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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의 부메랑

박석순 지음 | 에코리브르
제1부 백 년 전 환경재앙



시카고 대참사

1864년 미국 남북전쟁이 끝나자 시카고에는 많은 인구가 한꺼번에 유입되어 거리는 말의 배설물과 쓰레기로 넘쳐났다. 또한 많은 생활하수가 시카고 강과 칼루메 강에 방류되었고, 두 강은 다시 미시간 호로 흘러 들어갔다. 미시간 호의 물이 썩고 쓰레기로 넘쳐나자 시카고 시민들은 악취와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했다. 1885년과 1886년에는 장티푸스가 창궐하여 9만여 명이 사망했고 1891년부터 1895년까지 약 2만 명이 또 다시 장티푸스에 걸렸다. 거듭해서 참사를 겪은 시카고는 시카고 강과 칼루메 강의 유역을 변경하여 미시간 호로 흘러가던 지류를 일리노이 강으로 흐르게 했다. 그로 인해 시카고의 하수는 미시간 호로 흘러들지 않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로 가게 되었다.



시카고 시는 오염된 하천의 흐름을 변경하여 전염병을 몰아내고 미시간 호를 살렸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두 지역과의 법정 소송에 휘말렸다. 뜻하지 않게 시카고의 하수를 받게 된 일리노이 강과 세인트루이스를 포함한 인접 도시들이 시카고 시와 일리노이 주를 법정에 제소했다. 또한 미시간 호 연안에 위치한 캐나다와 다른 주들도 소송을 제기했다. 역사상 단일 환경재난으로는 최대 규모의 사망자를 낸 시카고 대참사는 정부가 시민들에게 안전하고 깨끗한 식수를 공급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시발점이 되었고, 수질관리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고 기술을 개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 연방정부는 시카고에 지하수를 개발하고 하수처리기술로 물을 정화 방류하도록 하였다. 또한 뉴올리언스와 필라델피아에서도 대규모 콜레라와 장티푸스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1887년,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강에서 취수한 물을 모래로 여과하는 장치가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염소소독법이 뉴저지 주의 저지시티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1948년에는 오염물질 배출을 규제하는 연방오염규제법(Federal Pollution Control Act)이 시행되었으며, 이 법은 개정을 거쳐 오늘날 수질관리의 기본 틀인 청정수질법(Clean Water Act)이 되었다.

아시오 광산 사건

1810년, 일본 도쿄에서 북쪽으로 150킬로미터 떨어진 토치기 현 아시오 마을에서 거대한 구리 광맥이 발견되었다. 그때부터 20년 동안 그곳의 구리 생산량은 일본 생산량의 44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고 개발회사인 '아시오 광산'은 동북아시아 최대 기업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아시오 광산은 성장을 거듭하면서 주변 삼림을 밀어내고 제련 설비를 확장해갔다. 산은 점점 황폐해졌고 제련 공장에서 나오는 배출 가스는 남아 있던 초목마저 사라지게 했다. 또한 아시오 광산의 채광 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도 늘어났으며, 이것은 모두 광산 인근의 와타라제 강에 버려졌다.



와타라제 강은 농민들에게 관개용수를 공급했고 어민에게는 좋은 어장이었다. 그러나 1878년 초부터 이 강에서는 수많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고 강물에서 목욕한 사람들의 피부가 곪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농토는 황폐해지고 유행병이 나돌아 수많은 가축이 몰살당하고 주민들도 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강 하류의 주민들은 아시오 광산이 비극의 원인이라 믿고 채광 중단을 정부에 탄원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인근 토양 시료를 채취하여 농업상무성에 분석을 의뢰했다. 하지만 농업상무성에서는 이것을 분석할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는 입장만 취했다. 결국 도쿄제국대학 교수들이 조사에 착수했고, 28개 마을에 번진 참변의 원인이 아시오 광산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아시오 광산은 곧 전국적인 문제가 되었으나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논쟁은 다음 회기까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이 무렵 일본은 농민들의 고통 따위에 관심을 쏟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 돌입했고 구리 수요가 급속히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농민들 역시 전쟁 상황에서 정부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그 보상이 돌아오리라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1896년 가을, 두 차례의 대홍수가 발생하면서 오염된 퇴적물이 농지를 뒤덮었다. 주민들은 이듬해 2월, 전쟁이 끝나자 정부에 아시오 광산의 조업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미 종결된 문제라고 일축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농업상무성으로 몰려가 수 차례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피해 농지에 세금을 감면해주기로 하고 홍수방지용 댐을 건설하기로 했다. 댐이 건설되자 한동안 효과가 있는 듯도 했으나 1899년의 대홍수로 이전에는 안전했던 지역까지 침수되고 말았다. 다음해인 1900년 2월, 다시 농민들이 시위를 벌이려 하자 정부는 무장군경을 파견했다. 군경들은 농민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중 몇몇은 한 노인을 번쩍 들어 올려 강물에 던지기도 했다. 이어 몸싸움이 벌어졌고 농민들의 온몸이 진흙과 오물로 뒤덮여졌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고, 그 부상자들이 누워있는 길은 10㎞도 넘게 이어졌다. 시위주도자 60여명이 구속되었고 재판은 2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시오 광산은 법적으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1902년 3월, 와타라제 강에 다시 큰 홍수가 발생했다. 그러나 홍수로 인해 오히려 광산 위쪽의 깨끗한 토양이 쓸려 내려와 오염된 농토를 덮어 농민들이 다시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정부는 오염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발표했고, 주민들의 분노도 가라앉았다. 정부는 잠잠해진 틈을 이용해 피해 중심지인 야나카 마을을 저수지로 만들 계획을 발표했다. 결국 이곳에 거주하던 450가구는 땅을 팔고 일본의 시베리아라 불리는 홋카이도 섬으로 이주했다. 이후 아시오 광산은 1973년까지 운영되다 조업을 중단했다.





