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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조재곤 지음 | 푸른역사
뚱허양행에서 울린 세 발의 총성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 중국 상하이의 뚱허양행이라는 한 호텔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갑신정변의 중심인물인 김옥균이 홍종우의 총에 살해된 것이다. 김옥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암살에 성공한 홍종우는 바로 도망쳤는데 그 다음날 오후 3시 거류지 경찰에 체포되었다. 청나라의 상해령(上海令) 지현(知縣, 현의 장관)은 일본, 영국, 미국 등 각국 관리를 대동하고 홍종우를 심문했다. 홍종우는 강경한 어조로 "김옥균은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사람이고, 나는 나라를 위해 적을 죽였으니 죽음을 달게 받겠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이를 '나라의 명령을 받아 하는 일'이라고도 말했다. 이에 청나라 관리들은 조선으로 전화를 걸어 사실 여부를 문의했고, 조선에서는 '이는 합당한 일이므로 속히 그를 본국으로 송환하라'고 말했다.



홍종우는 왜 김옥균을 암살했을까? 김옥균 암살 사건은 그동안 전모가 정확히 드러나 있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개인적 원한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 이 암살 사건의 배경에는 대한제국 시기를 전후한 국내 각 세력의 역학 관계는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홍종우가 무엇 때문에 김옥균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만 했는지 꼼꼼히 규명해 보고자 한다.



1장 숙명의 라이벌, 그 엇갈린 시작



이름뿐인 남양군파의 후손, 홍종우

홍종우(洪鍾宇)는 1850년(철종 원년) 11월 17일, 경기도 안산에서 홍재원(1827~1898)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남양 홍씨 남양군파 32세손으로, 집안은 정치적으로 노론에 속했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과 그의 아들이자 개화당의 핵심 인사였던 홍영식, 을사조약 때 자결한 홍만식 등이 바로 남양군파 벌족이었다. 그러나 홍종우는 벌족 집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일 프랑스 파리에 체류할 때 남양군파의 위세를 빌려 조선의 명문 귀족 행세를 하기도 했지만 그의 직계 가문은 이미 오래 전에 기울었다. 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홍종우의 4대 할아버지로부터 그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오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몰락한 가문에서 출생한 홍종우는 어린 시절 매우 빈곤하게 생활했다. 그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의 고금도에 정착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1894년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홍종우의 성장과정은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금도 연동리에 위치한 영모사(永慕詞)는 그의 성장과정을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이다. 영모사는 홍병례(洪秉禮)와 그의 제자였던 윤세용, 배학연을 추모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만든 사당이다. 홍병례는 1811년 홍경래의 난에 연루돼 이곳으로 유배되었고, 1864년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이곳에 계속 거주하다가 사망했다. 홍병례는 생전에 서당을 만들어 청소년들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아마도 홍종우는 그의 증조부 뻘인 홍병례에게서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보면 홍종우 일가가 고금도로 이주한 이유도 홍병례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안동 김씨 집안의 청년 엘리트, 김옥균

김옥균은 1851년(철종 2년) 충남 공주군에서 안동 김씨 문중 김병태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병태는 관직은 없었고 서당 훈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6살 때 5촌 숙부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병기는 양양부사, 강릉부사 등을 지냈기 때문에 김옥균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22세 되던 1872년, 알성시에 장원급제했고, 그 후 사헌부감찰, 홍문관교리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청요직이란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내리는 벼슬로 홍문관·사헌부·사간원 등의 관직을 말한다. 이를 거쳐야만 고위 관직에 진출하기가 수월했다. 따라서 김옥균은 이때부터 청년 엘리트로서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김옥균은 선진적 개화사상가들의 지도를 받아 근대사상에 눈을 떴다.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서양 문물 수입에 적극적이었던 박규수를 매개로 한 명문가 수재들과의 교류는 김옥균의 의식 세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즈음 김옥균은 일본과의 관계를 비교 분석한 <기화근사(箕和近事)>를 저술했다. 이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명성이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졌다. 지석영은 양무 운동가들의 각종 논저와 선진적 개화 인사들의 근대적 서적을 시급히 보급해 근대화의 기초로 삼자고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여기서도 김옥균의 <기화근사>가 거론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2장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젊은 그들'의 3일 천하

