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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복 교수의 고고학 이야기

이선복 지음 | 뿌리와이파리
글을 시작하며



고고학은 결코 고고하거나 낭만적이기만 한 학문은 아니다. 성호 이익이나 추사 김정희 같은 옛 학자들의 고대 유물에 대한 관심도 우리나라에 고고학을 탄생시키지는 못했다. 연구의 현장에는 비틀어진 한국 현대사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고, 도굴과 무차별적 문화유산 파괴가 일상화된 현실에서 고고학은 허덕이지 않을 수 없다.



파헤쳐진 무덤에서 나온 도깨비불

개항 이래 을사년과 경술년의 국치가 있기까지 외국인들이 문화유산을 어떻게 연구하고 약탈했는가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공식 기록에는 1902년 궁내부가 일본인 학자에게 고건축 조사를 위촉했고 그 과정에서 고고학 조사도 수행한 사실만이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유학시절 우연히 들춰본 1888년도 미국 국립박물관 휘보에서 우리나라의 고대 유적에 대한 최초의 학술적 보고문이라 할 만한 글을 찾고 매우 놀란 적이 있다. 이 글에는 이미 이때에 일본인 장사치들이 삼국시대 유물을 대량 수집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도굴이야말로 우리 근현대사의 뼈아픈 유산으로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일제 지배 하에서 도굴은 참으로 대규모로 저질러져서 평양 부근에서는 "파헤쳐진 무덤에서 나온 도깨비불이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굴은 현재까지도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더구나 문화생활을 위한 소도구로서의 문화재에 대한 일반인들의 수요가 늘다 보니, 자연히 도굴품의 공급은 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깨진 토기조각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도굴꾼들이 요즘은 깨진 것들까지 몽땅 들고 가 그럴듯하게 복원해 대학박물관에 팔고 있는 형편이다. 도굴의 규모와 폐해가 정확히 어느 만큼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1970년대 이후 1993년까지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는 모두 2,763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그 중에서 파괴되지 않고 원형대로 남아 있던 것은 전체의 10%에 불과한 정도라면 짐작이 갈 것이다. 다른 지역이라고 해서 이런 사정에서 예외는 아니다.

개혁과 역사 바로 세우기는 소위 문민정부 이래 지난 10여 년 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들어왔던 익숙한 구호이지만, 백주에 횡행하는 명백한 민족자산의 강도질을 굳이 없다고 외면하며 혹 있어 보았자 별것 아니라고 여겨온 정부가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을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일제는 이러한 악의 씨와 엉터리 보고서들을 남겨 놓고 또한 수많은 자료와 경험을 갖고서 해방과 함께 물러갔다. 그리고 분단과 전쟁의 와중에서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훈련된 인적 자원은 북한을 조국으로 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대까지 우리는 고대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학문적 기틀이 제대로 잡힐 리 없었고 사회적 혼란을 틈타 도굴과 유적 파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으며, 권력은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호도하기 위한 여론조작에 문화유산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부정적인 여건에도 우리 학문체계는 몇몇 분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조금씩 기틀이 잡혀갔고 경제성장과 더불어 발굴에 필요한 지원도 조금씩 늘어 미약하나마 꾸준한 발전이 계속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미처 해결 못한 과거로부터의 문제와 더불어 대규모 개발사업의 급속한 확산과 종래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대규모적 유산 파괴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위기에 부닥치고 있다. 개발과 문화재 보존은 개발과 환경보존만큼이나 이해가 상충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우리 사회가 옛날에도 지금도 그저 잘 되려니 하며 안이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속전철, 고속도로, 공단, 신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문화재를 감당할 인력도 조직도 없는 현실에서, 성실한 문화재 신고자는 손해를 입도록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법규이며, 제도의 미비는 무자격자에 의한 발굴이라는 명목의 문화유산 파괴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구석기시대] 단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구석기, 그 흥미진진한 한편의 대서사시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처음 등장한 때부터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 최후 빙하기가 끝날 때까지의 수백만 년에 걸친 시기다. 생물학적 개체이자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류의 기원과 진화는 그 자체가 매우 흥미진진한 한 편의 대서사시다. 어떻게 사람이 서서 걷기 시작했는가, 가족은 왜 생겼는가, 어째서 사람만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1년 내내 성행위를 할 수 있는가 등등의 주제는 그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책 한 권은 쓸 수 있는 내용들이다. 우리에게 이 서사시가 시작된 시기를 찾아보자면,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구석기 유적이 없다고 했지만, 이후 유적 발견이 늘어나면서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에 대한 생각도 점차 좀더 이른 시기로 잡혀져 나왔다. 비록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게 정확히 언제부터인가에 대해서 아직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단군께서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넘어가도록 하자.



