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불량정권

재스퍼 베커 지음 | 기파랑
1장 기근과 탈북사태



1997년과 1998년의 겨울, 북한에서는 기근이 절정에 달하여 수백만 명의 인민이 사망했고, 이 책을 저술할 당시인 2004년에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었다. 공장이 문을 닫고, 학교와 병원마저 폐쇄되자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찾아 집을 떠났으며, 그중 일부는 중국을 향했다. 그런데도 외부 세계의 사람들은 북한의 기근을 믿지 않았다. 북경에 주재하는 서방세계의 외교관들도 북한의 신용을 실추시키고자 하는 남한의 음모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북한의 기근은 천재지변이 아닌 북한 체제에 그 원인이 있었다. 북한 정부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에 걸쳐 모든 농지를 국영농장인 협동농장으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공산주의의 계획경제체제 아래서는 만성적으로 식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련과 중국에서는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일시적인 조치를 취해 성과를 본 적이 있었다. 1920년대 초반, 레닌은 방대한 유휴지에서의 주말 농장을 장려했다. 그래서 주민들은 개인적으로 과일을 재배하거나 가축을 길러 부족한 식량을 보충했다. 반면 중국의 마오쩌둥은 도시민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켜 영농에 동원했다. 두 나라는 이러한 제한적인 조치로나마 기근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정책도 거부했다.



1980년대에 김정일은 상황을 보다 어렵게 만드는 정책을 취했다. 군 복무기간을 7년에서 13년으로 연장하고, 여성들마저 강제 징집했다. 그 결과 병사들을 먹여 살릴 식량문제까지 야기되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군인들이 굶주림으로 사망하기 시작했고, 군인들은 농가의 작물을 강점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농가와 도시의 모든 지역에서 식량난이 심화 되었다. 그런데도 김일성 부자는 체제 붕괴를 우려하여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텃밭을 경작하는 등의 대체 생계 수단마저 금했다.



노동당의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은 암시장에서 상업 활동을 하거나 텃밭에 야채를 키우고, 토끼를 키웠다. 국경지역의 광산촌에서는 몰래 쌀 거래를 하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다. 당국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금지했고, '이대로 굶어죽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 주민들 200명이 체포되고, 그 중 10명이 공개처형 당하기도 했다. 난국이 심화되자 북한관리들은 이상한 대체식량 장려정책을 권장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나무뿌리와 줄기, 해초, 옥수수 껍데기 등으로 죽이나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다. 이는 영양가도 전혀 없었지만,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종종 사망하기도 했다. 질긴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해 직장(直腸)이 막혔기 때문이다.



1995년부터는 당 간부들까지 식량난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북한은 국제기구에 식량을 요청했고, 이에 국제기구뿐만 아니라, 중국도 북한에 식량을 원조해 주었다. 중국은 북한 주민들이 대거 탈출할 경우, 북한의 붕괴가 촉진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탈북자들을 강압적으로 송환시키고 이들을 '경제적 이주자'라고 주장하여 정치적 보호를 받을 수 없도록 하였다. 유엔 등의 국제기구가 중국에 항의했지만, 제네바협약의 준수 조항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중국의 주장에 따라, 그 누구도 항의를 계속할 수 없었다. 중국의 보안요원들이 일본영사관으로 들어가는 탈북자들을 강제로 끌어내는 모습이 TV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지만 한국 정부를 포함한 세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2장 김씨 왕조



김일성은 김성주란 이름으로 1912년에 태어났다. 김일성이란 이름은 항일운동을 전개한 전설적 지도자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김일성의 부모는 그가 7세 되던 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도피했다. 김일성은 길림성으로 불리는 중국의 북부 지역에서 중국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간신히 문자정도를 터득한 14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공산주의 학습모임에 합류했다. 이 일로 8개월간의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1932년 20세가 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의 게릴라 집단에 합류했다. 그 후 10년 동안 200명 남짓의 소규모 단체 속에서 생활하면서 일본에 대항한 게릴라 활동을 했다. 자금마련을 위한 약탈 대상은 주로 조선인이었다. 당시의 조선인 마을은 성실성과 근면성이 바탕이 되어 상대적으로 부유한 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당시의 시대상황에 의해 그 이념적 성향이 나뉘었다. 일부 조선인들은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마오쩌둥 부대에 합류했고, 일부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관계를 맺으면서 상해에 임시정부를 설립했다. 또한 일부 조선인들은 미국에, 특히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한 윌슨

대통령에 의존했다. 그러나 또 다른 일부는 1905년에 미국과 일본이 각각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한 것을 기억하고 공산주의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1925년 공산당을 조직하고, 조선을 구원해줄 대상으로 소련과 코민테른(공산당 연합)에 기대를 품고 소련으로 갔다. 그러나 스탈린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민족의식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 1930년대 초반, 지나치게 민족의식이 강하다는 이유로 조선인을 코민테른에서 추방했다.



