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과학기행
문중양 지음 | 동아시아
01 한국인의 하늘과 땅, 그리고 세계석불사 석굴, 천 년을 견뎌 온 신비의 축조술 "동양 무비(無比) 최고의 걸작품"'동양 무비(無比) 최고의 걸작품', 한일병합 직전인 1909년경 소네 아라스케 통감의 지시로 토함산의 석굴을 탐사한 일본의 미술사학자 세키노 타다시가 던진 찬사의 말이다. 즉, 동양에서는 견줄 만한 것이 없을 만큼 훌륭한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뜻이다. 그 이후에도 현란한 문학적 묘사를 구사하는 수많은 문사들이 거기에 담긴 예술 세계와 보고 난 감동을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꼈던 예술품이 바로 이 석굴이다. 석굴이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예술적 우수성 외에도 자연과의 조화를 꾀했던 석굴의 과학적 축조술도 분명 한몫을 했다.
굴이면서 굴이 아닌 것?일찍이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는 아잔타 지역에서 볼 수 있듯이 기원전부터 자연 암석을 파고 그 안에 원형의 주실과 네모난 형태의 전실로 구성되는 석굴 사원을 만들었다. 인도와 중국에는 조직이 무른 퇴적암의 사암이나 석회암의 거대한 암벽 지형이 많다. 따라서 암벽을 뚫어 규모가 큰 석굴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기후도 1년 내내 매우 건조하고 기온이 높기 때문에 암벽을 뚫어 만든 석굴은 매우 시원하고 안락한 사원의 공간을 조성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자연 여건은 달랐다. 물이 얼어붙는 추운 겨울과 고온 다습한 여름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자연환경인 데다 전 지역이 매우 단단한 화강암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한마디로 한반도의 자연 여건은 인도와 중국의 석굴을 재현하기에는 매우 험악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 석굴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대표적인 석굴로는 신라 하대에 만들어진 토함산의 석굴과 팔공산 서쪽 기슭에 있는 군위삼존불 석굴(국보 제109호)을 들 수 있는데, 군위삼존불 석굴은 위에 언급된 악조건에 저항하면서 무리하게 만든 것이라면, 토함산의 석불사는 험악한 자연 환경을 석공들의 탁월한 축조 기술로 슬기롭게 극복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즉 전통적인 석굴 조성 방식과는 달리, 암벽을 뚫은 것이 아니라 돌을 깎아 세우고 쌓아서 굴의 모양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석불사의 석굴은 굴이 아니며, 굴의 형식을 빌렸을 뿐이라 할 수 있다.
하늘의 힘을 빌려 반구형 돔을 쌓다굴의 형식을 빌려 인공으로 만든 석불사의 석굴은 세계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인데, 전반적인 구조는 네모난 전실과 원형의 주실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인도 석굴 사원의 형태를 띠고 있다. 참고로 석굴을 조성하는데 가장 어려운 공사는 원형의 돔 모양을 한 주실을 만드는 작업이었는데, 주실의 벽을 원형으로 둘러친 다음 돌을 깎아 반구형의 돔(Dome)으로 그 위를 덮는 작업은 그야말로 고도의 역학적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한 공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신라의 석공들은 '팔뚝돌'(주먹 쥔 팔뚝 모양을 한, 길이 2m 크기의 버팀돌)로 더 잘 알려진 버팀돌과 천장의 원반형 덮개돌로 해결했다.
천장의 뻥 뚫린 구멍은 원반형의 덮개돌로 덮었는데, 이 덮개돌의 모양은 찻잔의 뚜껑을 떠올리면 된다. 바깥지름이 약 3m, 안지름이 약 2.5m, 두께가 무려 1m나 되어 전체 무게가 무려 20톤이나 되었다. 기중기로 들어 올려도 만만치 않을 무게의, 커다란 덮개돌이었다. 이것을 5단으로 쌓아 올린 천장의 아가리에 뚜껑 덮듯이 올려놓으면, 그 하중으로 5단의 평판석과 팔뚝돌은 더욱 견고하게 반구형의 돔을 이루게 된다. 그야말로 못이나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무거운 돌만으로 완벽한 반구형의 튼튼한 돔을 만들었던 것이다.
