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미래의 정부를 말하다
노암 촘스키 지음 | 모색
1장 제1개념, 고전적 자유주의반인간적 제도, 국가선진 산업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다음의 네 가지 이상화된 사회형태를 논의의 틀로 잡고자 한다. 그것은 각각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libertarian socialism),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이다. 이 개념들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나의 관점을 분명히 밝히자면,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구상이 기본적으로 올바르며 현시대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선진 산업사회에 맞게 확장한 개념이다. 그러면 이제 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전적 자유주의 관점부터 검토해보기로 하겠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개인 및 사회에 최소한의 국가 개입만을 허용하는 사상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제한적인 개입 이외의 모든 개입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 사람이 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이다. 그는 1792년에 쓴 『국가 행위의 한계』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국가는, 인간을 국가의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로 삼으면서 개인의 목적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탐색적이며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결국 국가는 반인간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국가의 행위와 존재는 인간 잠재력을 풍부하고 조화롭게 개발하는 것과는 궁극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훔볼트는 루소나 데카르트 학파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주된 속성을 '자유'라고 파악했다.
훔볼트는 더 나아가 착취와 '노동 소외' 이론의 원리를 전개하는데, 다음과 같은 논의로 이어나간다.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것이 아닌, 자신이 행하는 바를 자기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원을 손질하는 인부는 정작 정원관리에는 무관심한 채 그 결실을 향유하기만 하는 집주인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정원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노동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인간은 자신만의 재능과 기술로 노동을 개선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지성을 배양하고, 인성을 고귀하게 만들며, 자신의 기쁨을 고양시킨다. 만약 자유가 없다면 이와 같은 유익한 영향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연유하지 않은 일은 참된 인간의 에너지가 아닌 단지 기계적 정확성으로 수행된 일일뿐이다."
반자본주의훔볼트가 보기에 인간은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창조에 임할 때, 생산도구가 아닌 한 명의 예술가가 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인간 본성에 관한 훔볼트의 발상의 요체이다. 이러한 설명을 마르크스의 '노동의 소외'와 비교해보면,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는 게 아니라 부정이 생길 때, 또한 그로 인해 육체가 소진되고 정신이 타락할 때 노동의 소외가 발생하며, 과학이 노동과정에 도입될수록 지적잠재력을 노동자에게서 떼어놓는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훔볼트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해서는 급진적 비판을 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그것이 전개된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은 대단히 반자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훔볼트는 자신의 책에서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 문제는 강조하고 있지만, '사적' 권력의 위험에 관해서는 우려하지 않았다. 훔볼트는 사적 인간의 개념이 나중에 법인 자본주의(corporate capitalism)시대에 이르러 기업과 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해석되리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즉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모두 자본주의적 경제 형태라는 현실 앞에서 난파선처럼 가라앉게 되리라는 점을 예측하지 못했다. 또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인간 존재를 보전하고 물리적 환경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가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리라는 점도 내다보지 못했다.