1937년, 일본군이 길림성의 중국 공산당 게릴라 단체를 전면 침공했다. 그러자 생존한 모든 게릴라들이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이때 김일성도 소련으로 들어가 하바로프스크 보병간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부대에 편입되어 대위까지 승진했다. 스탈린은 1945년 8월 8일,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8월 15일 평양에 입성했다. 이때, KGB의 전신인 NKVD는 김일성을 이용해 괴뢰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심했다. 김일성과 비교해 훨씬 자격이 훌륭한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다수 있었기에 김일성의 발탁은 전혀 의외였다. 당시 33세였던 김일성의 장점은 병사들의 기강을 잡을 수 있는 우람한 체격조건과 전투원으로서의 명성뿐이었다. 아마도 김일성의 발탁 배경은 김일성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조선의 토착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되어 있지 않다는 점, 즉 소련에 전적으로 충성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이었던 것 같다.



김일성은 1950년 6월, 남한을 침공했다. 김일성의 남침이 없었더라면 한반도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기회가 한국에 주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해방이후, 한반도에서 일본군이 떠났고, 소련군과 미군도 철수했다. 또한 중국은 내전으로 인해 경황이 없었다. 이는 한국의 애국자들이 19세기 말부터 염원해오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일성과 북한의 부주석 박헌영은 남침할 경우 남한에 있는 수십만의 빨치산들이 지원하게 될 것이라고 스탈린을 설득했다. 그리고 결국 지원을 얻어 침공을 개시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사상자만 안은 채, 한반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분단되었다.

김일성은 남침의 과오로 인해 자신의 정통성이 대폭 약화된 것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외세의 침공에 의한 무고한 희생이라며 역사를 조작하고, 6년 동안 박헌영을 비롯한 당 간부들을 처형했다. 이렇게 8만 명 정도의 초기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숙청함으로써, 자신의 날조된 역사를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거짓말도 자주 반복하면 사실이 된다.'고 레닌은 말했다. 김일성은 북한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자신의 정통성을 포장했다. 자신의 과거사를 모두 폐기하고, 모든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기록도 삭제했다. 따라서 김일성이 조선 공산당을 혼자 설립하여 독립투쟁에 몰두한 것으로 정립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조차도 김일성과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경외감을 표명했다.



3장 신격화된 왕조체제의 수립과정



1997년 2월의 어느 날 오후,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한 노인이 쇼핑을 간다면서 북한대사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상점에서 자신의 호위 요원들을 따돌리고 지나가던 택시를 탔다. 그렇게 북경 주재 한국영사관에 도착한 노인은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그가 바로 황장엽이다. 황장엽의 탈출은 히틀러의 충복(忠僕)인 괴링의 탈출에 비유되어 워싱턴포스트지에 실렸다. 황장엽은 1958년 이후 김일성의 개인비서로 근무해왔다. 그는 세상의 가장 비밀스런 정권의 최고위층에서 39년 동안 생활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일성을 '살아있는 신'으로 바꾸어 놓은 주체사상을 창시한 이론가이기도 했다.



황장엽은 1953년 모스크바대학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김일성대학의 교수로 부임했다. 그 후 마르크스 철학에 관해 가장 권위 있는 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1958년 1월, 김일성이 황장엽을 소환했다. 자신의 내각에 들어와 4명의 비서로 구성되어 있는 팀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북한식 해석을 발전시키라고 요구했다. 황장엽은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주체사상 정립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1965년 40세의 나이로 김일성대학의 총장이 된 그는 모든 연구목록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에 관한 글을 삭제했다. 그리고 조선 공산주의 역사를 다시 기술하는 작업을 했다. 즉, 김일성 외의 모든 공산주의자의 사진과 글을 기록에서 삭제했다. 그리고 공산주의 활동에서 별 의미가 없었던 빨치산 추종자들의 활동을 부풀려 기록했다.



황장엽은 김일성숭배를 창안하고 김일성을 과대 포장한 장본인은 김일성 자신이라기보다는 김정일이었다고 말한다. 김정일은 황장엽이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의 제자였다. 황장엽은 김정일의 개인지도 선생이기도 했다. 김정일은 외국유학을 마다하고 김일성 곁에서 보좌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와 자신의 이복동생들이 아버지의 신임을 얻게 되는 것을 두려워 했다. 김일성의 후계자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김정일과 조선노동당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일탈하여 '새로운 유교(Neo-Confucian)' 개념을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조부, 증조부, 그리고 삼촌을 포함한 김씨 가계가 신으로 추대 되었으며, 이를 위한 사당으로 만경대가 건립되고,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그곳을 참배하는 것이 의전관례가 되었다.



김정일은 영화를 이용하여 김일성 우상화를 극대화 했다. <피바다> 및 <꽃 파는 아가씨>와 같은 혁명 오페라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마오쩌둥의 아내이면서 배우인 장칭이 만든 것과 그 유형이 비슷했다. 1972년, 김정일은 김일성의 환갑 축하행사를 맞아 미화 8억 달러 상당의 황금으로 치장된 700피트 높이의 김일성 동상을 평양의 중심가에 세웠다. 그 후 몇 년 동안 김정일의 삼촌 김영주와 그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이 권력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974년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었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인정된 이후에도 언행을 몹시 조심했다. 1988년이 되어서야 김일성의 초상화 곁에 자신의 초상화를 나란히 걸도록 하였다. 또한 김일성을 공식 수행했으나 앞에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1992년 12월, 인민군최고사령관의 직위에 올라 군통수권을 공식적으로 인수받았다.



