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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

지구르트 헤벤슈트라이트 지음 | 문예출판사
1. 끊임없는 도전과 사랑의 생애



유년시절과 청소년기


마리아 몬테소리는 이탈리아가 해방과 통일을 맞아 경제적 낙관주의의 희망에 부풀기 시작하던 1870년에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통일은 정치적으로 낙후된 군주제라는 비민주적 구조하에 진행된 데다 당시 대규모 아동 노동 문제를 포함해 사회적 문제도 엄청났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 따라 교육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었으며, 개혁가들을 필두로 낙후된 학교 제도에서 벗어나 교육개혁을 이루려는 의지로 충만했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이렇게 정치적으로나 사회ㆍ경제적으로 개혁의 희망과 복고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이 양극화되어 있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긴장은 보수적인 진영의 아버지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진영으로 대표되는 어머니라는 형태로 그녀의 가정에도 존재하였으며, 그녀는 그 속에서 개인 스스로가 기존 상황에 맞서 강력하게 자신을 방어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얻는다.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세무사로 일하던 아버지의 직장을 쫓아 고향을 떠나 로마로 이사했으며 이후로도 그녀의 실향의 삶은 계속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집안에서 전통적인 역할 구분을 고수하려 애썼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외동딸을 자신의 뜻에 따라 안정된 중산층 가정에서 '정상적인' 직업을 준비하게 하였고, 궁극적으로 딸을 여교사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여성 교육은 여성을 가족에게서 이탈하게 해서는 안 되고 앞으로 해야 할 어머니 노릇과 주부 역할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청소년이 된 몬테소리가 이러한 전통적인 성 역할 분담에 대해 반항하고 여의사가 되어 남자의 성역을 침범하려 했을 때 부친은 몰이해와 거부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딸이 의사로 경력을 쌓고 박사 학위를 가진 여의사로서 일찌감치 사람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명인사가 되자, 비로소 아버지는 딸과 화해한다.



이와는 반대로 어머니는 자신이 도달할 수 없었던 '여성 해방'을 자식이 맞을 수 있기를 기대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딸이 주어진 역할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할 때나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여성으로 전문가의 경력을 쌓으려 할 때마다 늘 아낌없이 딸을 지원했다. 그녀는 엄격한 교육을 하는 대신에 아이가 지닌 발달의 소망을 깊게 이해하고, 마리아의 사고와 행동에 지침이 되어준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청소년기에는 아버지의 기대를 거스르며 반항했지만 결국 아버지가 제시한 방식대로는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선택한 바로 그 교육자라는 직업에서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냈으며, 그 과정에서 있었던 절망의 순간들마다 그녀를 북돋아주고 그 곤궁을 극복하도록 도와준 어머니의 가르침을 기억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이 새롭게 결성되는 교육 운동의 동지 모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평범하지 않은 의학도

청소년이 된 마리아 몬테소리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의학 분야에는 단 한 명의 여성도 의대에 입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만으로도 평범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의대 학장조차도 그의 입학을 거부했으나, 교황이 그녀를 위해 중재를 나서서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학 전공 입학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입학 자체도 강한 자의식이 요구되었지만, 학업 자체도 늘 새로운 도전이었고 자의식을 강화하는 과정이 되었다. 교수들 사이의 선입견을 극복하고 동료 남학생들의 차별과 야유를 이겨내야 했으며, 남자 동료들과 함께 시체를 해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감독관 한 명과 저녁 시간에 혼자서 어두운 불빛 아래 악취가 코를 찌르는 와중에 시체를 잘라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회의적인 상황을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유혹을 극복하고 자기 원칙을 강화하였다. 그녀는 영예로운 장학금을 받고 여학생과의 경쟁에서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남학생들 마음에 심어놓았다. 그녀는 결국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여의사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의사로 첫걸음을 내디디다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마친 스물여섯 살에 마리아 몬테소리는 베를린에서 열리는 국제여성회의 국가 대표로 선발된다. 이때부터 정치적으로 유력한 인물들, 즉 미국의 대통령, 인도의 간디, 교황 등에게 환대 받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녀의 화려한 약력이 시작된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나 다양한 정치 정당의 대표들이 자신과 자신이 대변하는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여성 문제 외에도 착취당하는 노동자나 교육조건 개선, 아동노동 퇴치 등 여러 사회 진보 운동에 참여하여 강연을 펼쳤고 덕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대학 부설 정신병동에서 수련의로 근무하면서, 참혹한 환경에 방치된 장애환자들을 위해 치료시설을 찾고, 더 쉽게 치료될 수 있는 환자들을 선별하는 일을 했다. 이 활동으로 그녀는 한 걸음 더 교육학적 소명에 다가설 수 있었고 어른 정신병자들과 함께 감옥과도 같은 보호 시설에 갇혀 지내는 어린이 정신장애아들을 보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하던 의사들의 시각과 달리, 몬테소리는 정신지체 문제가 주로 의학적이라기보다 더 주요하게는 교육적인 것이라는 영감을 얻었다. 이러한 장애아들의 잠자는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교육학적으로 장애아에게 적합한 길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장애아를 가르치며 성공을 거두는 한편, 갑작스럽게 치료교육 연구소를 퇴직하면서 그녀는 일반 교육학에 더 가까이 가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새로운 교육 방법을 동원해 얻은 초기 경험들을 어떻게 하면 모든 아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의학도인 자신이 충분히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이 전공을 바꿔 교육학과 학생으로 대학에 등록했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 자신의 작품을 시작했고, 로마 대학과 교사 양성기관에서 강의를 하다 결국 인류학과 교수가 되었다.



