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분위기가 90%
다케우치 이치로 지음 | 수희재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한다행위는 말보다 힘이 세다연극무대든 영화든 만화든, 이야기를 만들 때 가장 감동적인 장면에서는 말로 설명하지 않고 '그림으로 그린다'는 철칙이 있다. 언어는 전달을 위해 '특별히 생겨난 도구'이다. 하지만 '특별히 생겨난 도구'라고 해서 만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본디 인간 이외의 동물은 '언어 이외의 전달 수단(주로 행동)'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다. 즉, 언어의 역사는 행동의 역사보다 훨씬 짧거니와, 나처럼 연극이나 만화를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 언어는 행동보다 효과가 작은 전달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는 흔히 다음과 같은 광경을 볼 수 있다. 약속시간에 늦게 온 여자가 남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미안해, 화났어?" 남자는 "그래, 화났어"하고 말하지만 눈은 웃고 있다. 이런 경우는 화가 난 게 아니다. 거꾸로, "화 안 났어"하고 말하면서도 눈이 성나 있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화가 난 것이다. 눈은 입보다 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말하는 것은 눈만이 아니다. 태도도 역시 말한다. 턱을 괴고 있는 남자가 있다. 곁에 있는 여자가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거야?" 하고 묻는다. 남자는 "그래, 듣고 있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듣고 있지 않다. 마음이 그 자리를 떠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말과 진실은 전혀 별개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말은 7%밖에 전달하지 못한다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언어 이외의 방대한 정보.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심리학의 '논버벌 커뮤니케이션'이라 불리는 영역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앨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 박사는 타인으로부터 받는 정보의 비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 외양, 차림새, 몸짓과 표정 55%
* 목소리의 질(높낮이), 크기, 속도 38%
* 말하는 언어의 내용 7%
말하는 내용은 7%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외양, 차림새, 몸짓과 표정, 목소리의 질, 크기, 속도 등이 차지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주역의 90% 이상이 외양(분위기)과 그 밖의 것으로 채워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사람을 외양(분위기)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학교 교육에서는 '언어'만을 '전달'의 수단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7%를 '전체'로 착각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언어만이 주체가 되는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7%를 보되 93%를 보지 못하는 셈이다(그런 사람도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은 알고 있다). 교육의 함정이라는 관점에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어릴 때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런 교육이 왜 필요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겉모습으로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도 기본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아주 드물게 예외가 있을 뿐이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소파의 틈새는 왜 기분이 좋을까자신 없음을 무리하게 덮어 가리기보다는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 일반적으로 호감을 갖게 한다. 사람은 속내를 말하는 자를 좋아하게 되어 있다. 이는 '밑바닥'을 보임으로써 상대의 경계심을 풀어버리는 수법이다. 이는 '선글라스'와 반대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소파에 앉을 때 앉는 부분과 등받이 사이의 틈새에 손을 넣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을 받지 않는가? 또한 열차를 탈 때도 옆 좌석과의 틈새에 머리를 두면 편안해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불편해야 마땅한데 왜 손을 집어넣는 것일까? 그것은 '틈새에 들어가는' 것을 인간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도 틈새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본심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의 방어벽이 벗겨지고 틈새가 생긴다. 그 틈새에 사람의 마음이 들어간다.
동작의 법칙자기자리를 떠나지 않는 상사자기 영역 안에서 죽치고 앉아 있으려는 사람은 자신이 없다. 실제로 유능한 경영자는 사장실에 틀어박혀 있지만은 않는다. 현장을 좋아하고, 현장에 자주 나간다. 사람이나 곤란한 일에 부딪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에 자신을 갖고 있는 리더는 언제든지 부하의 자리로 간다. 영역 안에서 자기의 권위를 지키기보다 부하의 능력을 끌어낼 줄 안다. 나는 연출을 할 때 유능하고 덕망이 있는 인물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움직임을 취하게 만든다. 움직임을 통해 자신감을 표출하도록 장치하는 것이다. 무능한 배우는 유능한 인물의 역을 맡아도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위세를 떨치거나 의자에 찰싹 궁둥이를 붙이고 싶어한다. 그래야 '자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닮은 부부의 심리학상대와 허물 없이 지내게 되면, 서로가 동작이 비슷해지게 마련이다. 이런 경향을 심리학에서는 '동조 경향' 혹은 '자세 반향'이라고 부른다. 말하는 방식도 비슷해진다. 말하는 목소리의 크기, 속도, 말과 말 사이의 뜸, 발언 내용(즉 생각)까지 닮아간다. 중년 부부들을 보면 대체로 많은 점에서 닮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다음 3가지 반응이 있으면 동조의 표시로 받아들일 수 있다. ①따라서 반복한다 - 상대의 마음이 호의적인 상태라면, 내가 쓴 단어가 상대의 말 속에 섞여드는 경우가 있다. ②고개를 끄덕인다 - 내가 말하는 사이사이에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 ③맞장구친다 - 나의 호흡에 맞추어 분위기가 고조되도록 반응한다.
