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문제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 역사비평사
1장 감정의 문제 - 추도와 현창 사이야스쿠니 문제를 어렵게 하고 있는 최대 요인 중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감정의 문제다. 특히 그 중심에는 '유족 감정'의 문제가 있다. 남편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이와이 마스코는 2002년 4월 15일에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한 통의 진술서를 제출했다. 이와이의 진술서에는 격렬한 유족 감정의 분출이 보인다. 전후 반세기 이상 '야스쿠니의 아내'라는 아이덴티티를 지녀온 이와이에게는 "단 한마디" 라도 "야스쿠니신사를 매도하는 말을 듣는" 것은 "내 몸이 갈가리 찢겨져 전신의 피가 역류해 넘쳐 나와, 그 피가 전사들의 피바다가 되어 끝없이 펼쳐져 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한" 사건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말을 단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해버려서는, 야스쿠니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한편, 그만큼 강렬한 감정을 여태껏 품고 있는 유족이 있으니, 수상이 참배해서 그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느냐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성급함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야스쿠니신사에 강렬한 감정적 집착을 지니고 있는 것은 결코 이런 부류의 유족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 이 재판에서 원고가 된 일본인 유족들은 수상의 참배로 종교적 인격권을 손상당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다. 또 하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로서, 야스쿠니신사가 관련되어 있는 일본군의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아시아 사람들의 감정 문제가 있다. 일본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각국 정부와 미디어가 즉각 항의하는 이면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에 희생된 전사자의 유족과 그 자손들의 분노와 슬픔, 즉 감정이라는 방대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음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쪽에 '유족 감정'과 '국민감정'이 있다면, 아시아 각국에도 -만일 감정의 양을 비교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 몇 배나 될- '유족 감정'과 '국민감정'이 있다.
이러한 유족 감정의 다양성을 충분히 인식한 다음에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야스쿠니 문제의 근저에 있는 것은 전사한 가족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는 것을 기쁘게 긍정하는 유족 감정과 그것을 슬프게 거부하는 유족 감정 사이에 있는 심각한 단절이며, 또한 각각의 측에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적 단절이다"라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감정의 존재를 직시하고, 그런 감정들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를 되도록 철저히 이해한 다음에, 비로소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 스스로의 판단을 형성하는 일일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는 대일본제국 군국주의의 지주였다. 그렇지만 이 문제의 포인트의 하나는, 야스쿠니 신앙이 예전의 일본인을 '군국주의자'로 만들었는지 어떤지 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깊은 곳에 당시 일본인의 삶과 죽음 바로 그 자체의 의미를 모조리 흡수해버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나 천자님을 위해 아들이나 남편을 바치는 것을 성스러운 행위라고 믿게 함으로써, 야스쿠니 신앙은 당시 일본인의 삶과 죽음 전체에 최종적인 의미 부여를 했다.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종교이다. 또한 '국가신도'라는 개념의 내실을 어떻게 규정하든 그것은 천자, 즉 나라를 신으로 하는 종교이자 천황, 바로 그 사람에 다름 아닌 국가를 신으로 하는 종교였다. 천황, 즉 국가를 신으로 하는 종교였기 때문에 비로소 전사한 자가 신으로 받들어진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일찍이 1911년에 가와카미 하지메가 <일본의 독특한 국가주의>(<중앙공론> 제3호)에서 분석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러일전쟁에 승리해 한국을 병합한 일본에서 국가주의가 대두하는 것을 지켜본 가와카미는, 1930년대 이후 초국가주의(울트라 내셔널리즘)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일본의 국가주의가 '국가교'라는 종교임을 갈파하고 있었다. 일본이 청일 러일전쟁의 승리로 식민 제국이 되어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고는 하나, 그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장정이 전사했다. 그런데 많은 일본인이 전쟁과 국가에 대한 회의나 번민에 빠지지 않고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은, 일본인이 이미 국가교의 신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 때문에 국가교의 순교자를 사후에 전부 신으로 모시는 야스쿠니신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왜 국가는 그런 의미 부여를 제공하는 것일까? 왜 국가는 국민의 전사를 '명예의 전사'로 현창(드높여 받듦)하고, 그 유족으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에 목이 메게 하는 의미를 제공하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11월 14일 <시사신보>에 게재된 논설 <전사자의 대제전을 거행해야 한다>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청일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동아시아의 정세는 긴박해지고 있어서 언제 또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전쟁이 시작되면 무엇에 의지해서 나라를 지킬 것인가. 