 계속 세력을 팽창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영국 함대만이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팽창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런던에 있던 미국 사절은 캐닝의 공동 선언 제안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기울었으며, 먼로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만이 이에 반대했다. 그는 누구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었고, 미국 제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들이자 훗날 먼로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애덤스는 우선 현실적으로 주장했다. 어차피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미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애덤스는 원칙적인 문제를 거론했다. 유럽의 특정 강대국과 느슨하게라도 동맹관계를 맺을 경우 구세계의 끝없는 싸움에 말려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먼로 대통령은 미국을 변호했을 뿐 아니라 '아메리카 양 대륙'의 대변인으로 등장했다. 이전에 이미 미국 국무장관이 영국 사절에게 "영국이 캐나다를 보유하는 것은 좋지만 대륙의 나머지는 내버려두라!"고 솔직하게 선언한 바 있었다. 1819년에 존 퀸시 애덤스는 "우리가 아메리카 대륙을 우리의 지배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세계가 익숙해져야 한다고 적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이제 신대륙 전체를 이끌고 구세계에 대항하여 신대륙을 대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탈리아를 오직 로마인에게' & '아메리카를 오직 미국인에게'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존 퀸시 애덤스 사이엔 2,100년이라는 긴 세월이 놓여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흡사한 정치적 견해를 보였다. 그들은 국가의 안보를 염려했으며 각각 '이탈리아를 오직 로마인에게', '아메리카를 오직 미국인에게'라는 지배권 요구로 결론을 맺었다. 그들의 조언은 국가 외교 정책의 원칙이 될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의 연설은 키케로, 타키투스, 세네카와 더불어 로마인의 정치적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애덤스의 조언으로 탄생한 먼로선언은 대통령이 미국 정치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최초의 독트린이 되었다. 이후에도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면 로마인과 미국인들은 당시에 조언자들의 말을 따랐던 것과 같은 태도를 취했다.



로마와 미국, 과거와 현재 사이



미국과 로마를 비교하는 일은 사고의 유사성, 행동과 태도의 유사성, 지리적이고 인구통계학적인 전제들의 유사성, 끝으로 결과에 있어서의 유사성 등 실제적인 유사성을 향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선 큰 차이점에는, 한쪽은 무기를 가지고 투쟁하여 승리한 도시국가이고, 다른 한쪽은 무엇보다 이주와 구매, 경제적 팽창을 통해 확장해 간 연방이다. 한쪽은 모든 주권이 관료 계급에 있었고, 다른 한쪽은 농부와 해운업자, 상인과 기술자, 금광 채굴자 및 모험가들로부터 대부분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한쪽은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이 되었고, 다른 쪽은 국가 없이 어떤 일이 가능한가를 증명했다. 정치사상이라는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한쪽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반면, 다른 쪽은 공화국, 민주주의, 인권에 대한 사명감에 불탔다. 그들이 지닌 힘의 근원도 다르다. 한쪽은 정치적 본능, 국민적 규율과 군사적 강대함이 힘의 근원이었던 반면 다른 쪽에서는 기업가적 에너지, 역동적인 경제와 진보하는 기술이 힘의 근원이다. 또한 결과 역시 차이가 있다. 한쪽은 군주제로 통치된 제국이 된 반면 다른 쪽은 민주주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이끌어지는 비공식 제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미국에는 시간과 공간, 체제와는 무관한 유사성이 있다. 가장 큰 공통점은 그들이 동일한 의문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첫 번째 의문은 그들이 쌓은 스펙터클한 경력과 관련된다. 로마의 경우, 테베레 강가의 하찮은 도시가 어떻게 당대에 도달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지배자가 되었는가라는 의문이다. 미국의 경우, 유럽의 13개 식민지가 어떻게 식민 종주국인 유럽을 능가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대륙으로 바뀔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생성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대제국들의 생성 과정에서는 격정적인 정복자들이라는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로마와 미국의 도약은 이와는 달랐다. 즉 알렉산더나 칭기즈칸, 또는 나폴레옹과 같은 걸출한 인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로마와 미국은 서서히 성장해 갔다.