4장 노예국가



안명철은 '제11 수용소'의 정문을 들어서면서 본 사람들이 도대체 사람인지 의심스러웠다. 평균 140센티미터 신장의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로, 대부분 귀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콧등이 가라앉고 비뚤어져 있거나 한쪽 눈이 없기도 하고 눈동자가 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안명철은 네 군데의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8년 동안 근무했다. 안명철이 근무한 곳은 정치범과 그들의 가족을 감금하는 '관리소' 또는 '특별통제구역'이라 일컫는 곳이었다. 안명철의 증언에 의하면 정치범수용소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명된 1973년 이후 크게 변화되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이복동생인 김평일을 포함해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로 인해 수용소 내의 수감자 수가 80%나 늘어났다.



1970년대에는 수용소가 20여 군데 운영되었고, 범법자들을 수용하는 교화소 내지는 감옥도 150군데나 있었다. 죄수들은 모두 노동자로 활용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식량 부족 때문에 북한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는 죄수들의 숫자 또한 절정에 달하여, 질병과 영양실조로 죄수들의 사망률 또한 급격히 증가했다. 그 결과 수용소가 죽음의 지옥으로 변했다. 금광 제련소인 제77수용소에서는 2년 동안 약 2,000명의 죄수가 사망했다. 그곳을 탈출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죄수들이 식량 뿐만 아니라 돼지 사료, 동물의 배설물 중에서 소화되지 않은 곡물을 훔친 결과 사살되기도 했다고 한다.



수용소 상황이 악화되자 대규모 폭동이 야기되었다. 중국 국경 부근의 제12수용소에서는 탄광에서 일하던 정치범들이 경비원들과 그 가족들 수백 명을 살해했다. 이에 1개 대대 규모의 병사들이 수용소를 둘러싸고 대략 5,000명의 수감자들에게 기관단총을 발사하여 폭동을 진압했다. 죄수들이 대거 사망하자 이곳에서 생산된 곡물과 석탄에 의존하고 있던 북한의 경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김정일은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평양 근처의 몇 군데를 포함한 5개 수용소를 폐쇄하고 죄수들을 다른 수용소로 이동시켰다. 김정일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규범을 위배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음이 분명하다.



죄수들 중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에 묻어 있는 먼지를 깨끗이 닦지 않은 것과 같이 사소한 일로 체포된 사람들도 많았다. 안명철의 아버지는 1994년 7월, 곡물 창고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자신을 찾아온 몇몇 관리들과 술을 마셨다. 술기운에 그는 식량 부족에 관한 불만을 토로했다. 술에서 깨어난 다음날 아침, 자신이 전날 한 발언을 떠올리고 쥐약을 마셨다. 안명철은 아버지가 죽자, 자신에게도 닥칠 위험을 예견하고 김일성 사후의 혼란한 틈을 타 중국으로 탈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명철의 어머니와 누이들이 수용소로 끌려갔다. 황장엽의 가족 또한 황장엽이 북한을 탈출한 이후 수용소로 끌려갔고, 황장엽과 관련이 있는 2,000여 명이 숙청되었다. 황장엽의 딸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에 교량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주민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 대략 47등급으로 나뉘어 지며, 성분에 따라 식량 배급 규모를 포함해 모든 점에서 차별적 대우가 이루어진다. 가장 신뢰받는 계층은 항일투쟁에 헌신한 가문, 한국전 참전용사 집안, 1945년 이전의 노동자 농민 등의 후손이며, 이들만이 평양이나 다른 도시지역에서 살 수 있다. 가장 불신을 받는 적대계층은 1945년 이전에 교육받은 엘리트, 지주, 남한에 친척이 있는 자 등이며, 이들은 수용소나 탄광의 근로자 및 농민으로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적대계층은 세습된다. 이들은 고급교육을 받을 수 없고 노동당에 입당할 수도 없으며, 군에 입대할 자격도 없다. 반면 고위급 관리의 자제는 시험을 치지 않고도 학교에 들어가며, 군복무에서 면제된다.



5장 북한 경제의 붕괴



1987년 당시, 40대의 농업연구가였던 이민복은 연구차원에서 북한의 북동부 지역을 살펴볼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는 굶주림으로 사망한 북한 주민을 그때 최초로 목격했다. 그때부터 이민복은 식량생산 증진을 위한 아이디어를 찾아 6년 동안 북한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는 연구를 통해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난은 북한경제체제의 문제라고 결론지었다. 이민복은 집단농장이 아닌 개인 텃밭에서 일할 경우 5배의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적은 제안서를 중앙당에 제출했다. 그러나 곧 비밀경찰이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잠자코 있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 이민복은 탈북을 결심하고, 부인과 이혼한 후 잠시 잠적해 있다가 중국으로 탈출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