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즐거움
김열규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1. 공부는 삶이다살아있는 순간 오늘도 공부한다(장영희-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나는 어렸을 때부터 신기할 정도로 특별한 재주가 없는 아이였다. 신은 늘 공평하다고 믿는 어머니는 내가 일생을 신체장애(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를 갖고 기동력 없이 살게 되었으니 혹은 다른 특별한 재능이라도 주시지 않았을까 주도면밀하게 나의 '재능' 찾기에 바쁘셨다. 내가 다섯 살이 된 어느 날, 일부러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한글을 깨치고 순정만화를 읽는 오빠 옆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신 어머니는 그날로 결정하셨다고 한다. '쟤는 천상 공부밖에 잘할 게 없는 팔자'라고. 이렇게 해서 특별히 잘 할게 없었던 나는 얼떨결에 공부하는 게 내 '팔자'가 되었다.
중학교를 가야하는데 내 신체장애를 이유로 어느 학교에서도 입학시험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학교 저 학교를 찾아다니시며 제발 입학시험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셨다.나는 육체의 기능이 떨어지니 머리로 내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남만큼 아니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공부로 내가 이 세상에 발붙여야 하는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 당시에 장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란 순전히 수작업과 관련한 일뿐이었다. 학교에 가지 못해 그냥 집에 있거나 아니면 내 무딘 손재주로 수를 놓거나 목공예나 시계수선 같은 일을 해서 밥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것은 내게는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공부만이 나의 살 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순전히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나의 단 한 가지 재능까지도 원천봉쇄하려는 사회와 싸워이기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겼다!
이렇게 말하니 사뭇 전투적이고 비장하게 들리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 싸움을 나름대로 즐긴 것 같다. 이 세상에서 공부처럼 하기 쉬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육체노동을 극심히 싫어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아 할 만큼 게으른 나에게 있어 '공부할 팔자'는 기막힌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나는 19세기 미국문학을 전공하여 석사,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교수가 되었다. 덕분에 나의 공부이야기는 이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얼마 전에 나는 한 방송사의 문학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방영되는 날 텔레비전을 보는데 화면 아래로 내 경력이 자막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경력의 마지막에 '현재 암 투병중'이라는 말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아! 이제는 암도 내 '경력'이 되었구나',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공부의 목적이 학습이고, 또 모르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암이라는 병을 통해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으니, 어쩌면 인생 최대의 경력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 병에 걸리고 나서부터 나는 내가 몰랐던 사실을 열심히 공부한다. 내 몸이 얼마나 소중하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좀더 의미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아픔을 통해 남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을 배운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가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병을 이기겠다는 의지로 눈이 빛나고 있다. 항암주사를 꽂고 병상이 열두 개나 놓여있는 입원실에 하루만 누워 있으면, 돈 많은 부자나 대학교수나 정육점 아줌마나 결국 생명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갖고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마치 풍랑 속에서 한 배를 탄 사람들처럼 동지의식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들은 오늘 함께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운다. 그러니 우리들은 한 교실에서 함께 배우고 있는 교우들이다. 그리고 '공부' 밖에 잘하지 못하는 내 특유의 재능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받았듯이, 이번에도 나는 혼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하여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영원히 얻지 못했을,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아름다운 경력을 쌓을 것이다. 가슴으로 절절히 배우면서….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고미숙-고전평론가)대학 4학년 때, 당시 명성을 날리던 한 평론가의 강의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세련된 이론과 쌈박한 해설을 예상했건만, 희한하게도 그 강의는 '고전소설강독'이었고 제목에 걸맞게 강의방식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끙끙대며 써낸 독후감은 매번 맞춤법, 논리적 시각, 구성 등에 대한 세밀한 논평과 함께 되돌아왔다. 나는 독후감을 돌려받을 때마다 긴장과 감동으로 가슴이 '떨렸다'. 아마도 하찮은 내 사고의 파편들이 세심하고도 치밀한 지적 배려를 받는 데서 오는 자긍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수업을 통해 그간의 수업들, 운동권 서클에서 한 의식화 공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렬한 지적 촉발을 받았다. 그 촉발에 부응하여 나는 가차 없이(!) 내 인생행로를 바꾸었다. '안개 속의 풍경'처럼 모호하기 그지없었던 서양문학의 장을 떠나 한국 고전문학이라는, 낯설고도 이질적인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대학원 석사과정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다. 그 시절 내가 속한 대학원은 정체불명의 격정과 혼돈이 들끓는 용광로 그 자체였다. 이미 일가(一家)를 이룬 스승들과 나처럼 그 스승들로 인해 삶의 경로를 바꾼 '강호의 고수'들이 한 치의 양보 없이 각축하는 일종의 무림(武林)이었다. 사서삼경(四書三經)도 마치지 않고 겁도 없이 이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선배들의 표현에 따르면 구제불능의 '하룻강아지'였다. 수업 중에 발표한 내 발제문은 언제나 박살이 났고, 격렬한 논쟁에 단 한 번도 말을 섞어보지 못한 처참한 순간들이 이어졌다. 당시 지도교수님은 미국에 계셨는데 내가 간신히 석사논문을 고쳐서 보내면 시뻘건 '피바다'가 되어 태평양을 건너오기도 했다. 한 편의 글, 아니 단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검을 벼리고 악기의 현을 고르는' 것만큼 처절한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신체와 감성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오직 뚝심과 오기만으로 버텨냈지만 그 시절 나는 진정 행복했다. 앎에 대한 열정과 스승과 동학들 사이의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공부법의 '하부구조'에는 그때 새겨진 기억들로 충만하다.