새해에 떠오르는 태양의 첫 빛을 품다거대한 암벽을 뚫을 수 없어 차선책으로 돌을 깎아 인공 석굴을 만들었지만, 이러한 인위적인 석굴의 축조는 오히려 자연 석굴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먼
저 자연 석굴을 이용해야 했다면, 거대한 암벽이 있는 지형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석굴의 위치를 선정하는 데 큰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석불이 놓이는 방향도 자연지형을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석불사의 석굴은 평야나 강변이 아닌 해발 565m의 토함산 허리,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좋은 위치에 조성되어 있다. 인위적으로 쌓아 만든 석굴이었기에 신라의 영산인 토함산의 동쪽 산허리에 정확히 동남 30도를 바라보도록 석굴을 조성하고 석불을 안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천우 교수에 따르면, 석굴이 동남 30도를 정면으로 향함은 과학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짓날 해가 떠오르는 방향이 동남 30도이고, 동지는 바로 천문학적으로 태양이 천구상에서 한 해의 운행을 시작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햇빛과 샘물을 이용한 지혜인공 석굴이었기에 가능했던 또 다른 것으로 어두운 석굴 안을 자연 채광을 이용해 환하게 비출 수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아울러 겨울의 한기를 녹이고, 여름의 고온 다습한 기후 때문에 생기는 결로(結露) 현상 -석굴 내부의 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이슬이 맺히는 현상- 을 방지해 주는 자연제습의 원리도 활용할 수 있었다. 통풍 시설로는 감실의 환기창을 들 수 있는데, 좌상의 뒤편으로 조그만 구멍이 나 있어 외부로 바람이 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현재의 감실은 일제 때의 보수 공사로 감실 석재들이 모두 교체되면서 통풍을 할 수 있게 만들었던 환기창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편 자연 제습을 시켜 주던 또 하나의 장치가 있었는데, 화학자 이태녕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석굴 밑으로 샘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었고, 이 샘물의 흐름이 석굴 안의 결로 현상을 상당히 방지해 주었다는 것이다. 결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여름, 차가운 샘물이 석굴 밑의 석재 아래로 흐르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는데, 벽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비해 바닥면의 온도가 낮으면 이슬이 바닥 면에서만 생기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이와 같은 탁월한 통풍 장치와 샘물의 흐름을 이용한 벽면과 석불 외면의 결로 방지 장치는 1200년 동안의 험악한 풍화 작용에서 석굴을 구한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을 무시한 권력에 의한 수난사험악한 자연 환경을 1200여 년이나 이겨 온 석굴도 과학을 무시한 권력 앞에서는 무력일 수밖에 없었는데, 오욕의 첫 번째 이력서는 1910년대 일제에 의한 보수 공사였다. 이때 어느 정도 석굴의 원형이 훼손되었는지는 한 권의 책으로 서술해도 모자랄 정도이다. 그중에 가장 결정적인 공사는 2m 정도의 두께로 석굴 전체를 시멘트로 싸 바른 일이었다. 석굴의 붕괴를 영원히 방지하기 위해 견고하게 만든다는 취지였는데, 석굴의 돔 외부를 시멘트로 싸 바르면서, 성긴 돌과 기와로 인공 석굴을 얇게 덮어 살아 숨 쉬게 만든 구조는 숨이 막혀 버리면서 석굴은 죽어 가기 시작했고, 당연히 앞서 살펴본 자연 채광과 자연 제습의 시설들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오욕의 두 번째 이력서는 1961년 군사 혁명 정권에 의해서 이루어 졌는데, 이때의 보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종래 일제가 싸 바른 시멘트 더미 위에 1m 정도의 공간을 띄우고 다시 더 두터운 콘크리트 돔을 설치한 것이다. 