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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이명박 지음 | 랜덤하우스중앙
1장 1퍼센트의 가능성을 찾아서



열여덟 살 청년이었을 때 청계천은 내게 선망의 장소였다. 갓 상경해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일당 벌이를 하던 나와는 달리, 각종 공구를 파는 청계천 상인들에게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청계천 7가를 따라 죽 늘어선 헌책방에서는 각종 참고서와 교재를 팔았다. 그곳에는 가난한 고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시절, 청계천은 기술이든 명예든 부든 누구에게나 원하는 것을 얻을 기회를 주었다. 그동안 세상은 놀라울 만큼 변했다. 가난한 고학생이 대기업 CEO가 되고, 다시 정치가가 됐다. 그러나 청계천은 수십 년의 세월이 비껴간 듯 1980년대나 2000년대나 변한 것이 없었다. 그 풍경이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청계천을 찾는 사람들도 젊었지만 지금의 청계천은 그곳을 건설한 세대와 함께 늙어 가는 중이었다.



도심은 속성상 흐르는 곳이다. 차와 사람과 문화와 산업. 이 모든 것이 시대에 맞는 속도로 흘러야 한다. 그러나 아날로그 시대의 속도와 디지털 시대의 속도, 그 현기증 나는 차이를 청계천은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현대건설에 근무할 당시 청계천 지하에서 종종 메탄가스가 폭발하곤 했다. 서울시는 이 문제를 도로 곳곳에 시추공 같은 구멍을 뚫어 놓는 것으로 해결했다. 언론 통제가 가능한 때라 관계자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정보에 빠른 미군들은 내부 문건에 미군 차량 및 군속 차량은 청계고가도로를 지나다니지 말라고 경고했다. 1980년대에 이미 그러했으니 2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누군가 변화를 시도해야 했다. 그리고 이 일은 지나간 시대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그 시대를 가장 뜨겁게 껴안고 온 내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계천 복원을 떠올리게 된 미국 생활에서의 나의 첫 역할은 조지워싱턴 대 객원 연구원이었다. 1년 간 머물며 연구한 주제는 기업 경영과 국가 경영에 관한 것이었다. 나의 스케줄 맨 위에 있는 것은 세미나였다. 그런데 어느 세미나에서든 가장 큰 관심은 바로 환경이었다. 21세기는 환경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게 당시 미국학자들의 확신이었다. "혹시 빅딕 프로젝트(Big Dig Project)라고 들어 보셨나요?" 내가 환경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자 주변에서 귀뜸을 해 주었다. 21세기의 역사적 현장에 한번 가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얼마 후 보스턴의 찰스타운에서 노스엔드를 거쳐 다운타운으로 이어지는 고가도로로 향했다. 그곳은 멀쩡한 고가도로를 철거하는 중이었다. 유적으로 가득 찬 고도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철거하는 것이 바로 빅딕 프로젝트였다.



공사를 다 끝내려면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차는 지하로 난 전용 도로로 다니게 되고, 지상은 지평선 너머까지 거대한 공원이 펼쳐진다고 했다. 시행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몇 년간 논란이 있었지만 보스턴 사람들은 낭만을 택했다. 사회적 편익과 손실은 얼마인가 등의 대차 대조표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그곳의 계획은 환경이 주는 편익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빅딕 프로젝트는 당장은 엉뚱해 보이지만 손해나는 사업이 아니라 보스턴의 미래를 위한 훌륭한 투자였다. '아,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겠구나.' 보스턴은 현재 단지 한발 앞서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미래에는 그 어느 도시도 결코 추월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의 흐름을 읽고 빨리 시작하는 것, 그것은 곧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오버랩 되는 풍경이 서울 한가운데의 청계천이었다.



하루 17만 대의 차가 다니는 고가 아래의 지하 공간. 그곳이 어떤 상태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서울시 관계자들에게 청계천 지하에 들어가 보겠다고 요청했다. 그들은 예상대로 거절했다. 나는 평소 친분이 있던 서너 명의 시의원에게 부탁을 했다. 이왕이면 방송사에서도 함께 들어가 현장을 찍어 놓으면 더없이 확실한 증언이 될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다. 2002년 2월 25일, 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역사적인 현장으로 향했다. 일부 기둥들은 육안으로 보아도 이미 상당한 부식이 진행된 상태였다. "이 정도면 당장 교통을 차단해야 할 것입니다." 같이 들어간 독일의 구조물 전문가는 고개를 저었다. 복개 구조물은 이미 수명이 다 되어 있었다. 보수보다는 철거하는 쪽이 경제적인 면에서나 안전 면에서 돈이 적게 들 것이다.



2002년 들어 서서히 청계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복원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리기 위해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등 나를 부르는 모든 매체에 달려갔다. 청계천 복원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 준 덕분에 나의 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2002년 2월 22일, 나는 10여 년 전부터 막연한 생각을 해 오다 3년 동안 구체적으로 다듬어 온 청계천 복원 구상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각종 기사에서는 청계천 복원으로 인한 다양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서울시장 후보가 되기 위한 싸움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민선 서울시장 민주당 후보로 386세대의 선두주자 김민석 후보가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슈대결이었기에 20~30대도 끌어들일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청계천 복원은 서울이란 도시 자체의 혁명적 변화를 의미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안정은 기성세대가 원하는 것이고, 변화는 젊은 세대가 갈구하는 것이다.