세계적으로 최초의 인류, 즉 선 자세를 유지하며 두 발로 땅 위를 걷고 손을 사용한 최초의 영장류는 이르면 700만 년 전, 늦어도 500만 년 전에는 이미 등장했으리라 예측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비록 오래 전부터라고 해도 그것은 인류가 처음 등장한 때로부터 수백만 년이 흐른 다음의 일이라는 뜻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의 나이는 70만 년 밖에는 되지 않은 듯하니 에티오피아 화석보다 370만 년 뒤에야 한반도에 인류의 발길이 미쳤다는 말이다.



그나마 한반도에 70만 년, 아니 3∼40만 년이라도 된 확실한 유적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이 불확실한 '정설'은 학계와 언론계 일각에 퍼져 있는 '민족사적 정통성 증후군'의 한 전형적 증세에 감염된 분들 때문인 듯하다. 북한이나 중국에 70만 년 전의 유적이 있다고 우기니 우리도 질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부족한 전공인구와 미비한 연구여건, 신빙성이 의심되는 보고 등을 이유로 변명한다 하더라도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에 대해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를 통해 그 나이를 확신할 수 있는 유적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아, 추측에 의존하는 비중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구석기 유적의 발견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고 이제는 전국에 걸쳐 1천 개소 이상의 구석기 발견 지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적이 이 정도 되는 만큼, 그 중에는 그 나이를 10만 년 단위로 셈할 가능성이 있는 유적도 없지 않다. 한반도의 면적이 22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이니 앞으로 유적은 더 많이 발견될 것이고 수십만 년 전의 연대가 확실한 유적도 발견되리라 보이지만, 아무튼 이러한 지식을 얻게 된 것만 해도 일천한 연구사와 열악한 연구 환경을 생각할 때 큰 발전은 발전이라 하겠다.



'황금의 손'이 빚어낸 일본 구석기 유적 날조 사건

10여 년 전, 일본의 70만 년 전 유적으로 발표되었던 다카모리와 가미다카모리 유적이 날조된 것임이 밝혀져 소동이 일었던 적이 있다. 이 유적 날조 사건은 일본 고고학계와 일본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구석기 고고학계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이 유적 날조 사건을 일본의 역사왜곡 시비와 관련해 일본 학계의 조직적 개입 내지 묵인에 의한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유적을 날조한 후지무라는, 원래 고교를 졸업하고 전기 제품 공장에 다니는 평범한 사원이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유적 발굴을 접하며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75년 구석기 연구자들이 결성한 '석기문화담화회'라는 모임의 회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3만 년 전보다 시기가 이른 구석기시대 유적은 없다고 여겼는데, 그가 1980∼82년 사이에 3만 년 전보다 이른 시기의 유적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86년 무렵에는 일본에도 10만 년 단위로 셈할 수 있는 구석기 유적이 존재한다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석기문화담화회가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로 이름과 조직을 바꾸면서 후지무라는 부사장 직함을 맡게 된다. 눈부신 유적발견으로 '황금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계속해서 더욱 놀라는 발견을 하게 되는데, 드디어 1995년 가미다카모리 유적의 60만 년 된 퇴적층에서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음을 증명하는' 놀라운 증거를 '발굴'하여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2000년 가을 무렵에는 교과서와 고고학 지도에도 그가 발굴한 유적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러한 유적 '발견'보다 더 충격적인 유적 '날조'가 폭로됨으로써 20년에 걸친 사기 날조 행각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일본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 문화청은 전기와 중기 구석기 유적에 대한 즉각적인 재검토에 착수했으며 교과서 업체들은 이 유적과 관계된 내용을 수정할 차비에 들어갔다. 수사에서 그는 평소 각지에서 많은 양의 석기를 채집해 집에 갖고 있었으며, 더욱 오래된 유적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그런 석기들을 이른 시기의 지층 속에 박아놓고 새로운 유적을 발견한 것처럼 보고했다고 자백했다. 그렇게 '발견한' 유적이 각계의 높은 관심 속에 발굴이 실시되면 다시 사람들 몰래 퇴적층 속에 유물을 심어놓고 자신이 발견하는 식으로 새로운 유적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그의 강박관념으로 인한 단독범행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사람들은 고고학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이 20년 동안 너무나도 체계적으로 일본 구석기의 연대를 끌어올리며 점점 더 놀라운 내용의 발견을 날조해온 점에 비춰 그에게 날조의 방향을 암묵적으로 지시하거나 지원한 공범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후 일본 고고학계는 구석기 문제에 매우 신중히 접근하고 있으며 3만 년보다 앞선 시기의 유적이라고 주장되는 유적의 조사에는 학회 차원에서 조직된 특별위원회가 참가해 모든 절차를 검증하고 있다.



