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끝나지 않은 여행(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M. 스캇 펙 지음 | 열음사
First Step - 성장



1장. 의식과 고통의 문제




에덴동산의 신화는 우리 인간 존재가 어떻게 의식을 갖도록 진화했는지를 말해 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먹자, 인간은 의식을 갖게 되면서 곧바로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간은 갑자기 부끄럼을 타게 되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생기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분열된 존재로 의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연과 우주의 일부라는 의식을 잃고, 삼라만상의 나머지와 하나라는 의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은 천국에서 우리가 추방되었다는 것으로 상징된다.



천국에서 추방되면서 우리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절대로 에덴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오직 앞으로만 갈 수 있을 뿐이다. 사막을 지나 앞으로 곧장 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 여행은 힘들고 의식은 늘 고통스럽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던 길을 가능한 한 빨리 그만둔다. 사람들은 진정으로 성숙에 관해서 이야기하길 원치 않는다. 심히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산적인 고통이란 것도 있다. 비생산적인 고통과 생산적인 고통의 차이는 성장의 고통을 다룰 때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우리들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일정한 죄의식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존재론적인 죄의식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너무 지나친 죄의식은 오히려 우리의 존재를 저해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경증(노이로제)적인 죄의식이다. 감정적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자신에게 이렇게 물으라. "지금 내가 겪는 괴로움(걱정이나 죄의식)은 존재론적인가 아니면 신경증적인가? 이 고통은 나의 존재를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제한할 것인가?" "이러한 걱정이나 죄의식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리고 나서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일종의 뇌상이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혹은 고통을 무릅쓰고 앞으로 전진하는 능력이다. 사막을 통과해서 아주 멀리 전진하려면, 존재론적인 고통과 기꺼이 대면해서 돌파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빠르게 변화시키는 방법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계획되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생긴 '의식' 때문에 우리는 고통도 받지만 구원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점차 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숨을 구멍을 파지 않고 사막 안으로 더욱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앞으로 여행하면서, 우리는 더 많은 고통을 참아낸다. 바로 그 '의식' 때문에….



구원이란 말은 '치유'라는 뜻이기도 하다. 구원은 치료의 과정이며 완전하게 되어 가는 과정이다. 왕년의 무신론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조차도 심리치료의 목적은 무의식을 의식으로 만드는 것, 즉 의식을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치유와 의식과의 관계를 인정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칼 융은, 악이란 우리가 부인하고 싶어 하는 인격의 일부이며, 우리가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으려고 지속적으로 의식이라는 덮개 아래 숨겨두고 무의식을 지킴으로써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지 않으려 해서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여러분이 사막 안으로 충분히 멀리 들어가 보면 이전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푸르고 아담한 오아시스를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되면 모래 밑에서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더 깊이 들어갔을 때 여러분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을 완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치유가 되는 일은 주로 그러한 고통을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보다는 옆에 있어 주면서 기꺼이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더욱 의식을 갖게 되는 행동이다.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더욱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고통을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더 많은 기쁨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이 여행을 너무나 가치 있게 만드는 진정한 희소식인 것이다.



2장. 비난과 용서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배우면서 부쩍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받는 고통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게 된다. 그리고 비난은 항상 분노와 함께 시작된다. 분노란 뇌의 신경 중추에서 비롯되는 강력한 감정이다. 분노는 나름대로의 목적에 기여하므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런 감정도 필요하다. 분노 그 자체만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종 너무 부적절하게 촉발되기도 하므로 분노에 대처하는 복잡한 일련의 방법들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느냐는 우리가 살면서 어떤 식으로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비판할 때마다, 자신을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예수께서 "형제의 눈의 티끌을 보기 전에 네 눈에서 들보를 뽑아라" 하신 것도 다른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먼저 비판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비난하고 판단할 때가 왔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정확하게 알게 될까? 우리들 누구라도 고통스러운 결단에 직면하게 될 때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럴 때마다 질문을 던지고 다시 한번 그 해답을 찾으려고 고뇌하는 것뿐일 것이다. "주님, 이 일이 당신께서 지금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일인가요?" 우리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확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지로 인한 고통을 견뎌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막 진리와 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두 가지가 가까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는 우리들 자신보다 더 높은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자를 희구하고 스스로 그 힘에 따르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또한 과학 역시 진리를 따르는 행위임을 지적하겠다. 그러나 과학적인 방법이란 스스로를 속이고 싶어 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경향과 싸우기 위해 수세기 동안 진리를 옹호하며 발전시켜 온 일련의 관습이나 절차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더 높은 중재자, 더 높은 힘, 즉 진리를 따른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가 신이고 신이 진리다."라고 말했다.



강한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고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축복은 그 안에 저주를 감추고 있으며, 부작용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강한 의지에서 나타나는 최악의 부작용은 강한 기질, 즉 분노이다. 그러면 어떻게 의지에 마구를 채울 것인가? 여러분 스스로 의지에 마구를 채울 수는 없다. 의지는 자신보다 더 높은 힘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보다 더 높은 힘에 대해서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악인들은 매우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자아도취에 빠져 있고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부적절하고 파괴적인 비난에 탐닉하는 사람들이다. 심하면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낼 수 없는,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 지경까지 간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거짓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자신들의 결점이나 악행을 고집스럽게 모른 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증거가 이들의 죄나 결점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항상 자기 자신을 선하게 생각하며, 자기 교정 대신에 종종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면서까지 증거를 없애 버리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의지를 타인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자신들의 망가진 자아를 보호하려고 하며, 이런 식으로 그들 대부분은 악을 저지른다.



