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과 그의 시대
김창현 지음 | 푸른역사
1장 혼돈납치당하는 고려왕고려 국왕 충혜왕(1330~1332, 1339~1344)이 원나라 부왕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지 4년째를 맞이했을 때였다. 원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환관 고룡보와 박불화는 원의 순제가 하사한 의복과 술을 왕에게 전달했다. 충혜왕은 원의 황제가 선물을 보낸데 대해 감격했다. 그런데 다음날 원 황제의 사면령을 전달한다며 사신 6인이 또 왔다. 충혜왕은 원나라에서 사람을 연달아 보낸 것을 이상히 여겨 아프다는 핑계로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원의 환관 고룡보가 말했다. "황제께서는 항상 충혜왕께서 예의가 바르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마중을 나가지 않으시면 황제가 더욱 의심하실 것입니다."
충혜왕은 할 수 없이 정동행성으로 나가 사신을 맞이했다. 그때 갑자기 원에서 온 사신이란 자들이 충혜왕을 발로 차고 결박했다. 그리고 병기를 마구 휘두르자, 고려의 백관들은 허둥대며 도망치다가 칼과 창에 맞아 죽거나 부상당했다. 원의 자객들은 충혜왕을 말에 태워 달렸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도착했을 때는 유배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충혜왕을 실은 죄수용 수레는 연경에서 2만 리가 넘는 게양을 향해 출발했다. 이를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고려국 대원자 왕기(공민왕)였다. 충혜왕의 친동생인 왕기는 인질로 잡혀가 원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원과 고려의 관계충혜왕의 5대조인 고종(1213~1259) 때부터 고려는 몽골에게 수없이 침략 당했다. 무인정권이 강화도로 옮기는 동안 고려의 전 국토는 몽골군에게 유린당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살상당하거나 몽골에 끌려갔다. 전쟁에 지친 고종은 제위 46년(1259)에 태자(원종)를 몽골에 보내 화해 협상을 시도했다. 당시 몽골에서는 대칸의 자리를 놓고 칭기즈 칸의 손자들인 쿠빌라이와 아리부케 형제가 계승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고려의 태자(원종)는 쿠빌라이 편에 섰다. 쿠빌라이가 승리하고 대칸에 오르니,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원(元)나라였다.
쿠빌라이를 지지했던 원종(1259~1274)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는 원의 제후국이 되었다. 그래서 원의 내정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감시기구로 활용했다. 그리고 고려 국왕의 왕위 계승에 깊숙이 개입하고, 군대의 지휘관과 정동행성의 관리에 대한 임명권을 행사했다. 원종은 원의 세력을 얻기 위해 세자(충렬왕)를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시켰다. 이때부터 고려의 왕은 몽골 황실의 여자와 결혼해야만 했다. 따라서 고려의 왕위 계승은 칭기즈칸의 피로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원나라는 누구에게나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부여했고,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능력을 중시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고려에도 영향을 미쳐, 무인 집권기 이래 시작된 고려사회의 신분이동을 더욱 심화시켰다. 유학과 문장을 공부하지 않아도, 심지어 노비출신이라도 실용적인 능력을 갖추거나 권세가에게 충성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다. 고려왕조를 이끈 사람들은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인 '사족(士族)', 즉 양반이었고, 그 중에서도 유교와 문장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유자(儒者)'였다. 그런데 원의 영향으로 평민과 노비가 관직에 진출해 신분을 상승시키며 기득권을 잠식하자, 유자들은 격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보니 평민과 노비는 생존을 위해 친원(親元)을 했고, 유자들은 보다 큰 출세와 명망을 위해 친원을 했다.
고려는 원의 세계에 갇혀 지내지는 않았다. 원이 고려를 해체하려고 시도할 때면 언제든 들고 일어났고, 원의 세계적인 무역망을 이용해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농업생산력을 높였다. 고려의 상업경제가 발달하고 개인이 부를 축적할 기회가 증가함에 따라 향락문화도 퍼져나갔다. 이 시기 성의 자유분방함은 여성 인구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고려의 수많은 남성들이 몽골과의 오랜 싸움에서 목숨을 잃자, 과부가 늘어났다. 여성인구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 보니, 처녀와 과부는 남성을 놓고 경쟁을 벌여야 했다. 그래서 성리학을 존숭하는 유자들까지 공공연하게 다처를 거느렸다.