또 하나는 습한 공기가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목조 건물로 석굴의 전실과 입구를 막아 버린 것이다. 이러한 보수 공사는 석굴의 결로 현상이 생기는 주된 원인이 습기의 유입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남천우 교수를 비롯해 정밀한 과학적 분석을 수행한 여러 과학자들에 따르면, 석굴의 결로 현상은 습기가 유입돼서 생긴 것이 아니라, 잘못된 보수 공사로 외부 공기의 유입이 차단되고, 땅굴과도 같은 이중 콘크리트 돔 구조를 쌓아, 석굴의 온도 변화가 저하된 데 핵심적인 원인이 있다고 한다. 결국 일제 때 쌓은 시멘트 두 겹과, 여기에 다시 1960년대에 콘크리트로 한 겹 덧입힌 것, 그리고 목조 건물로 전실과 돔 입구를 막아 버린 것이 결로 현상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일제 때의 잘못된 보수 공사가 군사 혁명 정권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서 어처구니없이 더 보태진 셈이다.
고분 벽화에 새긴 고구려의 하늘믿기 어려운 2000년 전의 '고구려 천문도' 이 천문도 석각본이 오래전 평양성에 있었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대동강에 빠뜨려 잃어버 린 지 세월이 오래되고 그 탁본조차 없어져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 나 라를 세우신 지 얼마 안 되어 탁본 하나를 바치는 자가 있어 이것을 매우 귀하게 여겨 관상감으로 하여금 천문도를 돌에 새기도록 명하였다.
위 말은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설명문에 적혀 있는 말인데,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의 태조대왕이 새 왕조를 창건한 이후 첫 번째로 이룬 과학 기술의 성과물로서 하늘의 별자리를 평면 위의 동심원 안에 그려 넣은 천문도이다. 그런데 그러한 천문도가 고구려 때 존재했던 천문도를 근간으로 제작되었다는 말이다. 일찍이 역사학자들은 이 인용문에 근거해서 1395년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원본이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우리 고대의 천문도였다고 이해했다. 실제로 최근 천문학자들은 조선 태조 때 수정되기 이전의 원래 별의 위치를 고려해서 관측 연대를 추정했는데, 관측 연대가 대략 서기 1세기 중엽 무렵으로 계산되었으며, 관측 장소는 고구려의 강역인 북위 40도 이내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추정이 옳다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원본인 <고구려 천문도>는 지금부터 무려 2000년 전에 제작된 셈이다.
중국에서도 13세기에 와서야 전천 천문도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원본이 그보다 1200여 년 앞서 1세기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런데 서기 1세기 무렵에 고구려의 영토 지역에서 얻어낸 관측 데이터로 천문도를 실제로 작성했을 가능성, 곧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원본인 <고구려 천문도>가 실재했을 가능성을 높여 주는 유물들이 근래 들어 속속 발견되거나 소개되고 있어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고구려의 온 하늘을 그린 기토라 고분 벽화<고구려 천문도>의 실재 가능성을 높여주는 유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바로 일본 나라현 아스카 유적지에서 1998년 발견된 기토라 고분의 천문 벽화가 그것이다. 고구려와 관련이 깊은 유적지인 다카마쓰 고분에서 불과 1.2km 떨어진 기토라 고분을 소형 카메라로 조심스럽게 촬영한 결과, 묘실 내부의 벽면에 온 하늘의 별이 그려진 천문도가 발견되었는데, 흥미를 끄는 것은 이러한 기토라 고분의 천문도에 고구려의 하늘이 그려졌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의 중견 천문학사학자인 하시모토 교수와 미야지마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기토라 고분 천문도의 관측지가 대략 북위 38.4도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아스카 지역(34.5도)이나 중국의 낙양(34.6도) 등과는 크게 다르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의 위도(39.0도)에 가까웠다.
