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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재판

제임스 A. 콜라이아코 지음 | 작가정신
서론 - 철학과 정치의 비극적 대결



기원전 399년에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에서 재판을 받았다.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 중 대다수가 그가 유죄라는 데 동의했다. 국가가 믿는 신들을 불신한 것, 새로운 신들을 소개한 것,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것이 그의 죄목이었다. 아테네인들을 개혁시키고, 미덕을 추구하고, 영혼을 향상시키는 임무를 수행한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폴리스라고 부르던 도시국가의 통일과 안정에 필수적인 가치관과 신념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세계 최초의 민주국가인 아테네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정치와 철학 사이의 비극적인 대결은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사건을 계기로 절정에 이르렀다(소크라테스는 개인의 양심, 표현의 자유, 신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국가에 복종해야할 의무보다 우선이라는 도덕적 주장을 상징한다. 반면 아테네는 체제에 저항하며 전통적인 공동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철학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국가를 상징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재현해 놓았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를 체제에 불만을 품고 시민 불복종을 실천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다른 책 『크리톤』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유순한 시민으로 묘사했다.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법을 지켜야 한다며, 사형을 피해 도망치라는 권유를 거절한다. 급진적인 저항자와 유순한 시민이라는 이 상반된 이미지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소크라테스의 참모습이 무엇인가?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는 민주적인 전제 정치의 희생자였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비록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했지만 개인의 권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시민들을 억압하곤 했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원칙을 지키는 용기 있는 개인인 소크라테스에게 공감하지만, 한편 많은 아테네 시민들이 걱정에 휩싸였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과제는 철학(지혜와 미덕의 추구)이 가치 있는 것이며 공동체의 복지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아테네인들 앞에서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테네인들의 과제는 철학의 도덕적 이점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핵심과 그 밖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과제 수행이 더욱 더 어려워졌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서 정치는 기본적으로 힘의 정치였으며, 이런 체제 속에서 사람들은 정의로운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국가도 친구들을 돕고 적을 해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이런 정치의식의 산물이다. 이 전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라는 두 강력한 제국은 그리스의 지배권을 놓고 힘을 겨뤘다. 그러나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크라테스의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을 읽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을 순전히 소크라테스의 시각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아테네인들의 입장을 경시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복잡하게 뒤얽힌 갈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실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의 대결은 정치철학의 근본적인 문제, 즉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과 국가의 합법적인 권위의 조화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나의 목표는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의 갈등 속에서 떠오르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조사해서 양편의 입장이 모두 단순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재판의 무대가 마련되다



재판준비

우리 이야기의 무대는 아테네의 배심원 법정이다. 민중재판소(People's Court)에서 유래한 이 법정은 아테네 시정활동의 중심지인 아고라에 위치했다. 소크라테스 사건에서는 서른 살 이상의 평범한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판결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종교나 젊은이의 교육과 관련된 이슈, 모든 아테네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이 이 재판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인인 멜레토스가 원고 측의 명목상 지도자였지만, 아테네의 저명한 정치인이며 소크라테스를 기소하도록 사람들을 뒤에서 조종했을 가능성이 큰 아니토스, 웅변가인 리콘도 원고 측에 합류했다. 소크라테스가 민간인이나 민간단체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에 대한 범죄로 고발당했으므로, 이 사건은 공적인 기소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역사 기록에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최초의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에 알로페케 마을에 사는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파에나레테는 산파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조각가 또는 석수였으며, 소크라테스 역시 그 기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찬란한 페리클레스 시대에 성장기를 보내면서 아테네 제국의 탄생을 목격했고, 중장비 보병으로 펠로폰네소스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전쟁은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는 또한, 기원전 411년에 일어난 최초의 과두혁명에서부터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포위당했다가 패배한 후인 기원전 404년의 마지막 과두혁명에 이르기까지,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내전을 통해 민주주의가 회복된 후인 기원전 403년에도 소크라테스는 오래 전부터 계속해오던 철학적 활동을 하며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영혼을 소중히 여기라고 촉구했다. 그를 따른 많은 아테네 젊은이들은, 그가 아고라를 비롯한 여러 공공장소에서 지혜롭다고 알려진 많은 유력인사들의 도덕적 자기만족에 도전하며 철학을 실천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러나 기원전 399년에 아테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인 자유로운 사고에 대해 너그럽다는 평판을 얻었던 아테네인들이 이제 역사적인 예외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흔이 다 된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복지를 위협하는 사상을 전파하고 그런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재판을 받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에서 한 발언은 플라톤을 통해 후세에 전달되었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는 순전히 구두 담론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의 인격과 신념이 드러났다. 사실 그의 변론 내용은 재판에서 배심원과 방청객들을 자극했던 것처럼, 지금도 독자들에게 철학(지혜와 미덕의 추구)과 정치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심오한 이슈들을 한번 문답식으로 생각해보라고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세 편의 연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연설은 소크라테스가 '과거의 비판자들'을 언급한 후 자신의 주요 혐의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변론이고, 두 번째 연설은 소크라테스가 유죄판결을 받은 후 처벌의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이며, 마지막 연설은 사형선고가 내려진 후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내용이다. 이 마지막 연설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과 내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역사적 정확성

