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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김태준ㆍ이승수ㆍ김일환 지음 | 푸른역사
세계와의 조우를 꿈꾼 조선 지식인



연행이 조선 지식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


다양한 해양 루트를 통해 세계의 문명과 교류했던 삼국시대와는 달리 조선은 중국을 통해서만 새로운 문명을 접하다시피 했다. 이것이 결국에는 시야를 제한하고 안목을 편협하게 하였으며 근대화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당시 조선인에게 연행로는 문명의 실크로드나 다름 없었다. 북경은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연행로는 공식적으로 그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당연히 기지旣知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은 이 길을 통해 타 문화와의 조우를 꿈꾸었다.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연행은, 타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적극적인 모색의 계기가 되었다. 지식인들은 연행을 통하여 조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파악하려 하였다.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자신의 학문과 세계인식에 확신이 있었고,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그러한 믿음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 당시 북학北學을 논의한 대표적인 저자로는 아무래도 <열하일기>의 박지원과 <북학의>의 박제가를 꼽아야 할 것이다. 두 책은, 1780년대 초반 진보적 지식인의 정신 지형도를 잘 보여준다. 이들에게 있어 연행은 여행의 흥미나 이국 풍물에 대한 관심 차원을 떠나, 체험과 견문을 통해 학문적인 가설을 확인하는 한편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전망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이제 우리는 당대 <북학의> 수준의 연행록 수백 수천 권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연행을 계속하고 과거의 연행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이만수의 연행 풍정 아홉 수

연행 사신들의 애환을 풍부하면서도 간명하게 잘 그려낸 이는 이만수(1752~1820)이다. 그는 1803년 7월 사은사謝恩使(청나라의 은혜에 대한 답례로 가는 사절)의 일원으로 북경에 다녀왔는데 그 때는 영ㆍ정조의 안정기가 저물어가고 있었으며, 청은 건륭제의 치세가 끝나 국세가 기울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그는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연행의 풍정을 아홉 가지로 간추려 시로 표현했다. 조선 후기 연행사들이 무엇을 보고 감탄했으며 어떤 일에 괴로워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첫째는 '한가로움'이다. 18세기 이후에는 연행사들의 행동이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아 북경에 머무는 동안 명승고적을 유람할 수 있었다. 둘째는 '바쁨'이다. 이들은 외교 사절이었기 때문에 정해진 기한에 맞추어 목적지에 닿아야 했다. 이를테면 동지사冬至使(신년 하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동지 전후에 떠나는 사신들)는 정월 초하루에 있을 신년하례식에 늦지 않게 가야 했다. 연행사들의 일정은 동트기 무섭게 출발해서 사이사이 밥을 지어 먹고 해가 떨어지면 정해진 참에 투숙하는 고달픈 나날이었다.

셋째는 '우스운 일'이다. 명대 후반부터 청대를 일관하여 조선 사신들은 중국인들의 상례 모습을 눈여겨보고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이에 따르면 그들은 상을 당했을 때 조문객이 오면 풍악을 울려 망자의 혼령을 기쁘게 하는 동시에 조문객의 슬픔을 위로한다고 하였다. 상장례를 목숨만큼 중시했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그러한 풍경이 곱게 비추어졌을 리 없다.



