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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글자의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제1장 인간의 조건



생명 | 폭력, 공포 그리고 생존의 자유


생명이 '폭력적'이라는 것은 그 특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생명의 특성은 먹고 먹히는 데 있다. '동물의 왕국'에서 볼 수 있는 약육강식은 눈에 보이는 폭력일 뿐이다. 우리 식탁에 올라온 음식은 폭력의 과정을 거쳐서 살육된 것들이다. 다만 우리는 결과를 보기 때문에 은폐된 폭력은 잊고 음식 맛을 즐긴다. 채식주의자도 예외는 아니다. 식물은 최소한 생명계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생명체는 서로에게 치명적인 그 무엇이다. 자연의 순환을 이루는 과정도 생로병사의 죽음과 함께 다양한 '죽임'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살아 있는 것을 접하면 공포를 느낀다. 그것이 미지의 생명체일 경우 더욱 그렇다. 한밤중에 길을 걷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만나는 일이다. 생명체에 대한 이런 공포는 아마 생명의 본질적 폭력성에 대한 잠재의식 때문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한편 생명의 폭력적이고 치명적일 수 있는 성격은 각 생명체를 생존하게 하는 힘이 된다. 즉 생명체는 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그런 성격을 발현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모든 생명체의 살려고 애쓰는 성질 자체를 '자유의 발현'이라고 본다. 생존을 위한 자유의 발현이라는 생명체의 성격은, 그것이 내포하는 폭력성과 함께 누구든 생명 앞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생명은 두려운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무섭다. 그리고 생명과 연관된 것도 다 무섭다. 생명과 연관해서 인간이 하는 행위 또한 다 무섭다. 우리는 이제 생명 앞에서 무서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무서워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이 험난한 생태계에서 의연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렇게도 알고 싶어 하는 '생명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 | 모순적인, 너무나도 모순적인

우리는 자유를 자신 있게 인정할 수도 없고 쉽게 부정할 수도 없다. 레싱(G. E Lessing)이 말했듯이, "자신을 묶고 있는 사슬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모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자유가 존재하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하는 판단과 결정, 선택 등의 행위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바라고 갈구하는 것 등 인간의 어떠한 의지 표출도 자유롭게 한다는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 삶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절대적 결정론은, 사람이 살아야 하는 모든 의미를 삭제할 뿐만 아니라 삶을 '정지'시킨다.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를 배제한 절대적 숙명론이나 종교적 예정설도 마찬가지다.



나는 자유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행복을 추구할 것인가 하고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대는 자유로운가. 그렇다면 그대는 행복한 것이다. 그대는 행복한가.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대가 자유로운지 아닌지 모르겠다." 자유로우면 행복은 따라온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지향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자유의 일차적 정의는 분명하지만, 행복의 일차적 정의는 뭐라고 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을 앞세우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반면 행복을 지향하면서 자유를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아니, 행복은 드물지 않게 비자유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행복의 이름으로 자유를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유는 '모순적인, 너무도 모순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모순의 힘으로 이 세상 기만의 베일들을 들추어내는 힘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자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유혹 | 생생한 인간관계를 위한 멋진 놀이

우리는 흔히 사랑의 유혹은 줄다리기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치밀하게 계산된 밀고 당기기의 기술을 강조한다. 그러나 유혹은 기술과 전략 이전에 생명력의 발현이다. 밀고 당긴다는 것 자체가 생명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못한 생명은 지속되는 밀고 당기기의 긴장을 견뎌내지 못하고 빨리 결말을 내려 하거나 손쉽게 포기한다. 건강한 생명만이 이런 팽팽한 긴장을 즐길 줄 안다. 그러므로 유혹의 밀도는 생명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반영한다. 그런데 유혹을 생의 근본 조건으로 인식하기보다는 흔히 말하듯 상대를 꼬여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기술로 보면 이런 상호성을 간과하기 쉽다. 유혹을 주로 '정복의 기술'로 보는 경향은 인간의 문명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특히 여성의 입장에서 유혹을 남성의 성적 욕구를 이용한 권력 확장으로 인식하게 된 것도 남성 중심적 문명화 과정에 대한 역반응으로 나온 산물이다.