박사과정 시절, 고전문학 연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나는 선배들의 유혹에 이끌려 늦깍이로 마르크스ㆍ엥겔스라는 새로운 스승들을 만났다. 『공산당 선언』,『프랑스 혁명사』 3부작, 『자본론』 등을 읽으며, '경이에 찬 불면의 밤'을 보냈다. 무엇보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 건 그들의 문체였다. 고도의 난해한 이론과 경제학적 분석이 그토록 눈부신 수사학을 동반할 수 있다니! 적을 공격할 때는 폐부를 찌르듯 예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을 폭로할 때는 눈물겹게 애절했으며, 혁명의 파토스를 고양시킬 때는 말할 수 없이 힘찼다. 말하자면 마르크스ㆍ엥겔스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지식의 외부'였다. 지식이 대학을 박차고 거리로 나아가면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는 것, 또 글쓰기가 아카데미의 경직된 성채를 박차고 나오면 낯설고 역동적인 경계를 획득한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내 박사논문에는 어설프나마 이 새로운 스승들의 가르침을 체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담겨있다.
하지만 박사논문을 쓰고 '세상 속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90년대 중반이었다. 소비에트는 붕괴된 지 오래되었고, 혁명에 대한 비전은 사라져버렸으며, 설상가상으로 제도권 진출은 요원하기만 했다. 한마디로 내 공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가치들이 지상에서 홀연히 증발해버린 것이다. 알 수 없는 어떤 목소리들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고, '이제 너 자신으로부터 떠나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초발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했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물음들은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어째서 혁명의 열정은 바리케이드 위에서만 들끓는 것일까? 바리케이드가 걷히면 왜 모두들 다시금 중산층의 무기력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80년대를 주름잡던 '진보적 학자'들 상당수가 제도권에 진출했는데, 그럼에도 왜 '인문학의 위기'라는 유령은 끊임없이 대학 주변을 배회하는 것일까?
이 물음들이 '근대적 주체생산'이라는 문제틀 안에 있다는 것을 니체와 푸코, 들뢰즈ㆍ가타리를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들의 난해하면서도 까다로운 세계를 친절하게 안내해준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좋은 친구들'과의 접속이 이루어졌다. 수유리에 작은 둥지를 틀고 근대성, 동아시아, 고전문학 등을 주제로 한 세미나와 강좌를 연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후 몇 번의 공간 이동을 통해 연구실은 차츰 '지식인 코뮌'으로 자신의 모습을 갖춰갔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실험! 연암을 만난 것도 이 과정에서 였다. 생은 길섶마다 예기치 않은 행운을 숨겨놓는다고 했던가. 여행의 스릴과 서스펜스, 거대한 문명적 비전과 심연을 투사하는 시선, 범람하는 유머와 패러독스 등등. 마치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지평선을 마주했다고나 할까. 연암의『열하일기』의 진면목을 아주 먼 우회로를 거쳐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그때 이후 연암 박지원은 내 평생의 사우(師友)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친구이면서 스승인 존재- 가 되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탁오에서 허준, 노신, 달라이라마에 이르기까지 탈근대의 드넓은 비전을 제시해줄 스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 공부는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공부가 일상이고, 일상이 곧 공부다. 바로 그 때문에 일상은 곧바로 혁명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혁명이란 바리케이드 위에서, 적대적 투쟁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그런 류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건 존재의 생성과 변이를 가능케하는 유목적 여정,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라는 경계조차 넘어 우주와 소통하는 구법(求法)의 여정이 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게 "공부는 원초적 본능이자 삶의 모든 과정"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2. 공부는 새로움이다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라(윤구병-농부철학자)1950년 6월 25일에 벌어진 전쟁으로 헌걸찬 아들 여섯을 잃은 아버지는 남은 자식 셋을 데리고 서울에서 시골로 삶터를 옮기셨다. 아버지에게 무릇 이념은 그것이 사회주의로 포장되었건 자본주의의 탈을 쓰고 있건 모두 몹쓸 것이었다. 제도교육이 멀쩡한 자식들의 머리를 뒤흔들어 같은 핏줄을 서로 원수지간으로 만들어놓았으니, 겨우 목숨을 건진 자식들만은 아예 시골 무지렁이로 길러 피바람 부는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뜻이었다. 1ㆍ4후퇴 때 고향 근처로 옮겨간 뒤로 4년 동안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가족의 비운이 도리어 나에게는 소중한 공부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해와 달, 행성의 움직임 따위를 빌어 물질의 운동을 계산하고 그것을 '시간'이라 부른다. 이때의 시간은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한 '가짜' 시간이다. 이것은 '진짜' 시간, 생명계에 고유한 살아 있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 즉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이다. 