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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라 메르켈

게르트 랑구트 지음 | 이레
동독에서 보낸 청소년 시절



어린 시절부터 메르켈의 삶은 동독과 서독을 오가는 것이었다. 1954년 7월 17일 세상의 빛을 본 앙겔라 도르테아 카스너는 생후 몇 주 만에 부모님과 함께 동독으로 이주했다. 1926년 8월 6일에 태어난 메르켈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는 그때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막 끝낸 뒤였다. 그는 목회자가 부족했던 동독의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서독 교회의 방침에 따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주 교회에 개신교 목사로 부임하는 길을 선택했다. 호르스트 카스너는 교회가 자신을 아프리카로 파견했더라도 기꺼이 갔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한편 1954년 5월까지 '노동자와 농민들의 국가'인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이주한 사람은 족히 18만 명에 달했다. 1949년부터 장벽이 세워지던 1961년까지는 심지어 270만에 달하는 이들이 서독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동독을 등지는 가운데 호르스트 카스너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호르스트 카스너가 어떤 연유에서 동독으로 귀향을 결심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상사 격인 개신교 주교의 권유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는 본인의 말로 판단해보건대 호르스트 카스너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에 동독으로 옮겨간 것은 아니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처음의 동기가 어떠했든 간에 메르켈의 아버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계 내에서 동독의 체계에 점점 더 순응하는 쪽에 가까워졌고, 1960년대 이후부터는 그런 특징이 한층 더 뚜렷이 나타났다. 앙겔라 메르켈은 "아버지께서는 교회가 현실에 방향을 맞추어야 한다고, 그래야만 현실과 동떨어진 교회로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회고한다. 이로써 메르켈은 자신의 아버지가 동독과 내적으로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어느 정도 타협했음을 '조심스레' 인정한 셈이다.

학창 시절 메르켈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힘들다. 한편으로는 우수한 성적을 내는 재능 있는 학생이요, 공동체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공식 노선을 추종하는 교사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학생이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반 사회주의적 시를 낭송하다가 퇴학을 당할 뻔했던 아이요, 서독의 조끼와 청바지를 입고 다니던 학생이었다. 메르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학자가 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고 고백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실제로 그녀가 선택한 것은 자연과학 분야, 그 중에서도 물리학이었다. 신학을 제외하면 자연과학이 국가의 통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메르켈이 물리학을 전공할 상아탑으로 선택한 라이프치히는 부모님, 형제자매, 학창 시절의 친구들, 그리고 1957년부터 살아온 템플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메르켈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삼엄한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통제 하에서 앙겔라 메르켈은 감시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았다. 그러나 전화 통화를 하는 등의 일상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가슴 한 곳에서는 슈타지(국가안전부. 구동독의 비밀경찰)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메르켈은 목사의 딸에게 어김없이 가해지던 압력과 체제에의 순응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했고, 그 와중에 자기실현이라는 인생의 과제도 충족시켜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자기주장과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게 배려해준 가정교육과 뛰어난 학습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주장을 펼쳐도 좋을 때와 그렇지 않아야 할 때를 구분하는 타고난 감각은 메르켈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대학 시절



앙겔라 카스너는 1973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 공부를 시작한다. 작센 주의 대도시 라이프치히는 다양한 박람회가 개최되는 곳으로 국제도시로서의 명성도 지니고 있었고, 당시 동독 상황에 비추어보자면 템플린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여고생 앙겔라는 세계로 가는 관문 격인 라이프치히를 선택했던 것이다. 템플린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도 분명 대학 선정의 한 가지 기준이 되었다. 의식적으로 부모님과 거리를 두려 했었느냐는 질문에 메르켈은 "맞아요, 하지만 무엇보다 시골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베를린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베를린은 '부모님, 그리고 템플린에서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다. 메르켈은 "부모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해 늘 존경심을 품고 있기는 했지만 저는 항상 '세속적'인 직업을 갖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메르켈은 자신의 대학 시절이 "성적에 대한 부담은 있었지만 대체로 무난한, 걱정 없는 시기였다."고 고백한다. 또한 대학 시절 메르켈은 남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고 여행도 많이 다녔다. 같은 학년의 다른 학습 소속이던 첫 남편 울리히 메르켈과도 이 시기에 만났다. 함께 물리학을 전공했던 두 사람은 어울려 다니며 파티도 즐기고 술에 취하기도 했다. 토론 프로그램 등에서 메르켈은 대학 시절 바텐더 경험이 자신이 최초로 경험한 자본주의였다고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당시 그녀는 '체리위스키' 칵테일을 만들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칵테일에 들어갈 재료도 직접 조달했던 메르켈은 필요한 만큼의 체리 즙을 구하느라 하루 종일 전차를 타고 다니며 도시 곳곳을 헤맨 적도 있다고 한다.