그것은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병사의 정신일 수밖에 없고 그 정신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요체이다. 그리고 그 정신을 기르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광을 전사자와 그 유족에게 돌려 전쟁터에서 쓰러지는 것, 즉 전사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왜 국가가 전사자를 '나라를 위해 죽은 명예의 사망자'로 일컫고 최대의 영예를 선사하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설명이 들어 있다. 즉 가족을 잃고 비탄의 눈물로 지내는 전사자의 유족을 방치해서는 다음 전쟁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면서 싸우는 병사의 정신을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전사자와 그 유족에게 최대의 국가적 영예를 돌리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명예로운 전사'를 택하도록 병사들을 유도하는 길이다. 그럼 전사자와 그 유족에게 최대의 영예를 주는 방책은 무엇인가? 청일전쟁과 대만전쟁 후에 각 지방에서 전사자의 초혼제가 올려졌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제국의 수도 도쿄에 전국에 있는 전사자와 유족을 초대해서, 명치천황 스스로가 제주가 되어 사자의 공적을 칭송하고 그 혼을 현창하는 칙어를 내리는 것이야말로, 전사자와 그 유족에게 최대의 영예를 돌리는 것, 그리고 국민에게 전쟁터에서 쓰러지는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전사자를 현창하는 국가의 논리를 이 이상 알기 쉽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쿠라의 병영에서 거행된 초혼제에서, 전쟁으로 외아들을 잃은 한 노인이 처음에는 단지 울기만 하다가 초혼제에서 '명예로운 전사'로 칭송 받은 외아들의 죽음이 결코 슬픈 일이 아니라고 말하며, 크게 만족해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앞에서, 전사자를 낸 유족의 감정은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슬픔이 국가적 의식을 거침에 따라 완전히 달라져 기쁨으로 전화된 것이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마치 연금술에 의한 것처럼 유족 감정이 180도 반대 방향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야스쿠니 신앙을 성립시키는 감정의 연금술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전사자의 대제전을 거행해야 한다>가 발표되고 나서 약 1개월 뒤인 1895년 12월 15일에 오데라 야스즈미 육군소장 이하 1,500명의 초혼식이 거행되었고, 마치 <시사신보>의 주장에 화답한 것처럼 12월 16일부터 3일 동안에 걸쳐 청일전쟁의 임시대제가 거행되었다. 첫날에는 칙사의 파견이 있었고, 그 다음 날에는 '대원수' 명치천황 스스로가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였다. 야스쿠니신사는 이렇게 점차 그 권위를 높여, 러일전쟁 후에는 일본의 전몰자 제사의 중심시설로서 결정적 지위를 확립해간다. 야스쿠니 제사는 비애의 감정에 잠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슬픔이나 아픔의 공유, 즉 추도나 애도가 아니라 전사를 기리어 칭찬하고 미화하면서 공적이라 내세워, 뒤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하는 것, 즉 현창인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이런 의미에서 결코 전몰자 추도 시설이 아니라 현창 시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장 역사인식의 문제 - 전쟁책임론의 저편에야스쿠니 신앙은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비참함과 무시무시함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그것을 성스러운 세계로 승화한다. 동시에 전사자 유족의 슬픔, 허무함과 같은 감정을 '명예로운 전사'라는 강력한 의미를 부여해 수탈한다. 그러므로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사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 오로지 '상=비애'의 감정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전사를 기뻐할 것이 아니라 슬퍼할 것, 오로지 애도할 것, 그리고 계속해서 추도할 것!
그러나 여기에서 곧바로 다음 문제가 나타난다. 바로 역사인식의 문제다. 생각해보자. 일본군 병사가 맞은 '비업(非業)의 죽음'에 대한 감정이 기쁨에서 슬픔으로, 현창에서 추도로 바뀌었다고 한들,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국 병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본 국민에게만 국한된, 일본 국민 내부에서 완결되는 추도공동체이며 애도공동체일 뿐이다. 그 공동체는 전쟁으로 죽은 자국 병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일 뿐, 그 죽음을 초래한 전쟁 그 자체의 성격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오로지 가족이나 동포의 전사를 슬퍼하고 추도할 뿐이라면, 그 전사를 초래한 전쟁 그 자체의 성격을 물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전사자에 대한 애도를 넘어서 전쟁 그 자체의 성격을 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은 우선, 일본 국민의 바깥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생긴 대규모 사망자와 피해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 국민의 바깥에, 애도의 대상이 되는 일본군 전몰 병사가 참가한 전쟁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일본군 전몰 병사의 몇 배나 되는 수의 사망자와 피해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사망자나 피해자와의 관계를 도외시하고 일본 국민만의 추도공동체나 애도공동체에 머문다면, 그 추도나 애도 행위 자체가 밖으로부터의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일본군 전사자들이 참가한 전쟁은 일본의 타자에게, 일본의 바깥에 얼마만큼의 죽음과 피해를 초래한 것인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전사자들의 전쟁은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에, 또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겪었던 여러 민족에게 얼마만큼의 죽음과 피해를 초래한 것인가? 그것을 물을 수 없다면, 자국 전사자에 대한 추도나 애도도 타자로부터의 비판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그 정당성은 근저로부터 와해될 것이다.