물질화한 '인간의 시간'은 알맹이가 없이 늘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생명체의 몸 안에 간직된 시간은 비어 있는 시간, 똑같이 쪼개져 있어 그 안에 아무것이나 채워 넣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아니다. 갯지렁이의 시간이 불가사리의 시간과 다르고 또 질경이의 시간, 곰밤부리의 시간, 고슴도치의 시간, 다람쥐의 시간도 저마다 다르다. 이 저마다 다른 살아 있는 시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길섶에서 짓밟히는 질경이를 보라. 저 여린 생명체가 움 돋고, 꽃피고, 열매 맺는 데는 외부의 간섭이나 통제가 필요 없다. 저절로 자라는 것이다. 누가 밖에서 돕거나 부추기거나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저 알아서 제 삶의 시간을 통제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는 일과 놀이가 하나로 어우러진 자연의 삶을 즐기면서 생명의 세계에서는 자유와 필연이 하나이고, 삶의 본질은 자율성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렇게 자연의 아이로 자라던 나를 제도권 교육으로 밀어 넣은 사람은 고종사촌형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형은 "초등학교라도 다니게 해야 제 앞가림은 하지 않겠느냐"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러나 정작 내 삶의 소중한 시간들은 학과공부가 끝나거나 수업이 없는 주말과 방학 때에 시작되었다. 나는 산과 들을 쏘다니면서 청미래나 정금 열매를 따먹고 메기, 가물치와 술래잡기 놀이를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학년말 시험을 앞두고 한겨울 눈 쌓인 벌판으로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나는 철학공부가 목적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우여곡절 끝에 철학교수로 내 밥벌이를 하게 되었다. 1981년부터 1995년까지 15년에 걸친 '앵무새' 철학교수를 끝으로 나는 철부지 농사꾼 흉내로 지난 10년을 살아왔다. 그 동안 나는 하루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날마다 새롭게 익히면서 어제 배우고 익힌 것들이 오늘 쓸모없어지는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 그렇게 자연과 함께 살면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라"는 공자의 말씀 뒤에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그러지 않으면 니 앞가림을 제대로 할 수 없느니라"란 말이 감추어졌겠지). 요즘 내 공부의 주제는 사랑이다. 무슨 거룩한 종교적 사랑이 아니라 짝지어 씨를 퍼뜨려서 생명의 시간을 미래로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남는 길'을 닦는 뜻에서 사랑이다. 사랑 속에 '자연의 시간', '생명의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가 숨어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언제나 책가방을 갖고 다닌다(제타룡-전 도시철도공사 사장)매일 몇 시간씩 책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35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늘 책가방을 들고 다녔다. 지금도 여전히 책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타지에서 어업을 하셔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죽을 때까지 일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님을 보면서 나도 할머니처럼 죽을 때까지 한 가지는 열심히 하겠다고 선택한 것이 공부였다. 어려서 읽은 책도 내 공부 인생에 도움을 주었다. "마른 논에 물을 대면 싹이 돋아나고, 계속 물을 대면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 그래도 계속 물을 대면 나무는 더 커서 열매를 맺고 그늘이 져서 쓸모가 있게 된다. 사람도 계속해서 머리에 물을 대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도 머리에 물을 대듯 책을 가까이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공부하는 습관이 드니 평생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시 과장과 국장이 되면서부터는 각종 행정, 경영, 경제에 관한 자료들을 접하는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수많은 자료들이 축적되다보니, 정책을 수립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1994년 당시 삼성경제연구소 소장인 친구가 보내준 CEO 정보지를 읽고 또 읽었다. 또 외국의 석학들이 쓴 책과 자료도 꾸준히 읽었다. 이런 자료들을 꼼꼼히 챙겨 읽은 것은 행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1997년 4월, 시청 간부회의에서 내가 외환위기를 예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렇게 살아 있는 자료를 꾸준히 읽은 덕분이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나처럼 관련자료들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도 예상할 수 있었다. 또한 외국의 각종 자료들을 읽으면서 세계 벤처사업의 발전과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시장에게 새로운 정책을 건의하기도 했다.
1998년 정년을 1년 앞두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 나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우선 전문대에서 골프를 배워 골프강사 자격증도 따냈다.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는 도시행정학을 공부했고 내처 서경대 영문학과에도 편입학했다. 실용학문을 공부했다가, 영문학을 공부하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