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들어가는 글 - 견딜 수 없는 뜨거움으로



아직까지 나를 세계 일주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면, 오지 여행가 한비야는 잊어주기 바란다. 이제 나는 긴급구호 요원으로 완전히 변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긴급구호가 뭐하는 거예요?"하고 묻는다. 긴급구호는 한 마디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신속히 살려내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긴급구호? 여기엔 사연이 있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세계 일주를 마치고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예? 월드비전이라구요?" 속으로 어느 안경점에서 나이 든 분이 전화를 하셨나 했는데, 글쎄 국제 구호 단체의 회장님이셨다. 나더러 긴급구호 팀장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러 전화하신 거였다. 순간 너무 좋아서 천장을 뚫고 나갈 뻔했다. 야호! 야호호오! 드디어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구나.



그랬다. 7년 동안 오지 여행을 하면서 여행이 끝나면 난민 돕는 일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설사같이 시시한 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는 데 필요한 건 링거 한 병이고, 그 한 병이 단돈 8백 원이라는 사실을 오지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렇게 막연히 꿈만 꾸던 일을 해보겠냐는 전화를 받았으니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하지만 다음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 뜨거운 마음이 그저 한 순간 지나가는 열정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난 회장님께 내 마음을 자가 점검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진행 중인 긴급구호 현장에 직접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회장님은 너무나 순순히 그러자고 하셨고, 난 케냐와 캄보디아 현장에 다녀올 기회를 얻었다. 거기서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을 가져다주는 일이 얼마나 가슴 뻐근한 일인지 확실히 알았다.

이 일을 하기로 결정한 직후 한 대학생이 물었다. "재미있는 세계 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세요?"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죠." 나는 사람들에게 새장 안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 제발 단 한번만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늘도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가벼운 바람에도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소진하고 소진했을 지라도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기꺼이 쏟고 싶은 그 일은 무엇인가?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긴급구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기쁘다.



한비야, 신고합니다! - 아프가니스탄



2001년 10월, 드디어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이 되었다. 혼자서 계획하고 결정하는 독립군에서 조직의 시스템과 함께 돌아가야 하는 연합군이 된 것이다. 월드비전에 출근한 첫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이 시작되었다. 아, 아프가니스탄! 이 나라와 나는 무슨 인연이 이다지도 깊은 걸까. 1996년 초겨울 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헤라트에 있었다. 무장한 탈레반이 거리를 활보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나는 눈총을 견디다 못해 그곳을 떠나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지뢰로 왼쪽 다리와 오른팔을 잃은 여자아이가 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수줍게 빵을 건넸다. 한순간 망설였다. 이 빵을 아이가 먹고 배가 부른 것이 좋을까, 내가 먹고 우린 친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게 좋을까. 잠깐의 망설임 끝에 빵을 받아 한 입 덥석 베어 물었다. 같이 있던 아이들이 손뼉을 치고 어깨춤까지 추며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그날 나는 앞으로 내가 할 일을 결정했다. 이 여행이 끝나면 난민들을 위해 일하리라고. 특히 아이들을 위해 나를 아낌 없이 쓰고 싶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첫 파견지는 바로 6년 전 그 아이들을 만났던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였다.



저 먼지가 모두 밀가루였으면

여기는 쿠차마을. 세상과는 당나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어 차로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지금은 건기라 강이 바닥을 드러낸 울퉁불퉁한 돌길을 지나서 험준한 산골동네에 도착했다. 마을로 걸어 들어가는데, 다섯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땅에서 뭔가를 찾아 겨우 흙만 털고는 게걸스레 입에 넣는다. 그러다 나를 보더니 얼른 손을 뒤로 감추며 수줍게 웃는다. 입 주위에는 시퍼런 풀물이 들어 있다. 먹고 있는 것은 시금치처럼 생긴 야생풀. 미리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아이를 따라 집에 가보았다. 깜깜한 방 안에 죽은 듯 누워 있는 갓난아기, 나오지 않는 젖을 물려보는 젊은 엄마, 두 살이 넘도록 걷지 못하는 꼬마. 가재도구를 다 팔았는지 방 안에는 옷 몇 가지와 빈 냄비만 덩그렇다.