제2부 잿빛 하늘과 숨막히는 공기



도노라 사건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모논가헬라강을 끼고 아담하게 자리 잡은 도노라(Donora) 시는 금속가공과 제철 산업으로 생겨난 작은 공업도시이다. 1900년에 윌리엄 도너에 의해 제철소가 세워지면서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많은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었다. 어린아이들도 강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을 정도로 제철산업은 이 지역 주민들의 삶과 밀접했다. 보통 강철을 만들려면 철광석, 석탄, 석회석이 필요한데, 당시 이곳의 한 공장에서만 하루 평균 화물차 45대 분의 석탄, 6대 분의 석회석, 그 외 각종 원료 6대 분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곳의 주민들은 옷에 항상 시커먼 먼지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해가 보이지 않는데도 주민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다. 그들에게 석탄가루는 연료와 돈을 제공하는 황금가루였다.



1915년, 이곳에 아연공장이 세워졌다.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아연공장이었다. 주민들은 이 공장에서 하루 세 시간만 일하고도 최고의 임금을 받았다. 그들의 작업시간이 세 시간이었던 것은 누구도 그 이상의 시간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연은 우리 몸에 소량으로 있을 때는 당분과 결합하여 감기 바이러스 퇴치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황, 탄소, 불소, 질소 등의 기체와 결합하게 되면 맹독성을 띠는 물질이 된다. 일반적으로 아연과 강철 제련 공정에서는 불소와 칼슘을 함유한 광물이 많이 사용된다. 이런 광물은 매우 강한 불소 기체를 만들어내어 유리를 부식시키기도 하고 아이들의 치아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결국 도노라 시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1948년 10월 26일 아침, 도노라는 차가운 공기로 뒤덮였다. 제철소와 용광로의 화덕에서 나온 온갖 매연들이 안개와 뒤섞여 집과 거리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 것이다. 한낮에도 앞을 전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게 어둠이 깔리면서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되었고, 공기는 노란색을 띠었으며, 역겨운 냄새가 나기도 했다. 이 안개는 수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주변을 둘러싼 산에 막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과 며칠사이에 9명이 숨지고 앓아 눕거나 죽어 가는 사람이 계속 늘어났다. 비가 내려 안개가 사라진 11월 1일까지 일주일동안 주민 20여명이 사망했다. 그 후 한 달 간 50명이 더 사망했으며, 질병에 걸린 사람이 6천여 명에 달했다. 장의사 집에 남은 관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 영향은 오래 지속되어 10년이 지난 뒤에도 이곳의 사망률은 주변 지역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도노라 사건은 대기오염의 무서움을 미국 전역에 알리고 연방정부 차원에서 규제 법안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2년 오리건 주가 처음으로 대기오염을 법으로 규제했고 다른 주들도 곧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1963년에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청정대기법(Clean Air Act)을 제정했다. 이 법이 개정되면서 전국의 실외 공기에 적용되는 대기 기준치와 자동차에 적용되는 대기오염 배출기준치를 정하게 되었다. 청정대기법은 1990년에 다시 개정되어 독성이 우려되는 188개의 오염물질을 규제대상으로 지정하여 이를 환경보호청이 감독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 전역의 아황산가스 배출량은 1972년 3,200만 톤에서 1999년 1,900만 톤으로 줄었고, 이는 1915년의 배출 수준에 이르는 수치였다.



런던 스모그 사건

일반적으로 기온은 위로 갈수록 낮아지는데, 배출된 연기는 주위 공기보다 온도가 높아 가볍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게 되고 점차 희석된다. 그러나 지면온도가 상층보다 낮아지는 기온역전 현상이 발생하면 배출된 연기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지면 부근에 머물게 되어 더 큰 피해를 유발한다. 1952년 12월 4일 런던의 기온은 정오에도 -1℃를 나타냄에 따라 연료 사용이 급속히 증가했다. 당시 영국은 가정이나 산업체 모두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석탄을 태운 연기는 여과 없이 대기 중으로 배출되었으며, 무풍과 기온역전 현상으로 상층 대기와 섞이지 못하고 지면에 정체되었다. 이렇게 배출된 연기는 짙은 안개와 합쳐져 스모그를 형성했고, 특히 연기 속에 있던 아황산가스는 황산으로 변했다.



