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야 할 길
M. 스캇 펙 지음 | 열음사
제1장 훈련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어렵다는 이 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삶이란 대수롭지 않으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와 어려움이 가혹하다고 불평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문제만 가장 특별하다고 믿으며, 왜 다른 사람들은 당하지 않는데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만 이같이 고통스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분개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삶의 승패는 그 문제들을 얼마나 해결해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문제들은 우리에게 용기와 슬기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없던 용기와 슬기를 만들어 내게까지 한다. 우리는 문제를 통해서만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현명하지 못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고통을 두려워하고, 가능한 한 문제들을 피하려고 한다. 문제를 질질 끌면서 저절로 없어지기를 바라거나 문제를 무시하고 잊어버리려 하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려 한다. 심지어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약물을 먹고 자신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칼 융은 이것을 "노이로제(신경증)란 항상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라고 표현했다. 고통을 회피한 대가는 회피하고자 했던 고통보다 결국에는 더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어떤 경우든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하며, 그때 생기는 고통을 회피한다는 것은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 성장도 회피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만성 정신질환 상태에서 정신적 성장은 정지하게 되며, 이것을 치료하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시들어가기 시작한다.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 방법은 자기 훈련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문제를 직시하고 더 나아가 문제가 야기하는 고통을 건설적으로 경험하는 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이루어 내는 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기술이 있는데, 그것은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것'과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 '진실에 충실하는 것', 그리고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첫째로,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룬다는 것은 삶의 즐거움과 고통의 시간적 우선순위를 조절하는 간단한 일이다. 하루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을 계획적으로 짜되, 고통을 먼저 겪은 뒤 즐거움을 갖게 되면 그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둘째로,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 어느 환자에 대해 성격장애로 진단하는 것은, 그 환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는 양상이 일반인보다 더욱 심한 경우이다. 흔히들 "신경증 환자들은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굴고, 성격장애자들은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모두 못살게 군다."고 말하지만, 정상적인 사람들도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고통을 회피하려고 한다.
나도 서른 살 때 맥 배지리 씨 덕분에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성격 장애를 치유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맥 배지리 씨는 내가 수련의 과정을 이수하고 있던 정신과 외래담당 과장이었다. 이 외래에서 동료 수련의들과 나는 교대로 새 환자를 보도록 할당받았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열심이다 보니 내가 동료 수련의들에 비해 더 오랜 시간 동안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료들이 오후 4시 반이면 집으로 가는 데 반해 나는 밤 8시, 9시까지 스케줄이 꽉 짜여 있었다. 내 가슴은 점차 분노로 끓어오르면서 점점 더 화가 나고 기운이 빠지게 되었다. 나는 무슨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배지리 씨에게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밀린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몇 주 동안 새 환자를 받는 윤번제에서 면제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배지리 씨는 내 이야기를 매우 주의 깊게 받아들이는 태도로 경청하고는 공감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예, 나는 당신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특히 당신은 시간 때문에 생긴 문제가 있군요. 그러나 당신의 시간이지 내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시간 때문에 생긴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나는 몹시 화가 나서 배지리 씨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맥 배지리 씨를 미워하게 되었다. 석 달 동안이나 나는 그를 미워했다. 나는 그를 심각한 성격 장애자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렇게 냉담할 수 있는가? 나는 겸손히 그에게 단지 약간의 도움과 조언을 구하러 갔을 뿐인데. 외래 책임자로서 그런 문제를 파악하고 지도해 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는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석 달 뒤 나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성격 장애를 가진 사람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시간은 내 책임이었다. 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정돈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에게만 달려 있었던 것이다. 동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에 투자하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의 결과 또한 내 책임이었다. 동료들이 일찍 퇴근하는 것이 내게 괴로움을 주고, 가정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아내의 불평을 듣는 것도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내가 내린 선택의 결과이다. 내 삶의 방식이나 내 일의 우선순위는 나 스스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그 결과에 따르는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태도의 변화로, 동료에 대한 나의 분노는 사라졌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자유롭게 남들과 같이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나와 다른 생활 방식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들에 대해 분개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다. 이후로 나는 즐겁게 일에 충실할 수 있었다.