관료제와 독재국가에 대한 비판훔볼트는 고전적인 자유주의 이론을 표현하고 있지만, 루소가 찬양한 '자기 자신 속에서 사는 미개인'과 같이 원시적인 개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것은 훔볼트의 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인간 사회의 모든 속박을 깨뜨리면서도 가급적 그만큼 많은 새로운 사회적 결속을 맺으려고 애를 쓴다. 즉 고립된 인간은 속박 당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훔볼트는 국가나 여타 권위적인 제도의 강압이 없는, 자유로운 결사의 공동체, 즉 자유로운 인간들이 창조하고, 자기가 가진 힘을 최고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를 고대한다."고 했다. 기실 훔볼트는 자기 시대를 훨씬 지나친 산업사회에나 어울리는 무정부주의적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라는 틀 안으로 모아지는 날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회형태이지만, 오늘날 대중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새로운 사회적 참여를 만들어내려는 노력 즉, 서구 민주사회에서 지금까지 실현되고 있는 개인의 권리 보장이라든가, 이스라엘의 키부츠(kibbutz, 집단공동체),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평의회 등과 같이 권위주의적 관행과 공존하고 있는 여러 노력 등에서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의 요소들을 감지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내가 판단 기준으로 세우고자 하는 국가에 대한 첫 번째 개념은 고전적 자유주의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관점은 국가의 기능을 철저하게 제한하여 다양성과 자유로운 창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인간 본성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속박을 제거하고 경쟁적 탐욕이나 약육강식의 개인주의가 아닌 사회적 결속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관점은 산업자본주의에 근본적으로 대립된다. 즉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이루는 소유 중심 개인주의와는 정반대 입장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사상이 산업자본주의의 이해와 결합될 경우,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혹은 무정부주의로 곧바로 통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2장 제2개념,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무정부주의로 가는 길「1886년 5월 4일,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노동자 집회가 열렸다. 집회 취지는 8시간 노동제 요구와 경찰의 노동자 살해에 대한 항의였다. 집회는 평온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경찰이 해산을 명령했고,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폭탄이 터져 순식간에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그 뒤 경찰관 살해를 교사했다는 혐의로 어거스트 스파이즈, 아돌프 피셔를 비롯한 무정부주의자 8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5명은 사형, 3명은 금고형을 받았다. 그러나 1893년 일리노이 주 신임 주지사는 재판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금고형을 받은 3명을 특별 사면했다. 오늘날 5월 1일 노동절은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정해진 것이다.」
이 사건의 순교자 가운데 한명인 아돌프 피셔(Adolph Fischer)는 "모든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주의자이지만 모든 사회주의자가 반드시 무정부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좌익 마르크스주의자인 안톤 판네쿠크(Anton Pannekoek)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일관된 무정부주의자라면 정부에 의한 생산의 조직화에도 반대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목표는 착취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므로 생산에 대한 국가 관료들의 지휘와 공장의 관리자, 과학자 등의 지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대목은 급진 마르크스주의가 무정부주의의 흐름과 합류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국가가 관료주의적 전제정과는 다른 무언가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했다.
영국 공산당 창립자 가운데 한 명인 윌리엄 폴(William Paul)은 1917년에 쓴 <국가 : 그 기원과 기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미래의 정치적 국가는 '지배계급의' 정부를 의미하는 반면, 사회주의 공화국은 전체공동체를 위해 관리되는 '산업의 정부'가 될 것이다. 전자의 정부가 다수의 경제적 ·정치적 종속을 의미하는데 반해, 후자의 정부는 만인의 경제적 자유를 뜻한다." 폴의 이론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자유지상주의 이론과 닮았다. 특히 국가가 소멸되어야 하며 사회가 산업적 조직화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원칙도 매우 유사하다.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이것이야말로 무정부주의 혁명가들의 근본사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에 대한 인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상이 1차 세계대전 뒤의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1936년 스페인 카탈루냐(스페인 내란) 등으로 펼쳐졌다는 점이다.
국가사회주의와 국가자본주의우리는 앞장에서 국가가 왜 산업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지를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상적 산업체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산업은 노동자들이 직접 자신들 가운데서 선출한 산업관리위원회를 통해 민주적 소유와 통제를 유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활동과 사회의 여러 산업을 수행하는 사람들 또한 지방 및 중앙의 산업평의회를 통해 대표될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자들은 공동체의 필요와 소통을 담당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정치와 국가는 사회주의개념의 산업관리위원회로 대체될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윌리엄 폴과 같은 사람들은 평의회 공산주의야말로 산업사회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의 자연스러운 형태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이렇게 주장하고자 한다. "평의회 공산주의라 할지라도, 독재적인 엘리트 집단이 산업 체제를 좌지우지할 경우에,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란 한낱 속임수에 불과할 것이다. 즉 권위주의적 지배라는 조건 아래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위로부터 지시를 받는 생산 과정의 한 도구로 남을 것이다."