또한 관측 연대도 기원전 65년경으로 추정되었는데, 이 연대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관측 연대 추정치인 1세기 중엽과 불과 100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그려진 별자리의 모양을 중국의 <순우천문도>와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각각 비교 분석한 결과 조선의 방식에 훨씬 가깝다는 결론이 일본 천문학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고분이 축조된 시기가 대략 7~8세기 무렵이므로 아마도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에 도래한 고구려 정착민들이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기토라 천문도의 저본(底本)이 된 천문도는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망명해 들어온 고구려의 유민들이 가지고 들어온 '고구려 천문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담긴 고구려의 하늘<고구려 천문도>의 내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직접적인 자료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담긴 별자리 그림이다. 현재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고분은 95기 이상이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위치했던 지역인 중국의 길림성 집안현과 북한의 대동강 유역에 퍼져 있는데, 그중 22기의 고분 벽화(묘실의 천장)에 별자리 그림이 그려져 있다. 22기의 고분 벽화에 그려진 별자리의 내용은 물론 고분마다 다르고, 같은 별자리라도 그 형태가 조금씩 다르나, 136개나 되는 별자리를 고분 벽화에 그려 넣은 사실만으로도 '고구려 천문도'의 실재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하겠다.
중국의 하늘과는 다른 고구려의 하늘 - 남두육성과 북극삼성고구려 고분 천문 벽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별자리 체계는 중국의 고분 벽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참고로 북두칠성은 중국의 고분 벽화에서도 일반적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에 대응해서 남두육성이 등장하지는 않는데, 고구려 고분에서는 무용총과 각저총을 포함해서 10기의 고분 벽화에서 북두칠성과 짝을 이루어 남두육성이 그려져 있다. 또 북두칠성과 북극삼성으로 구성된 북쪽 하늘의 별자리도 중국의 것과 매우 다르다. 이러한 고구려의 독특한 북극 주위의 중앙 하늘을 표현하는 '북두칠성과 북극삼성'의 별자리 전통은 고려의 고분 천문 벽화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빼앗길 위기에 처한 고구려 고분 벽화 / 이미 빼앗겨 버린 다라니경과 측우기<천상열차분야지도>와 '기토라 천문도', 그리고 고구려 고분의 천장에 그려진 별자리 그림을 통해서 고구려인들이 중국과는 별개의 천문 관측 활동과 천문관의 전통을 지녔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패망하고 그 근거지였던 광활한 만주와 발해만 지역이 현재 중국의 영토로 들어가, 이와 같은 우리의 천문 전통을 담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 바로 중국 정부가 강력하게 배후에서 지원하고, 수많은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진행되고 있는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에 의해서이다. 동북공정 프로젝트 연구 사업의 취지는, 21세기에 동아시아의 중심 지역으로 부상할 중국 동북 지역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이다. 하지만 구체적 사업으로 들어가면 고구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 정권으로 정의하고, 고구려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에 포함시키려는 내용이 중요하게 들어가 있다.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중국 정부와 학계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북한 대동강 유역에 퍼져 있는 고구려 고분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는 것을 2003년 7월 저지, 연기시켰다. 북한 소재의 고구려 고분이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경우, 고구려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에 귀속시키려는 프로젝트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고구려의 유산을 중국이 빼앗으려고 하는 이때, 우리의 자랑스러운 과학 유물 중에 이미 중국에 빼앗겨 버린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701~751년 무렵 제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우리의 목판 인쇄물로, 고려의 금속 활자와 함께 우리의 앞선 인쇄 문화를 입증해 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그런데 중국의 학자들은 이것을 702년경 중국 낙양에서 인쇄해 신라에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러한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 세계 학계에 널리 퍼져 있다. 이뿐이 아니다. 1441년 세종 때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아이디어로 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