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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발전소

옌스 쥔트겐 지음 | 북로드
지루한 세상을 도발하라!



열정과 냉소

철학은 처음 시작될 때부터 선동하고 부추기며 도발하는 형식을 띠었다. 도발은 대개 익숙한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90~399)만 해도 그 당시 세상의 말썽거리로 통했다. 소크라테스는 초라한 옷차림부터가 하나의 도발이었는데 그는 성공이니 부유함이니 하는 일상적인 가치들을 의심거리로 삼고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해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도, 그는 굴복하며 스스로를 변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재판정의 무능함을 비난했다.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법정은 끝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도발의 역사는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개' 같다는 의미와 더불어 '빈정거리고 비꼰다'는 의미와 연결되는 견유(犬儒)학파도 소크라테스의 후예다. 견유학파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디오게네스(기원전 400~328)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무소유 정신을 본받아 실천했는데 그가 벌이는 해프닝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방귀를 뀌어대고 아무데서나 잠을 자곤 했으며, 사람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기도 했다. 그는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근친간의 성관계가 전혀 불경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고, 근친 살해를 허용하는 법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집도 없었던 디오게네스는 항아리 속에서 꽤 오랫동안 지냈다고 한다. 항아리 속에 들어가 있는 디오게네스의 모습은 독일 쾰른에 있는 로마-게르만 박물관의 모자이크 한가운데에 부조로 남아있다. 디오게네스가 쓴 희곡에도 이처럼 이해하기 힘든 도발적인 내용들이 담겨졌는데, 그는 자신의 작품을 '동전을 다르게 주조했노라'는 말로 설명했다. 이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어로 노미스마(nomisma)는 '동전'이란 뜻뿐만 아니라 '관습'이란 뜻도 있다. 따라서 디오게네스의 철학은 '관습을 뒤엎어버리자'는 것이었다. 디오게네스 이후 로마는 아테네를 정복했고, 철학은 여러 세기에 걸쳐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건 오해라니까!



사실과 인용

사실에 바탕을 둔 진술만이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이라는 것이 정말 그렇게 확고부동한 것일까? 전문가가 손을 대면 그 '사실'이라는 것도 굴절되고 변형된다. 신문의 머리기사만 비교해보아도 그렇다. 똑같은 사건이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별다른 뜻 없이 자기가 들었던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는 서로 다르게 전달된다. 이야기를 전할 때면 거의 대부분 전달자의 견해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확고한 것일지라도 바뀔 여지는 조금이나마 있게 마련이다. 다음의 이야기에서도 그걸 확인할 수 있다.



「예수회 수도사 한 명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 한 명이 기차의 같은 칸에 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일과에 따라 기도서를 읽었다. 그때 예수회 수도사가 담배 한 갑을 꺼냈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는 깜짝 놀라서 "성서를 읽을 때 담배 피는 건 금지되어 있는 거 몰라?"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회 수도사는 자신이 수도원장으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 수도사도 특별허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는 "수도원장에게 기도 하면서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고 물었다가 호되게 질책만 받았다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회 수도사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식으로 물었어야지. 난 수도원장에게 담배 필 때 기도해도 되느냐고 물었다네."」



대조와 비교

어떤 대상의 인상을 바꾸는데 말의 뉘앙스만 사용되는 건 아니다. 비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상인들이 물건을 팔 때 상품의 가격보다는 가격대비 성능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철학자들은 수백 년 간의 연습을 통해 힘들이지 않고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능력을 개발했다. 철학의 테마 중에서 언제나 으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죽음' 혹은 '고통'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조금만 바라면 되지."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가난에 대한 인식을 '결핍'에 둔 것이다.



'말 비틀기' 역시 타인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말 비틀기를 이용하면 아주 조그만 변화로 전혀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게 된다. 프랑크푸르트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 기술의 대가이다. 역사학자 안드레아스 힐그루버의 파시즘적 사상을 이 기술을 이용해 들춰냈다. 힐그루버는 자신이 저술한 『이중의 몰락』이라는 책에서 '나치 독일의 마지막'에 대해 이렇게 썼다. "최후의 절망적인 방어와 붕괴와 탈주 등의 위기 속에서 그나마 제 일을 했던(sich bew hrt) 사람들은 민족사회당 쪽의 사람들이 많았고, 다른 사람들은 비참하다고 할 정도로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이 글은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노련한 지식인이 작정하고 나서면 불리한 간접증거로 돌변하게 된다.



