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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

최정동 지음 | 푸른역사
길을 떠나기 전에 - '2002 연행단' 소개



박태근 선생 : 69세. 명지대 LG 연암문고 연구위원. 우리 역사에 해박하고 특히 한ㆍ러 문명교류사에 밝다. 기억력이 뛰어나 매번 정확한 연대와 수치를 인용해 일행을 놀라게 했다.

김태준 교수 : 63세.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 조선 후기 한문학 연구자이며 담헌 홍대용의 중국 여행기인 한글판 『을병연행록』을 현대어로 번역했다. 중국 여행 경험이 많아 일행의 알찬 답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안병욱 교수: 54세. 가톨릭대 사학과 교수. 조선 후기사 연구자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조사연구위원을 맡는 등 참여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유홍준 교수: 53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문화유산답사기로 대중에게 유명해졌다. 단장을 맡아 일행이 탄 버스가 '움직이는 강의실'이 되도록 답사를 알차게 운영했으며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수천 리 길을 여행하였다.

이광호 교수: 53세. 연세대 철학과 교수. 동양철학 연구자다. 한문 해석의 대가로 답사 도중 어려운 비문이나 현판 해설을 맡았던 항상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노장풍의 철학자다.

박지선 선생: 53세. 노가제 김창업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의무려산에 오르며 "아마도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이 산을 오르는 것"이라며 감격해 했다.

임옥상 화백: 52세.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 적도 있으나 현재는 전업 작가로 활동한다. 예술가답게 섬세한 면도 있지만 타고난 활달함으로 여행 내내 일행을 즐겁게 했다.

김혈조 교수: 48세. 영남대 한문학과 교수. 조선 후기 한문학, 특히 연암 박지원에 정통하다. <박지원의 산문문학>이라는 방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낮 연행'도 중요하지만 '밤 연행'도 중요하다며 매일 밤 일행을 중국의 밤거리로 안내하며 중국의 현재 모습을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최정동 기자: 41세. <중앙일보>의 사진기자이자 이 책의 필자. 현대판 화원畵員의 임무를 맡아 사진으로 답사 과정을 기록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명기 교수: 40세. 명지대 사학과 교수. 조선 중ㆍ후기, 한ㆍ중 관계사를 연구했다. 우리 사학계에서 거의 대접하지 않는 광해군을 재조명해 주목을 받았다. 병자호란 전후사에 밝아 이번 여행에서는 우리 민족이 치용을 당한 심양 지역 집필을 맡았다.

배영대 기자 : 38세.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학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어 답사 여행을 총괄적으로 진행했다. 인문ㆍ역사 분야에 관한 그의 기사는 깊고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김효민 씨 : 33세. 김태준 교수의 아들로 북경대학에서 명ㆍ청 시대의 소설을 연구하며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중이다. 유홍준 교수는 과거의 예를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1장 국경에 서다



압록강에서 『열하일기』의 첫 페이지를 쓰다 - 평생의 장한 여행, 연행의 첫걸음

222년 전인 1780년 여름, 연암 일행은 장마로 강물이 불어난 탓에 열흘째 의주에 머물고 있다. 비가 내리다 쾌청해진 지도 나흘이나 지났는데 백두산 부근에 장마가 졌는지 강물은 오히려 불어나고 있다. 6월 24일 정사 박명원은 드디어 강을 건너기로 결심하고, 한양으로 보내는 장계에 날짜를 써 넣었다. 건륭제의 칠순 행사일인 8월 13일 이전에는 북경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의 연암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연암도 이날 아침 간편한 군복으로 말을 타고 숙소를 떠난다. 말은 '자줏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쫑긋한 품이 참으로 만리를 달릴 듯싶은 명마'다. 마부 창대昌大가 견마를 잡고, 하인 장복長福이 짐을 지고 뒤를 따른다. 안장에는 주머니를 달았는데,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하나,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표 하나를 넣었다. 이것이 연암의 개인 소지품 전부다.