넷째는 '탄식'이다. 모두 북경에서 포착한 장면인데, 중화사상이 흔들리는 듯한 모습에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있어, 소小중화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조선 지식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청은 모든 국가 건물이나 공문서에 한자와 만어滿語를 병기하였는데, 중화사상의 핵심인 공묘에 붙은 만어 편액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다. 조선 사신들은 명대의 복제를 따른 자신들의 의관을 문화적 정통성의 근거로 생각하였던 만큼, 한족漢族의 원래 의관을 잡극의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현실을 탄식한 것이다. 당시에는 청조가 성립된 지 150년이나 지나 이미 민족에 대한 관념이 무뎌진 터였다. 하지만 그 문제에 조선 지식인들은 여전히 민감했다. 오늘날 청조를 자국사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중국을 보면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예민함은 일견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그러한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섯째는 '통쾌함'으로, 풍광의 장대함을 노래했다. 징해루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 노룡두老龍頭에 발해를 조망할 수 있게 지은 누각으로 역대의 제왕 문사가 숱한 시문을 남긴 곳이다. 노구교는 일명 마르코폴로교라고도 하며 북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힌다. 홍화점은 신해관을 지나 사신들이 묵는 숙소가 있던 마을이다. 명대 이후 중국은 동북쪽에서 많은 위협을 느꼈고, 이에 이쪽을 지키는 관문을 천하제일관이라 이름했는데, 사신들이 오가며 지나야 했던 곳이다.



여섯째는 '부끄러움'이다. 청은 입국 초부터 경제난에 시달렸으며, 조선이나 명과의 관계에 있어 재물에 대한 심한 집착을 보였다. 이 시는 재물을 밝히는 청나라 관리들 때문에, 천하의 보화가 그들의 본거지인 북경이나 심양으로 모여드는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일곱째는 '부러움'이다. 아무리 정신적인 우월감을 고집하고 싶어도, 경제적인 풍요와 선진제도 앞에서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수레제도와 유통 상업의 관계, 벽돌의 이용과 성곽제도, 그리고 목축의 발달과 넉넉한 식량사정에 대해서는 북학파 학자들이 구구절절 논의했던 바다. 여덟째는 '괴로움'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물이 안 좋기로 유명하여 이 때문에 차茶 문화가 발달했는데, 조선 사신들은 수질이 나빠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마지막은 '기쁨'이다. 연행사들은 심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각 참站에서 편지를 써서 인편으로 가족에게 보냈고 돌아올 때는 반대로 고향에서 온 편지를 받아보았는데, 이만수는 귀로에 연산관連山關을 지나면서 가족이 모두 잘 있다는 편지를 받았던 모양이다. 그곳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면 바로 고국이다. 사행의 임무를 완수하고 장정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에, 황량한 중국 땅을 여러 달 동안 헤매다가 문득 눈에 익은 고국산천을 대면한 연행사들은 절로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도강, 경계 넘어서기



아, 압록강!


압록강의 말없는 소리를 듣고 표정 없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그 물이 시작하는 백두산 높이의 안목과, 800킬로미터를 흘러 바다로 향하는 뜻과, 수만 년 세월에 대한 식견을 갖추어야 될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압록강을 황하黃河ㆍ장강長江과 더불어 천하의 3대 강이라 일컬어왔다. 압록강은 중국의 문헌에서 쓰던 명칭이다. 강물 빛이 오리의 머리 색깔 같이 푸른 까닭에 '압록鴨綠'이라고 하였다. 압록강의 다른 이름을 요수遼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광개토대왕비에서는 아리수阿利水라 하였고, <대동여지도>나 <신 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여러 물줄기가 합쳐져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여 대총강大總江으로 부른다고도 했다. 이밖에도 엄수淹水, 엄리수淹梨水, 욱리하郁里河 등의 명칭이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야루, 아리 등의 발음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 초에 우리 역사를 과거 과목으로 채택하자고 했던 양성지(1415~1482)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후 자연스럽게 이 땅에는 중국 중심의 역사관ㆍ세계관이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한강처럼 압록강은 국토의 심장부를 흐르는 강이었다. 하지만 고려 태조가 북방 고토를 회복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이후, 압록강은 요遼ㆍ금金ㆍ원元ㆍ명明ㆍ청淸으로 이어지는 중원의 대국과 국경선을 이루는 땅 끝 물줄기였다.