시체를 묻는 매골승경남 창녕의 화왕산에는 옥천사라는 절이 있었다. 옥천사는 몇 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어린 노예가 한명 있었다. 이 아이는 옥천사의 노비 여인과 불공을 드리러 온 신씨 성을 가진 한 남자와의 사이에 생겨났다. 고려 왕조의 법은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자식의 소유권은 여자 노비에게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어머니를 따라 옥천사의 소유가 된 것이다. 어린 노예는 놀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가끔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의 아버지는 영산이라는 조그만 시골의 유지였는데,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옥천사에 몸값을 지불하고 아들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켰다. 하지만 세상의 눈이 두려워 아들을 옥천사의 중이 되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편조(신돈)였다.
당시 고려는 관료들에게 조세 징수권을 위임했는데, 관료들이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거나, 한 토지에 대해 중복과세를 하는 등, 토지로 인한 세금부담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아예 토지를 권세가에게 기증하고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런 연유로 기아와 질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시체를 치우는 일이 사찰에 주어졌는데, 사찰에서는 이 일을 어린 중에게 시켰다. 옥천사의 어린 중들은 편조가 노비출신이라며 괄시하고 모욕을 주곤 했으며, 시체를 치우는 일도 편조에게 맡겨 버렸다. 즉, 매골승(埋骨僧)이 된 것이다.
어린 매골승은 시신을 처리하느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보니 여러 지역의 사람들과 접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얻어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다. 충렬왕 때 원나라의 관리가 고려의 노비제도를 없애려다 고려 관료들의 반발로 실패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물론 중국을 지배한 원은 고려와 같이 엄격한 노비제도가 없었고, 특히 몽골인은 동족을 노비로 만들지 않았다. 동족을 노예로 삼는 고려는 몽골인들에게 이상한 나라였다. 매골승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고려인들은 몽골인을 미개한 오랑캐라고 깔보는데, 동족을 노예로 삼는 고려는 문명국이란 말인가? 어린 매골승이 생각하기에 원나라는 관대하고 위대한 나라 같았다.
반야를 찾아서매골승은 옥천사가 답답하기만 하였다. 부처님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였는데, 부처님을 떠받드는 사찰조차 노비를 소유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불교계는 선종과 천태종이 양축을 형성했다. 선종은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천태종은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다. 또한 비밀불교인 밀교도 유행했는데, 원 제국이 후원하는 티베트불교(라마교)가 유입되어 고려불교에 영향을 미쳤다. 티베트불교는 성적인 결합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좌도 밀교의 경향이 강했다. 그 영향으로 고려에는 대처승이 급증했고 승려들의 간통이 흔한 일이었다. 이 시기 특히 천태종이 밀교와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매골승은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옥천사를 나왔다. 그리고 남한강을 따라 북상하다가 치악산에 올랐다. 그곳에는 각림사라는 절이 있었다. 각림사에서는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도 묻지 않고 그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매골승은 관음 신앙의 주요 경전인 천태종의 법화경을 독송하며 정진했다. 법화경을 독송하다보니 자기만이 아니라 남을 구제하는 보살승이 느껴졌다. 매골승은 법화의 세계, 천태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느 정도 수련 과정을 거치자, 큰 스님이 '편조(遍照)'라는 법호를 내려주었다. 법호의 의미는 등불처럼 세상을 두루 비추어 중생을 구제하라는 것이었다.