내가 배지리 씨에게 내 시간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라고 함으로써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내 권리와 내 자유를 양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리히 프롬이 나치즘과 권위주의에 관한 자신의 연구를 적절하게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이름 붙인 이유이다. 책임이 따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백만, 심지어는 수십억 사람이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힐데 브르흐 박사는 그녀의 책 『정신 요법 입문 Learning Psychotherapy』의 서문에서 말했다. "근본적으로 모든 환자들이 '하나의 공통된 문제'를 지니고 정신과 의사에게 찾아오는데 그것은 사물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과 공포와 내적 확신이다." 대다수의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이런 '무력감'의 뿌리는 자유에 따르는 고통에서 도망가려는 어떤 욕구, 그리고 이 욕구로 인해 자신의 삶과 문제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있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와 힘을 내던졌기 때문에 무력감을 느낀다. 이것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성인의 삶은 전반적으로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큼 그들은 영원히 자신을 희생자라고 느끼며 살게 된다.
셋째는, 진실에 충실하는 훈련으로서, 진실이란 현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을 보다 명확히 볼수록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보다 나은 준비를 갖추게 된다. 세상의 현실을 보는 눈이 불투명하여 허위, 착각, 환상에 의해 혼란스러워질수록,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한 현명한 결정을 하게 될 가능성은 점점 작아진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란 지도와 같아서 그걸 지표로 삶의 모든 영역을 판단하게 된다. 만일 지도가 참되고 정확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고,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도가 거짓되고 부정확하다면, 길을 잃게 될 것이 자명하다.
우리는 지도를 갖고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야 하며, 이 일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도를 만드는 데 따르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지도가 정확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수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일 현실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정보들을 종합, 흡수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도를 수정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할 때도 있다. 이 과정은 마치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괴롭다. 인간의 정신 질환의 주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오랜 동안 노력해 만들었는데 그 관점이 틀렸다는 것이 확인되고 대폭 수정해야 한다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런 작업은 대단한 고통이 요구되므로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 버릴 것이다. 이런 일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대개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정보를 무시해 버리려 한다. 이러한 행위는 아무 것도 안하려는 수동적인 행위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정보들을 거짓되고 위험하고 이단적인 악이라고 거부해 버릴 지도 모른다. 사실상 그것을 십자가에 매달고, 심지어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의 기존 견해에 따르게 하기 위해 세상을 조작하기조차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도를 고치기보다 새로운 현실을 말살하려 한다.
현실에 대한 낡은 견해에 이렇게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것은 많은 정신 질환의 원인이 되며, 정신과 의사들은 이것을 일컬어 전이(轉移)라고 한다. 전이란 어린 시절에 형성된 세계관이 대체로 어린 시절의 환경에는 매우 적합하나 어른이 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적절하지 못한데도 어린 시절의 것을 그대로 옮겨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의 경우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정도가 심하면 그 증세는 반드시 겉으로 드러난다.
진실에 충실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첫째로 계속적이고 끊임없는 엄중한 자기 성찰을 하는 삶을 의미하며, 둘째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삶을 뜻한다. 우리의 지도가 정확함을 확신하는 유일한 길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비판하고 도전하도록 개방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꽉 막힌 세계 안에서 살게 되어 점점 더 깊은 자아도취 상태에 빠지게 된다. 개인과 조직이 개방적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그들의 지도가 공개적으로 조사 받도록 그것을 진정으로 개방해야 한다. 따라서 진실에 충실한 삶의 세 번째 의미는 정직한 삶이다. 다시 말해서 진실과 현실을 우리가 아는 그대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의 대화에 반영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자기 분석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훈련을 거친 사람은 마음이 활짝 열려 있으므로 친근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다. 이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므로 자신은 세상을 밝고 깨끗하고 정연하게 하는 데 일조를 했다는 만족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솔직성으로 인해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살며, 감추지 않는 용기가 있으므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살게 된다. 결국 이들은 완전히 자유롭게 살아간다.