산 로렌초의 첫 번째 어린이집

마리아 몬테소리는 처음에 돌볼 사람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대규모 임대주택 단지에 마련된 놀이 시설의 감독을 의뢰 받고 곧 이 놀이시설에서 의미심장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 시설에서 그녀가 활동한 기간은 2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간은 교육학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는 데 충분했다. 그녀가 처음 접한 놀이시설은 성급한 건설 계획이 경제 하강 국면을 맞아 중단되면서 범죄와 매춘이 성행하고, 위생 상태가 엉망인 도시가 되어버린 산 로렌초에 위치해 있었다. 마리아 몬테소리의 눈에 1907년 이 어린이집의 아이들은 '문명과 무관한 어린이 집단'처럼 보였다.



초기에 몬테소리는 가끔 그곳에 머물면서 감독하는 역할만 했으나 어느 날 아이들이 전통적인 장난감보다 그녀가 제시한 자료를 가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할 뿐 아니라 엄청난 집중력으로 이 대상들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된 후, 아이들이 이제껏 생각했던 선입견과는 달리 내면에 자신의 발달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알맞은 환경에 두고 발달에 적합한 자료를 제공하면,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내적인 동기에 따라 움직인다는 교육학의 근원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몬테소리가 할 일은 적합한 환경을 갖춘 조건을 찾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발달에 필요한 자료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며, 교육과정에서 교사의 과제를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생겼다. 이로써 환경과 자료와 교사의 삼위일체를 통해 새로운 교육학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이 교육학을 일반 대중들에게 선전하고 확산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밀려드는 성공의 파도를 타고

중년이 된 마리아 몬테소리는 로마는 물론 이탈리아 전역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고 국제적으로도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는 아버지가 꿈꾸던 여교사가 될 마음이 없었던 청소년기에서 시작해 의학, 정신의학, 치료교육학의 우회로를 거쳐 이제 새로운 교육학의 초석을 놓은 교육학자가 되어 있었다. 첫 번째 어린이집 이후로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몬테소리 방법은 지구상 거의 모든 나라와 엄청난 수의 교육 실무자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자신의 교육 이념들을 실현하기 위해 쏟아 부은 엄청난 열정을 반증한다. 그녀의 양육 방법에 강도 높은 관심이 집중될수록, 세계 도처에 점점 더 많은 어린이집이 건립되었고, 강연과 교육과정 요청이 많아지면서 그녀 혼자서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자신이 벌이는 교육 운동을 뒷받침해 주는 재정적, 제도적 배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분명 어떤 국가의 도움이나 정치적인 영향력과 운영 재정을 가진 자리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독립성을 잃게 될 것이라 판단하여 몬테소리는 혼자서 일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가까운 친구들과 동료들로 이루어진 작은 그룹의 도움을 받았다. 수 많은 동료들과 친구들에 대해서 마리아 몬테소리는 일종의 모녀 관계를 맺었고, '어머니' 마리아는 평생 동안 다른 어머니들이 성장하는 자식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것과 같은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자식들은 독립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간다. 그녀에게도 이 이별은 슬픈 경험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자식들'은 평생 동안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력자로서 그녀 곁에 머물렀다.



