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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요덕

강철환 외 지음 | 월간조선사
히틀러와의 화해를 위해 아우슈비츠를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함경남도 요덕군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함경남도 금야군을 통해 월왕령(越王嶺)을 넘어 들어가는 길, 또 다른 하나는 평양-온성 간을 오가는 기차역 관평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것이다. 1977년 8월, 우리 가족이 요덕으로 들어갈 때에는 관평 도로가 나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함남 금야군을 통해 월왕령을 넘어 요덕수용소로 압송됐다. 때문에 월왕령은 수용소로 들어가는 눈물과 한이 서린 고개다. 수용소로 오가는 운송수단은 북한에선 보기 드물게 모두 화려하다. 러시아제 신형 트럭 '지르'가 정치수들을 실어 나르고, 보위원과 군인들은 외국에서 수입한 고급 버스를 타고 다닌다. 하지만 요덕역에서 일반주민들이 이용하는 버스는 구 체코산 낡은 버스가 몇 대 다닌다. 하도 고장이 잦아 요덕읍까지 들어가는 길은 전쟁터와 같다. 요덕역에서 요덕읍까지는 80리, 요덕수용소까지는 120리 정도다.

요덕수용소가 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현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요덕군 용평 지구에 1960년 초 지주(地主), 자본가, 6ㆍ25전쟁 때 미군을 도왔던 '악질 반동'들을 임시 수용하는 구역이 있었는데, 1965년경 요덕군 다섯 개 리(용평리, 평전리, 립석리, 대숙리, 구읍리) 주민들을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수용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7년 우리 가족이 요덕수용소에 처음 입소할 때에는 수용소가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요덕수용소를 남북으로 흐르는 입석천을 경계로 동쪽은 '완전통제구역', 서쪽은 '혁명화구역'이었다. 가끔 완전통제구역에서 누명을 벗거나 감형을 받아 혁명화구역으로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드물게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혁명화구역은 '지상낙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완전통제구역이란 곳이 얼마나 열악한 곳인지 짐작할 수 있었고, 혁명화구역에 수감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정치수 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외곽경비와 내부관리로 구분된다. 외곽경비는 인민경비대 산하 군인들이 완전 군장을 갖추고 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경비를 선다. 때문에 이들은 38선 경비대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내부에는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직접 관리한다. 각 반마다 두 명의 보위원이 정치범들을 관리하는데, 보위부의 감시전략은 정치범 내부에서 서로 감시하도록 하는 데 있다. 정치범 가운데 건장한 사람을 뽑아 총감독이란 자리를 만들고 감독은 각 반장들을 통제한다. 반장은 분조장, 분조장은 5인조를 감시한다. 5인조는 수용소 하부말단 조직이다. 5인조장은 분조장에게 보고하고 분조장은 작업반장, 작업반장은 감독에게 보고하는 식이다. 보위부 요원은 감독에게서 모든 상황을 직접 보고 받는다. 이 외에도 수용소 내부에는 정치범들을 비밀 스파이로 잠입시킨다. 그들에게는 특별 위로금이 지불되고, 담배와 식료품도 비밀리에 공급된다.



3개월 안에 강제노동과 먹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면 영양실조로 사망하게 된다. 처음 먹어보는 옥수수밥이 소화가 안돼 3개월간 설사를 하고 나면 뼈만 남게 된다. 3개월이 수용소 생활의 최대 고비인 셈이다. 너무 고기가 먹고 싶어 자신의 살이라도 뜯어먹고 싶을 정도다. 동료들과 함께 밭에서 쥐 굴을 파내 잡아낸 쥐들을 난생 처음으로 구워 먹었는데, 그 순간이 수용소 생활에 적응하는 첫 코스이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으려면 쥐고기는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고급에 속한다. 지렁이, 개구리, 심지어 소똥에 박힌 옥수수 알을 주워 먹을 정도가 돼야 수용소에서 살아남게 된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수용소의 영양실조는 '펠라그라'로 불리는데 옥수수만 먹고 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토속병이라고 한다. 옥수수만 먹고 단백질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할 경우 생기는 영양결핍이 펠라그라인데, 북한에서는 수용소 외에도 널리 퍼져 있는 영양실조 증세다.