이러한 현상은 12월 10일까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매연 1,000여 톤, 이산화탄소 2,000여 톤, 이산화황 370여 톤이라는 엄청난 양의 오염물질이 매일 두꺼운 안개 속으로 배출되었다. 사건 발생 후 3주 동안 호흡기 장애와 질식 등으로 런던 시민 4,000여명이 사망했고, 그 후 만성 폐질환으로 8,000여 명이 추가 사망하여 총 12,000여 명이 생명을 잃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정부는 대체연료로 석유와 천연가스 사용을 점차 늘렸으며 발전소와 중화학공업 산업체 등을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였다. 그로 인해 대기 중 이산화황을 90퍼센트 감소시키게 되었다. 오늘날 런던은 전 세계 대도시 중에서 비교적 깨끗한 공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대기오염 하면 공장 굴뚝이나 자동차에서 나오는 매연을 우선 떠올리지만, 최근 실내 공기오염도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주택 등의 건물에서는 결함주택증후군(Sick House Syndrome)으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고 있는데, 이는 건축자재로부터 발생하는 포름알데히드나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외부로 배출하지 못해서 발생한다. 우리나라의 지하철의 경우도 석면, 라돈, 포름알데히드, 이산화질소 등이 실내 환경 기준치를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학교에서의 실내오염도 심각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학교 교실은 실외보다 미세먼지 농도가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세먼지 속에는 인체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금속이 들어있다. 여기에 30여 가지의 곰팡이 균과 이산화탄소까지 함유되어 있어 이는 질병뿐만 아니라 집중력도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실내 공기오염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환경친화적인 건축자재 사용을 의무화하고 내부 청소나 환기 시설 설치 등도 의무화해야 한다. 또한 계측기를 이용한 지속적인 관측 관리가 시행되어야 한다. 건물 관리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 환경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공기오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초부터 일반 주택을 포함한 모든 부동산 거래에 환경안정성 검증제도가 시작되었다. 수돗물 안전도, 하수관 부식, 정화조 상태나 실내오염 등 환경 안정성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계약서에 첨부하도록 하고 있다.





제3부 죽음의 독이 된 물과 음식



미나마타 사건

1952년, 일본 규슈에 있는 미나마타라는 작은 어촌에서 이상한 질병이 나타났다. 하늘을 날던 물새가 갑자기 땅에 떨어지고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들이 미친 듯이 뱅뱅 돌며 입에 거품을 내뿜는 괴이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이것을 '춤추는 고양이 병'이라 불렀다. 그런데 1년 뒤 이 병은 주민들에게도 발병했다. 주민들의 손과 발이 마비되고 통증과 오한, 두통, 시각장애, 언어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심한 경우 격렬한 고통과 마비증상이 나타났다가 죽음으로까지 이어졌으며, 태어나는 아기들은 기형이거나 사산되었다. 보건당국이나 의사들은 이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단순한 풍토병쯤으로 생각했다. 1959년 7월에 와서야 구마모토 대학의 다케우치 다다오 교수에 의해 이러한 증상이 수은중독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되었다.



조사결과 미나마타 만의 해수와 퇴적물, 그리고 물고기에 다량의 수은이 함유되어 있었고 그런 물고기를 섭취한 것이 이 증상의 직접적인 원인임이 밝혀졌다. 또한 미나마타 만이 수은에 오염된 까닭은 그곳에 인접한 질소비료공장에서 배출한 폐수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폐수에 함유된 수은은 미생물에 의해 더욱 유독한 메틸수은이라는 물질로 바뀌어 이곳에 서식하는 생물의 체내에 농축되었고, 먹이사슬을 따라 상위로 갈수록 농도가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물고기를 오랫동안 먹어온 물새, 고양이, 사람들에게서 그 독성이 크게 나타난 것이었다. 구마모토 현과 일본정부는 당시 미나마타 만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그 원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즉 공장 폐수에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하나, 원인물질이 규명되지 않는 한 배출금지는 불가능하다며 폐수 배출을 허용하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렸다.



공장은 계속 가동되었고 일부 주민들은 미나마타를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은 주민들의 계속된 투쟁으로 얼마의 위로금을 받는 조건 하에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그런데 6년이 지난 1965년, 니가타 현 아가노 강 하류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서도 미나마타병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욧카이치에서 천식사건이 발생하고, 그 다음해에는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인한 소송이 연이어 제기되었다. 이를 계기로 미나마타 사건의 원인을 15년 동안이나 인정하지 않았던 일본정부는 공장 폐수의 수은이 그 원인임을 밝혔다. 또한 법원은 공장 측에 보상금 9억 3,700만 엔을 지급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종결되지 않았다. 환자로 인정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매년 증가했으며, 이들 또한 법정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미인정 환자들의 법정 투쟁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고, 1996년 5월 19일에 종결되었다. 환자들은 총 1,984명으로 일인당 260만 엔의 보상금에 최종 합의했다. 그들이 적은 보상금에도 합의한 이유는 갈수록 피해자들이 사망하여 그 수가 줄어들고 가해자의 보상능력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미나마타병은 유전자에도 이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결혼은 물론 취업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미나마타 사건은 발생에서 종결까지 40여 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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