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문화선택 한류
백원담 지음 | 펜타그램
제1부 왜 한류인가
한류, 동아시아에 부는 바람NRG사진과 Click B, 빨간 머리의 서태지 등 스타들의 신상명세서가 빼곡한, 한류관련 사이트를 통해 중국의 젊은 세대들은 한국의 상을 잡아간다. 우리기업 삼성은 중국의 십대들을 겨냥하여 만든 사이트에 안재욱을 광고모델로 내세워 성과를 거두었다. 정보사냥에 혈안이 된 소년소녀들의 호기심을 상품 구매력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핑클의 베이징 공연, 비밀만남, 한류 체험기회 제공 등 온갖 그물망을 필사적으로 쳐놓았다. 이처럼 한류란 결국 이들 거대 자본들에 의해 기획되고 조직되는 자본의 논리에 의한 문화산업 버전에 다름없다.
중국이 한류에 휩쓸리는 현상에 대해 중국 지식인들은 위기감과 우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내비친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이 경제적 특혜를 받은 일부 청소년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국한된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한국에서 이제 더 이상 홍콩스타들을 기억해내지 않듯이 중국에서도 5년 이내에 한국문화가 퇴조할 것이라 낙관한다. 하지만 <박하사탕>이나
등의 한국영화는 상업주의 문화와 조응하면서도 인간적 가치생산이라는 문화적 본연에 충실했음을 인정한다. 또한 제5세대와 사회주의 주선율(主旋律, 영웅찬양영화)을 선양하는 낡은 중국영화계에 이러한 한국영화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중국이 한류에 대해 엄정한 평가와 대응을 고민하는데 비해 우리는 너무 낙관적이다. 하지만 언제 우리가, 우리 문화가, 국경을 넘어 이처럼 무단횡단, 회통(會通)해 본 적이 있던가. 국가주의와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면 한류의 진정한 자리매김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민간문화는 지금 동아시아에 조심스럽게 '말 걸기'와 '서로 되비쳐보기'를 시도하는 중이다. 이 민간의 자발적 연계 고리를 통한 상호이해와 소통, 그것이 동북아 평화공존을 위한 사회지반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류, 동아시아의 문화선택
2002년부터 한류를 진단해 왔지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두 가지이다. '한류의 실재'와 '한류의 지속화 방안'이 그것이다. 최근 동남아와 일본의 한류 열풍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은 엄연한 사실이고,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 사회주의 해체 이후 급속한 자본화 과정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과도기적 대행을 한류가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일본의 경우에는 '욘사마', '한류 사천왕' 하며 난리법석이지만, 정작 우리 아이들의 일상에 일류(日流) 현상은 이미 깊게 뿌리내려져 있다. 일본의 아이돌시스템이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현실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게 한다.
한류의 물줄기를 어떻게 하면 강하게 혹은 제대로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진정한 한류의 방향타를 잡는 것을 통해서만 그 올바른 해결을 볼 수 있다. 한류의 진정한 힘. 그것은 다름 아닌 네티즌들의 발랄한 소통으로 정감적 진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그 지점에 있다. 한류스타들의 팬 페이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서적 교감과 문화적 체감들, 그것은 소비적 분비물의 성격이 아직은 강하다. 그러나 그 속에 상업주의와 국가주의의 작위와 음모와 조작의 간극을 가르며 흐르는 어떤 기운이 만들어지고 있다면 그것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역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2부 한류의 동아시아 여정
<지하철 1호선>, 동아시아 문화 형성의 희망열차
김민기는 미술대학을 졸업한 서양화가였지만, 민통선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곳을 떠나게 되었지만 농사꾼의 삶은 그의 노래와 노래 굿의 형식과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농한기에는 광산에서 일하기도 했다. 공장에서 체험한 열악한 노동현장경험을 <공장의 불빛>이라는 노래 굿으로 공연하기도 했는데, 노동문제를 부각시켰다는 이유로 수배를 당하기도 했다. 광산에서 일했을 때는 그곳 소녀의 일기를 바탕으로 <아빠 얼굴 예쁘네요>라는 어린이 노래 굿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지하철 1호선>은 원작이 독일 것이다. 김민기는 본격적인 뮤지컬 공부를 위해 <지하철 1호선>을 가져왔다. 그것을 우리 것으로 개작하여 1994년에 시작된 공연이 벌써 1,350회를 넘어섰고, 7년여 동안 그는 끊임없이 작품을 개작해나갔다. 그리고 중국까지 연장운행을 하게 되었다. 그 뮤지컬의 내용은 '사랑을 찾아온 연변처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창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 두 개의 사랑이야기를 뼈대로 한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음악극에서 80년대식 정치성이 거세되었다고 말한다.