유혹의 본질은 상호 욕망의 실현에 있다. 유혹한다는 것은 상대의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다. 동시에 유혹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과정은 곧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 향유'의 유혹 행위가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유혹 당하다'는 수동태를 많이 쓰는데, '유혹 당하기'는 곧 '욕망 채우기'와 일치한다. 유혹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는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유혹이 곧 욕망을 실현하는 기회라는 점에서 매우 능동적이다. 인간관계가 점점 더 계산적으로 되어가는 시대에, 유혹이 정복하고 차지하는 기술과 전략이 아니라, 생명의 기운을 유지하고 즐겁게 살기 위한 근본 조건이자 삶의 지혜라는 인식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보는 것이 유혹의 원초적 의미를 되살리는 길일 것이다. 그러면 유혹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되고, 유혹 당하기는 단순하게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유혹을 받아주는' 지혜를 발휘하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가 된다. 결국 유혹은 즐거운 인간관계 맺기의 한 방식이 되는 것이다.



희망 | 깨어 있는 자들의 건강한 꿈

희망은 참 묘한 것이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속담이 있지만, 희망은 인간에게 '약 주고 병 주는' 듯하다. 희망이 없다면 삶의 의욕을 상실하기 쉽겠지만, 희망은 곧잘 이루지 못한 꿈의 안타까움으로 남기 때문이다. 희망의 엑스터시 이상으로 희망의 스트레스도 엄연히 존재한다. 스피노자(B. Spinoza)는 "두려움 없는 희망은 없고, 희망 없는 두려움도 없다."고 했다. 이것은 어쩌면 희망의 본질을 가장 잘 꿰뚫어보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류사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구원의 희망'을 의미하든, 일상생활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위한 아주 작은 바람들을 의미하든, 희망의 태생적 모순은 인간 삶의 조건일지 모른다. 이는 고대 신화에서 인류 시조의 이야기를 희망의 탄생과 연계해서 전개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희망이라는 말은 참 흔한 말이지만, 흔하게 쓰일 수 있는 말이 아님을 새삼 느낄 수 있지 않는가.



우리는 흔히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나 희망을 가지라는 다짐과 조언을 하지만, 그것은 때로 매우 '편한' 다짐과 조언이 되지 않은가? 고통이 희망의 동기이지만, 어렵고 괴로울 때 아무 대안 없이 희망을 가지라는 조언은 자칫 고통의 구체적 해결을 은폐할 수 있지 않은가? 희망을 현실을 극복하는 에너지로 내세울 때마다 우리는 그 진지함을 저울질해 보아야 한다. 아울러 희망의 이름으로 바라는 바가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다짐과 조언으로 연명하는 삶은 자칫 더욱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희망이라는 말은 아껴 써야 할 말이다. 희망을 잘 쓰려면 '마지막'처럼 써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이 쉽게 실망이 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희망은 사실 '부정하는 힘'으로 작용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즉 절망의 부정어가 될 때 희망이란 말과 그 말로 하는 다짐의 의미와 효과는 빛을 발한다. 매일같이 수많은 기대를 해도 좋다. 하지만 '절망은 없다'는 다짐을 위한 희망은 상자 속 귀한 보석처럼 아껴서 간직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행운 | 산들바람처럼 즐기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합리적으로 조직된 목적에 우연히 도달해서 큰 행운을 차지할 수 있는 것으로 첫손을 꼽으라면 그건 바로 복권일 것이다. 복권을 사서 맞추어보는 행위는 놀이로 즐기는 행위이다. 즐김은 가벼움의 미덕을 동반한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복권을 가지고 노는 행위는 너무 무겁다. 따라서 즐김이 없다. 당연히 놀이의 의미도 상실한다. 예를 들어보자. 최근 로또 복권의 열풍 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걸고 복권을 산다. 월급을 털어서 사고, 빚을 지면서 사고, 신용카드를 연체하면서 산다. 대박을 노리며 도박을 했다가 쪽박을 차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복권의 긍정적인 면을 행복감에서 찾는다. 복권을 사고 나면 적어도 일주일 동안 행복감에 젖어서 산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복권 구매는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한데, 이것도 역시 복권을 무겁게 즐기는 일면이다. 자신의 행복을 오로지 복권 맞추기에 실어버리니까 그것 자체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것을 무겁게 만드는 것은 삶의 지혜가 아니다. 어떤 작가는 "인생살이에서 가벼움은 구명대와 같다"고 했다. 가벼운 즐김은 우리 삶에 활력을 줄 수 있지만, 가벼운 것을 무겁게 대하는 자세는 인생이란 배를 가라앉게 만든다.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의 주인공 맥과이어 교수는 단골 식당에서 외상으로 식사할 때마다 주머니에서 당당히 복권을 한 장 꺼내 보이며, "내 장부에 달아둬. 여기 당첨이 확실한 복권이 있거든."하며 넘어간다. 이것은 그가 쓰는 위트이다. 식당 주인도 잘 안다. 그것이 이미 '꽝'인 복권이라는 것을. 교수는 복권과 놀이를 하고, 식당 주인은 이 놀이에 즐겁게 맞장구치는 것이다. 복권은 이렇게 가볍게 즐기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진짜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행운의 여신은 무겁게 노는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열풍처럼 지나가지만, 가볍게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산들바람처럼 다가와 입 맞추기 때문이다.