황후가 된 공녀 기씨고려는 원의 정치적인 간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재물을 가릴 것 없이 많은 것을 빼앗겼다. 몽골 남자들은 고려의 양가집 어린 미녀들을 원했고, 원 황실은 고려 출신 환관을 요구했다. 고려가 원나라에 바치는 여인을 공녀(貢女)라 했는데, 많게는 일 년에 두 번, 적게는 2년에 한번씩 40~50명을 데려갔다. 공녀의 선발 대상은 대개 10대의 어린 처녀들이었고, 노비를 제외한 평민 이상의 양가집 규수였다. 공녀들은 원 황실에서 잡일을 하거나 몽골 남자들의 첩 또는 원나라 군인들의 부인이 되었다. 운이 좋으면 황족이나 황태자의 배우자인 황후에 오르기도 했는데, 기황후가 그렇게 선택된 여인이었다.
기황후는 양광도 행주의 사족 출신으로 미모가 빼어나고 영민했다. 그녀는 고려 출신 원나라 환관인 고룡보에 의해 궁녀로 발탁되었다. 그녀가 처음 한 일은 젊은 황제 순제에게 차를 끓여 올리는 일이었다. 순제는 원 내부의 계승 싸움으로 인해 한때 고려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순제는 잠시 머문 고려에서 고려인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꼈었다. 그래서 고려 출신인 궁녀 기씨에게 푹 빠져들었다. 순제는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지만 승상 바얀이 반대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몽골족 여인을 황후로 맞아들였지만 황제는 늘 기씨의 처소에 머물렀다. 기씨가 황자를 낳아 더욱 총애를 받던 차에 큰 기회가 찾아왔다. 승상 바얀이 중국 문화 존중파인 톡토에 의해 실각된 것이다. 이로써 공녀 기씨는 황자를 낳고 황후에 책봉되었다.
기씨는 황후에 책봉되자 제1황후를 무력화시키고 황실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환관 고룡보와 박불화의 도움이 컸다. 기황후가 실력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데 이용한 무기는 바로 고려 출신 미인들이었다. 기황후는 공녀들을 이용해 고관대작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원 황실은 고려여인과 환관들이 점유해 갔다. 또한 기씨 집안은 급속히 지위가 상승했다. 원의 순제는 이미 사망한 기황후의 부친을 '영안왕'이라 추증했고, 생존해 있는 모친 이씨를 대부인에 책봉했다. 그리고 기황후의 오빠 기철, 기원, 기주, 기륜 등에게 고위 관직을 내렸다. 이로써 기씨 집안은 온갖 세력을 휘두르며 이득을 챙겼다.
2장 서광왕위계승 경쟁에서 조카에게 패배하다충혜왕과 공민왕 형제는 충숙왕과 덕비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둘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나 차이가 났고, 공민왕이 태어났을 때 형은 이미 왕위에 오른 상태라 공민왕은 형을 어려워했다. 공민왕의 이름은 기(祺)였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의 작위는 강릉대군이었다. 충혜왕이 원에 끌려갔다가 다시 복위했을 때 강릉대군은 열 두 살이었다. 대군은 무서운 형이 고려로 돌아오는데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데 원에서 강릉대군을 인질로 불러들였다. 강릉대군은 고국을 떠나는 아픔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형에게서 벗어난다는 안도감에 속히 원나라로 갔다. 강릉대군은 왕위계승 후보자였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를 지지하는 고려의 관료들이 서서히 늘어나고, 그를 부추기는 원나라 실력자도 생겨났다. 그래서 강릉대군 자신도 왕이 되겠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충혜왕은 복위 3년 만에 원에 납치되어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이때 강릉대군의 나이는 15세였다. 원은 충혜왕의 장자(충목왕)를 고려왕으로 선택했다. 충목왕은 불과 8세의 어린애였지만, 그의 어머니가 몽골공주였고, 충목왕이 나이가 어리니 고려 왕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계산에서 그를 선택한 것이다. 충목왕이 보위에 오르면서 고려조정의 실권은 원나라 공주이면서 충목왕의 어머니인 덕녕공주와 재상들의 손에 쥐어졌다. 이때 세력을 떨친 유자 중에 경상도 영산 출신의 신예라는 자가 있었다. 신예는 원의 환관 고룡보의 처남이었다. 매부가 원에서 권세를 부리게 되자 신예를 비롯한 친인척들이 고려에서 세력을 떨쳤다. 편조도 개경에 와서 신예 형제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다.