김민기가 사랑타령을 무대에 올린 것은 자못 의아스런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상업주의를 깨뜨리고자 하는 의도는 아닐까. <지하철 1호선>의 통속적 멜로는 지순한 인간의 원초적 사랑으로부터 평형성을 형성해 내고자 한 의도적 기획의 산물일 수 있다. 예컨대 극중 '안경'이라는 캐릭터에는 70~80년대 학생 운동권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먹고살 길이 없어 농민이 되고, 농한기 때 일거리가 없어 광산촌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김민기로서는 지식인 학생들의 목적의식적인 현장 하방운동이 가소롭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민기의 인식적 한계 또한 여실히 드러난다. 생계가 진실이었던 만큼 당시의 하방운동이나 변혁지향의 흐름도 진실이었고, 역사적인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늘 정치나 운동과 무관한 사람임을 강조하는 김민기는 먹고사는 문제의 잣대로 모든 진보지향을 재단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하철 1호선>의 주인공들이 도시빈민, 룸펜들인 점 또한 김민기가 80년대 조직적 민중운동 등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김민기는 '안경'을 해고된 노동자로 재설정한 바와 같이 박탈당한 삶에 대한 문제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다. 그것이 음악극 <지하철 1호선>의 일관된 미학이다.
김민기는 <지하철 1호선>의 중국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두 차례나 상연할 극장을 직접 다녀왔다. 중국에서의 무대가 큰 점을 고려할 때 소극장 음악극을 그대로 들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극장 크기와 같은 곳을 골라 한국에서 한 달 동안 적응 공연을 올렸다. 그가 이렇게 치밀하게 공연 준비를 한 반면, 중국 측은 모든 준비를 김민기와 극단 학전에 의존했다. 김민기는 이러한 중국 측 공연관계자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정식 사과를 요구했다. 그가 이처럼 중국 측에 사과를 요구한 이유는 <지하철 1호선>의 중국 공연을 상업적 대중문화식의 침투가 아니라, 문화적 소통의 새로운 차원을 열고자 했기 때문이다.
김민기는 <지하철 1호선>을 중국에 주는 작은 선물이라 했다. 무슨 뜻일까. 그는 애초부터 중국공연을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라는 성격으로 관철했다. <지하철 1호선> 중국 공연은 베이징에서는 대성황이었으나 상하이에서는 실패했다. 상하이에서는 ASEM회의를 한다고 공연장 앞을 봉쇄했다. 더구나 중국 측은 사전 홍보나 설비 등 공연준비가 거의 안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국 측에서 일일이 설명하고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상하이에서의 실패와 학습으로 베이징 공연에서는 빛나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 과정에 기술 전수와 내용 공유가 중국의 공연예술 수준을 5년은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민기는 경극과 혁명가극의 나라 중국에 자신의 음악극 경력 10년을 전수했다. 그래서 그는 <지하철 1호선>을 중국에 주는 작은 선물이라 했던 것이다.