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 오래 전부터 논란을 벌였다. 이 작품이 재판 이후 10년 안에 만들어졌다는 데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발언이 여기에 실제로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변호하는 글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관한 자료들 중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가장 믿을 만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의 저작 중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등장하는 유일한 작품이다. 만약 이 작품이 순수한 창작물이라면, 플라톤은 스승을 변호하기 위해 스승이 법정에서 더 효과적인 반론을 펼친 것처럼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재판에서 밝힌 생각들을 세심하게 재현했다. 게다가 플라톤은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방청했으므로 현장을 직접 보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이 점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신뢰성을 한층 더 높여준다.



플라톤은 철학의 순교자가 된 스승을 논쟁을 즐기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아테네인들은 이런 소크라테스에게 상반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정신적인 삶을 구현한 영웅이라고 생각했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를 피뢰침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사람들에게서 부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펠로폰네소스전쟁 이후 정치적 불안과 도덕적 불안에 대한 시민들의 두려움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희생양이었다는 전통적인 견해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쓰면서 맞닥뜨린 과제는 소크라테스의 실제 모습을 묘사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철학적 사명의 요체를 포착해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급진적인 철학적 사명



신탁의 수수께끼 풀기

비판자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힌 소크라테스는 가공의 인물을 하나 내세워, 그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자연철학자도 아니고 소피스트도 아니라면, 그가 사람들에게 그토록 잘못 알려져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이날 재판에서 "아마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며 가공의 인물에게 대답하는 형식으로 말을 돌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런 수사학적 장치를 통해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박에 미리 손을 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 사명과 관련된 중요한 이슈들을 내세울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적인 멜레토스와 잠깐 언쟁을 벌일 때를 제외하고는 평소 때처럼 문답법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가공의 인물을 대화상대로 내세웠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잘못된 평판을 얻은 것은 실제로 "어쩌면 사람이 얻을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이 인간적인 지혜가 바로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을 구분해준다. 소피스트들은 "초인간적인 지혜"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발언에 반대의견이 나올 것을 예상한 그는 배심원들에게 자신이 비록 인간적인 수준에 그치기는 해도 매우 독특한 자신의 지혜를 확인해줄 "믿을 만한" 증인을 부르는 동안 자신의 주장이 "터무니없이" 들리더라도 소리를 질러 지신의 말을 중단시키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부른 증인이란 다름 아닌 델포이의 신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델포이의 신탁을 증인으로 부르겠다고 말했을 때 배심원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배심원들은 마치 연극에서 극적인 장면에 등장하는 코러스처럼 야유를 퍼부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은 아폴로 신이 그리스 문명의 영적인 중심지인 델포이의 신전에서 자신의 여사제인 피티아의 입을 통해 말을 전달한다고 믿었다. 델포이 신전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따르고자 했던 지혜의 구절 두 개가 새겨져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와 "무엇이든 지나쳐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아폴로의 뛰어난 통찰력에 기대를 걸고 그의 조언을 얻기 위해 이곳을 찾곤 했다. 도시국가들도 전쟁이나 법률제정 등 중요한 일을 앞두고 신탁을 구했다. 원래 '신탁'은 아폴로의 응답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나중에는 신탁을 얻을 수 있는 델포이 신전 자체와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아폴로는 과거에 아테네와 싸운 적들의 편을 들었다. 처음에는 페르시아의 편을 들었고, 얼마 전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는 스파르타의 편에 섰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말을 가로막지 말아달라고 다시 한 번 부탁하면서, 몇 년 전에 자신의 어릴 적 친구인 카에레폰이 델포이로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다는 얘기를 꺼냈다(이 무렵 소크라테스는 서른다섯 살 전후로 이미 철학을 하고 있었으며, 상당히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폴로의 여사제는 카에레폰의 질문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신의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내용을 최상급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지혜가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뜻으로 만들어버렸다. 신탁으로 인해 그는 갈등에 빠졌다. 그는 자신에게 지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거짓말이 신의 본성에 어긋난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내용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성적인 탐구에 평생을 바친 소크라테스가 신탁의 내용을 시험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아폴로에게 직접 "반박"하겠다는 각오를 다진 것이다.