또 다른 집에 가보았다. 열일곱 살 된 엄마가 축 늘어진 한 살 남짓의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날 때부터 시작된 설사가 멈추지 않는다는 아슈라프는 얼굴이 창백하고 수세미처럼 숱 없는 머리카락에 뼈와 가죽만 남아 꼭 미라 같다. "일주일 내로 식량이 오지 않으면 이 아이는 굶어 죽을 거예요." 그곳 촌장이 말했다. 이 집뿐 아니라 주민 1천 5백여 명이 똑같은 실정이라고 한다. 서부아프가니스탄 지역 53만 명 대부분이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식량난이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거라는 사실이다. 지난달 파종한 씨가 비가 오지 않아 전혀 싹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올 겨울까지의 수확이 전무할 텐데, 국제기구들의 구호 식량 공급은 대부분 오는 6월로 종료되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어렵게, 어렵게 말한다. 몇 달만, 첫 수확 때까지만 도와달라고. 동네를 대표하는 아저씨 1백여 명이, 동양에서 온 서너 명의 우리 일행과 흑인 국제 직원 두 명을 마지막 생명줄이나 되는 양 꼭 붙들고 절박하게 애원하는 것이다. 통역으로 따라간 현지 직원 소하일도 시골 사정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몹시 충격을 받은 듯 침통해 했다. 그러고는 다짐하듯 나에게 말한다. "한 팀장님, 약속 하나 해 줘요. 오늘 본 것을 잊지 않겠다고. 저 아이들을 살려주겠다고." 정말이지 나도 그러고 싶다. 아, 그런 힘이 내게 있기만 하다면……. 마른 강바닥을 달리는 우리 앞의 자동차가 잔뜩 먼지를 일으킨다. 저 펄펄 날리는 흙먼지가 모두 밀가루라면 얼마나 좋을까!



