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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독재의 영웅 만들기

권형진, 이종훈 지음 | 휴머니스트
1부. 새로운 '대중영웅'이 등장하다



호르스트 베셀 - 만들어진 나치의 '대중영웅'



'엘리트 영웅'에서 '대중영웅'으로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만들어지다: 나치 집권 초기 독일 사회는 구(舊) 엘리트 집단과 신(新) 엘리트 집단의 재배치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20세기 초반 많은 독일인들이 엘리트주의를 기초로 한 영웅주의를 신봉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나치 체제가 추구한 사회 지도층의 재편성은 지극히 '독일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치 독일에서 엘리트주의를 기반으로 한 영웅주의는 그 한계점이 명확히 그어져 있었다. 특히 살아 있는 인물들이 '지도자' 히틀러의 위상을 넘거나 그와 동등한 존재가 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치 체제에서 최고의 엘리트 영웅은 히틀러 단 한 사람뿐이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히틀러 신화는 나치 집권 기간 동안 유일무이한 현상이었다. 나치의 엘리트주의와 영웅주의가 히틀러라는 개인으로 체화되고 정형화된 것이었다. 따라서 집권하기 이전 나치스는 대중운동으로서 나치즘을 대중에게 선전하고 그들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하여 전통적인 영웅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이라는 민족적 재앙을 경험한 독일인들에게 민족의 동질감과 위대성을 강조할 수 있는 민족영웅의 이미지는 매우 효과적인 정치 선전의 도구였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이전과는 달라야 했다. 아군과 적군이 수 킬로미터 또는 수십 킬로미터로 길게 늘어선 전선에서 참호를 파고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나폴레옹과 같은 전투 지휘관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기술문명의 발전으로 전쟁의 양상도 이전의 전쟁과는 사뭇 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와 같이 군사 지휘관이 전쟁의 영웅이 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 병사들이 기억하는 전쟁은 비좁은 참호 속에서, 또는 몇 평 되지 않는 철조망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제한되었다. 이들에게 진정한 영웅은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 분대장이나 소대장과 같은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을 바쳐 전우를 구하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일반 병사가 더 많이 필요해졌고, 평범한 병사들이 전쟁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는 늘어났다. 새로운 유형의 전쟁영웅이 탄생한 것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 사회에 전몰장병에 대한 사자(死者) 숭배가 자리 잡도록 만들었다.



'대중영웅'이라는 새로운 영웅 등장 : 1933년 정권 장악에 성공한 나치스는 자신들의 집권을 '독일 혁명'으로 선전하였다. 여기서 나치 혁명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민족사회주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이를 '민족사회주의(경배) 의식'을 통하여 기념하며, 민족적 종교의식으로 승화시켰다. 1923년 실패한 나치 쿠데타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영웅기념일' 행사는 나치의 정치종교 의식을 특히 잘 보여준다. 쿠데타 당시 사망한 16명을 기념하기 위하여 히틀러는 1926년부터 11월 9일을 나치당 내에서 전국적인 '애도일'로 선포하고 그들의 '순교'를 기리는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히틀러에 따르면 이들이 흘린 피는 "제3제국을 위한 세례성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수렁이 된 참호 속에서 죽어간 무명용사들은 아무 의미 없이 죽어간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위하여 숭고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전후 수많은 전몰장병 기념물들이 세워졌다. 이렇게 전통적인 엘리트 영웅상은 국가적ㆍ사회적 목적에 의해 그 의미가 전화되고 확대되어 대중영웅의 이미지로 변화되었다. '대중영웅 숭배'의 사례라고 할 수 있는 호르스트 베셀의 경우를 살펴보자.



호르스트 베셀은 누구인가?

청소년기의 호르스트 베셀
: 빌레펠트에서 1907년 호르스트 베셀이 태어났다. 1922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당시 열 네 살이었던 호르스트 베셀은 보수 기독교 색채가 강한 독일국가인민당의 청소년 조직 '비스마르크 소년단'에 가입한다. 그러나 후에 이 단체의 평범한 프로그램에 호르스트 베셀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 훈련이나 테러 연습과 같은 청소년 단련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좀더 급진적인 '바이킹 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1926년 베를린 대학의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바이킹 연맹이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프로이센 주에서 불법화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 사건들이 그렇듯이 프로이센 주 바이킹 연맹의 쿠데타 음모도 증거 불충분으로 소송이 중지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호르스트 베셀은 정치적으로 무소속자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찾은 새로운 정치조직은 거의 와해 상태에 있던 나치 돌격대(SA)였다. 돌격대에 가입하면서 괴벨스(Joseph Goebbels)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호르스트 베셀은 크게 고무되었고, 1927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3차 나치 전당대회에 참가하며 돌격대 활동에 완전히 몰입한다.