야스쿠니 문제에서 역사인식이 거론되는 것은 이른바 A급전범 합사 문제 때문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야스쿠니 문제에서 역사인식에 관해 물을 때 그것을 A급전범 합사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결국 이 문제를 극도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그럼 A급전범 합사 문제란 무엇인가? 우선 A급전범이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 즉 침략전쟁을 주도한 죄로 기소된 28명을 일컫는 말이다. 야스쿠니신사의 A급전범 합사는 왜 비판의 대상이 되는가?
그것은 우선, 그들을 '영령=호국의 신'으로 현창하는 것은 그들이 주도한 전쟁을 침략전쟁이 아닌 정의의 전쟁으로 정당화하는 것과 연결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단지 순수한 일개 종교법인의 역사관이라면, 민주주의 사회의 사상이나 신앙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허용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후에 수상이나 천황의 참배가 되풀이되면서 국가와의 고리가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전반까지는 한국과 중국 정부도 침묵을 지켜왔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신국가주의 노선을 추구한 나카소네 수상이 '전후정치의 총결산'을 외치며 등장하자,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강하게 경계하는 한국과 중국 정부의 허용 한도를 넘어버린 것이다. 이후 한국과 중국 정부는 A급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신사에 일본수상이 참배하는 것은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라며 계속해서 강하게 반발해왔다. 중국의 이런 입장에 대해 일본이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반응은 A급전범 분사론이다. '분사'라는 것은 일단 합사된 영혼을 분할해 일부를 다른 곳에 제사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나카소네 내각은 중국의 비판을 받고 A급전범 분사를 시도하기도 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A급전범 분사론은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역사인식을 심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한다는 것이다. 야스쿠니 문제를 A급전범 분사론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얼핏 보면 전쟁책임 문제를 중시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반대이다. 그것은 전쟁책임 문제를 축소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역사인식 문제를 더욱 은폐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지금, 만일 A급전범이 분사되었다고 하자.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본수상이 야스쿠니신사에 공식 참배한다. 한국 정부나 중국 정부에서는 아무런 항의도 할 수가 없다. 그런 다음 A급전범 합사가 세상에 알려진 뒤 끊어졌던 천황의 신사 참배가 부활한다. 수상의 공식 참배를 원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은, 무엇보다도 천황의 참배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의미로는 도쿄재판이 지닌 거대한 문제점을 반복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소화(昭和)천황이 A급전범을 배제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고 영령들을 위무한다. 그것은 도쿄재판이 주된 전쟁책임을 A급전범에게 집중시켜 희생양으로 만듦으로써, 소화천황과 압도적 다수의 일반 국민의 전쟁책임을 불문에 부친 구도와 흡사하다. A급전범 분사론이 이런 희생양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노나카 히로무 관방장관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누군가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A급전범 여러분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지게 해, 그분들을 분사한다."(1999년 8월) "누군가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A급전범에게 지게 한다"라는 것은, 너무나도 편의주의적인 책임 전가이며 강요이다. 이와 같이 A급전범 분사론이 전쟁책임의 축소로 이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전쟁책임론은 겨우 역사인식 문제의 입구에 다다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전쟁책임'이라는 말이나 '전쟁책임론'이라는 관점 바로 그 자체가 역사인식의 심화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책임이란 무엇인가? 전후 일본사회에서 이 말은, 가장 좁게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의미하고, 좀더 넓게 이해될 경우라도 도쿄재판에서 심판 받은 책임, 도쿄재판에서 추궁 받은 책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지 않는다. 도쿄재판에서 심판 받은 것은 1928년 이후의 전쟁책임이며, A급전범은 만주사변(1931)과 그 이후의 중국 침략 및 태평양전쟁의 주된 전쟁책임자로서 심판 받은 것이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는 역사적으로 1869년에 도쿄초혼사로 창건되어, 1879년에 '야스쿠니신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신사의 등급을 제정한 뒤부터, 근대 일본이 행한 모든 전쟁에 관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야스쿠니 문제에서 역사인식이 문제될 때 그것을 전쟁책임론의 관점에서 논하는 한, 사실상 만주사변 이전의 모든 전쟁이 간과되고 만다.
여기에 1935년 9월 20일에 발행된 <야스쿠니신사 충혼사>가 있다. 당시의 육군대신 관방과 해군대신 관방의 감수 하에 야스쿠니신사 사무소가 편찬·발행한 것으로 전5권 총 5천여 쪽에 달하는 대작이다. 오늘날의 일본 정부가 '지난 대전'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중일전면전쟁의 시작(1937)으로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까지의 시기를 가리키고, 그 사이의 일본 전사자수는 군민 합쳐 310만이라고 한다. 야스쿠니신사 발표의 합사자수에서도 그 두 전쟁의 전사자가 전 합사지수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야스쿠니신사의 전쟁으로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만을 생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