우리는 여기서, 비난은 게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분노나 증오도 게임이다. 즐거움을 주는 다른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비난은 습관이 되어 버려 어느새 그런 행동에 빠져들고 만다. 아마도 모든 심리 게임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난 게임일 것이다. 대부분 우리들은 이 게임을 해본 경험이 있다. "내가 잔소리를 하는 건 당신이 마음의 벽을 치고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마음의 벽을 치고 있는 건 알지만, 그건 당신의 잔소리 때문이야." 따라서 여기엔 일종의 순환논법이 존재하고 중단하기 힘든 반복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게임을 그만두는 유일한 방법은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을 멈추려면 용서가 필요하다.



진정한 용서란 정말로 힘든 과정이지만,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 과정은 너무도 번거롭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값싼 용서'를 선택하고 만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가 발휘될 수 있는 것은 유죄평결이 났을 때만이 가능하다.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 누군가를 용서할 수는 없다. 죄가 밝혀진 후에야 비로소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릴 수는 없다. 용서라는 힘든 일을 회피해 보려고 마음의 상처를 눌러 보지만 결국 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드러내고 용서하는 것뿐이다.



그러려면 죄를 기억해내야 하며, 그런 후에 필요한 것이 바로 분노다. 죄를 재판하고 고발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분노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 다시 말해 오랫동안 분노에 집착할수록, 더 오랫동안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우리가 용서를 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치료에 도움을 주는 정도를 넘어서 분노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성장을 멈추고 영혼은 오그라들기 시작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고통 없이 그 일을 상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일과 친해지는 것이다.



3장. 죽음의 의미



내가 죽음에 대해 호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신비로움으로 가득하고 상당히 흥미로운 의미가 들어 있다.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죽음과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기꺼이 죽을 수도 있는 어떤 계기가 없다면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도 없다.



문제는 우리들이 비겁하게 죽음을 부인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아무런 이유도 알 수 없는 사고로 보는 우리의 문화적 관점은 너무나 명백한 잘못이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를 선택한다. 수세기 동안 의사들은 아주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가끔씩 암이 자연적으로 소실되는 사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희귀한 사례에 나타나는 유사점들 가운데 하나는 환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에 매우 심오한 변화를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면, 암은 기적적으로 사라져 버린다. 삶에 대한 의지가 결정적으로 생을 연장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단순히 일종의 사고라고 여기면, 대체로 죽음이라고 하는 현실뿐만 아니라 그 신비로움마저도 무시하게 된다.



과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레이몬드 무디는 임사체험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순서대로 변화를 설명한다고 보고했다. 첫째,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천장에 있는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있는 자기 몸을 보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보았다고 기억한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어떤 종류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부분인데, 그들이 빠르게 휙 날아서 터널을 빠져나오자 하느님이나 혹은 예수님으로 인식되는 어떤 빛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그러나 그 빛과 같은 존재가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 빛과 같은 존재는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하는데 그 빛에 복종하여 마지못해 되돌아온다. 무디에 따르면,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이전부터 영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 경험 이후로 그렇게 되었으며, 그러고 나면 그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반드시 믿게 되고 죽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경감되곤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나는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맬 때, 나의 죽음이 지닌 신비로움과 버둥거리면서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우리는 배우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생긴 모든 일은 우리가 배우는 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죽음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엉덩이만 붙이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단 최종 기한만 주어지면 얼마나 재빠르게 움직이는지 놀랄 지경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일정한 단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 단계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발생한다. 1단계: 부인, 2단계: 분노, 3단계: 거래, 4단계: 우울, 5단계: 수용. 이 과정에서 죽음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종교를 갖게 된 사람들이 실제로 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토록 지나치게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그 이유는 주로 우리 자신의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은 나르시시즘은 심리적이고 영적인 병의 주요한 전조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자존심이 받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나르시시즘적인 상처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죽음은 커다란 문제이다. 우리에게 존재론적인 소멸이 다가오는 것만큼 우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르시시즘적인 애착과 자부심을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명한 방법이란, 가능한 한 빨리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나르시시즘, 자기 중심주의, 오만함을 더욱더 줄여 나갈수록 죽음을 덜 두려워할 수 있으며,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사심 없이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려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며 사랑을 더 많이 나누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위대한 종교가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누구든지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즉, 누구든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고집하는 자는) 생명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니라."



4장. 신비로움에 대한 기호



우리는 매우 신비로운 우주에 살고 있다. 토마스 에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의 99% 가운데 1%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엄청난 기술시대에도, 어떻게 해서 우리가 발을 땅에 붙이고 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우리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어린애라고 생각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실제보다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사는 것이 더욱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또한 나태하기 때문에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기도 하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알 수 없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고 깊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에서 자극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완전한 정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