2장 반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라



2002년 6월 13일, 마침내 나는 시장에 당선되었다. 나는 서울에 빚이 있었다. 가난한 이웃들의 정을 나는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을 위해 일을 해서 그 빚을 모두 갚고 싶었다.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부터 거의 매일 청계천으로 나갔다. 그리고 시장 직 인수위원회 사무실을 아예 청계천 옆에 있는 현대빌딩 6층에 차렸다. 서울 시내를 출근 시간, 평일 낮, 퇴근 시간, 야간 등으로 나눠 수십 번씩 지나다니면서 소통이 어느 정도인지 체크했다. 교통량과 도로 사정, 시간대별 문제점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택시기사는 어디를 가든 차가 꽉꽉 막히는 바람에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소연을 해왔다. 청계천 상인이나 노점상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노점이 생계가 막막할 정도로 장사가 안 되었다. 노점상이든 택시 기사든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예전처럼 땀만 흘려서는 안 된다. 변화에 발맞추어 적응해 나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청계천 복원 사업을 추진하는 추진본부는 기업으로 따지면 일종의 프로젝트 팀이다. 지원자를 받았지만 선뜻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는 건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크다는 의미다. 업무량이 많은 것은 물론, 실패라도 할 경우에는 앞으로 입지가 좁아진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추진본부의 인사는 처음부터 난항을 겪어야 했다. 적임자를 찾기 위해 과장 이상 지원을 받았는데 지원한 사람이 단 두 명뿐이었다. 7월 2일 첫 번째 임명을 하면서 모든 건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했다. 기업은 일의 결과를 중요시 여기지만, 공무원은 일을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의 책임 소재를 중요시 여긴다. 나는 안심하고 일에만 매진하라는 의미에서 일하는 과정에서의 실수는 시장인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한 것이다. 추진본부의 공무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사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실수에는 관대한 편이다. 그러나 게으름은 용서하지 못한다. 책임 소재가 어디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을 열심히 하다가 조직에 손해를 끼친 사람은 다음에 그 손해를 상쇄할 일을 해낸다. 반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은 손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27년 간 기업 생활을 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추진본부는 위에서 명령하면 아래에서 복종하는 상명 하복 체계가 아닌 철저한 기업식 운영을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사람을 우선 순위로 뽑되 차출 방식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자원해서 일하게 되면 일에 임하는 자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책임감과 소명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더불어 기업에서와 같은 조직원간의 경쟁을 유도했다. 한두 달 시간이 지나자 변화가 감지되었다. 마침내 스스로의 약점을 수정해 가며 소신껏 일을 추진해 나갈 조직이 생겨난 것이다.



언론은 속성상 한발 앞서 간다. 청계천 복원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선거가 끝난 뒤에도 끊이지 않았다. 복원의 타당성에 대해서 절감하던 시민들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자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청계천 지하에서 보고 느낀 것을 시민들도 똑같이 느끼게 된다면….' 눈으로 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것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강한 법이다. 이렇게 하여 청계천 투어를 계획해 냈지만 안전 문제가 있었다. 노약자를 위한 안전 대책을 세우고 성실한 자원 봉사자들도 모집하여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한 달 여의 준비 끝에 마침내 8월 13일 화요일 청계천 투어가 시작되었다. 나는 시민들과 함께 첫 투어에 참가했다. "여기 좀 보세요. 똥참외 싹입니다." 비가 와서 하수가 쏟아지기라도 하면 당장 쓸려갈 운명이지만, 참외 싹은 그 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세상에 하찮은 생명이란 없다. 그리고 시민들의 큰 호응 속에 진행된 투어는 복원 여론을 반대에서 찬성으로 바꾸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해 주었다.



7월 2일 발령 받은 상인 팀은 서울시 공무원들 중에서도 별동대였다. 상인 팀을 책임지고 이끄는 국장과 직원들의 자리는 누가 맡든 어려운 자리였다. 힘들 것이 불을 보듯 뻔하고, 만약에 운 좋게 풀어 간다 하더라도 그 과정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울 것이었다. 만에 하나 실패할 경우에는 80퍼센트의 시민이 지지하는 사업을 망하게 했다는 책임을 면할 길이 없었다. 나는 상인 팀에게 서울시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잊으라고 주문했다. "상인 팀이 상인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면 청계천 복원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못해요. 알다시피 현금 보상은 없습니다. 상인 편에 서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헤아려 서울시로 전하는 창구 역할을 해주십시오. 상인들이 우리를 그들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야만 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상가를 소유한 상인이든 임차 상인이든 상가는 상인에게 모든 것이다. 청계천의 1만여 상가에는 각각 스토리가 담겨 있는 데다 상인 단체만도 1000개가 넘을 정도로 이들의 이해관계는 얽히고 설켜 있었다. 대책을 세우려면 이들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상인 팀은 하루에 청계천 전 구간을 서너 번씩, 심지어 네댓 번씩 돌면서 상인들과 안면을 익혔다. 오지 말라고 해도 그 다음 날 또 찾아가 박대를 당했다. 자주 만나면 거리가 좁혀지게 마련이다. 사안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상인들의 요구에 국장 이하 전 스태프가 즉각적으로 응답했다. 어느덧 상인들 스스로 상인 팀 국장을 상인국장이라고 불렀다. 서울시 일을 하는 국장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국장이라는 뜻이다. 상대방을 설득시키려 할 때는 먼저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정이 쌓이다 보니 믿음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대화가 가능해졌다.