연암은 문루 위에서 의주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출발 의식을 치른다. 술 한 잔을 문루 첫 기둥에 뿌려서 장복과 창대를 위해 빌고 남은 술을 땅에 뿌려 말을 위해 빌었다. 사실 중국 여행은 연암이 고대해 마지않았던 '평생의 장한 여행'이지만, 막상 떠나려 하니 찌는 듯한 무더위에 엄두가 나지 않아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술을 뿌리는 의식을 행하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다. 구룡정 나루에 이르러 배에 타자 사공이 삿대를 젓기 시작한다. 연암의 눈에는 절벽 위 통군정의 기둥과 난간이 빙빙 도는 것처럼 보이고, 모래밭에 서서 전송하는 사람들이 금세 팥알같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연암은 통군정 아래 나루를 떠나는 모습을 묘사하며 『열하일기』의 첫 페이지를 쓰고 있다.



슬픈 압록강 - 호산장성과 통군정

단동으로 돌아오는 길에 호산장성虎山長城에 올랐다. 호산은 멀리서 본 모습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정상에서 보는 경관이 대단하다. 발아래는 압록강이고 강 건너로는 의주 시가지가 조그맣게 보인다. 오른편에는 멀리 신의주와 단동이 보이고 그 사이로 위화도가 널따랗게 떠 있다. 전망이 이렇게 좋은 걸 보니 이 산 자체가 역시 천혜의 요새이긴 하다. 강 건너편을 보니 의주 시가지를 가리고 있는 가파른 절벽이 병풍처럼 강을 따라 서 있는데, 절벽의 능선 중간쯤에 제법 웅장한 규모의 팔각지붕 정자가 시야에 빨려 들어온다. 통군정이다. 연암은 그 통군정 아래 구룡정 나루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흔들리는 배에서 고국 땅을 돌아본 연암의 눈에는 빙글빙글 도는 통군정의 모습이 각인됐다. 연암뿐 아니라 모든 사신들이 먼 길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마음에 새긴 고국의 풍경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통군정은 조선 사신들에게 경치를 즐기는 곳만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쫓긴 선조가 여차하면 명나라로 망명할 생각을 하고 의주까지 왔다가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초라한 행색의 조선왕은 이 정자에 올라 강바람을 맞으며 시를 읊었다. '산에 걸린 달을 보니 절로 통곡이 나고, 심심한 가슴 압록강 바람이 쓰리게 하네' 조선 사신들은 중국으로 가는 길에 이 통군정에 올라 풍광을 감상한 것이 아니라 선조의 시를 읊으며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후손인 나는 통곡이 나기는커녕 울화가 치밀었다. 서울을 버리고 왜군에 쫓겨 온 판국에 무슨 음풍농월吟風弄月이란 말인가.

연암, 중국에 들다 - 책문 풍경

일행은 버스를 타고 조선 사신이 최초로 중국 땅으로 들어갔던 입구였던 책문에 도착했다. 책문이란 청나라의 가장 바깥 경계로 버드나무를 사람 어깨 높이로 박아 가로 막대를 질러 엮은 경계선인 책성에 난 문을 말한다. 연암이 이곳을 지날 당시에 책성은 발해 만으로부터 대륙으로 2천 리를 뻗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버드나무로 만든 책성이 사라지고 책문이 있었던 자리는 열차 건널목이 되어 있었다. 연암은 압록강 나루를 떠난 지 사흘 만에 이 책문 앞에 도착하였는데,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민가들이 모두 등마루가 훤칠하고 문호가 가지런하며 사람이 탄 수레와 화물을 실은 차들이 길에 가득하며 길가에 진열되어 있는 그릇들도 전혀 시골티가 나지 않는 풍경을 보고 기가 팍 죽는다. 중국의 가장 변두리인 책문 마을이 이렇게 반듯하니 앞으로 볼 것들이 얼마나 대단하겠느냐는 생각에 그만 발길을 돌려 한양으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연암은 즉시 견문이 좁은 자신을 반성하며 밝고 열린 눈으로 청나라를 보고자 마음먹는다. 시선을 동쪽으로 돌려 고국 쪽을 한 번 돌아본 연암은 책문을 들어선다. 드디어 중국 땅에 들어선 것이다. 책문 마을에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접한 실학자 연암은 모든 것이 뒤떨어진 조선 민중들의 구차하고 고단한 생활을 뇌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부터 연암은 마치 돋보기로 살피듯이 사물들을 관찰하며 말안장에 싣고 다니는 공책에 중국의 앞선 문물을 자세히 기록했고, 이 원고는 『열하일기』의 초고가 되었다.