Ⅱ. 로마 & 미국, 섬나라 사람들



섬, 안전을 위한 조건이 되다



이탈리아도 미국도 지리학적 의미에서는 섬이 아니지만, 정치적ㆍ군사적 의미에서 섬으로 간주되었다. 역사적ㆍ문화적으로 이탈리아는 중앙 유럽이 아니라 지중해에 속했고,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통해 다른 대륙과 분리된 특수한 대륙에서 발전해 갔다. 사람들이 '반도'라거나 '대체로 섬인 나라', 또는 '유사 섬'이라고 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 즉 로마인들과 미국인들도 그들의 생각과 감정에 있어서 오랫동안 섬사람이었으며, 미국인에게는 이에 해당하는 고유한 단어, 즉 '고립주의(Isolationism)'라는 단어가 있다.



섬나라 로마

바다는 사람들을 세계와 연결시키고 세계를 향해 열어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세계와 갈라놓는 역할을 했다. 즉 이탈리아는 '바다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로마가 지배하는 처음 수백 년 동안 이탈리아는 바다 쪽에서 공격을 당한 일이 없었으며 피로스의 위협이 처음이었다. 피로스는 자의가 아니라 타란토의 요청에 의해 이탈리아로 왔던 것이며 끊임없이 그리스의 모험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타란토가 굴복함으로써 마침내 로마는 바다 쪽 공격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에트루리아로부터 해방된 이후 200년 동안 로마인들은 외부 세계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이탈리아 내부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미국이라는 섬나라

미국은 우선 제한적으로만 바다의 보호를 누릴 수 있었다. 로마와 달리 미국에는 이미 해외에서 온 적들이 존재했다. 플로리다에는 스페인인, 캐나다에는 영국인, 뉴올리언스에서 캐나다까지는 프랑스인, 알래스카에는 러시아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19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이 미국 외교 정책의 주요 문제로 자리하고 있었다. 북쪽이든 서쪽이든 남쪽이든 미국이 팽창해 가려 하는 곳 어디에나 영국인이 그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런던의 목적은 아메리카에 있는 옛 식민지의 팽창을 막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다른 유럽인들을 아메리카로부터 떼어 놓는 것이었다. 영국의 이러한 관심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19세기의 가장 강력한 해군의 보호 속에서 미국은 바다의 안전을 누릴 수 있었다. 미국은 세기말경에 카리브 해와 태평양의 해상권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함대와 군대, 해안의 안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1890년 이후 강력한 함대를 구축한 것은 방어의 목적이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로마처럼 미국도 아무런 방해 없이, 아무런 걱정 없이 그들의 섬 문제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섬나라, 막강한 세력을 키우다



폭력적인 정복, 개방적인 수용

로마는 전쟁과 위협으로 팽창하여 군사 식민지를 통해 지배를 확고히 했다. 미국인은 인디언을 말살시키거나 보호구역 안에 가두었고,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그들이 팔지 않는 것을 점령과 전쟁을 통해 빼앗음으로써 팽창했다. 로마인과 미국인은 자신들의 섬을 점령하면서 거의 무제한으로 폭력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로마인과 미국인의 또 다른 공통점은 팽창하는 국가들에게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어떤 능력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국가의 성격을 바꾸지 않고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해치지 않으면서 국가를 확장시키고 국민의 수를 늘렸다. 양자 모두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것은 멀리했고 자신들에게 맞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개방적이었다. 로마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관대하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미국은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자치 행정을 갖춘 새로운 주들을 수용함으로써 국가를 확장시켰다. 그들은 유럽에서 온 이주자들을 받아들여 국민의 수를 늘렸다.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근거로, 즉 종교적ㆍ인종적ㆍ정치적ㆍ경제적 근거를 들어 문호를 닫기도 했으나, 미국은 항상 이민국가로 남아 있었다. 새로 들어온 이민자들은 처음에는 미국에 낯설어 했지만, 독일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적응해 갔다.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하다

