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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의 大家, 수호전을 歷史로 읽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 푸른역사
1 풍류객 휘종과 기녀 이사사



부덕한 황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설 『수호전』은 이른바 장회소설(章回小說)이다. 즉 하나의 장(章)에 해당하는 것을 회(回)라고 부르고, 각 회마다 대구(對句)를 이용해서 제목을 붙인다.『수호전』은 제70회를 전후한 부분이 분수령이다. 70회까지는 108명의 호걸이 이런저런 경로로 양산박의 수중 요새에 집결한 후 세력을 정비하고 임무를 분담하는 내용으로 일단락된다. 그리고 70회 이후부터는 송강 등, 108명이 조정에 귀순해서 정부군으로서 활약하는 내용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 최대의 공적은 방랍이 이끄는 반군과의 싸움이다. 여기서 송강은 적군을 격파하고 방랍을 포로로 잡아 수도로 개선하지만, 송강도 결국 조정의 의심을 받은 끝에 독주를 받고 죽음에 이른다.



『수호전』에서 송강의 활동은 북송(北宋, 960~1127)의 제8대 천자 휘종(徽宗) 황제(1101~1125 재위)의 선화(宣和) 연간(1119~1125)에 시작된다. 휘종은 재위기간 동안 여섯 번 연호를 바꿨는데, 선화는 치세 만년의 연호다. 당시 수도 개봉의 인구는 100만 전후로 세계 최대였으며, 경제면에서도 풍요로웠다. 개봉으로는 전국의 물산이 유입되었고, 서아시아 지방의 대상(大商)들도 자주 왕래하여 금은보화나 비단, 도자기, 그 밖의 모든 상품들이 거래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당시 개봉의 상류사회에서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듯한 진귀한 물품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행세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러한 사치생활에 가장 앞장 선 사람이 휘종이었다.



휘종은 부덕한 군주였지만 그의 아버지 신종은 정치개혁을 단행해 이름을 떨친 천자였다. 신종의 정실부인인 황태후 향씨는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신종이 죽자 서출인 6명의 황자들 중에 가장 서열이 높은 철종(哲宗)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철종은 10살에 즉위하여 후사를 남기지 않고 스물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다시 황자 중의 누군가를 황제로 세워야 했는데, 철종의 동복형제인 간왕만이 유력시 되었다. 하지만 황태후는 철종과 간왕만의 생모인 주씨의 세력을 경계하여 이를 반대하고, 자신의 세력에 가장 장애가 되지 않을 것 같은 휘종을 추천했다. 이리하여 휘종은 생각지도 않게 천자가 되는 행운을 차지했다.



휘종은 즉위와 동시에 한량기질을 드러냈다. 그는 즉위와 동시에 그때까지 살던 교외 별장에서 가족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였는데, 새로 황후가 된 정실과 함께 젊은 여성 48명이 무리를 지어 따라오자 황태후 향씨조차도 경악한 나머지, 하나하나 신상을 점검한 후에야 입궁을 허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천자가 궁중에서 새와 짐승을 모으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동물을 모으는 취미는 곧바로 정원의 조경으로 연결되었고, 그에 어울리는 건축물을 짓고 그 안을 서화와 골동품으로 채워 넣느라 엄청난 궁중 경비를 소비했다. 그리고 이러한 취미생활도 재미가 없어지자, 궁 밖으로 미행을 나가기 시작했다. 미행은 거의 정례행사처럼 되었는데, 그의 행선지는 놀랍게도 몸을 파는 여자들이 모이는 청루(靑樓)였다. 휘종은 이사사와 조원노라는 기생의 집에 상습적으로 출입했는데, 후에 금군에 의해 만주로 붙잡혀 갈 때도 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군주가 상습적으로 청루에 미행을 다녔다는 것은 당시 수도 개봉부의 치안 상태가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외면적인 것이었다. 개봉의 인심이 호경기에 취해 있는 사이, 지방은 조세 부담으로 고통 받았고 백성의 경제생활은 파탄에 직면했다. 그 결과 일어난 사건이 『수호전』에도 등장하는 '방랍의 반란'이며, 이어서 여진족의 신흥국가인 금(金)의 침입을 받게 된다. 휘종은 금나라와의 전쟁에 패배하고, 일족 수천 명과 함께 만주의 오지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9년 동안 살다가 결국 병으로 죽었다(1135).