개화당의 지도자였던 김옥균은 조선의 정치체제를 근대적으로 개혁시키고자 했다. 김옥균이 조선의 근대화 방안을 놓고 고민할 무렵,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에 진출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조선의 내정은 청국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명성황후와 주변 집권세력은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는 등 고식책으로 일관하여 부의 불균형이 가중되고, 민중에 대한 정권수탈도 더욱 강화되었다. 민씨 정권은 대외 개방과 근대문물 수입에 적극적이었지만, 근대화를 빌미로 조선을 압박해오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김옥균을 비롯한 문명개화론자들은 조선이 자주적인 근대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청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울러 일본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면 조선을 도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열강의 군사적 침략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열강들이 조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개항 이후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박영교, 서재필 등 근대적 인식을 지닌 청년 정치가들과 세력을 규합했다. 그러자 집권 보수파들은 개화파에게 주도권을 상실하지 않을까 불안을 느끼고 김옥균과 박영효를 중앙 정계에서 밀어냈다. 이에 김옥균 등은 보수파들의 견제를 제거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쿠데타라는 비상수단을 감행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이다.



하지만 김옥균의 거사는 불과 3일 천하의 정변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청나라 군사가 반격해 왔으며,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배신했기 때문이다. 정변 실패로 홍영식과 박영교 등이 피살되었고,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등 생존자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정변 참여자의 가족들에게는 연좌제가 적용돼 대대적인 체포와 처단이 자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박영효의 아들과 아버지가 자살하고, 서재필의 부인과 아버지도 자살했다. 김옥균의 아버지와 동생 역시 옥사했고, 김옥균의 부인 유씨는 지방 관청의 노비가 돼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이때 홍종우의 벌족인 홍순목도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어린 손자를 독살한 후 자결했다.



일본에 배신당한 김옥균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에 김옥균 등의 망명객 송환을 계속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여의치 않자 자객을 보내 망명자들을 처단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매번 실패했다. 한편 일본의 재야인사들은 김옥균을 환대했지만, 일본 정부는 외교적 부담 때문에 그를 냉랭하게 대우했다. 김옥균은 1884년 12월부터 1894년 3월 상하이로 갈 때까지 만 9년 이상 일본에 있었는데, 그 중 3년 이상을 변방에 억류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다른 망명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박영효와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 도착 4개월 만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중 박영효는 얼마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그곳에서 모두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김옥균도 이와다 슈사쿠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나중에 청국행을 결심하면서는 이름을 이와다 미와(岩田三和)로 바꾸었다. 그의 개명에서 알 수 있듯이 김옥균은 이른바 삼화주의(三和主義)에 심취해 있었다. 여기서 삼화란 한·중·일 삼국의 공존과 화맹을 통해 서양 침략에 대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 배신당한 김옥균은 당시 청의 실권자인 리홍장의 아들 리징방과 친하게 지냈다. 이는 리징방을 통해 리홍장을 만나 삼화주의와 조선중립론의 취지를 설명하고 청국정부로부터 지원을 얻으려 한 의도로 보인다. 말하자면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어 국체를 보존하자는 뜻도 담겨있었지만, 청국 정부에 자신의 입지를 반영시켜 정치적으로 재기할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3장 홍종우, 프랑스를 배우다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다

1886년 3월, 홍종우는 어머니가 사망한 직후 프랑스행 유학을 결심했다. 이전까지 홍종우가 무슨 활동을 했는지는 아쉽게도 알 수 없다. 그런데 프랑스 유학 전에 그가 '한불수호조약'을 체결하는 자리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과 통상장정이 조인되고, 1887년 5월 협정서가 교환되는 자리에 홍종우가 조선 측 전권대신 김만식의 비서 자격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홍종우는 관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수행한 역할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는 프랑스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여권도 발급받은 점으로 보아 외교 사무에 관한 일을 담당했음직도 하다.



당시 조선에서 프랑스로 가기 위해서는 요코하마나 상하이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을 타야 했다. 1888년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을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우선 일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자신이 그린 서화를 팔기도 하고 오사카 아사히신문사에서 촉탁 식자공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홍종우는 신문을 제작하면서 일본어를 배우고 세계정세와 조선이 처해 있는 국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그는 동양 대세와 종교침략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호방한데다 문사(文士)의 자질까지 갖춘 홍종우는 명사(名士)기질을 보였다. 그래서 그에게 휘호를 청하는 일본인들이 줄을 이었고, 관리와 유지 등이 빈번히 그를 방문했다. 이로 인해 그는 어느 정도 유학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1890년 홍종우는 일본에서 지낸 지 2년 여 만에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파리로 가게 되었다. 이때 홍종우의 나이는 38세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던 데는 프랑스의 자유민권사상이 일본 메이지유신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조선이 프랑스 문명을 도입해 일본처럼 근대화되기를 바랐다. 이러한 사실은 파리에서 홍종우와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레가미가 게재한 <정치적 암살자>라는 글에서도 알 수 있다. 레가미는 홍종우가 '자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 문명을 흡수하기를 열망했고, 특히 조선으로 돌아가 현재의 일본을 존재하게 만든 운동과 비슷한 운동을 펴기를 희망했다'고 전한다.