그러나 델포이의 신탁은 그 내용이 난해하기로 유명했다. 사실 그리스 전역에서 아폴로는 '모호한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신탁이 애매모호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폴로가 승인해줄 것으로 믿고 창의력을 발휘해 신탁을 해석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움을 벌이고 있던 기원전 481년에 신탁을 구했다가 우울한 예언을 들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패배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그들은 아폴로에게 좀더 호의적인 예언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나무 장벽" 뒤에서는 아테네가 난공불락이라는 신탁이 나왔던 것이다. 이 신탁 내용을 두고 커다란 논쟁이 벌어졌고, 아테네인들은 신탁의 뜻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총동원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 장벽이 아크로폴리스를 뜻한다고 주장했지만, 위대한 정치가이자 장군인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 장벽이 아테네의 함대를 뜻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다.



물론 모호한 신탁의 내용은 어떤 경우에도 틀릴 수가 없었다. 만약 아테네가 살라미스 전투에서 패했다면, 사제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적과 맞섰다면 아테네를 성공적으로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대답했을 테니까 말이다. 신탁은 미래를 정확히 예언하는 대신, 신탁을 구한 사람들의 손에 사실상 결정권을 되돌려주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경우, 신탁은 그의 지적인 능력과 군사적 판단력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신탁이 지혜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을 확인해주었으며, 영혼을 완벽하게 다듬으려고 노력하면서 미덕을 추구하라고 시민들에게 촉구해야겠다는 열정적인 사명감을 그에게 심어주었다.



소크라테스가 정치가, 시인, 기술자들을 시험하다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수수께끼"라고 표현한, 그의 지혜를 인정한 신탁의 내용에 어쩌면 더 깊은 의미가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아테네 시민들 중 지혜롭다는 평판을 얻고 있는 세 집단, 즉 정치가, 시인, 기술자들을 차례로 언급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먼저 어떤 정치가를 찾아갔다고 말했다. 정치가 백성들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 기술이라면, 그가 만나서 조사해 본 정치가들은, 분명히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혜와 도덕적 선을 추구하는 대신 개인적인 명예와 권력에 집착했다. 그러나 많은 아테네인들은 아마 존경하는 정치가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난을 도시국가에 대한 모욕으로 해석하는 쪽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헤라클레스가 자신에 관한 신탁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수행했던 일련의 노동과 그 자신의 임무를 비교했다.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수행한 지적인 대결을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의 저 유명한 12공업(功業)과 비교하는 것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을 숭배하는 외에 영웅으로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실제 인물이나 신화적 인물들도 숭상했다. 모든 영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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