2 도적 송강과 장군 송강



송강은 두 사람이었다

『수호전』에 묘사된 송강(宋江)이란 인물은 108 호걸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몇 번이나 조정에서 보낸 토벌군의 공격을 받고도 꿈쩍도 않을 뿐 아니라 번번이 관군 대장을 사로잡았다. 이 내용을 보면 '얼마나 용맹무쌍한 호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는 작은 현(縣)의 관청에서 일하던 평범한 서기 출신으로, 손으로는 닭을 잡을 만한 힘도 없고 머리로는 손오(孫吳)의 병서를 읽을 만한 재능도 없는 자였다. 의협심이 강하다고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그 의협심이란 가난한 자에게 금전을 베풀고, 노름꾼에게 몇 번이나 돈을 사기당하고도 화내지 않는 정도의 것이었다. 이런 송강이 어떻게 나머지 107명의 호걸들을 통솔할 수 있었는지 미심쩍지만, 송강이라는 사나이는 자신의 결점을 잘 알고, 결코 자신의 재능을 내세우려 하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송강에 대한 사료는 송대의 역사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지만 모두 단편적일 뿐이라 그의 행적 전모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동아시아에서 이른바 중일전쟁이 헤어날 길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던 1939년경에 진귀한 새 사료가 발견되었다. 섬서성(陝西省) 부곡현(府谷縣)에서 발견된 그 사료는 북송 말엽, 범규라는 인물이 지은 비문으로, 비석의 주인은 '절가존(折可存)'이라는 무장이었다. 묘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선화 3년(1121) 4월 26일, 절가존이 방랍을 체포하여 도읍인 개봉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는 도적 송강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절가존은 방랍을 체포했던 전선으로 다시 되돌아가, 그달을 넘기지 않고 도적을 잡아 무공대부(武功大夫)에 봉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호전』 100회본에 의하면 송강은 장군으로써 방랍군 토벌에 맹활약을 했었다. 그런데 왜 도적으로 몰려 체포당했을까. 이 문제에 대해 한 가지 해법을 제시한 사람이 대만의 모윤손(牟潤孫) 박사다. 그는 1962년에 발행된 《대만대학문사철학보》 제2권에 발표한 <절가존 묘지명의 고증과 송강의 최후를 논함>이라는 논문에서, "송 왕조는 장수가 전공을 세웠더라도 결코 권력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반을 기도하지 않을까 하여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 박사는 송강이 포로가 된 날짜가 언제인지 밝히는 일을 소홀히 했다. "달을 넘기지 않고 송강이 체포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정확히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비문에 의하면 방랍이 생포된 날짜가 4월 26일이므로 달을 넘기지 않았다면, 4월을 넘기지 않아야 한다. 그 달은 마지막 날이 29일까지밖에 없었으므로 불과 사흘 안에 송강을 붙잡은 것이 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절가존이 방랍을 체포하여 도읍 가까이 가 있었고, 그곳에서 방랍을 토벌한 전선까지는 사흘 이내에 닿기 어려운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점을 해결해 주는 자료가 몇 가지 있다. 우선 남송 사람 왕칭이 저술한 『동도사략(東都事略)』에 보면, "5월 3일, 송강이 체포되다"라는 기사가 기재되어 있다. 또 다른 사료는 남송 이직이 쓴 『황송십조강요(皇宋十朝綱要)』와 양중량이 편집한 『속자치통감장편기사본말(續資治通鑑長篇紀事本末)』이라는 책이다.

이 책들의 기록을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적 송강이 출현한 지 1년 뒤 절강성 방면에서 방랍의 무리가 봉기했다. 이에 놀란 조정은 환관 동관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선화 3년 (1121) 정월, 20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시킨다. 이때 동관을 수행한 장군들은 유연경, 유광세, 신기종, 송강 등이다. 정부군은 4월에 방랍을 체포하고, 그해 6월까지 전선에 남아 방랍의 잔당들을 퇴치한다." 이 기록에 보면 정부군의 장군들 중에 송강이란 존재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사료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송강에 대한 기존 관념을 깨뜨려야 하는 대단히 중대한 결과가 초래된다. '송강은 4월에 전선에서 활약하다가, 그달 안에 체포된다. 그리고 빠져나왔는지 어쨌는지 5월에는 강도 송강이 되어 5월 3일에 다시 체포된다. 그리고 6월에는 장군 송강이 방랍군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활약한다.'