그는 법학이라는 쉽지 않은 전공 공부를 하면서 돌격대 활동을 계속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돌격대 활동에만 전념한다. 호르스트 베셀은 알렉산더 광장의 돌격대 제4지대 제1대에 속한 돌격대 분대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호르스트 베셀은 선동 연설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하였다. 1929년 트룹퓌러로 승진한 호르스트 베셀은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하인 지역에 돌격대 제5지대를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제5지대는 베를린 돌격대 중에서 가장 과격한 집단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1929년 말 제5지대는 소속원이 약 240명으로 급증하였다. 또한 선동 연설가로서 호르스트 베셀의 명성도 높아져 베를린에서 거의 괴벨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호르스트 베셀 피살사건 : 그는 프리드리히스하인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알게 된 창녀 출신의 에르나 예니케와 동거하며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예니케와의 사소한 불화로 화가 난 집주인(엘리자베스 잘름)이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 죽은 남편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되었다. 1930년 그녀가 남편의 옛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단골 술집으로 갔을 때, 그곳에는 일단의 '붉은전사동맹'의 단원들이 몇 시간 전 일어난 나치 돌격대의 피격 사건에 대하여 대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붉은전사동맹의 행동대장이 몇 시간 전 길거리에서 나치 돌격대에게 총격 피습을 당했던 것이다. 그들이 범인으로 호르스트 베셀의 부하들을 지목하고 있던 차에, 잘름 부인과 문제를 일으킨 나치 돌격대원이 다름 아닌 그들이 찾던 호르스트 베셀이라는 소리를 듣자 동지의 복수와 함께 악명 높은 나치 돌격대의 행동대장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처단할 것을 결정하였다. 호르스트 베셀의 방으로 들어간 공산당 행동대원들 중 알브레히트알리 휠러가 그의 얼굴에 대고 권총을 발사하였다. 프리드리히스하인 병원으로 실려간 호르스트 베셀은 5주 후에 패혈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나치의 '대중영웅' 호르스트 베셀 만들기

'베셀 신화'의 창조자, 괴벨스 : 호르스트 베셀의 죽음은 당시의 상황에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하여' 전사하였고, 이후 좌우익의 내란 상태에서 무수히 죽어갔다. 그러나 '호르스트 베셀 신화'의 탄생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괴벨스와 베셀 사이의 개인적 관계와 그의 죽음을 나치 운동의 신화로 만들어낸 괴벨스의 선전 전략이다. 이미 베셀의 장례식을 전후로 그의 죽음을 나치 '대중영웅'의 숭고한 죽음으로 만들려는 작업이 괴벨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30년 그는 <돌격>지에 베셀을 '사회주의자 예수'로 묘사하면서 신성화하기 시작하였다. 베셀은 조국을 위하여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삶에 지친 노동자들을 찾아간 '사회주의자 예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노동자들에게 준 구원의 약속은 조국 독일이었다.



나치 정권은 베셀의 죽음을 신성화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공시설의 이름을 개명하는 작업이었다. 또한 베셀을 나치즘의 '순교자'로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도 즐겨 이용된 방법이었다. 베셀의 무덤은 나치의 성지가 되었고, 그의 묘석에는 그의 노래 <깃발을 높이 들고(베셀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나치의 행진가. 그의 사망과 함께 나치즘을 상징하는 문화적 기제로 적극 활용됨)>를 상징하는 부조물이 첨가되어 나치의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춰나가게 된다. 그 외에도 베셀 신화를 대중의 일상에 접합시키기 위하여 그의 전기와 그를 주인공으로 다룬 수많은 출판물들이 간행되었다.



'천년 왕국'을 위한 순교자, 호르스트 베셀 : 베셀 신화의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는 그의 살해 사건 이후 괴벨스에 의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진 순교자라는 이미지다. 이것은 나치가 '투쟁시기'라고 부르는 집권 전 시기에 나치 혁명의 달성을 위한 자기희생의 도덕률을 상징하였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 '피와 대지'로 대표되는 '민족 공동체' 이데올로기는 철저히 개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호르스트 베셀의 순교자적 영웅상은 1933년 이후 청소년들이 본받아야할 대표적인 민족사회주의의 청소년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만들어진 '대중영웅'의 실체