한국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1890년 12월 24일, 홍종우는 파리에 도착했다. 홍종우는 소르본느 대학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파리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의 동양학자들 사이에서는 극동어학 연구가 성행해 중국과 일본에 관한 연구서가 계속 간행되었다. 이때 레가미는 빅토르 위고와 총리 카르노우 등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한 기록 화가이자 기메박물관의 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일주 과정에서 조선을 방문한 적도 있었는데 고종의 어가 행렬을 그린 삽화를 잡지에 실기도 했다. 동양전문가인 그에게 홍종우는 관심 대상이었다. 레가미는 6척 장신이자 부리부리한 인상의 홍종우를 만난 그 자리에서 홍종우를 박물관의 연구 보조자로 채용했다. 그리하여 홍종우는 거의 2년 동안 기메박물관의 연구 보조자로 일했다.



홍종우는 기메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 책,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다. 홍종우가 번역한 <춘향전>은 프랑스인에 의해 <향기로운 봄 printemps parfum >이란 제목으로 간행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최초의 한국 소설이다. 춘향전이 번역된 후 프랑스의 몇몇 식자들은 조선 문학작품의 번역본을 더 보고싶어 했다. 홍종우는 그들의 요구에 답하기 위해 <심청전>을 번역했다. 표기된 연도가 1893년인 것으로 보아 2년 동안 작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서문은 무려 32쪽이나 되는데 주로 한국 역사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홍종우는 조선 문학을 프랑스에 알리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그는 조선이 처한 상황을 이탈리아와 비교하기도 했다. 두 나라는 모두 반도국으로 서양 열강들의 침략 대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동질성을 갖는다고 전제하고, 조선을 둘러싼 중국·일본·러시아 등 열강의 침략 정책을 알리고자 했다. 홍종우는 파리 체류 동안 늘 한복을 입고 다녔으며,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초상화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일견 복고주의적이거나 수구적 성격으로 규정될 소지가 있지만 홍종우는 서구 문물을 유입하는 데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대다수 유학생들은 국가나 세도가의 절대적 지원을 받으며 서구 사상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선진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나머지 그것을 조선의 현실과 제대로 접목시키지는 못했다. 그 결과 일본으로 간 많은 유학생들은 러일전쟁 후 민중의 변혁과 반일운동을 폄하했다. 심지어는 그것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으며, 통감부와 총독부의 핵심 인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홍종우는 이들과 생각을 달리했다. 홍종우는 서구화를 일차적 과제로 삼았지만 그것이 조선의 전통문화와 단순 대치될 순 없다고 보았다. 서양 문화를 동양적 가치에 적용해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려는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홍종우는 조선의 현실을 유럽에 소개하는 한편, 볼테르(Voltaire, 1694~1778)의 서적 등을 탐독하면서 서구의 정치·문화를 습득했다. 볼테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로 전제군주제에 염증을 느끼고 1726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영국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봉건제도의 억압과 카톨릭 교단의 모순적인 굴레를 비판했고, 순수윤리와 이성에 입각한 사회 개혁 의지를 담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 볼테르는 희곡 <중국의 고아, 1775>에서 칭기스칸의 위협을 받는 송나라를 지원하러올 한국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는 막연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얘기하고자 할 때면 한국의 상황을 거론했다고 한다.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홍종우에게 '나는 행동하기 위해 쓴다'라고 외친 볼테르의 열정이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4장 만남, 그리고 암살



프랑스 요리, 그 죽음의 유혹

1893년 홍종우는 프랑스 체류를 마감하고 그 해 7월 일본으로 갔다. 일본 고베의 한 호텔에 여장을 푼 그는 여독으로 꽤 오랫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민영소의 밀명을 받은 이일직이 홍종우에게 접근했다. 이일직은 홍종우가 일본에 도착하기 일 년 전, 무역상으로 가장해 일본에 들어왔다. 이일직은 개화파 인사를 암살하기 위해 일본에 들어왔지만 김옥균과 박영효 주위에 지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서양에서 돌아온 홍종우에 대한 얘기를 듣고 홍종우를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1893년 12월, 홍종우를 방문한 이일직은 개화파 망명객들을 죽이는 것이 고종의 뜻이라고 전하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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