송말의 난세라 할지라도 이러한 변화는 도저히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결론은 장군 송강과 강도 송강은 별개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결론을 정리하자면, 송강의 이름이 사료에 처음 나타난 선화 원년(1119) 12월에는 '산동의 도적 송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산동이란 현재의 산동성으로 간주되며 양산박은 바로 이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똑 같은 시기에 또 한명의 송강이 관군의 대장으로 확실히 존재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결코 동일인물이 될 수 없다. 도적 송강은 5월에 생포되었고, 관군 대장 송강은 4월에서 6월에 걸쳐 방랍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역사학의 약속을 따르는 이상 송강은 분명히 두 사람이었다.



3 마법사 공손승, 활개를 치다



입운룡, 공손승(公孫勝)

송강이 조정을 위해 치른 최초의 전쟁은 '대요(大遼)정벌'이었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는 북송시대에 몽골 지방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고 남쪽으로는 중국의 일부, 곧 현재의 북경 지방까지 영토가 뻗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인들도 '대'자를 붙여 대요라고 불렀다. 이처럼 대제국인 요나라를 송강이 굴복시킨 뒤 항복조약을 맺고 돌아온다니, 대단히 유쾌한 이야기다. 더욱 재미있는 대목은 송강이 이런 공훈을 세우고 위풍당당하게 개선했는데도 송 정부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내린 관직이 고작 보의랑(保義朗)이었다는 점이다. 보의랑은 정9품의 관직으로 겨우 육군 상사 임관에 해당한다.



송강 집단의 대요 원정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사람은 공손승(公孫勝)이다. 그는 수련을 쌓은 마법사로서 검은 구름과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천둥과 비를 부를 수 있었기에 '입운룡(入雲龍)'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적군 쪽에서도 가끔씩 비슷한 마법사가 나타날 때가 있었으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공손승은 송강 진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한 번은 요나라의 마법사가 갑자기 먹구름을 일으켜 송강 군대의 머리 위를 덮쳤다. 주변이 암흑천지로 변한 틈을 타, 요의 군대는 사방에서 쳐들어왔고 송군은 손으로 더듬어가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때 공손승이 보검을 뽑아 주문을 외우자 신기하게도 검은 구름이 홀연히 흩어지고 태양이 눈부시게 내리쬐었다.



공손승은 대요 전쟁 이후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공손승은 대요 전쟁이 끝난 후, 스승 나진인(羅眞人)의 슬하에 귀의하여 수도를 계속하게 된다. 따라서 방랍 토벌전쟁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여기에 바로 100회본 저자의 용의주도한 배려가 깔려 있다. 송강은 몇 번이나 정부군과 요나라 군대를 상대로 격전을 치렀지만 단 한 명의 전사자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방랍 정벌 때에는, 부하들이 연이어 전사했고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따라서 다수의 전사자를 내려면 그전에 공손승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추론이 성립된다. 또한 공손승이 물러나려면 그에게 퇴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대요전쟁이다. 공손승은 대요와의 전쟁에서 마음껏 활약했기 때문에 송강에 대한 의리를 다한 셈이 된다.



송강의 무리는 처음에 36명이라고 알려졌는데, 사실 공손승은 이 36명 중에서 가장 정체가 의심스러운 인물이다. 왜냐하면 남송 말기에 최초로 세상에 나온 36명 호걸 명부 속에는 공손승이 끼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손승은 원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역사소설 『선화유사』에서 비로소 36명 중 하나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명대에 이르러 『칠수류고(七修類稿)』에서는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수호전』에 이르러 거물이 되어 등장한다. 이는 공손승이란 인물이 『수호전』작자의 개인적 기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자의 개인적인 기호라 할지라도 당시 성인의 읽을거리였던 『수호전』에 왜 이런 귀신괴담이 들어갔을까?