그 이외의 동조 표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상체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기울어져 있다', '책상 위에 놓은 접시나 컵을 옆으로 밀어놓아 상대와의 장해물을 제거한다', '양손을 쥐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다리 위에 놓고 있다' 등.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 콘택트(눈의 마주침)'다. 사랑하는 남녀는 서로를 응시한다. 그 응시 시간의 길이가 '좋고 싫음'의 감정을 나타낸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동성끼리도 그런 경향은 있다. 남녀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나란히 앉을 때 무릎, 발가락 끝이 상대 쪽을 향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서로 상대 쪽을 향하고 있다면 좋은 관계다. 상대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장래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나치게 고개를 끄덕이거든 주의하라우리는 상대에 따라서 드러내놓고 부정할 수 없는 국면을 숱하게 마주하게 된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 동의하든 안 하든 얼마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끄덕인다고 해서 반드시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끄덕이지 않는' 것이 부정이라면 '지나치게 끄덕이는' 것도 실은 부정인 경우가 많다. "네"하고 한 번 대답하면 동의지만, "네네"하고 마지못해 대답하는 것이 꼭 동의가 아닌 것과 비슷하다. 어림잡아 말해서 네 번 이상 계속 끄덕이면 '부정'이다.
상대의 의견을 부정할 때는 대부분 팔짱을 끼고 있다. 팔짱은 "그 이야기는 들어줄 수 없다"는 태도의 표시다. 꼰 팔은 자신을 지키는 방패다. 배우가 연기를 할 때도 이 동작은 효과적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연습 중에 팔짱을 끼지 않으려 하고 있다. 배우의 연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연출가의 일이다. 팔짱을 끼면 배우가 불안해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답답하군. 이 장면을 더 좋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하는 생각으로 연습을 하다 보면 그만 무의식중에 팔짱을 낄 때가 있기는 하다.
긴장의 표시전화 통화를 하면서 손장난을 하는 것은 긴장의 표시다. 무언가를 만지면서 긴장을 풀고 싶은 것이다. 여자의 경우는 이를 기본적으로 '호의'로 보아도 무방하다. 호의를 갖지 않은 상대, 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남자에게 긴장의 손장난은 하지 않는다. '눈 깜박임'도 불안이나 긴장의 표시다. 깜박임을 통해 타자의 시선을 한순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 깜박임은 시선을 비끼는 의사 행위인 셈이다. 또, 상대가 물끄러미 쳐다볼 때 깜박임이 많아지기도 한다.
한편, 긴장이 풀린 표시의 대표는 '겉옷을 벗는' 행위다. 만담가는 이런 동작을 의식적으로 이용한다. 서두를 끝내고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면 겉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 순간 이를 보고 있는 관객도 기분이 풀리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겉옷을 벗는' 것뿐 아니라 '상의 단추를 푼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한다' 등도 긴장 완화의 표현이다.
말없이 말하는 민족국경을 뛰어넘는 논버벌 행동나라에 따라, 종교에 따라 논버벌 행동은 다르다. 아랍에서는 남자들끼리 손을 잡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세우는 것은 일본에서는 도둑의 의미지만, 그것이 통하는 것은 일본뿐이다. 중국에서는 그것이 '9'를 의미하고 멕시코에서는 '돈'을 의미한다.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이것은 '좋다'는 의미다. 영어의 경우는 'Thumbs up!'이라는 대사와 짝을 이룬다. '좋다' 이외에 일본에서는 '남자', 한국에서는 '보스'의 뜻도 있다. 물론 거의 모든 곳에서 '1'의 의미가 있다. 'V사인'. 이것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승리', '평화', '2'의 의미로 통한다.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둥글게 만든다'. 이것도 모든 나라에서 '오케이', '확실하다'의 의미다. '돈'의 의미가 있는 나라는 일본, 한국, 필리핀, 멕시코다. 그밖에 '구멍', '제로' 등의 의미로 유통되고 있는 나라도 있다. '집게손가락을 입에 댄다'. 이것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조용해"의 의미다. 논버벌 행동 중에서도 특히 국제성이 높은 표현이다.
'말하지 않는' 문화논버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연구 영역은 주로 미국에서 발달했다. 미국인은 인사를 할 때 악수를 중요시한다. 애정 표현의 키스도 잊지 않는다. 놀랐을 때는 짐짓 양손을 펼쳐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전하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말보다 전달 위력이 큰 표현을 동원하여 '더 잘 전달하고자'하는 의사의 표출이다. 미국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은 몸짓 손짓 등의 논버벌 커뮤니케이션을 자주 이용한다. 특히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것의 호소력이 훨씬 명확하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에게 논버벌 커뮤니케이션이 갖는 의미는 이해하기가 쉽다.