청계천 복원 공사를 2년 안에 끝내겠다고 하니 모든 사람이 나를 불도저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텔레비전 토론을 통해 공사 기간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는 설명한 적이 있다. 한 건설 업체가 공사를 하면 최소 5~6년이 걸리지만 공사 구간을 셋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건설 업체가 하면 공사 기간 역시 3분의 1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사 기간은 마음만 먹으면 더 단축할 수 있었다. 공사 구간을 더 짧게 나눠 버리면 해결된다. 그런데 내막도 들어 보지 않고 2년이란 공사 기간을 추상적인 생각만으로 짧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공사 기간 2년이 짧은 게 아니라 공사를 위해 준비하는 1년이란 기간이 짧다는 게 문제였다. 상인 단체와의 협상, 청계천 외곽 교통 개선, 노점상 문제 등의 현안은 반드시 1년 안에 마무리해야 했다.



실제로 기본 계획이 세워지는 1년 간은 어느 부서를 막론하고 200퍼센트 집중해서 일을 했다. 일을 할 때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고 해서 절대로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일의 순서와 타이밍 그리고 집중력이다. 2003년 2월 11일, 실시 설계가 마무리되어 청사진이 나오자 '마침내 우리가 임무를 완수했다'는 분위기였다. 공사 일정은 관계자들이 짜지만 일의 순서와 그것을 시작할 타이밍을 읽어 내는 것은 리더의 몫이다. 상인들과 원만한 타협을 이루어 내면 중앙 정부 또한 협조를 잘해 줄 수밖에 없으며, 상인 대책이 마무리되면 노점상들도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한다. 3년 동안 우리는 서울의 도심 풍경뿐 아니라 교통 시스템까지 모든 것을 변화시킬 작정이었다. 3년은 변화시키기에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3장 빠르게, 그러나 정확하게



공사 기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가장 어려운 것이 일정 관리였다. 담당자들이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워한 것이 바로 이 일정, 즉 시간 관리였다. 일정 관리를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공사 기간을 줄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공사에는 그것에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이 있다. 따라서 공사 자체를 앞당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정을 빈틈없이 진행하는 것뿐이었다. 담당자들이 살인적인 일정 관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결재 체계가 즉각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담당자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바로 결재를 해 주었다. 그리고 그 결재는 토요일청계천 관계자 회의를 통해 모든 부서가 정보를 공유하게끔 했다. 결제를 받기 위한 준비 시간과 대기 시간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시간을 두 배 이상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착공 전 1년이 수많은 순간이 모인 거대한 역사였다.



청계천 복원 공사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이냐는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 설계와 시공을 일괄 입찰하는 일명 '턴키(Turn Key)방식'(공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도맡아 하는 형태)이 적절하다는 것. 그러나 공사 기간도 변수가 많은 데 비해 그리 넉넉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공사비가 빠듯했다. 그러다 보니 업계의 1군 그룹 건설사들이 참여할 이유가 없었다. 거대한 건설사를 입찰에 끌어들이기 위해 담당 공무원은 저녁 시간마다 건설사를 방문했다. 마케팅 원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익을 이해시킨다'였다. "공사와 관련된 모든 것에 건설사의 로고와 간판을 걸어 놓으면 그 자체로 엄청난 홍보 효과가 있을 겁니다. 국책 사업보다 더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사업이라 언론의 노출 빈도는 엄청납니다." 실제로 1년 동안 2000번 넘게 기사가 실릴 정도로 신문을 펼치면 늘 청계천이 있었다. 결국 5월 26일에 1군 건설사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마케팅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이제 건설사가 시민과 해외를 상대로 마케팅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청계천 복원 공사 착공을 몇 달 앞두고 '추억 바람'이 불었다. 청계천에 대한 추억을 청계천홍보관에 모아 두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시민들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디어는 엉뚱한 데서 떠올랐다. 2003년 '제2회 하이 서울 페스티벌'을 한 달 앞두고 상암동 월드컵공원에서 외국인 마라톤 대회를 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이왕이면 청계고가도로 위를 달려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청계고가도로가 사라지기 전에 그 역사의 현장을 시민들이 직접 밟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명이 찬성한다면 여덟 명이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우려를 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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