왕위 쟁취편조는 더욱 넓은 세계에서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개경을 떠나 원나라로 갔다. 원나라 사람들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실용적인 능력을 중시하는 풍조를 보면서 편조는 큰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고려인으로서의 한계도 절감했다. 원 제국은 몽골인을 제1종족으로 두고, 충성도에 따라 색목인(중앙아시아인)을 제2종족, 한인(중국 북쪽 사람)과 고려인을 제3종족, 마지막으로 원에 끝까지 저항한 남인(남송의 유민)을 제4종족으로 분류해 차별했다. 편조는 티베트밀교(라마밀교) 사원에 거처를 정했다. 이곳에서 편조는 좌도 밀교에 빠지면서, 라마승처럼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충목왕은 1348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떴다. 당시 열아홉의 혈기 방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던 강릉대군 왕기에게 소망하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원은 충목왕의 이복동생인 충정왕을 고려왕으로 선택했다. 충정왕은 충혜왕과 희비 윤씨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몽골공주의 소생이 아니었다. 게다가 겨우 열한 살이었는데 원은 장차 후환이 될지도 모를 강릉대군 대신 조종하기 쉬운 어린 충정왕을 선택했다. 이로써 고려의 실권은 충목왕의 어머니 덕녕공주와 충정왕의 어머니 희비 윤씨, 그리고 기황후의 오빠 기철의 손에 들어갔다.
연달아 어린 조카에게 패배한 강릉대군 왕기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를 지지했던 이들 중에도 이탈자가 점점 늘어갔다. 왕기는 원나라 황실이 자신을 경계하는 이유가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측근을 통해 원 황실 위왕의 딸인 노국공주와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또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세력을 설득하고 기황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자 원 황실은 남성적인 충혜왕과는 달리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왕기에 대해 점차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왜구의 출몰이 잦았다. 왜구를 퇴치하자면 고려의 지원이 필요했는데, 고려 내부의 갈등을 수습하고 왜구를 물리치기에 충정왕은 아직 어렸다.
충정왕 3년(1351), 원의 순제와 기황후는 고민 끝에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 왕기를 고려국왕에 책봉했다. 이로써 강릉대군 왕기, 즉 공민왕은 오랜 기다림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공민왕의 등극은 양위가 아니라 일종의 정변이었다. 공민왕파인 이제현은 공민왕이 귀국할 때까지 충정왕파의 핵심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유배 보냈다. 그리고 공민왕은 귀국하자마자 권좌에서 축출된 어린 조카 충정왕을 강화도로 쫓아냈다. 충정왕은 강화도에 유배된 지 3개월 만에 독살 당했다. 그의 나이 열네 살이었다. 공민왕의 집권은 이렇게 조카의 피를 묻힌 채 시작되었다.
반원의 소용돌이공민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몇 년 동안 원에 억류당하고, 형 충혜왕이 원에 끌려가 사지로 가는 것도 목격했다. 그래서 자신도 원의 간섭을 받는 한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특히 기황후와 기씨 일가는 언제든지 공민왕을 끌어내릴 만한 힘이 있는 자들이었다. 공민왕은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차에 오랫동안 자신을 측근에서 수행해온 조일신이 공민왕 원년(1352) 9월, 정변을 일으켰다. 조일신이 전직 재상 최화상 등과 시정잡배를 모아 기 황후의 오라버니들인 기철, 기륜, 기원과 환관 고룡보를 제거하기 위해 밤을 틈타 습격했다. 하지만 기원만 살해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쳤다.
사관에 보면 공민왕이 정변을 직접 지시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공민왕의 심증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민왕은 기씨 집안의 횡포에 대한 불만을 자주 표출함으로써 기씨를 반대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에 측근 조일신이 왕의 심중을 읽고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요컨대 이 정변은 공민왕이 사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기황후와 기씨 세력의 보복이었다. 조일신은 정변에 가담한 최화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