[구석기와 신석기의 사이] 한민족의 기원



잃어버린 시간의 고리를 찾아서


우리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의 과정을 시간표로 그려보자면 아직 채워야 할 빈칸이 너무 많다. 발굴된 유적들의 나이를 짐작하기에 필요한 자료가 축적되지 않은 데다 발견된 석기들이 모두 비슷한 모습이고 동일한 퇴적층인 경우가 많아 이들을 한 묶음으로 엮을 수 있다고 할 때, 이들보다 뒤 시기로서 그 나이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유적들 사이에는 긴 시간대로 빈 채로 남아 있다. 그나마 어느 정도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들은 대략 2만에서 1만 년 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구석기시대에 이어 시간적으로 연속해서 다음 시기의 유적이 아직도 발견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 다음의 유적으로서 가장 오래된 유적들은 토기를 동반하는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인데, 이들은 구석기시대의 종말 시점인 1만 년 전의 시점에서 다시 몇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의 자료들이다. 중석기시대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한 유적들이 중석기시대의 유적임을 말해주는 절대연대나 유물 혹은 지층에 대한 객관적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즉 우리는 구석기 시대가 끝난 다음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셈이다. 이러한 시간표상의 단절이 왜 생겼는가 하는 것에 학계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문화'라고 부르는 오늘날 우리의 삶의 양식의 원형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며, 한국인은 어떻게 해서 등장한 것인가에 대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원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학계의 정설에 따르자면, 구석기시대가 끝난 뒤 수천 년 동안의 고고학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구석기시대의 주민들이 빙하시대가 끝나며 환경이 변하자 어디론가 떠났고 따라서 이후 수천 년 동안 한반도는 텅 빈 땅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학설은, 한국과 시베리아 신석기시대의 문화 내용이 가진 유사성으로 볼 때 양 지역의 주민이 동일 집단임을 뜻하고, 시베리아 주민이 고아시아족이었을 것이므로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주민 역시 고아시아족이었을 것이며 그들이 기원전 1,000년 무렵 퉁구스족의 이동과 더불어 시베리아 북쪽 오지로 밀려날 때 한반도에 퉁구스족이 밀려들어와 선주민인 고아시아족과 동화하거나 그들을 대체했으리라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은 청동기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이주한 퉁구스족의 한 갈래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외견상 그럴듯하지만 사실 많은 약점을 안고 있는데, 먼저 한국과 시베리아 신석기시대의 문화는 일률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수 없으며 설령 유사하더라도 이것이 주민의 동질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당시 시베리아 주민이 고아시아족이라는 근거가 빈약하고, 퉁구스족의 이동으로 고아시아족이 오지로 밀려났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 역시 부족하여 오늘날에는 그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선 이 낡고 빈약한 주장을 대신할 새로운 설명을 갖고 있지 못하다.



민족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민족의 실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완결되지 않는 한 끝없이 겉돌 수밖에 없는 주제일 뿐이다. 민족의 정의, 민족의 실체를 확인시키는 것, 상이한 표식적 자료의 분포에 대한 해석 방법 등을 무엇으로 놓느냐에 따라 민족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동일한 자료를 놓고도 정반대의 입장에 설 수 있는 문제다. 때문에 민족 기원의 연구라는 주제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에 입각해 뚜렷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진지한 고고학적 연구과제라기보다는, 한 사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 들어가는가 하는 사회적 기대치 내지는 그 사회의 여러 학문의 성원들이 왜 이 문제에 집착해야 하는 가의 패러다임 차원의 문제와 관계된 지식사회학적 논의의 대상으로서의 의의가 더 크지 않을까.



분단과 통일의 고고학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북한의 고고학 연구수준을 비교한다면 압도적으로 북한 측이 우위에 있었다. 남한에서 청동기시대가 설정된 것도 50년대와 60년대 북한 측에서 이루어진 성과물이 입수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100퍼센트 남한 학계의 독자적 성취라고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북한 고고학이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앞서나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해방 후 많은 인력이 북쪽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북과 더불어 여러 분야의 지식인들이 대거 북행한 덕분에, 북한에서는 정식으로 정권이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임시인민위원회 명의로 문화유산 보호에 필요한 입법조치가 취해졌을 뿐만 아니라 각지에 연구기관이 설립되어 아주 일찍부터 역사시대뿐 아니라 선사시대에 대한 조사가 계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전쟁 이후의 복구사업에서 발견된 여러 유적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질 수 있었으니, 70년대 무렵까지 도무지 학문의 기틀이 서지 못한 남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북한 학계가 앞서나갔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당시 북한 학계의 활발한 활동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도유호 씨인데, 그가 1960년대 말 숙청된 이래, 오늘날 북한에서 그의 이름은 완전히 잊혀졌고 50년대와 60년대에 그가 이룬 업적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신석기시대 말기 농경 흔적의 발견,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구분, 최초의 구석기 유적 발견 등의 업적과 더불어, 최초의 한국 고고학 개론서인 그의 저작 『조선원시고고학』은 남북을 떠나 한국 고고학사상의 기념비적 업적이다. 북한 고고학은 그가 왕성히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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