공개처형으로 죽고, 굶어죽고, 강제노역으로 현장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을 매일같이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더 강해진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짐승처럼 죽고 싶지 않은 것은 아마 모든 인간의 공통된 의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도 완전통제구역에 가지 않고 혁명화구역에 수감된 덕분에 우리 가족은 10년 만에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풀려나게 됐다. 수용소 소장은 "당의 큰 배려로 새 생명을 얻게 됐다"라며 "죽어도 이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무엇이 당의 배려이고 새 생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옥에서 낙원으로 나온 듯한 느낌, 수용소 밖의 공기를 마시면서 자유를 느꼈다. 수용소에서 출소할 때 안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일체 외부에 발설하지 말며, 이를 어길 시에는 그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서약을 했다. 5년간의 사회생활 후 북한을 탈출해 기적같이 대한민국에 입국한 날, 요덕수용소가 드디어 공개됐다. 기자회견을 통해 처음으로 북한의 수용소가 낱낱이 폭로된 것이다.



국제사회는 유엔인권위, 유엔총회를 통해 연일 북한 인권에 대해 거론하고 있지만, 남한 국민들의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은 국제사회와는 거꾸로 가고 있다.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미군의 점령으로 만행이 멈춰진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북한의 만행도 어쩌면 김정일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야 멈춰지지 않을까? 한 명의 무고한 주민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남한 국민은 무엇을 하고 있고 국제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오랜 기간 동안 남북한이 싸워왔는데 이제 겨우 화해하는 마당에 인권문제를 거론하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대해야 할 존재는 북한 지도부가 아니라 북한 인민이고 화해할 대상도 바로 인민이다. 그 인민을 억압하는 정권과의 화해 때문에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할 인민의 인권을 거론하지 못한다는 것은 히틀러와의 화해를 위해 아우슈비츠를 그대로 놔두자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 그곳이 바로 지옥이니까



15호 관리소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는 만큼 내부인의 탈출도 철저하게 막고 있다. 철통같은 경계를 하지만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기도 한다. 탈출 기도자는 매년 15명 정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양부족으로 험한 산을 넘을 수가 없고 산을 넘는다 하더라도 체포되어 지금까지 탈출에 성공한 예는 단 한 건도 없다고 한다. 또한 이렇게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은 현장에서 무차별 사살되며, 체포 시에는 수용소에서 공개총살이나 교수형에 처해진다. 수용소 내에서는 부락마다 담당보위원 두 명이 상주하면서 감시하고, 야간에는 보위부원, 인민 반장, 감독 등이 매일 밤 인원을 점검하기 때문에 탈출을 시도하면 12시간 내에 비상이 걸린다. 이 같은 수용소의 경비는 국가보위부 산하 인민경비대에 소속된 군인 1천여 명이 전담하고 있으며, AK자동소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수용소 내에서는 범죄자의 가족이 수용되면 '가족세대'라 하고, 범죄자 장본인이 수용되면 '독신중대'에 편입된다 하여 '독신중대'로 통칭하며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구역을 나눠 놓고 감시하고 있다. 수용소 내에도 중범자 가족들은 한번 들어가면 출소 불가능한 '완전통제구역'으로 수용되고, 국가보위부에서 경미한 범죄라고 분류한 범죄자 장본인과 그 가족들은 이른바 '혁명화 구역'으로 분리 수용된다. 범죄 혐의자들은 주로 보위부원들의 끄나풀인 정보원들의 밀고에 의해 구속되며, 구속되는 과정은 거의 납치와 다름없다. 귀순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구속해야 할 사람을 사회안전부 등 일반기관에서 정식으로 공문이나 전화로 불러내게 한 다음, 통보받은 장소로 이동 중에 납치한다. 따라서 가족은 물론 통보한 기관에서조차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게 되어, 자연히 '간첩으로 행방불명'이란 항목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가족세대'의 경우는 수용기간 중 모포 한 장과 상하 누빈 동복 한 벌을 지급하며 3년에 한 번씩 작업복을 공급하지만 '독신중대'는 수용 당시 입고 갔던 의복 한 벌로 기약 없는 출소일까지 생활해야 한다. 작업을 하기 위한 노동화는 1년 6개월에 한 켤레, 겨울 솜동화는 5년에 한 번씩 공급되고 양말, 팬티 등 속내의는 일체 지급치 않고 있으며 겨울철에는 목욕을 하지 못해 이, 벼룩들이 우글거려 발진티푸스가 자주 발생한다. 화장실의 경우는 수용자 모든 세대가 공동변소를 사용한다. 그래서 아침에는 수십 명씩 줄을 서서 용변을 봐야 하는 형편이고, 마른 강냉이잎, 콩잎, 호박잎, 칡잎들을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하며,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에는 둥근 자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사용하기도 한다. 겨울철에는 마을 주변에 나무가 없어 겨우 밥이나 하는 정도로 불을 내기 때문에, 집안의 온도가 낮아 몸을 비비며 추위를 쫓느라 잠을 못 자는 형편이고, 하천에서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서 먹고 있다.