우리에게 논버벌 커뮤니케이션은 왜 중요할까? 왜 언어 이외의 전달 표현을 중요시할까? 우리는 본디 말하지 않는 민족이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던 민족이다. 논버벌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지만, 그 발전 형태는 다르다. 그것은 문화의 특질에 기인한다. 먼 옛날 농경문화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신적인 핵(core personality)이 형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혼자서 묵묵히 논밭을 일구는 농민의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었고, 일하는 중에 남들과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 '말하지 않는' 문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도시국가와 상인사회가 이른 시기부터 발달했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의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자신의 권리가 위태로워지고 만다. 그 결과 애증의 감정이 거세지고 표현도 강렬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에게 알려서 자신을 통하게 한다'는 것이 유럽식이다. '서로 말하지 않고 헤아린다'는 것이 우리 식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삼가는' 문화농경민족은 기본적으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는다. 이래서 어른답고 조심스러운 기본 성격이 형성된다. 굳이 유교의 '겸양의 미덕'이 들어오지 않았어도, 겸손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구인을 뻔뻔스럽게 느낄 때가 있다. 서구에서는 자신의 장점을 늘어놓고 '파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팔지 못하면 인정을 못 받는 사회다. 사극 안에서 고관대작의 대열이 거리를 지나가면 백성들은 땅바닥에 엎드린다. 신분의 차이를 논버벌 행동으로 전하고 있는 셈이다.
'삼가는'문화를 생각하는 데서, 일본에는 '증다(憎茶)'라는 흥미진진한 습관이 있다. 아내는 싫은 손님이 와도 남편의 체면을 구길 수가 없기에 차를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럴 때 아내는 뜨거운 차를 찻잔에 넘치도록 붓는다. 그렇게 하면 찻종이 뜨거워져 손에 쥐지 못한다. 손님은 차를 마시고 싶어도 식을 때까지 입을 댈 수가 없다. 의도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증다'를 통해 부인은 "당신이 싫습니다"라는 뜻을 전한다. 그리고 손님은 그 뜻을 헤아린다. 이것 역시 말보다 전달력이 강한 표현 방법이다.
색과 냄새도 말을 한다색의 힘색 또한 논버벌 커뮤니케이션에서 큰 요소를 차지한다. 나처럼 연극과 만화라는 두 가지 일을 하다 보면 '색의 불가사의'와 마주치는 경우가 많다. 연극의 경우, 의상이나 조명의 색깔은 '세계'를 결정하기도 하기 때문에 선택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1947년의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을 무대로 한 희곡을 쓴 적이 있다. 등장인물의 거의 대부분은 재일화교다. 나는 이 연극에서 국민당 지지자에게는 녹색 의상을, 공산당 지지자에게는 적색 의상을 입혔다. 중국을 '녹색'의 대지로 비유하고, 신흥 공산주의자를 '적색'으로 구분했던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덕분에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관객은 등장인물의 입장을 곧 이해할 수 있었다.
화장이 주는 자신감인체의 색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화장이다. 정신 분석의 세계에서 드라마 요법이라는 것이 있다.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조금씩 마음을 풀어 가는 요법이다. 자기 이외의 사람이 됨으로써 자신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자신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면 상당히 대담해진다. 배우에게 화장은 자기 이외의 사람이 되는 데서 중요한 수단이다. 대담해지기 위해, 자신감을 갖기 위해, 화장은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냄새가 없는 사랑연애는 냄새와 무관하지 않다. 관계가 가까워지면, 자연스레 서로가 자신의 냄새를 상대에게 알려도 좋은 거리가 된다. 최근에는 인터넷상으로만 하는 연애도 있다. 그런데 이는 냄새가 없는 사랑이다. 체취와 같은 냄새를 느낄 수 없는 연애가 나에게는 미덥지가 않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네 집에는 냄새가 넘쳐나고 있었다. 가축이 있었고, 분뇨 구덩이가 있었다. 부엌에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과일과 야채의 냄새가 있었다. 그 이전에, 목조 건물 특유의 집 냄새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냄새는 집안에서 급속히 사라져갔다. 또한, TV의 보급이 '정보 속에 있는 냄새'를 빼앗아갔다. TV는 방대한 정보를 보내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냄새라는 정보를 보내지는 못한다. 우리는 TV를 통해서 전쟁의 영상을 볼 수 있지만, 전쟁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터넷상의 연애는 수세식 화장실과 TV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좋은 타이밍, 나쁜 타이밍, 엇나간 타이밍타이밍은 전달한다이야기를 꺼내는 타이밍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호흡 순간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