이제까지는 국가사회주의와 국가자본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흥미로운 부활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영국의 노동자관리 운동은 지난 몇 년 동안 대단히 중요한 세력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운동은 기계공·주물공의 통합노동조합과 같은 몇몇 대규모 노동조합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노동자관리라는 원칙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이 운동은 일련의 성공적인 회의를 개최하여 흥미로운 소책자들을 여러 번 선보인 바 있다. 1968년 5월, 프랑스의 혁명에서 비롯된 평의회 공산주의와 같은 사상이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에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흐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혁명운동현재와 같은 억압의 물결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노선에 입각하여 산업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문제를 가장 중심적인 지적 쟁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혁명적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를 향한 대중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관념적 고찰은 이제 행동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 어느 곳에서든 급진적인 종류의 민주적 사회변혁이 일어날 합리적인 가능성이 있으려면 미국에 강력한 혁명운동이 존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최소한 세계 제국주의의 거대한 중심지에서 반혁명의 개입을 저지하는 국내의 압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가능성을 통해서만 자국의 강압적인 국가기관을 타도하고 경제를 민주적 통제 아래 둘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국가를 논의하기 위한 두 가지 판단 기준인 고전적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를 언급했다. 이 두 사상은 국가의 기능이 억압적이며 따라서 국가의 행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산업사회의 민주적 조직화를 위해 국가권력을 제거해야 하며, 모든 국가기관을 그 기관의 작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직접 통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자평의회, 소비자평의회, 코뮌의회, 지역연방 등의 공동체 조직이 설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체제에서 각 조직의 대표자들은 사회집단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고 그 집단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대의제도라 할 수 있다.
3장 두 가지 반론첫 번째 반론, 인간의 본성복잡하고 고도로 기술적인 사회에서 내 주장과 같은 사회구조가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보기에 그 반론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첫 번째 범주는 자유로운 사회조직은 인간 본성에 반대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범주는 이런 조직은 효율성의 요구와는 양립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각각의 주장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
저 자유로운 사회조직은 인간 본성에 반대되는 것인가? 일찍이 2백 년 전에 루소는 자유야말로 본질적이면서도 인간을 규정짓는 인간의 속성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궤변을 일삼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비난했다. "자유란 순결이나 미덕 같은 것으로서 그것을 스스로 향유할 때만 가치를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잃어버리면 그 맛도 곧 잊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루소의 말처럼 자유인의 삶을 포기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박당한 채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식을 찬양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들이 멸시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몇몇 국가에서는 쾌락과 안식, 부와 권력, 심지어 생명까지도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을 볼 때, 자유에 대한 논의는 노예들의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릇 자신이 가진 힘을 자유롭고 유용하게 활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자유로워야 한다. 훔볼트도 루소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다. "내가 보기에 자유란 인간의 본성 자체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무능력은 도덕적·지적 힘의 결핍에서 생겨나므로 이런 힘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결핍을 메우는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도덕적·지적 힘이 행사되어야 하며, 이런 힘의 행사에는 그 활동을 일깨우는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루소나 훔볼트가 표명한 견해의 정확성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과 직관에 의해 이를 평가해 볼 수는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인간이 독재자를 추종하거나,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어떤 사회적 결과를 낳았는가.
두 번째 반론, 효율성 평의회와 같은 대의 공동체가 산업 체제의 가장 작은 기능까지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과연 효율성과 양립할 수 있는가의 반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어떤 이들은 중앙집중적인 관리가 기술상의 필수요건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에 이런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허약한 주장임이 드러난다. 중앙집중적인 체제에서는 경제 엘리트 집단조차도 일정한 목표를 위해 생산을 조직하는 체제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즉 그 목표에 권력, 성장, 이윤 등은 포함되지만, 공동체의 필요는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진 결정만이 이런 필요와 이해뿐만 아니라 다양한 엘리트들의 결정까지도 반영하리라는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이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효율성이란 개념 자체가 이데올로기로 흠뻑 젖어 있기 때문이다. 즉 상품의 극대화가 인간다움의 유일한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4장 제3과 제4의 개념, 국가사회주의와 국가자본주의사적 권력과 사적 제국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