아름다운 삶과 죽음

1910년에서 1915년 사이, 마리아 몬테소리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잃는다. 이제 그녀를 이탈리아에 붙잡아둘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몬테소리 본부를 세우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어 그녀는 1916년부터 이후 20년 동안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강연 여행을 하거나 교사 양성 과정을 전파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녀가 예순 여섯이 되던 해 스페인 내전 때문에 고향과도 같은 바르셀로나를 떠나 영국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국제적인 교사 양성 과정을 진행하다 거처를 고심하고 있던 중에 부유한 네덜란드 여성인 피어슨이 자신의 부모님 집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제안하여 네덜란드로 이주하게 된다. 피어슨은 몬테소리의 아들인 마리오가 그의 어머니와 인도에서 머무는 7년 동안 그의 네 아이들을 돌보고 나중에는 마리오의 두 번째 아내이자 마리아 몬테소리의 며느리가 되어 그녀의 노년을 지켰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식민 통치 아래 놓인 인도에 가서 교사 양성 과정을 진행하였고, 그 사이 그녀의 교육 이론은 또 한 번 범위가 넓어졌다. 그녀는 태어나서 만 세 살까지 아동의 발달과 양육에 관해 연구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흡수정신>이라는 새 책에 기록했다. 그녀는 외부적으로 움직임이 어려워지고, 쇠약해져가는 노구를 소진케 하는 기후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일하면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 전쟁이 끝나 유럽으로 돌아와 폭탄 세례를 받은 도시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러한 참혹상은 다시금 그녀의 교육적 사명을 불태우는 동기가 되어주었다. 전쟁 같은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근절하려면 어른들은 아이와 함께 평화를 누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녀는 다시금 자신의 가르침에서 희망과 전망을 길어내는 수많은 청중을 만나게 되었다. 유럽으로 돌아온 그녀는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몬테소리회의에서 자기 학설의 핵심적인 본질을 설명했다. 여든한 살 마리아 몬테소리의 연설에는 역설이 담겨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께서 제게 보여주신 크나큰 경의를 마주 대하면서 제게 한 가지 비유가 떠오릅니다. 여러분이 개의 관심을 어떤 것에 돌리려고 할 때, 개가 어떻게 행동 하는지 관찰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개는 여러분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손가락을 바라봅니다. 여러분이 제게 그토록 커다란 존경을 표시하실 때, 여러 분도 매우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가 지적해도 될까요? 이제까지 거의 40년 이상 저는 계속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마도 제 손가락을 보면 서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녀의 손가락은 얼마나 멋진가? 손가락에 얼마나 멋진 반지를 끼고 있는가!" 여러분이 내가 가리키는 쪽을, 즉 어린이를 바라본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내게 베푸는 더없이 큰 존경이자 더없이 깊은 감사가 될 겁니다.



2. 몬테소리 교육학의 교수, 방법론



[교육적인 시각]

관심의 양극화
: 아이의 강한 집중력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스스로 선택한 과제에 집중해서 여기에 몰두하는 아이의 강한 끈기를 경험하였고, 이를 '관심의 양극화'라고 불렀다. 즉 주의를 분산시키는 다른 환경은 무관심하게 제쳐두는 반면, 아이와 교구는 완전히 하나가 된다. 아이가 그런 '결정점'을 발견했다면, 그 이상의 발달 과정은 혼자 힘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다. '관심의 양극화'의 발견의 중요성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넘쳐나는 보조 수단들이나 그들의 관심을 끌려는 의도로 가해지는 요란한 자극이 아니라, 그들에게 적합하고, 그들을 위해 합목적적으로 계발되어 손으로 만지면서 다룰 수 있는 교구라는 것을 알게 된 데 있다. 그러면 아이들은 혼자 힘으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자기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 나간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어른의 안경을 쓰고 잘못 지각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과 '본성'에 따른 아이의 모습이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 '관심의 양극화' 현상을 정상적인 발달 현상으로 드러나게 해줄, 아이에게 적합한 주변 환경은 어떤 것인가, 인성을 형성하기 위해 아이에게 필요한 교구는 어떤 것인가, 교사가 할 일은 무엇이며, 아이의 관심과 자연스런 자아 발달이 가능하도록 교사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등의 연구 주제를 찾게 된다. 그녀는 아이에 대한 이런 새로운 시각을 기초로 만 세 살에서 만 여섯 살까지의 아이를 위한 교수법과 방법론을 창안했다.



억눌린 아이: 어른은 아이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할 일을 쉽고 재빨리 해낼 수 있기 때문에 교사들이 아이들의 노력을 덜어주고 그들을 위한다고 행동하는 것이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록 어른들이 더없이 좋은 의도로 이 모든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마리아 몬테소리는 이러한 태도에서 아이에 대한 어른의 억압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실제로 몸과 머리와 마음의 모든 성장은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으며 혼자 이뤄내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사회에서 올바르게 행동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과제를 갖고 있다.



겉보기에는 아이를 돕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를 억누르는 어른은 다른 수많은 문제가 생겨날 기반을 다지고 있는 셈이다. 예컨대 점점 더 이상행동을 많이 보이는 아이들에게 교사들이 보이는 노력을 생각해보면 교사들은 말썽을 부리지 않도록 아이들을 통제하고, 그들의 활동하려는 충동에 적절한 실행 가능성을 마련해주고, 소음과 어수선함을 막는다. 이상행동을 보이는 아이와 굼뜬 아이는 마리아 몬테소리가 '일탈'이라고 이름 붙인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본래 평온한 궤도에서 자기 발달을 진행하려는 아이가 가진 근원적인 능동성은 장벽에 부딪힌다. 에너지가 방출되고 그 에너지가 통제되지 않는 행동을 통해 폭발할 위험이 생겨난다. 이러한 현상에 맞서 싸워야 한다. 아이들의 '악의'는 어른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모양을 갖추고 대체된다. 반항이나 체념은 그런 대우를 받은 아이에게 나타나는 결과다. 그런 다음 어른은 그런 식으로 아이가 탈선하는 것이 인간의 '참된 본성'을 표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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