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도정일ㆍ최재천 지음 | 휴머니스트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도정일ㆍ최재천 지음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 614쪽 / 25,000원
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
유전자로 들썩이는 세상
도정일 : 지금 생명공학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매혹하고 있어요. 죽지 않는 인간, 병에 걸리지 않는 인간, 원하는 대로 자기를 개량할 수 있는 인간, 천재 생산, 성격 개조 등등, 생명공학은 지금까지 인간이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자연적 한계를 일거에 제거할 수 있다는 환상을 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과 인간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차이는 유한성과 불멸성입니다. “인간은 죽고, 신들은 죽지 않는다”죠. 지금 생명공학은 인간이 불멸성의 문턱에 올라설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 수명은 정말 얼마만큼이나 연장이 가능할까요? 실제 연구는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최재천 : 생명과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래는 모든 사람이 최대 수명인 120세까지 질병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120세 생일날까지 섹스도 하고 테니스도 하는 등 신나게 잘 살다가 120세 생일잔치를 마치고 “잘들 있게나”하며 아무 고통 없이 떠나는 거죠. 이런 세상이 한 사람의 생명과학자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생명공학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이 혹시 150세, 200세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바라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최대 수명이 120세를 넘기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몇십억 년 동안 자연선택이 갈고 닦은 결과를 하루아침에 뒤집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그리고 그게 정말 좋은 일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고, 또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정일 : 사람이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어 없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죠. 그 두려움으로부터 고통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현대 생명공학은 인간이 그 유한성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행복의 가장 간단한 정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일 텐데, 현대 생명의학은 바로 그런 해방에 대한 전망을 주고 있는 겁니다. 생물학이 행복의 길을 열어놓는 거죠. 현대인에게 지금 생명공학, 생명의학, 유전자 치료 같은 분야는 일종의 마술적 영역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술적 영역을 통해 행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아주 위험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오케이, 고약한 자들과 손잡고 악과 동맹을 맺는 것도 오케이라는 게 되거든요. 이게 행복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데올로기 앞에서 인문학은 지금 속수무책이죠.
최재천 : 과학은 거기에 더 속수무책입니다. 특히 진화생물학에서는 행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가장 힘든 주제 가운데 하나이죠. 유전자는, 혹은 자연선택은, 나의 행복 같은 것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거든요. 자연선택의 목적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유전자는 “넌 새끼나 많이 만들어라”라고 할 겁니다. 진화생물학자가 제일 설명하기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왜 우리가 끔찍이 행복을 추구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도정일 : 생물학과 인문학의 공통 딜레마가 거기 있군요. 사실 ‘고통 없는 세상’은 인간의 오랜 꿈입니다. 행복 이데올로기가 행복 그 자체를 추구 대상으로 삼듯이, 고통 예찬론은 고통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죠. 삶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면서 말이죠. 이 망설임이 고민이고, 그 고민이 ‘옳고 그름’ 사이의 선택의 문제가 되면 고통이 생깁니다. 판단하고 선택하는 행위가 이미 고통을 수반하는 거죠.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고통스럽지만 그 선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떳떳하게 합니다. ‘고통을 통해서만 도달하는 진실의 길’이란 말하자면 그런 경우죠. 선택의 고통 속에 이미 행복이 들어와 있는 겁니다. 이 경우 진실은 바른 선택과 분리될 수 없고, 바른 선택은 ‘좋은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좋은 삶’이 행복의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좋은 삶이지 행복 그 자체는 아닌 것 같아요. 행복을 위해 바른 선택을 포기하면 좋은 삶이 망가지고 행복도 날아갑니다. 생명공학 기술은 ‘통증 없는 세계’를 제시하지만, 공학기술이 도덕적 판단과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르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더더구나 인간이 해결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문제도 아니거든요. 기술이 그런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기술사회의 행복 이데올로기입니다. 그 이데올로기 앞에서 아주 무력해졌다는 것이 인문학의 딜레마고요. 과학과 인문학 모두 이 지점에서 함께 물에 빠지는 거죠.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왜 만나야 하는가
도정일 :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한 말에 “과학과 기술, 종교와 예술은 삶의 토대다”라는 것이 있어요. 사실 그 네 가지 활동영역들은 삶의 토대만이 아니라 인간 문명의 토대를 이룹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두 개, 즉 종교와 예술은 인문학의 영역이고 두 개는 크게 과학의 영역입니다. 인문학 영역들과 과학기술의 영역들이 함께 문명의 토대를 이룬다면 그 토대들 사이에 접합ㆍ교섭ㆍ대화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종교ㆍ예술ㆍ과학ㆍ기술은 문명의 토대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인간적 활동의 최고급 알맹이들입니다.