벽돌 예찬 - 통원보 스케치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마고령이라는 고갯길을 북상하던 연암 일행은 29일 통원보에 도착한다. 때는 장마철이라 비가 계속되고 7월 1일 아침에 큰비가 쏟아지자 정사 박명원은 마침내 머물 것을 명령한다. 신분과 연배가 비슷한 사내들이 방에 모여 앉아 투전판을 벌였으나 솜씨가 시원찮은 연암은 끼지 못하고 구경하며 술이나 마시게 되었다. 연암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셈이니, 슬며시 분하긴 했으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벽에 기대어 앉아 자작 술을 홀짝거리는데 벽을 통해 여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따분한 판국에 솔깃해진 연암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가냘픈 목청과 아리따운 하소연이어서 마치 제비와 꾀꼬리가 우짖는 소리인 듯" 목소리의 주인공이 반드시 절세의 가인이라고 확신을 하고는 슬며시 자리를 뜬다.



담뱃불을 핑계 삼아 목소리가 들려오는 부엌으로 들어갔으나, 연암의 시선에 박혀 온 이 여인은 나이는 쉰도 넘어 보이고 사납고 추하게 생긴 만주 여자였다. 실망 천만인데 그 여자가 예의 그 아리따운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연암은 아궁이 재를 헤치는 체하며 그 목소리만 예쁜 여인을 빠른 눈길로 관찰하였다. 그때 주렴 안쪽에서 역시 억세고 사납게 생긴 딸이 들어섰는데, 외간 남자가 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쇠양푼에 수수밥 한 사발을 수북하게 퍼 담아 젓가락으로 밥을 먹으며 두어 자 길이나 되는 파뿌리를 장에 찍어서 씹어 먹는 모습을 연암은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안주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그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나, 다 큰 처녀가 처음 보는 남정네 앞에서 밥을 퍼먹는 것은 조선 양반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연암은 여자들이 해마다 조선 사신을 봐서 낯이 익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이 오래 전부터 여성 상위 사회였음을 모르고 있다. 중국은 예로부터 여자가 귀해 남자가 온갖 험한 일, 천한 일을 하며 여자를 귀하게 대했고 따라서 중국 여자는 남자 앞에서 낯가리는 일도 없는 걸 몰랐던 것이다.



2장 오동벌 1,200리



큰 울음 터로다 - 사람은 슬플 때만 우는가?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몇 편의 중국여행기를 읽고 가장 기대했던 곳이 바로 요동벌이었다. '요동벌은 아득히 넓고 기름진 대평원이며, 요양에서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 길이 들과 하늘이 맞붙은 땅'이라고 했으니 기대가 큰 것은 당연했다.



산모퉁이를 벗어나 광막한 요동벌을 만난 연암도 "인생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라고 했다. 넓디넓은 요동벌의 장관이 연암으로 하여금 부평초浮萍草 같은 인생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그리고는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 하고 감탄한다. 별안간 울고 싶다니 웬 말이냐는 정진사의 물음에 연암은 '울음의 본질'에 대한 도도한 변설을 토해낸다. '사람이 칠정七情 중에서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요,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된다'라는 것이다. 희로애락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지극한 상태에 이르면 웃고 우는 것의 구분조차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연암은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캄캄하고 막히고 결려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나와 손을 펴고 발을 펴매 그 마음이 시원할지니, 어찌 한마디 참된 소리를 내어 제멋대로 외치지 않으리오'하며, 답답하고 부조리하고 낙후된 조선사회에 갇혀 있었던 자신을 '태중의 아기'로 비유하였다. 그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터져 나오듯이, 오늘 이 넓은 요동에 와 보니 몸과 마음이 지극한 해방감을 느끼며 눈물이 쏟아진다는 말이다.