의주에서의 이모저모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지나온 길을 잠깐 돌아보자. 연행사들을 위한 이별연은 보통 홍제원에 마련되었다. 대궐을 향해 절을 올려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가족 친지들과 이별을 정을 나누었다. 한양을 출발하여 임진강을 건너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에 닿기까지는 보통 보름에서 20일 정도 걸렸다. 의주에 도착해서도 보통 열흘 정도를 머물렀다. 수행원들이 다 이르러야 했고, 각처에서 모인 봉물을 확인하고 포장했다. 중국 황실에 보내는 문서를 검토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객사 동쪽에 있었다고 하는 취승당聚勝堂은 사람들을 감회에 젖게 했던 곳이다. 1592년 창졸간에 도성을 포기한 선조가 머물며 강을 건너야 할지를 고민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선조 이전에도 이후에도 국경 의주를 찾는 국왕은 없었다. 관료들도 부임하기를 꺼리는 곳이라 주로 무변이나 권력 밖에 있는 사람들이 부임하였다. 권력의 보호막 속에서 안온을 추구할 때 그 안온이 결국은 암덩이가 된다는 사실을, 조선의 지배층은 몰랐던 까닭이다. 반면 이웃나라 청은 어떠했던가? 17,8세기 강희제康熙帝와 건륭제는 주기적으로 천하를 순행하며 변방의 실태를 살피고 민심을 다졌다. 장성을 새로 쌓거나 보수하지 않고도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만들어놓은 힘이 거기에 있었다. 또 근래 중국이 변강사邊疆史 정리에 전념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장성의 축조는 끝나지 않았다 - 호산



호산에서 역사를 생각하다


오늘날 압록강을 찾는 이들은 보통 심양공항에 내려, 심단瀋丹(심양~단동)고속도로를 타고 단동으로 간다. 단동은 중국에서 가장 큰 국경도시로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으며, 평양과 북경을 잇는 국제 열차가 지나는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다. 그런데 압록강 철교 옆에는 한국전쟁 때 끊긴 단교가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이 북한에 병력과 군수물자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미군이 다리를 폭파했던 것이다.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을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일컫는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압록강 단교는 항미원조 전쟁의 흔적이고 북한과의 우정의 표상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분단의 또 다른 흔적일 뿐이다.



이곳은 연행사들이 건넜던 곳이 아니다. 연행사들이 강을 건너는 광경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압록강 상류 북쪽으로 약 20킬로미터 정도 가서 이른바 호산장성虎山長城에 올라야 한다. 그런데 뚱딴지 같이 압록강가에 웬 장성인가? 만리장성의 동쪽은 산해관에서 끝나는 사실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고구려 산성터였음은 최근 중국의 연구 성과에서 오히려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더니 요즘에는 고구려 자체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먼 연행길을 따라가려면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이 문제는 잠시 짚고 넘어가자.



독도 문제에 독도로 받고, 고구려 문제에 고구려로 대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역사 전쟁은 역사를 통해 풀 수밖에 없다. 중국 중심의 화이론華夷論에 젖어 도외시했던 발해ㆍ원ㆍ요ㆍ금ㆍ청의 역사에 주목하고, 그들의 본거지였던 요동 지역에 대한 문화 지리를 연구함으로써 학술 자료를 축적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역사적인 시야를 고조선ㆍ고구려에 닫아두지 말고 요동사遼東史연구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장 - 우모령