『수호전』에서는 송강이 적을 상대할 때 적군에 의해서도 마법이 많이 펼쳐진다. 당대 말엽에서 송에 걸친 시기, 민간에서는 마법의 가능성을 믿었던 듯하다. 때로는 이것이 반란의 도구로 이용되어 민심을 선동하는 무기가 되었다. 일례로 북송 때 일어난 '왕측(王則)의 반란'을 들 수 있다. 왕측은 신분이 낮은 일개 졸병에 지나지 않았으나 요술을 부릴 줄 안다고 동료들을 속여서 군사를 모으고 모반을 꾀했다. 이런 송대의 민간신앙이 후세에 전해져 공손승 같은 마법사가 『수호전』에서 활개 치게 된 것이다.



4 무공을 세운 환관 동관



송대의 궁중과 환관

주권자와 귀족, 그리고 부호 등의 유력자가 환관이라는 기괴한 남자 하인을 가까이 두고 일종의 노예로 부리는 풍습은 아시아 대륙 동서에 걸쳐 널리 퍼져 있었다. 이 풍습은 역사의 속내를 불결하고 탁한 색깔로 물들여 왔는데, 『수호전』의 배경이 되는 북송 말년의 철종 연간(1086~1100)에는 특히 폐해가 심각했다. 철종이 즉위했을 때는 그의 나이 겨우 열 살이었으므로, 사실상 신종의 어머니인 고태후(高太后)가 정권을 쥐었다. 고태후는 신종이 주창했던 신법정치를 배격하고 구법을 부활시켰다. 이로 인해 신종을 모시던 환관들이 모조리 축출되고 철종 주위에는 태후의 환관들이 배치되었다.

철종의 생모 주태비(朱太妃)는 아들의 신상을 염려하여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식사 때는 물조차도 먼저 마시고 독이 없는지 확인하고서야 철종에게 권할 정도였다. 열 살이면 어느 정도 사리분별이 가능한 때여서 철종은 할머니 고태후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던 사이 고태후가 죽고, 친정을 시작하게 되자 그는 가장 먼저 태후 쪽 환관을 축출하고 아버지 신종 시절의 환관을 불러들여 신변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철종은 병약해서 친정을 시작한지 겨우 7년 만에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병으로 쓰러졌다. 철종이 죽자 황태후 향씨가 휘종을 옹립하고 후견인이 되면서 다시 정치 방침이 바뀌었다.

향태후는 정치적으로 자신만의 독자적 방침을 뚜렷이 내세웠다. 그는 휘종으로 하여금 신법당과 구법당을 조정하고 국론을 통일해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정치를 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이념을 담아, 다음 해 연호를 '건중정국(建中靖國)', 즉 공정한 방침을 세워 나라 안의 평정을 유지한다는 뜻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새 연호를 미처 불러볼 사이도 없이 건중정국 원년(1101) 정월에 향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신ㆍ구 양당이 격전을 벌였고, 이에 질세라 두 파의 환관들이 서로 악다구니를 벌였다. 신법당 중에서 특히 세력을 쑥쑥 키워온 사람이 대신 채경(蔡京)이었으며, 여기에는 환관 동관(童貫)의 도움이 컸다.



휘종 즉위 초년(1100년 경), 환관 동관은 휘종의 뜻을 받들어 항주(杭州) 방면으로 서화와 골동품을 찾으러 나갔다. 동관은 서화골동에 대해서 전문가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 분야에 조예가 깊은 누군가의 식견이 필요했다. 바로 여기에 안성맞춤으로 나타난 인물이 채경이었다. 당시 채경은 반대파인 구법당의 탄핵을 받고 현직에서 쫓겨나 항주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채경은 우선 글을 잘 썼고 모든 취미가 고상했으며 특히 감식안이 뛰어났다. 채경은 밤낮없이 동관을 만나 서화골동을 선택하는 데 지혜를 빌려주었다. 이로써 이후 20년간 송의 정치를 좌우하는 두 사람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때 동관은 47세, 채경은 54세였다.



동관은 환관에겐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공을 세워 출세하겠다는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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