하버마스는 이 글을 인용하면서 힐그루버가 나치를 두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기위해 힐그루버의 글을 인용하면서 '제일을 하다sich bew hrt'라는 동사를 '유능한bew hrt'이라는 형용사로 바꾸어버렸다. 즉, '그나마 제일을 했던 나치당'을 '유능한 나치당'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사실 바꾸기의 기술은 때에 따라 마음대로 두들겨 팰 수 있는 허수아비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칸트 가라사대



권위

우리가 믿고 있는 걸 우리가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진리'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 바 있다.

1. 우리 스스로 지각했기 때문에 믿는 것들

2. 스스로 궁리하여 추론해냈기 때문에 믿는 것들

3.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에 믿는 것들



우리가 갖고 있는 확신들이란 첫 번째나 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 종류가 대부분이다. 태양이 건초더미보다 크다거나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알고 있는 것은 순전히 우리가 그 사실을 어디선가 읽었거나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 사안을 전하는 사람 자체를 평가하게 된다. 즉 훌륭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친한 사람이나 기관에 자신의 생각을 연결시키려고 한다. 이는 '권위'를 끌어들여 근거로 삼는다는 뜻이다. 유명 인사들이 나와서 특정 상품을 광고하는 것, 이른바 '추천사' 효과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철학에서라면 고전적 철학자들이 바로 그렇게 이용된다.



고전적 대가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인물들이지만 어떤 테제를 칸트나 플라톤과 연결시킬 때 토론에서 좀 더 유리해지는 게 사실이다. 고전적 철학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존재들이다. 대가들은 후세에 의해 기념비가 세워지고 실제 그들의 모습보다 더 위대한 모습으로 전해지게 된다. 심지어는 완전히 허구로 만들어진 권위자들도 있다. 좀머 박사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독일에서 매우 유명한 상담자인 좀머 박사는 1969년부터 한 청소년 잡지에서 끊임없이 조언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좀머 박사'는 실제 인물이 아니다. 좀머 박사는 편집인들과 여러 심리학자들로 이루어진 팀의 이름인 것이다.



반 권위

누구나 의지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처음 떠올린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외면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처음 편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권위자들의 기대 논거들이라도 그와 정반대 사실을 주장하는 다른 권위자들을 불러들이거나, 권위를 반박할 만한 논거를 들이밀게 되면 뒤집어질 수 있다. 철학사에서도 권위에 대한 반발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 잘 알려진 경우가 계몽주의 시대의 일이다. 계몽주의가 불붙은 것은 17세기로, 집단적 마녀사냥이라는 히스테리에서 깨어나는 과정이 계기가 되었다.



법학자이자 철학자인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1655~1728)도 처음에는 마녀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맡겨진 1694년 마녀재판에서 피고 여성의 유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작성한 감정서는 같은 학부의 동료 교수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토마지우스에게 '어떤 정황증거를 바탕으로 피고를 마녀라고 했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토마지우스가 사실을 증명해 보이지 못하자 그들은 피고를 석방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토마지우스는 감정서하나 때문에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지성인인 토마지우스가 '마녀의 존재'를 아무 의심 없이 믿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스스로 이 문제를 계속해서 궁리하던 토마지우스는 이러한 믿음이 '편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것을 이론으로 전개했다. 말하자면 '동물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에 의해 곧바로 제 몸을 가눌 줄 아는데, 사람은 오래도록 부모에게 의지하여 성장하기 때문에 미신과 편견에 약하다'는 것이었다. 토마지우스는 이를 계기로 독일 최초의 계몽주의자가 되었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편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는 원칙'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곧 제3자의 생각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과 경험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마누엘 칸트가 계몽주의의 기치로 내걸었던 "용기를 내어 스스로 네 이성을 사용하라 Aude Sapere!"는 문구도 칸트 스스로 생각해낸 게 아니었다. 그것은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고대 로마의 격언 "아우레 사페레!"Aude Sapere!"에 대한 일종의 번역이었다.