심하전투에서 무참히 깨진 조선군


작게는 연행에 있어, 크게는 조선 지식인의 세계인식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은 병자호란과 청조의 등장이다. 외교적으로는 사대를 표방했고, 문화적으로도 적극적으로 명의 문물을 배우려 했던 조선 전기의 지식인들에게 명이 지배하는 세계의 질서는 이론에 부합되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중국의 화이관에 따라 오랑캐라고 폄하시했던 만주족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또 그들이 중원을 통치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조선 지식인들은 현실과 당위 또는 윤리와 현실의 괴리에 적잖이 당황했다. 시대라는 정치질서와 화이관이라는 문화의식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명청 교체라는 역사적인 대전환의 빌미를 제공한 임진왜란은 만주족 흥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명 조정에서는 대대적인 후금後金 정벌을 계획하였다. 광해군은 군비를 갖추어 국방력을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정책을 펼치며 출병을 거부하려 했지만, 내외의 압력을 못 이겨 결국 1619년 2월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3,000명의 군사를 파견하였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명청 교체의 분수령이 된 유명한 사르후 전투이다. 조선에서는 이 전투를 '심하전역深河戰役'이라고 불렀다. 조선군은 우모령牛毛嶺 아래 들판에 진을 쳤다. 누르하치는 명의 압력으로 출병한 조선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하며, 조선과 후금의 동질성을 강조하여 동맹하려는 뜻을 보였다. 대명의리론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은 크게 반발하며 명과의 동조 쪽으로 대응의 방향을 잡아 갔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는 강홍립의 투항 및 김응하 장군의 전사 소식이 보고되었다. 이후 김응하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절의 장군으로, 강홍립은 도의를 져버린 비열한 장수로 굳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더욱 강화된다. 이후에도 이 땅에서 전쟁은 되풀이되었지만, 한두 사람의 희생적 영웅을 만들어 겨우겨우 권력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행태는 계속된다.



연행의 성격은 1644년 명청 교체를 기점으로 성격이 반전되었는데, 명청 교체의 분수령은 사르후 전투이고, 이 전투의 일환인 심하 전역에서 수많은 조선의 장졸들이 희생되었다. 심하 전역은 1627년의 정묘호란,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답사를 마치고도 심하라는 지명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 지도상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우모오牛毛塢 아래로 지나가는 북고하北股河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모오 마을 동쪽 산줄기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전쟁을 겪었지만, 언제나 지배층은 전쟁의 실상은 묻어두고 몇몇 영웅을 만들어 위기를 벗어나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의 생명이란 쓰라린 상처와 실패에서 나오는 법이다. 용기 있는 자만이 자기 상처를 바라볼 줄 알고, 지혜로운 사람만이 수모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여기 우모령이 소중한 이유이다.



기맥이 상통하는 땅 - 압록강에서 책문까지



연행사들의 첫 숙영지, 구련성


구련성九連城은 단동시에서 동북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압록강가에 자리 잡고 있다. 아홉 개의 성이 잇달아 있어 '구련九連'이라 했다는데, 성 같은 문화유적마저 문화혁명을 거치며 대부분 파괴되었으니 특별히 연행사들을 기념하는 유적이야 더더욱 있을 까닭이 없다. 명나라 때에는 이곳에 진강부鎭江府를 설치하여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켰지만,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로는 봉금정책을 실시하여 조선과의 국경 지역에 건물을 짓거나 농사를 하지 못하도록 했으니 인가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과 청 사이에 완충 역할을 하는 공한空閑지역은 상징적인 국경인 책문柵門에까지 이르렀다. 의주의 군졸들은 책문까지 연행사 일행을 호위하였는데, 때마다 차이가 있었겠지만 연행사 일행이 보통 300명을 넘었고 말의 수도 그에 달했다. 밤에 600명에서 많으면 1,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막사를 치고 모닥불을 피웠으니 큰 마을이 들어섰던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책문에 이르기까지 무인지경을 가로질러 가면서 많은 사람들은 산천의 기맥이 조선과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1708년 강희제 때 제작된 지도들에는 한결같이 봉황성 동쪽 압록강 유역이 모두 조선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버드나무 꺾어 세워도 넘보는 이 없다 - 책문



국경을 넘기 위한 첫 관문


총수참에서 산 아래로 난 길을 따라 10킬로미터 남짓 가면 조선과 청의 실질적인 국계國界였던 책문이 나온다. 책문은 조선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인데, 성곽의 외곽 방어 시설인 목책木柵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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