용기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솔직히 드러내야 하지만, 또한 필요할 때는 적절히 자신을 감추는 능력도 가져야 한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신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하지만, 동시에 진실로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은 거절할 줄 아는 능력도 가져야 한다. 매일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지만,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파괴적이지 않는 한도 내에서 현실적으로 살아갈 능력도 소유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훈련 자체가 또한 훈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훈련을 '균형잡기'라고 부른다.
넷째, '균형을 잡는 것'은 우리에게 융통성을 주는 훈련이다.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모든 활동 분야에서 비상한 융통성이 요구된다.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응체계가 불균형하고 유연하지 못해서 고생을 한다. 우리의 대응체계는 고뇌와 죄의식과 불안감으로 손상을 받으면 받을수록 균형을 잃는다. 성숙한 정신 건강에 필요한 것은 서로 모순되는 욕구와 의무와 책임과 방향 등을 융통성있게 균형잡는 능력이다. 이러한 균형잡기 훈련에서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포기'인데, 이것은 삶을 통해 거듭 배워야 하는 교훈이다.
나는 아홉 살 적의 어느 여름날 처음 이것을 배웠다. 자전거 타는 법을 처음으로 배우고 있던 때였는데 나는 가파른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서 속도를 내는 것이 몹시 즐거웠다. 그 언덕을 끝까지 내려오면 바로 커브 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나는 브레이크로 속도를 줄여 이 환희를 포기한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급커브를 돌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몇 초 뒤 환희는 끝나고, 나는 길에서 12피트나 튀어 올랐다가 숲 속에 내동댕이쳐졌다. 여기저기 긁혀 상처가 나고 피도 많이 흘렸다. 또 내 새 자전거는 나무에 정면으로 부딪쳐 전혀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나는 균형을 잃었던 것이다.
균형이란 바로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이며, 그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일종의 훈련이다. 우리는 이 훈련 과정을 통해, 포기함으로써 포기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훈련은 자기를 확대하는 과정이다. 포기에 따르는 고통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지만, 낡은 것의 죽음은 새 것의 탄생이다. 우리가 새롭고 좀더 좋은 생각, 관념, 이론 또는 이해 방식을 개발한다는 것은 곧 낡은 옛 것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T. S. Eliot는 <매기의 여행>이라는 시의 결구에서 자신이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때 이전의 세계관을 포기하는 고통을 겪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탄생은 '죽음', 우리에게는 어렵고 쓰라린 고뇌라네…. 나는 또 하나의 죽음을 기뻐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위대함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는 바로 그가 얼마나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가에 있다.
균형 잡는 훈련과 그것의 요체인 포기에 관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포기하기 위해서는 포기할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아무 것도 얻지 않았는데 얻는 일을 포기한다면 당신은 출발점에 있을 따름이다. 당신은 자아를 버리려 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만들어 가고 또 발전시켜야 한다. 발전하려는 의욕은 있으나 그렇게 하려는 의지력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훈련을 건너뛰고 성자가 되는 쉬운 지름길을 찾으려 하며,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흔히 그들은 단지 성자의 겉모습만 흉내내어 은둔함으로써 성자와 예언자가 되었다고 믿고, 자신이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하며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중간 지점을 통과해 와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명상, 요가, 정신요법 같은 과정도 훈련의 기술이 아닌가 하는 물음은 합당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본적인 방법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도움일 뿐이라고 답하겠다. 유용할 수는 있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 위에서 이야기한 기본적인 4가지 기술은 끊임없이 진지하게 실행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