활동의 성격으로 나누면 이 네 가지 토대들이 다시 성찰적 활동과 창조적 활동으로 구분됩니다. 종교는 철학, 역사와 함께 대표적으로 성찰적 행위의 영역에, 예술ㆍ과학ㆍ기술은 창조적 행위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활동들은 ‘성찰과 창조’라는 두 개의 축 위에 전개됩니다. 문명이란 인간이 이룩한 업적의 총체인데, 그 업적은 쉽게 말하면 성찰과 창조라는 축 위에 서 있죠.
20세기 후반 인문학과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영감의 한 원천은 생물학입니다. 생물학의 영향은 점점 더 커질 거예요. 이제부터 생물학 쪽의 발견들을 참작하지 않는 인문학은 불가능할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인간과 그의 문화적 성취에 관한 연구가 인문학인데, 지금 ‘인간’이라는 문제에 관한 과학적 발견치고 현대 생물학을 능가할 학문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나라에서 인문학과 과학 전통의 만남을 이야기할 때에는 우선 우리의 배경이 서양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서양 근대가 과학의 시대였다면, 우리의 근세는 ‘과학결핍의 시대’입니다. 과학이 다른 영역을 압도해서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과학의 결핍이 문제였죠. 이것이 서양과 우리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모자라는 것은 서양 과학기술이다, ‘도(道)’는 우리도 충분하고 우리 것이 더 우수하니까 ‘기(器)’만 보충하면 된다는 주장 말입니다. 물론 이건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생각이지만, 과학의 결핍이라는 문제의식은 옳았죠. 과학의 결핍은 아직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최재천 : 스노의 1959년 강연문을 읽어보면 과학과 인문학이 근본적으로 융화되기 어려운 두 문화라고 규정하긴 하지만, 둘 사이의 엄청난 괴리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의 전통이 과학을 끌어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런 점에서 생태학 또는 사회생물학에 몸담고 있는 저는 용감하게 『하나의 문화(One Culture)』라는 책에서 과학과 인문학이 하나의 분야로 합쳐져야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나의 문화적 담론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부르짖는 영문학자 조지 레빈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인문학과 과학의 하나됨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인문학자들이 적지 않게 있는 걸 보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최재천 : 고대 서양에서는 철학과 과학이 크게 구분되지 않았죠. 새로운 방법론이 개발되면서 두 갈래로 길이 갈린 것 같아요. 그동안 자연과학은 인간의 기원이라든가 가치라는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죠. 그런데 진화생물학이 등장하면서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겁니다. 결국 과학과 인문학이 다시 만난다면 그 연결고리에 서 있을 수 있는 학문이 진화론이 아닌가 싶어요.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이 그렇게 기대하죠. 인문학적인 상상력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자의 상당수도 진화생물학자죠. 확실히 진화론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도정일 :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 인문학과 긴밀한 접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진화심리학의 통찰을 받아들인 미학론이 나오는가 하면, 진화론에 입각한 문학이론도 나오고 있어요. 뇌신경학과 두뇌 연구는 인간의 의식 현상을 설명하는 데 상당히 기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문학과 생물학의 ‘접점’이 어딘가 하는 거죠.
유전자 혁명, 그 후 60년
최재천 : 우리가 알고 있는 진화론은 다윈의 자연선택론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다윈 이후의 인간에 대한 관점은 그 이전과 엄청난 차이가 있죠. 그래서 ‘다윈 혁명’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인간이 침팬지와 가장 가까운 공통 조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인간과 침팬지 유전자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인간과 침팬지가 공통 조상에서 갈려 나왔다는 대전제는 이제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났죠. 인간의 기원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다윈은 그 당시 유전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뚜렷한 아이디어가 없었습니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또 하나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어요. 진화론의 발견과 유전자의 발견 사이에는 100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죠. 진화론의 발견만큼이나 유전자의 발견은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유전자 혁명’이라는 말을 써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도 20세기 과학사에서 최대의 사건으로 뽑히지 않았나요? 이제는 생명의 주체가 창조주도, 별도 아니고 유전자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습니다.
도정일 : 생물학이 생명의 기원, 인간의 기원을 밝혀낸다고 해서 인간을 충분히 알게 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생명의 기원은 이런 것이고 인간종은 이러저러하게 진화했다고 생물학이 들려주는 설명은 물론 인간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는 중요한 과학적 업적이죠. 그러나 인간진화과정을 안다고 해서 그 지식이 곧바로 “그렇다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도 대답하는 건 아니죠. 그건 생물학이 대답할 질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대체로 진화생물학자들은 진화의 과정에 대한 지식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든 질문에 답한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인문학은 확실한 결론보다는 문제를 열어두고 싶어 합니다. 과학은 답을 추구하고 인문학은 질문을 추구합니다. 확실성의 추구는 서구 근대과학의 특징이죠. 유전자결정론도 확실성에 대한 그런 열정의 연장선에 있어요. 현대 생물학이 인간 존재와 그의 행동에 대한 모든 답을 가진 것처럼 발언하는 순간 인문학은 생물학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됩니다.