나치의 대중영웅 만들기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대중의 일상이 머무는 모든 곳에서 베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치 집권 이전에는 전통적인 영웅을 만나는 장소와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다면 나치가 집권한 후 독일 국민은 대중영웅 베셀을 어느 곳, 어느 시간에도 만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영웅 만들기가 가능하였던 가장 큰 이유는, <호르스트 베셀 노래>라는 문화기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독일 대중이 접하는 모든 문화 매체가 나치의 호르스트 베셀 영웅 만들기에 동원된 것이었다. 또 나치의 베셀 영웅화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나치 정권이 대중들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보았던 호르스트 베셀 신화의 창조를 위한 다양한 방법들은 뛰어난 나치의 대중 선전ㆍ선동 정책의 결과물이었다. 나치 체제가 만들어낸 대중영웅 베셀의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지금도 존재한다. 근래에 유럽과 독일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는 신나치 운동의 추종자들이 그의 무덤을 찾는 순례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젊은 극우주의자들만이 아니라 호르스트 베셀의 영웅 신화를 일상에서 직접 경험한 나이 든 세대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승복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정치학



이승복 사건의 진실 게임


그동안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다뤄져왔던 '이승복 어린이의 비극' 이야기가 1997년부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남한 반공교육의 상징이었던 이승복 사건이 공식 교과과정에서 빠지게 된 사실은 1990년대 탈냉전과 남북 화해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작지만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2004년 10월 28일, '이승복 사건 오보 논란'과 관련해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심에서 재판부가 원고인 조선일보사 측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리면서 잊혀져가던 이승복의 이름이 다시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었다. 이승복이 무장공비의 위협 앞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하고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가 "기자의 현장 취재도 없었던 '작문기사'였다"는 피고 측의 의혹에 대해 재판부는 "<조선일보> 보도는 현장 취재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결론지었다.



대법원 상고 가능성이 남아 있으므로 아직 진실 게임은 끝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법정 진실 게임에서는 조선일보사가 진실의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 진실 게임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질문과 공방은 어쩌면 이 사건이 갖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은폐시키는 효과를 발휘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은폐되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바꾸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승복이라는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발언할 수 있었던 사회ㆍ역사적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대중으로부터 나온 이승복이라는 영웅이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순교자가 된 소년

"공산당이 싫어요"
: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에서 북한 측 남파 공작원들에 의해 열 살 소년 이승복을 포함한 일가족 네 명이 살해되고 두 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다룬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공비'들이 산골 외딴집인 이승복 가족의 집에 침입, 가족을 협박하여 강냉이를 먹고 가족 다섯 명을 안방에 몰아놓은 다음 '북괴의 선전'을 하였다. 그런데 그 때 열 살짜리 어린이인 이승복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자, 공비들은 "입버릇을 고쳐주어야겠다"며 이승복의 입을 찢은 뒤 돌로 내리쳐 죽였고, 이승복의 두 동생도 돌로 짓이겨 살해했으나, 함께 돌로 가격 당했던 형 승권이만 다행히 살아났다.



사건이 있은 지 14년 뒤인 1982년, KBS에서는 <증언 10세 소년의 절규: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승복의 형 이승권의 담담한 증언이 비중 있게 다뤄졌다. '1968년 12월 9일 저녁 이승복의 집에 침입한 무장간첩들은 방에서 메주콩을 주워 먹고는 숙제를 하고 있던 이승복 옆에 앉아서 이렇게 묻는다. "너는 북한이 좋니, 남한이 좋니?" 이에 이승복이 "우리는 북한은 싫어요."라고 대답하자 뒤에 있던 무장간첩이 바싹 다가와 "너 지금 뭐라고 말했니?"라고 했고, 다시 이승복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무장간첩이 "야!"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승복 입에다 칼을 넣고 위협하였다. 이때 형 이승권이 일어나서 "왜 이러세요?"라고 말하자 무장간첩 중 한 명이 개머리판으로 내리쳐 이승권은 정신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KBS 인터뷰 증언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승복은 무장공비의 장난 섞인 질문에 그저 어린아이답게 솔직히 대답했다가 불행하게 살해된 불쌍한 소년일 따름이었다.



이승복의 실언으로 인한 참극? : <조선일보> 보도를 유력한 '사실/진실'로 받아들이고 생각해보자. 열 살 소년이 총칼의 위협 앞에 굴하지 않고 무장한 남파 공작원들 앞에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발언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와 관련해 2004년 10월 재판 판결에서는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한다. 재판부는 이승권의 증언에 근거해 "이승복이 국군인지 공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공산당에 대해 묻는 질문에 당시 반공교육이 투철한 상황에서 '공산당이 싫다'는 취지의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성 해석을 내렸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이 사건은 산골 어린이의 빛나는 반공투쟁이 아니라 순진한 어린이의 무의식적 실언이 빚은 참극인 셈이다.



순교자 이승복, 영웅이 되다

이승복이 영웅이 되어야 할 이유
: '싸우면서 건설하자'라는 구호에 집약되어 있듯이 박정희 체제의 개발주의는 반공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반공주의는 '무력 남침 전쟁'이라는 예감할 수 있는 공포에 기반해서 작동했다. 박정희 체제는 하루빨리 산업화를 추진하여 북의 군사ㆍ경제력을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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