새벽 5시 반까지 아침식사를 마치고 작업준비를 하면 보위부원, 작업감독이 인원점검을 실시한다. 인원점검 시 조금이라도 늦게 나오는 경우는 모진 구타를 당하며 '가족세대'의 경우는 월 지급 식량에서 하루분을 공제한다. 작업은 5인조별로 저녁 8시까지 실시하며 오전, 오후 30분 휴식과 점심은 각자 지참한 강냉이 주먹밥으로 현장에서 취식하게 된다. 저녁 6시에 담당 보위원이나 감독, 인민 반장 등이 할당된 작업결과를 중간 점검하고 작업 목표가 미달되었을 경우는 연장 작업을 시킨다. 저녁 8시 반, 또는 9시쯤에 작업이 종료되면 저녁 10시부터 보위원과 작업감독, 인민 반장이 인원점검을 한 뒤 저녁 11시에 취침토록 하고 있다. '독신중대' 수용자의 경우는 인원점검을 매시간 실시하며 저녁 10시부터 1시간 동안은 김일성 덕담, 김 부자(父子) 찬양노래 등을 반복해서 교양시킨다.



수용소 내에는 지구마다 20~30명 규모의 학교가 한 개씩 있으나, 명분만 있을 뿐 마치 어린 노예들이 일을 하는 노동현장과 흡사하다. 학생들은 아침 6시쯤에 집을 나와 마을 앞에 집합, 줄지어 노래를 부르면서 등교한 뒤 12시에 학교수업이 끝나면 오후 일과는 노동시간이다. 교장을 비롯하여 교무주임, 일반교원 모두 보위원들로 권총을 항상 차고 다니며 수업시간 중 질문은 일체 못하게 되어 있고 만약 수용소에 새로 들어온 학생이 학교의 규칙을 모르고 질문할 경우 교원은 선생을 놀린다는 이유로 모질게 구타한다. 학생들은 주로 나무채취, 강냉이 작업량이 정해져 있으며 정량을 다하지 못할 경우 집에 보내지 않고 연장작업을 시킨다.



수용자 대부분은 영양실조와 심한 육체적 노동으로 폐렴, 결핵, 간염, 펠라그라병 등의 질병에 감염되어 있었다. 특히 폐렴, 결핵, 간염 등 전염병 환자들은 수용소 뒤 평풍산 골짜기에 격리시켜 수용하지만 치료를 전혀 해주지 않아 저절로 사망하게 된다. 또한 단백질 부족으로 생기는 펠라그라병 환자는 게걸증세가 있어 지렁이, 쥐, 개구리 등을 마구 잡아먹지만,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예는 허다하고 고환염, 치질환자 등 중환자들도 작업장에 동원되기 때문에 걸음속도가 늦다는 이유로 구타당하기 일쑤라고 한다. 작업장 동원 시 엉덩이를 양손으로 벌려 잡고 걷는 사람, 오리걸음을 걷는 사람, 숨이 차서 걷다가 주저앉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처참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수용소 내 진료소에는 의사가 없을 뿐 아니라 투약하는 경우가 없어 대숙, 구읍지구의 경우 매년 40~50명씩 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도주자, 도주 기도자, 보위부원 구타에 격분하여 보위부원을 구타한 자 등이 발생하면 1~2일 동안 감금해두었다가 통상 아침 10시쯤 작업장에서 수용소 주민들을 전원 강변에 집합시킨다. 그리고 보위부원 2명이 끌고 나가 눈 부위는 헝겊으로 가리며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나무 말뚝에 눈과 가슴부분 및 다리부분 등 세 부위를 포박한다. 이어서 관리소장 등 간부 두세 명이 책상에 앉아 있다가 소장이 "반역자 ○○○에 대한 처형을 시작하겠다"라고 선포하고 대상자의 죄행에 대해 약 5분간 설명한 뒤 "민족을 배반하고 반역의 길을 걸었다"라면서 "형법 ○○조에 의거, 총살형에 처한다"라고 선언을 한다. 이 선언이 끝남과 동시에 보위부원 세 명이 자동보총으로 사격자세를 취하면, 지휘자는 "민족반역자 ○○○를 향하여 쏴"라는 명령을 내린다. 요덕수용소의 경우 매년 15명 정도가 공개총살형을 당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교수형을 하는 때도 있다. 교수형은 수용소 탈출 후 체포되는 등 경비병이 다수 동원된 경우에만 실시된다고 한다.