연암은 밤에 중국을 보았다 - 밤 연행

나를 포함한 일행 중 몇몇은 여행 중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거리를 쏘다니며 '밤 연행'을 했다. 우리는 낯선 중국의 밤거리를 다니며 중국인들의 50년 후를 예측하거나 좌판에 앉아 노린내 나는 양고기 꼬치구이를 먹으며 한국의 정치 상황을 논했다. 개방 이후 번성하는 향락 산업을 보고 혀를 차기도 했으며, 마을 광장에서 빠른 음악에 맞춰 원을 그리며 춤추는 북방 소수민족들의 놀이판에 끼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모두 밤에 이루어졌고 우리는 결과적으로 풍성한 기억을 간직하게 됐다. 연암 전문가 김혈조 교수는 "연암은 밤에 중국을 보았다"라며 우리들에게 밤 연행의 중요성을 이야기 했고, 연암의 발길을 쫓는 우리들은 당연히 밤에 중국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연암 일행은 심양에서 이틀을 머물고 북경으로 떠나는데, 연암은 그 이틀 밤을 무박으로 지샌다. 밤에 숙소를 몰래 빠져나가 거리를 배회하며 청나라의 속살을 뒤지고 다닌 것이다. 외국인인데다 사신을 따라온 수행원 신분으로 밤에 함부로 나다니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연암은 몰래 숙소를 빠져나간다. 심양에서의 첫날, 거리를 걷던 연암은 골동품 가게 예속재와 비단 가게 가상루에 무작정 들어가 중국 사람들을 사귀게 돼 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는 이틀 밤에 걸쳐 이 두 점포를 찾아가 밤새 필담을 나눈다. 장사치들이라 함께 학문을 논하거나 고담준론을 나눌 형편은 못 되었지만 연암은 이들로부터 중국인들의 세상사를 듣는다. 연암이 대륙을 떠돌며 중국을 느끼는 방식은 독특하다. 밤이건 낮이건 아무 집에나 불쑥 들어가 집주인과 서툰 중국어로 대화도 하고, 단지 중국의 풍습을 알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상가喪家에 대책 없이 들어가 엉겁결에 조문을 하기도 한다. 『열하일기』를 읽다보면 돈 키호테처럼 좌충우돌하는 연암이 그려져 아슬아슬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는 마치 수영을 배우기 위해 물 속에 자신을 빠뜨리는 무모한 학습자 같다.



심양 고궁에서의 야외 강의 - 조선 사신 구타 사건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36년 봄, 조선은 심양에 사신을 파견한다.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후금을 이어받은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면서 즉위식을 하는 자리였다. 청 태종의 이름은 한자 표기로는 황태극 皇太極이지만, 조선에서는 오랑캐 이름에 좋은 뜻의 한자를 붙여줄 수 없다며 그를 홍태시 紅泰豕, 즉 '붉고 큰 돼지'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행사에서도 순서에 따라 인근 각국에서 온 사신들이 황제에게 배례를 하게 되었는데 조선의 사신들만 몸을 숙이지 않고 있었다. 군사들이 달려들어 강제로 허리와 목을 구부리게 하면서 몸을 숙이라고 하였으나 끝까지 절하기를 거부하자 무자비하게 구타를 가해 사신들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외교사절이 구타를 당했다는 사실에 놀란 나머지 흥분했다가, 사신들이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하면 불사이군 不事二君의 유교 윤리를 어기는 것이 되므로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듣고는, 너무 한심하고 슬퍼서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무엇하러 그 자리에 참석을 했단 말인가. '붉고 큰 돼지'는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이는 조선 국왕이 우리 청나라를 원수로 삼고자 나로 하여금 이 사신들을 죽이게 해 그 구실을 만들려는 수작이다. 거기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라며 사신들을 석방해 보내면서 조선왕을 꾸짖고 왕세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다. 조선이 이 요구를 묵살하자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다. 병자호란의 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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