2001 도쿄, <지하철 1호선>과 보아
HOT의 강타가 중국 십대의 일상을 그야말로 강타하고 있는 시점에, 일본은 보아의 노래와 춤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각종 언론들은 보아의 열풍이 일본에서의 한류 징조라며 떠들썩했다. 그 시점에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 도쿄 공연이 있었다. 나는 동아시아의 학자와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하는 문화교류를 위해 도쿄에 가게 되었다. <지하철 1호선>은 재팬파운데이션의 초청에 의한 공연으로 무료초대권은 아예 없었다. 중국과 달리, 일본 측은 철저한 공연 준비와 관리를 했다. 6만 원에 달하는 비싼 표 값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내리 만석이었으니, 홍보에도 만전을 기했음에 틀림없었다.
11월의 찬 기운 속에 재일동포들이 마련한 <지하철 1호선> 환영의 자리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에 올라섰다. 지하철에서 만난 일본인들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곤 없었다. 조심스러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한 그들의 어두운 이면만이 보여 졌다. 지하철 밖에 정부의 홍보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삭막함과 일상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자연과 함께 하세요." 분재를 키우라는 권장 문구였다. 철사에 칭칭 감긴 기형을 미학으로 강제당한 나무. 그들에게 자연은 분재일까.
지하철의 출입문 한가운데는 문을 '도아'로 공식 표기하고 있었다. 한 일본친구는 전후 미국의 군정경험과 패전 심리가 일본이 서구를 좇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가면 식민침략을 반성하라고 강요하고 있지만, 대다수 일본인에게 8.15는 곧 패전의 아픔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일본 역시 피해자라는 인식이 참회의식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부대낌이 아니라 남의 삶에 비켜가며 살아가는 저 표정 없는 사람들의 내일은 무엇인가.
'보아'
1990년대, 일본은 아시아의 미디어산업에 뛰어들었다. 소니와 마쓰시다가 적자를 내고 할리우드에서 철수하는 등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비디오게임 시장에서는 미키마우스를 능가하는 마리오의 위세를 떨쳤다. 일본은 국가 정체성을 재구축하기 위해 아시아에 팽배한 반 일본 정서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가동하고자 했다. 그래서 일본의 색채를 거세한 문화상품, 즉 음악 산업에서 범아시아 스타를 주조하고자 했다. 일본의 언어와 문화적 특수성 때문에 일본 문화상품으로는 먹혀들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홍콩과 대만 등지에 현지 자본과의 연계에 의한 현지 아이돌스타를 제조해가는 지속적인 변모를 꾀해왔다.
반일의식이 팽배한 한국에서 일본문화의 소비는 음성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음악 산업면에서는 규제되어 왔다. 한국진출에 대한 일본의 갈망과 한국 기획사의 일본 음악 산업 유입에 대한 갈망이 일치되어 보아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한국 진출에 대한 형식적 규제는 오히려 보아를 일본에 데려다 성공시키는 전략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보아가 일본에서 이룬 성공은 우리 문화산업의 도약을 일러줄 열쇠가 될 것인가. 문화산업의 성장이 국민경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환상도 금물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지배가 문화산업이라는 명분을 통해서 합리화되는 일이다.
동아시아 문화의 교감ㆍ소통ㆍ생산을 위한 한중문학ㆍ출판교류
중국정부는 WTO에 가입한 후 문화시장 개방 대비를 위해 대대적인 시장 정비작업과 콘텐츠 개발 작업에 착수했다. 문화산업 규범화와 정리 업무를 통한 생산유통 질서 구축과 다오반(盜版, 불법 복제된 영상, 음반 등)의 숙정작업과 IT기술력에 기반한 문화상품 개발 등을 관건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네티즌 인구 증가와 온라인 게임의 급성장에 따른 게임 산업 개발도 숙고되고 있다. 개방 20년을 지나온 중국의 향배 또한 그랬듯이 문화산업의 성장 가능성 또한 의심할 수 없는 대목이다. 따라서 한류든 화류든 서로를 경쟁적으로 대상화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와 상생을 위한 샛바람이 불도록 해야 한다.