대학 시절, 앙겔라 '카스너'는 울리히 메르켈을 만나 앙겔라 '메르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977년, 스물세 살의 나이로 앙겔라 카스너는 자신보다 한 살 위의 물리학도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했다. 그다지 이른 결혼은 아니었다. 당시 동독 젊은이들이 서독 젊은이들보다 대체로 일찍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르켈의 첫 결혼은 4년 만에 파경을 맞는다. 오늘날 앙겔라 메르켈은 '지나치게 가정적이었던' 전 남편에게도 불화의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며, 결혼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을 조심스레 분석한다. 적어도 울리히 메르켈은 아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실시하는 부부동반 여행에 참가하지 않았고, 앙겔라의 옛 직장 동료들은 울리히 메르켈에서 있어 그 점만큼은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이라 지적했다. 자식이 없던 메르켈 부부의 결혼은 1982년 법적으로도 파국을 맞는다. 무신론을 표방하던 동독에서는 이혼이 그리 죄악시되지는 않았고, 대체로 어린 나이에 결혼들을 했던 만큼 이혼이 흔했던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는 젊은 여성과학자



물리학자였던 앙겔라 메르켈은 1990년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베를린 아들러스호프에 있는 동독 학술아카데미 산하 물리 화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12년의 재직 기간 동안 메르켈은 특별한 전망 없이 그저 평범한 과학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메르켈은 친구와 동료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그녀에게서 진정한 리더십의 가능성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동년배들이 그렇듯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도 동독에 대해 형식적인 충성심을 보여주는 행동양식을 배웠다. 목사의 자녀로는 흔하지 않게 '젊은개척자단'과 '자유독일청년단'에서 활동한 것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메르켈은 스스로도 자신을 동독 체제의 저항가로 묘사한 적이 없다. 그녀는 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싶었고 아버지에게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메르켈은 때때로 동독을 떠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고 말한다. 당시 독일로 떠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일단 망명도주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는 너무 위험했다. 만약 발각될 경우에는 수년간의 감옥생활을 각오해야 한다. 아니면 합법적으로 출국 허가를 신청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직장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대가로 온갖 괴롭힘을 당하고 수년간에 걸친 대기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천 명의 동독 주민들은 교회 채널을 통해서 서독에 몸값을 지불하고 서독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서방국가로의 여행 기회를 얻는 것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기회를 얻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있다 해도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기회가 주어졌다.



학술아카데미에서는 다른 곳과는 달리 서른 살까지 자유독일청년단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나는 자유독일청년단에서 경력을 쌓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무엇보다 지도부에 속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이 실제로 자유독일청년단에서 선전과 선동을 담당하는 서기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문화 담당자'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유독일청년단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메르켈에게 자유독일청년당 동료들은 당시 좋은 친구들이었고 서로 우호적이고 결속된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메르켈이 결혼생활의 문제와 남편과의 이혼으로 힘들어할 때 자유독일청년단 회원들은 큰 의지가 되어 주었다. 1991년 한 기자의 질문에 "나는 자유독일청년단 활동이 즐거웠습니다."라고 대답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독 학술아카데미는 대학기관은 아니었지만 박사과정은 밟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학문 활동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들이 따랐는데,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메르켈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메르켈은 논문을 준비하면서 자주 절망감에 빠졌다. 컴퓨터가 원하는 숫자를 뽑아내는 데 며칠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수학적인 계산에 따른 문제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그녀의 논문은 특히 수학적인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계산이 정확한지 항상 검사가 필요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야 수학적인 가정이 옳았는지 아니면 수정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연구 과정은 몹시 힘겨웠다. 마침내 논문을 끝낸 뒤 감사의 글에는 논문 지도 교수였던 루츠 취리케에게 주제 선정과 논문 지도에 대한 감사의 인사와 함께 요아힘 자우어 박사에게도 논문원고 감수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했는데, 바로 이 사람이 훗날 메르켈의 두 번째 남편이 되었다.