수용소 안에는 심한 구타 등으로 수용 당시 멀쩡한 사람도 정신병 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부는 수용소에 오기 전 심한 정신적 타격을 받아 이미 정신병자가 되어 입소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 정신병 환자들은 '17호 수용소'라 불리는 철판용접으로 만든 별도의 병동에 수용되며 수용인원은 200여 명으로 추측된다. 정신병 환자들도 작업에 동원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비교적 단순한 작업만을 시킨다. 보위부원들은 정신병 환자들을 먹는 것으로 통제한다고 한다. 즉 일하는 양에 따라 그릇 위로 밥이 올라오는 '상밥', 수평의 '중밥', 밥공기 중간까지만 담기는 '하밥'으로 식사량을 제한 배식하는 것이다. 정신병자가 수용관리 중에 김일성 부자(父子)에 대한 욕설이나 체제비판과 관련한 헛소리를 하게 되면 "평소 갖고 있던 생각에서 그와 같은 언동이 나온다"라며 가족 전체를 보다 통제가 심한 완전통제구역으로 이감시키는 경우도 있다.



수용소 내에 수용된 많은 가족은 대부분 부모의 실수로 인해 수용되었기 때문에 자식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면 부모를 원망하고 증오하게 된다고 한다. 특히 죄를 범한 당사자가 죽게 되면 그 가족들이 출소된 사례가 있어 자식들은 부모에게 "빨리 죽어라"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부모와 자식이 싸우다가 부모들이 맞아죽는 경우, 또는 부모가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질병에 걸려 운신을 못하게 되면 귀찮게 생각하여, 밥을 주지 않아 굶어죽게 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한다. 1979년경 북송교포 마을에 거주하던 김성일(25세)은 수용 1년 만에 아버지가 질병에 걸리자 구박과 함께 밥을 주지 않아 굶어죽게 하였고, 1979년경 구읍지구 3반 마을에 거주하던 최영철(24세)은 아버지가 형과 싸워 맞아죽었고, 어머니가 병사하자 출소한 사실이 있으며, 귀순자 강철환의 친구인 북송교포 마을 거주 전진일, 송인석, 홍만득, 신황식, 한창주, 이태근 등의 아버지 역시 자식들에게 맞아죽거나 구박을 받아 굶어죽었다.



1974년 초 100여 세대 600여 명이 최초로 수용된 이후, 1979년까지 연 100~200세대씩 수용되어 왔다. 현재 북송교포는 일가족 수용자 800여 세대의 5,000여 명과, 범죄자 장본인 300여 명으로, 도합 총 5,300여 명이 수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1980년대 이후는 수용자가 감소하여 새로 수용되는 자는 거의 없고 심사 결과에 따라 출소자만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대부분은 이유도 모른 채 요덕수용소의 구읍지구 10반에 3개 마을로 집단 수용되어 있다. 마을과 마을은 200m 간격으로 떨어져 있고 주간에도 상호방문을 규제하고 통행증이 있어야 하며 저녁 10시부터 아침 5시 30분까지는 통행을 금지시킨다. 야간에는 보위원과 작업현장 감독 3~4명이 매일 순찰하면서 가택점검을 실시하고, 인원이 없을 경우 마을의 종을 쳐 비상을 걸고 수색을 실시한다. 특히 야간 10시 이후 이동하다 순찰에 적발되면 1개월간 중노동에 처하고 3회 이상 적발된 경우는 수용소 내 '구류장'에 넣어버린다.



4년간 50여 명 공개처형, 굶주림으로 정치수 절반이 굶어죽어



요덕수용소는 북한에서 일인ㆍ일당 독재체제에 위배되는 행동이나 발언을 했다는 주민들을 끌어다가 바깥세상과 절연시킨 채 정배살이를 시키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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