공생의 샛바람이 불게 하기 위해서는 문학만한 기제가 없다. <가을 동화>라는 TV 연속극은 대만에서 소설로 개편되어 중국 대륙에서 50만권이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1만권이 정품이고, 나머지 49만권은 모두 해적판이라는 소문이다. 그보다 기막힌 사실은 우리 문학은 이문열의 작품 몇 개밖에 소개되지 않았고, 그 외의 출판물도 제대로 번역된 것이 없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베이징에서 해마다 열리는 국제도서전에 한국 출판관계자들이 수십 명씩 드나들고, 중국책 번역 출판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역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 문학 번역 지원은 대부분이 서구를 향하여 있고, 본격 문학작품이 중국에 소개되더라도, 일개 중개회사의 사업목적에 그치고 마는 현실이다. 따라서 작품 선정부터 번역 출판에 이르기까지 기획력 있는 지원체계 구축이 절실하다고 하겠다.
2003 한류, 사스 퇴치 위문공연
2003년 8월, 무더위 속에 베이징에 당도했다. 다음날 아침 숙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오기 전에 이창동 문화부장관과 베이징에서 만나자고 했던 터라 약속을 잡아야 했다. 나는 "'금요일 행사'때 뵙자"고 직원에게 말했다. 그해는 사스가 중국전역을 휩쓸었다. 당시 중국은 한국 의료진을 요청했지만, 한국은 어렵사리 거부해야 했다. 미안함으로 10억을 들여 위문공연을 해주기로 했는데, 그 사스 위문공연이 금요일에 있을 행사였다. 하지만 이는 사후약방문격에다, 위로공연을 빌미로 한류 선전하러 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게 됐다. 어찌되었건 국가 간 예의 차원에서 성의를 보인 것이니 중국 측에서도 그냥 거절할 수만을 없을 터였다.
공연 날, 베이징박물관 앞은 어린 십대들의 물결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분명 초대권만 발행했다는 공연장에 암표장수들이 즐비했다. 표 한 장에 700위안(우리 돈으로 9만 5,000원 정도)이었는데도 십대들은 표를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암표장수는 느긋하게 흥정에 임하고 있었다. 북새통을 뚫고 겨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맨 앞쪽에 양국의 장관들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앉았고 그 뒷줄에 하얀 가운의 의사와 간호사들 이백여 명이 몇 줄을 채우고 있었다. 사스 퇴치 위문공연이라는 명분이라면 당연히 맨 앞줄이 그들을 위한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장관을 찾지 않았다. 인사 정도만 나눌 뿐 더 할 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남녀 사회자 소개로 가수들이 출연했다. 그런데 한국 십대 스타가 등장하면 괴성을 지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중국의 십대들은 자기나라 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르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했다. 그 유명한 보아, 문희준, NRG, 강타의 순서가 이어질수록 그 괴이한 진행은 더욱 두드러졌다. 더욱 이상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중국 가수들은 하나같이 나오면서 감사인사를 했다. "의사와 간호사 여러분, 정말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그들은 정중하고도 진실 되게 객석에 앉아있는 의료진들에게 인사를 했다. 반면 한국의 이른바 스타들이 한다는 말은 이랬다. "여러분, 보고 싶으셨죠, 저도 그랬어요, 반가워요" 혹은 "한동안 뜸했었지만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많이 보고 싶으셨죠,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니하오!"
이런 무례가 어디 있나 싶었다. 돈을 10억씩이나 들였다면서 문광부에서는 그 공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행기에서라도 좀 알려줄 일이지…. 더구나 그 뻔한 립싱크는 초원을 넘어가듯 깊은 울림을 표현하는 중국 가수의 노래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출연했던 가수들이 다시 등장하자 중국문화부 장관과 이창동 장관은 보아, 강타 등 가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아니 도대체 이런 자리에 왜 장관들이 나와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격려하며 흐뭇해하는 것일까. 과연 그들은 악수를 건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초대권을 암표로 둔갑시키고 그 실익만을 셈하며 아이들의 법석을 바라보는 중국 정부의 안일한 대응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이지만, 이런 공연에 10억씩이나 쏟아 붓고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