동독의 붕괴와 앙겔라 메르켈의 약진



1989년 11월 13일 메르켈은 폴란드로 출장을 떠나는데 그곳에서 놀랍게도 다음으로는 독일 통일이 이루어질 차례라는 이야기가 떠도는 것을 듣게 된다. 폴란드에 있는 그녀의 동료들은 지금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독일에 있지 않고 폴란드에 와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 베를린에 방문하게 되면 독일은 이미 통일되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얘기였지만 메르켈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녀는 그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동독 학술아카데미의 동료들도 이런 폴란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혼란스러워했다. 메르켈은 "독일의 상황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 대다수의 서독 주민들도 독일의 통일은 아직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은 언제부턴가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그해 12월 중순쯤 '민주변혁'의 문을 두드렸다. 메르켈의 말에 의하면 그전에는 당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클라우스 울브리히트와 함께 참여할 만한 정당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라이프치히에서 열렸던 민주변혁의 첫 전당대회 이후 앙겔라 메르켈은 이 신생 정당에 가입했다. 메르켈은 민주변혁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체계적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만들어갔다. 초기에는 민주변혁 사무실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일반 당원에 불과했지만 민주변혁의 대변인 자리를 거쳐 대표 자리에 올라 이 정당이 존재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미 창당된 정당에는 가고 싶지 않았고, 시민운동단체인 '뉴 포럼'에서는 '기초 민주주의적 절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변혁에서는 적어도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희망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민주변혁에는 비교적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자신이 할 일도 있었다.



총선이 실시되기 며칠 전 볼프강 슈누어 민주변혁 당수가 슈타지의 비공식 직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폭탄과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슈피겔》지에서 슈누어의 전적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슈누어는 그제야 슈타지에 협력했음을 시인했다. 민주변혁의 모든 딜레마는 지역대표인 아펠트와 메르켈이 이끄는 기자회견에서 분명해졌다. 민주변혁 지도부는 슈타지에의 협력을 장기간 부인한 슈누어에 대한 당혹감을 밝혔다. 많은 참석자들은 오늘날까지도 메르켈이 기자회견에서 보인 기진맥진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려는 민주변혁의 꿈은 사라져버린 듯했다. 1990년 3월 18일 실시된 총선에서 민주변혁은 0.92퍼센트의 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이 신생정당에서는 4명의 의원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된 동독의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동독 총선이 예상을 깨고 '독일을 위한 동맹'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자 메르켈은 오히려 짧은 시간 안에 정치적 도약을 하게 된다. 민주변혁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메르켈은 정부 부대변인으로 발탁된 것이다. 마지막 동독 정권에서의 메르켈의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 선출된 동독 정부는 정권이 몇 년간 지속될 것을 예상하고 국정을 살피고 있었다. 1990년 4월 18일에 열린 첫 동독 내각 평의회에 모였을 때만 해도 1990년 10월 3일에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했다. 독일 통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가 계속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독일 정부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속해서 수천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메르켈은 동독 정부 부대변인 시절부터 통일된 독일에서의 자신의 직업적 진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메르켈의 동료 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무너져가는 동독에 대한 정신적 충격에 휩싸여 있을 때 메르켈은 이미 자신의 직업적·정치적 진로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통일과 함께 메르켈은 정부 부대변인으로서의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실업자가 될 염려는 없었다. 일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메르켈을 지원했던 귄터 크라우제 덕분이었다.



그는 메르켈의 정치 인생에서 핵심적인 인물이다. 메르켈이 기민당에서 정치적 첫발을 내딛는 데 크라우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기민당 대표이자 연방 장관이었던 크라우제는 막강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적당한 선거구를 찾고 있던 크라우제와 메르켈의 눈에 슈트랄준트뤼겐그림멘 선거구가 들어왔다. 그러나 이 선거구에는 이미 2명의 서독 출신 후보가 있었다. 결국 이 선거구에 3명의 후보가 나서서 결선 투표까지 간 끝에 메르켈이 당선되었다. 베를린 제국의회 건물에 독일 연방의회가 구성됨으로써 1990년 12월 20일, 메르켈은 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이날만 하더라도 몇 주 후에 자신이 여성·청소년부 장관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관으로서의 빠른 출세



메르켈은 1989년 12월, 민주변혁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한 지 꼭 1년 만에 통일된 독일의 장관 자리에 올랐다. 메르켈은 과연 어떻게 헬무트 콜 수상의 관심을 끌었을까? 콜 수상은 항상 내각에 지역적인 안배가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동독에서 온 젊은 여성, 게다가 개신교도인 메르켈이 콜의 인사 정책 구상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메르켈이 장관으로 취임한 여성·청소년부의 권한이 비교적 약했던 것은 콜 수상의 의도였다. 그는 젊은 동독 출신 여성 장관에게 비교적 '부드러운' 정치적 현안을 다루는 부를 할당해 줌으로써 이후에 더 비중 있는 과제를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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