현대 생물학이든 19세기 생물학이든 간에, 생물학은 인간의 생물학적 차원에 대한 연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비생물학적 차원이 있다면 그 차원은 생물학의 적절한 연구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이 인간을 설명할 때 동원하는 두 개의 핵심 개념은 ‘생존’과 ‘번식’입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프로그램은 물론 중요하죠.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간의 행동, 가치, 목표를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면 인간 존재는 쪼그라듭니다. 그것 말고 생물학이 특별히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성이나 ‘인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최재천 : ‘비생물학적’이라는 용어는 맞는 용어가 아니에요. 저는 그것조차도 생물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물학에는 유전자에 의해서 발현되는 형질들이 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관련된 모든 학문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경과 관련되는 것은 싹 빼버리고 ‘생물학적=유전학적’이라는 편견이 지배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비생물학적’이라는 개념은 적절한 게 아닙니다. 저는 그게 오히려 지극히 생물학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쓴 『개미제국의 발견』에는 ‘개미 사회의 경제’, ‘개미 사회의 문화’, ‘개미 사회의 정치’ 등의 장들이 있습니다. 개미라는 참으로 대단한 사회적 동물에 대해 경제학ㆍ정치학ㆍ사회학ㆍ문화론 등에 대해 기술해본 겁니다. 모든 생물학자가 동의하진 않겠지만 최재천이라는 생물학자는 비생물학적 차원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 DNA와 자연과학 DNA가 따로 있나
최재천 : 전문 생물학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유전자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갖기가 쉽지 않지요. 실제로 유전자 정의에는 아주 여러 가지 수준이 있습니다. 하나의 대립형질일 수도 있고, 어떤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단위일 수도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전체 전체일 수도 있죠. 그런데 흔히 유전자라고 통칭하면 마치 어떠한 성질을 나타내는 하나의 특정한 유전자가 있는 것처럼 오해들을 많이 해요.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아주 ‘결정적인’ 오해죠. 그러면 우울증 유전자, 자폐증 유전자, 예술가 유전자, 정치가 유전자가 있게 되는 거예요.
도정일 : 인문학자들이 문화 DNA니 정치 DNA니 하고 말할 때는 은유적인 의미로 하는 말입니다. 문화도 유전됩니다. 생물학적 유전과는 다른 의미에서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탄생은 생물학적 사건이되 그의 성장은 사회문화적 사건입니다. 어떤 문화 속에 태어나 자라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나와요. 최 교수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인문학의 거부감이 상당히 누그러지는군요. 최소한 지금의 생물학은 유전자 결정론의 단계는 벗어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고요. 그러나 21세기의 돈줄로 여겨지고 있는 생명공학 쪽 사람들이 지금 최 교수님께서 말한 그런 유전자론에 전면 동의할지 나로선 알 수 없군요. 나는 생물학과 그 연관 분야들이 인간을 개조 혹은 개량하기 위한 공학적 시도들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그것을 요구하고, 자본이 꼬드기고, 사람들의 열망이 크니까요.
생명복제, 이제 인간만 남는 것인가
누구를 위한 윤리인가
최재천 : 생명체는 정자와 난자와 만나 수정란(배아)이 형성되면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복제생명체는 다릅니다. 정자와 난자 대신 핵이 제거된 난자와 평범한 체세포만 있으면 되거든요. 이론상으로는 이 두 가지만 결합시키면 마술처럼 체세포와 동일체인 배아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만큼 복제인간의 탄생이 그렇게 쉽고 가까운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현재의 복제기술 자체는 여전히 불안정해서 복제한 배아를 자궁에 착상시키면 유산이나 사산의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집니다. 복제이론 자체는 간단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매우 불안정한 단계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걸 두고 바로 생명의 존엄성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복제인간을 만드는 전 과정에서 거의 완벽하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절대로 복제를 시도할 수 없는 겁니다. 저는 복제인간이 몇 십 년 안에 탄생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도정일 : 생명윤리의 관점에서는 배아도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생명의 시작이죠.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뽑아내는 일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배아가 세포 분열을 시작하고 나서 일주일 이내에 줄기세포를 뽑아내야 하고, 일단 줄기세포를 뽑아내고 나면 배아는 파괴해야 합니다. 생명체를 죽이는 거죠.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충분히 문제가 됩니다.
최재천 : 물론 그렇죠. 이런 연구에 생명윤리적인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고 유치한 발언입니다. 그런데 좀더 실질적인 문제는 이 같은 실험 자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연세대에서 ‘생명윤리와 인간본성’이라는 강의를 하고 있지만, 참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바로 ‘누구를 위한 윤리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제 가족한테 난치병이 있다면 저는 지금이라도 세상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세포 연구를 할 것 같아요. 우리 가정의 유전적인 문제를 저의 생물학적 지식과 실험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기꺼이 어떤 실험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내 아버지를 살려야겠고 내 자식을 살리겠다는데 누가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