안전 | 일상의 덫, 일상의 요구

현대인들도 다른 동물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는 않지만(바이러스 같은 병원체나 모기 같은 병원전달체를 생각해보라), 문명화의 덕분에 적어도 '약육강식'의 먹고 먹히는 생존 경쟁에서는 어느 정도 안전하다. 그러나 자연의 공격으로부터는 여전히 취약하다. 특히 예기치 않은 자연 재해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때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도 없다. 원시인들이 자연 재해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을 피해 이주하였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다. 오늘날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일정한 조건 안에서 조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큰 위험이 다가올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일상생활의 지형을 떠날 수 있는 삶의 조건에 있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험의 가능성을 망각하며 산다. 그렇지 않다면 불안감 때문에 편하게 일상을 지속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석기 시대 인류는 날카로운 돌의 효용성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이 주는 위험 또한 감지하는 경험을 했다. 돌의 날카로운 면은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자르는 데에 매우 유용한 것만큼 잘못하면 자신의 살을 벨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원시 시대 사람들도 이미 최초의 도구를 만들었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즉 위험과 안전의 차원을 함께 감지한 것이다. 이러한 문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인류는 일상생활에서 문명이기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이 '해기(害器)'가 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원시 사회의 인간이 강한 맹수에 쫓기고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의 폭력에 시달리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미지를 그리면서, 문명사회의 안락함을 만끽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인은 '불안전한 삶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원시인들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유사 안전'이 우리 삶에 내재하는 불안전한 요인들을 감추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깊은 실존적 고뇌에 빠져 있으면서, 정작 안전이라는 생존적 일상 현실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2장 감정의 발견



낭만 | 치기라서 더욱 소중한 낭만


낭만의 감정은 또한 고독과 밀접하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인간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공통적인 감정이다. 고독은 타인과의 단절로 인해 사람을 자기 안으로 침잠하게도 하지만, 자아 성찰의 기회가 돼서 사람을 성숙하게도 한다. 혼자 있는 영혼은 그 지평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래서 고독한 사람은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것이 또한 고독한 사람의 낭만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적 고독은 세대 차이 없이 나타난다. 중년의 기성세대와 젊은 신세대 사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낭만의 성격은 추억과 의미, 촌스러울 정도의 소박함, 고독, 상상 그리고 의외로 현실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마음이다. 보통 사람들의 낭만이란 이런 것이다.



낭만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이기 때문에 삶의 공통분모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감성적이고 영적인 접근을 요구하는 인간적 삶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낭만은 합리성의 문제일 수는 없고, 인간의 영혼과 밀접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마른 영혼이 가장 지혜롭다."고 단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술 취한 사람이 아이에게 이끌려가고 있다. 다리는 비틀거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의 영혼이 젖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암시한다. 일상생활을 이끌어 가는 데는 이성적 활동을 보장하는 '마른 영혼'이 필요하지만, 가끔은 '젖은 영혼'의 낭만이 제공하는 일탈 또한 삶을 의미 있게 한다. 그래서 오늘도 도시의 서민들은 값싼 탁주로 촌스런 시심을 발휘하며 '낭만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쓰레기통 뒹구는 뒷골목의 낭만 고양이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면서 '더 자유롭게' 바다로 '떠날 거예요.'라고 치기 어린 다짐을 하는지도 모른다.



향수 | 노스탤지어의 손수건과 '문화적 인권'

향수의 감정이 인간의 삶에서 보편적인 것이라면, 우선 그것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쪽으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데에도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유적과 파괴되지 않고 잘 보존된 농촌의 자연 환경은 향수의 감정을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언제라도 다시 찾아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보존하는 일 또한 공동체적 임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스탤지어의 차원에서 보아도 '보존의 삶'이 '파괴의 삶'에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명언도 향수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일지 모른다. 좀더 현실적으로는 인간의 고향을 되돌아보며 성찰하는 자세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계획하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인권은 그 어느 때보다 다차원적으로 우리 시대의 화두이다. 인권을 정치적 맥락에서만 보려고 하는 것은 20세기적 사고라 할 수 있다. 물론 경제적이고 사회 복지적인 차원에서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도 있어왔다. 그러나 인간 고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생활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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