로마인과 미국인은 헬레니즘과 유럽의 정복에 저항했을 뿐 아니라 로마인에 의한 헬레니즘 세계 정복과 미국인에 의한 유럽정복이 가능한 힘을 축적했다. 이탈리아의 지배자로서 로마인은 이탈리아 전체의 병력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최초의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다. 이와 유사하게 영국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미국의 거대한 생산력을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은 독일 잠수함에 의해 침몰된 상선 한 척당 세 척을 새로 만들어 냈고, 유럽과 태평양에서 격추당한 연합군 비행기 한 대당 다섯 대를 생산해 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이미 미국은 세계 제일의 경제 강국이었으며, 미국의 산업 생산력은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산업 생산물을 다 합친 것과 같은 정도에 달했다. 알렉산더의 후예들, 그리고 유럽의 황제와 왕들이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로마인은 200년이 넘게, 미국인은 100년 넘게 말 그대로 총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비교적 방해를 받지 않는 섬이라는 상황에서 그들은 각자의 특성을 발전시키며 권력의 토대를 구축해 갔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 정치에 개입하고 바다 저편에 있는 나라들을 장악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Ⅲ. 로마 & 미국, 세계 정복자가 되다



로마와 미국이 지역 강국에서 당대 유일의 세계적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에는 각각 74년, 즉 대략 4분의 3세기가 걸렸다. 로마는 기원전 264년에 카르타고와의 첫 번째 전쟁을 치르고 기원전 201년에 다시 카르타고에 승리하여 지중해 서쪽 지역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다. 11년 후에는 마케도니아와 아시리아의 왕들을 무찔렀으며 이후 고대 세계의 동쪽에 더 이상의 강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은 1917년에 1차 세계대전에 휘말렸고 이 전쟁이 종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5년에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도약했으며, 1991년에 라이벌 소련이 붕괴함으로써 최초의 세계적 강국에서 유일한 세계 강국이 되었다.



결정적 전투, 당대 최초의 세계 강국을 낳다



로마 최대의 도전, 2차 포에니 전쟁

로마인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명했던 이 전쟁을 후손들은 '일찍이 치렀던 모든 전쟁 중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이라고 여겼다. 로마인에게 한 번도 한니발과 같은 적수가 없었고, 그들이 이탈리아를 지배한 이후로 자기 나라 안에서 전쟁을 벌이도록 강요당한 적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500년이 지나 민족대이동에서야 비로소 낯선 침입자들이 이탈리아로 몰려왔다.



한니발의 천재성 vs 로마의 힘 : 한니발은 스페인 북부의 정복을 받아들이기를 희망했는데 로마의 선전 포고는 그를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 그는 스페인 뿐 아니라 아프리카, 즉 수도 카르타고의 안전에도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로마인들이 어디에서 전쟁을 개시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로 진격함으로써 아프리카와 스페인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수단, 신속성과 기습을 이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에게 스페인과 군대의 거의 절반, 그리고 병참 부대를 맡긴 다음 정예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발했다. 한니발은 피레네 산맥을 넘고 남부 프랑스를 지나 알프스를 넘어가는 길을 매수와 폭력으로 헤쳐 나갔다. 이러한 강행군은 엄청난 손실을 대가로 지불했다. 길에서 만난 적들과 추위, 빙판이 된 길, 배고픔과 질병으로 두 사람 중 하나가 희생되었다. 포 강에 도착한 사람들도 육체적ㆍ도덕적으로 '피폐해진' 모습이었다.

한편 로마인들이 범한 오류는 더욱 심각했다. 그들은 몇 십 년 동안 잘못된 위험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상 강국인 로마가 바다를 주시하고 있을 때 해상 강국은 육지를 통해 들이닥쳤다. 한 집정관이 스페인으로 가서 한니발과 싸우고, 또 다른 집정관은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나타나자 카르타고로의 돌격은 취소되어야 했다. 17년 동안 로마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전쟁을 치렀고 패배에 패배가, 앞선 패배보다 더 끔찍한 패배가 이어졌다. 특히 기원전 216년 여름 칸나이에서의 참담한 패배에서, 로마군과 동맹군 8만 명이 카르타고 용병과 지원군 5만명을 진압해야 했지만, 다수가 소수에게 포위당하여 초토화되었다. 그것은 로마의 가장 끔찍한 패배였다. 로마의 군사력은 약화되었고 이탈리아의 동맹국들은 떨어져 나갔으며, 예전에 충성스러웠던 시라쿠사가 변하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은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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