권위에 대한 맹종은 그 모든 계몽주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지 않았다. 현대인이 300년 전의 조상들보다 '그저 들어서 알게 된 것들'을 훨씬 더 많이 믿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생각하자'는 계몽주의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시도라도 이루어지려면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로 들어가 세상을 등진 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충분치 않을 듯하다. 황무지에서조차 온갖 '기억'의 영향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따라서 편견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가장 극단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머릿속의 하드드라이브에 저장된 기억이 완전히 지워질 때까지 홍두깨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능력'까지 함께 잃어버리게 하는 짓이다.



보고 또 보고!



관찰과 추리

철학자들은 자신의 작품에 생명력과 색채감을 불어넣기 위해 많은 '보기'와 '이야기'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중에는 남의 것을 베낀 경우가 많다. 그 보기들이 한 작가에서 다른 작가들에게로 계속 이어지면서 어떤 식으로든 왜곡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기로 들은 것들을 현실에 비추어보고 그것이 베낀 이야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의심해보고 그 보기들을 변형시켜보고 새로운 보기들과 바꿔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에드문트 후설(1859~1938)로 대표되는 현상학파의 목표였다.



현상학의 모토는 "사태 자체로! Zu den Sachen selbst!"였다. 후설의 제자들은 온갖 감정과 생각의 흐름 혹은 지각 현상들에 대해 정확하고 꼼꼼하게 설명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옛날 테제들 중 많은 것들이 순전히 멋대로 지어낸 상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했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는 '사물의 모양이 분명하게 고른 것으로 보이는 건 다만 그 사물을 휘둘러보듯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보다 자세히 살펴볼 경우, 모든 사물에서 수없이 많은 홈과 미세한 틈들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습관과 추리로 그는 미·적분을 발명했으며, 현대 컴퓨터의 이론적 선구가 된 모형을 장식화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 사람은 이겨내기 어려운 온갖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독일의 극지 탐험가이자 기상학자였던 알프레트 베게너(1880~1930)는 남아메리카 동해안 경계선이 서아프리카 서해안 경계선과 서로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여러 대륙들이 한때는 거대한 하나의 대륙을 이루고 있다가 나중에 서로 떨어져 나간 것'이라는 대륙이동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베게너를 머리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베게너는 자기 이론을 뒷받침해줄 증거를 찾다가 1930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후 30년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지리학자들은 대륙의 이동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를 내놓게 되었고, 오늘날 그 이론은 보편적인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내게 증거를 보여줘!



본보기

어떤 종류가 되었든 자기주장을 펼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본보기'다. 보통 본보기라고 하면 '어떤 테제가 옳다는 걸 뒷받침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사실'을 말한다. 이러한 본보기를 이용한 반증은 널리 알려진 가르침도 보기 좋게 무너뜨릴 수 있다.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나온 칸트의 정언명령(더 이상 말이 필요 없게 분명히 정해져 있다는 뜻)을 반격할 수 있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네 의지의 준칙들이 항상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들어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철학의 영원한 '결실'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뒷받침하는 본보기를 들자면 '다른 사람에게서 무얼 훔치거나 사기 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윤리이다. 하지만 반대 본보기를 들 수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절약하여 돈을 늘 은행에 저축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해보자. 그 원칙 자체로서는 무척 합리적이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절약이 합리적일 수 있지만 국가경제차원에서 보면 불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것을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까지 삼을 수 있을까? 칸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총각으로 남는 것이 원칙이 된다. 그것 또한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입각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타당한 본보기를 내세운 공격은 공격하는 이나 공격받는 이 모두에게 특별한 기회를 줄 수 있다. 반대 본보기로부터 공격을 막아낸 이론은 그것을 계기로 엄청나게 강해진다. 오래 전에, 과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양자역학을 둘러싼 토론을 사례로 들 수 있다. 1927년에 열린 제5차 솔베이 학술회의에서였다. 논쟁의 당사자는 양자역학 이론을 세운 볼프강 파울리(1900~1958),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그리고 양자역학이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 ~1955)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학술회의 기간 동안 매일 이들 세 사람에게 양자역학 이론에 대해 의심 가는 점들을 지적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본보기를 내세웠다. 파울리와 하이젠베르크는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이의에 개의치 않았지만 보어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하루 종일 반박할 논리를 궁리했다. 그리고는 매번 저녁식사 자리에서 본보기를 내세워 아인슈타인의 논거를 무력화시켰다. 아인슈타인도 여기서 물러서지는 않았다.



3년 뒤 제6차 솔베이 학술회의가 열렸을 때였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기본 바탕이 되는 불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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