움직이는 파란 감옥

"미리암, 탈레반도 없는데 왜 부르카를 쓰고 다녀?" 철든 후 단 한 번도 부르카를 쓰지 않고 바깥에 나간 적이 없다는 현지 여직원 미리암에게 물었다. "무서워서요. 지금은 벗어도 된다지만, 나중에 탈레반이 다시 득세하면 지금 벗고 다닌 사람들,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해요." 탈레반 시절, 자기 언니가 옷 바깥으로 손목이 보였다고 길거리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다며 미리암은 부르카 벗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부르카뿐만 아니라, 탈레반은 여자들이 있을 곳은 집 아니면 무덤뿐이라고 하면서 여성의 일과 교육을 원천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미리암이 전해주는 탈레반 치하의 일상은 엄격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여자는 남자 보호자 없이는 시장이나 병원은커녕 택시도 탈 수 없고, 젊은 여자는 젊은 남자와 이야기해도 안 되며 위반자는 즉시 그 상대와 결혼해야 했단다.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 이렇게 한번 해볼까? 나는 네 부르카를 입고, 넌 내 스카프로 머리만 가리고 오후에 주방장이랑 시장 가기." "네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얼굴까지 발개져 날 쳐다보는 미리암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난생 처음 맨 얼굴로 거리에 나선 미리암은 좀처럼 얼굴을 들지 못했다. 뭔가 대단히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불편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긴 했다. 부르카는 모자처럼 된 머리 부분을 먼저 쓰면 원피스처럼 생긴 나머지 부분은 넉넉하고 풍성해서 대충 맞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옷자락이 길어 자꾸 발에 밟혔다. 또 눈 부분만 그물망처럼 뚫어놓고 나머지는 몽땅 가렸기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눈을 가린 그물망도 어찌나 촘촘한지 온 세상이 파란 격자무늬 속에 갇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어휴, 이건 옷이 아니라 감옥이네. 움직이는 파란 감옥!"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부르카를 벗어던지며 말했다. 사무실 현지 직원들은 호기심에 차서 미리암에게 맨얼굴로 다니니까 어떻더냐고 물었다. "벌거벗은 느낌이었어요. 사람들이 모두 나만 보는 것 같고, '아니, 감히 부르카를 벗고 다니다니!'라고 질책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내일부터 다시 부르카를 입고 다닐래요. 다른 사람들이 다 벗으면 그때 벗으면 되죠." 길들여진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다시 해발 3천 미터 산을 넘고 벼랑길을 10시간 달려서 바드기스 현장에 왔다. 쿠차마을보다 더 깊은 시골로 들어가니 영양실조에 폐결핵까지 만연하는 등 상황은 더욱 나빴다. 네 살짜리 사이드와 생후 팔 개월 된 압둘도 그런 아이들이다. 당장 치료급식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 의식 불명 직전인 아이들을 차에 싣고 단숨에 읍내로 달려왔다. 담당 의사가 몇 가지 의례적인 검사를 한 뒤,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둘 다 살 수 있다고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긴급구호 요원이다. 저 아이들의 목숨이 딱 끊어지기 바로 그 순간까지, 가망성이 0퍼센트가 되는 그 순간까지는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집중 급식을 위해 우리는 네 개 조로 나누어 불침번을 서며 두 시간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 치료 영양죽을 먹이기로 했다. 자주 정신을 잃는 사이드는 꼬집어 깨워서 수저로 떠 먹였고, 삼킬 힘이 없는 압둘은 강제로 입을 벌려 흘려 넣었다. 딱 이 주일이었다. 어느 날 사이드의 목을 왼팔로 받치고 죽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으려고 할 때다. 아이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힘이 없어 언제나 허공을 바라보던 눈이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어주니, 글쎄 아이가 나를 보고 방긋, 웃는 게 아닌가. 아! 살아난 것이다. 순간 가슴이 너무 벅차서 터지는 줄 알았다. '고맙다, 사이드.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그러나 같은 날 들어온 압둘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바드기스를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치료급식소를 둘러보고는 압둘에게로 갔다. 아이는 여전히 미동도 않은 채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양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런데 힘없이 누워 있던 아이가 갑자기 그 조그만 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더니 손가락을 꽉, 깨무는 게 아닌가. 따끔하다. 이도 두 개 밖에 나지 않은 녀석이 마치 "걱정 마세요. 이제 나 힘 세졌어요."라며 힘자랑을 하는 것 같다. 내 손가락에는 선명하게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현장으로 떠나기 얼마 전에 받은 이메일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당신들이 목숨 바쳐 일한들,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 받는 사람 전체 중 얼마를 돌볼 수 있느냐, 잘 해봐야 10만 분의 1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면 맥이 빠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되새긴다. 바닷가에 사는 한 어부가 아침마다 해변으로 밀려온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져 살려주었다. "그 수많은 불가사리 중 겨우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동네 사람의 물음에 어부는 대답했다. "그 불가사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진 거죠." 이것이 내 마음이다. 그리고 전 세계 긴급구호 요원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호는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다. 구호 전쟁을 하려면 사랑의 총알이 필요하다. 구호 자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오기 직전, 한 아이에게 카드와 함께 꽉 채운 저금통을 받았다. 카드에 적힌 사연은 기도문 형식이었다. '하느님, 이제 저는 그만 돌봐주시고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돌봐주세요.' 글씨체로 봐서는 겨우 유치원이나 다닐 만한 아이. 그 조그만 아이가 우리를 어떻게 믿고 자신의 전 재산이었을 저금통을 통째로 보냈단 말인가. 생각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난다.



내가 탄 파키스탄 행 비행기가 힌두쿠시 산맥을 아슬아슬 넘고 있다. 기장이 안내 방송을 한다. "우리 비행기는 곧 아프가니스탄 영공을 떠나 파키스탄으로 들어섭니다." 나도 모르게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꼬마의 기도를 떠올렸다. '하느님, 저는 이제 조금만 돌봐주시고 아프가니스탄 잘 돌봐주세요.' 호다하페스 헤라트!(헤라트여, 안녕!)



당신에게 내 평화를 두고 갑니다 - 이라크



2003년 6월, 허허벌판의 군용 비행장. 트랩을 내리자마자 훅, 모래 섞인 사막바람이 얼굴을 덮친다. 턱, 숨이 막힌다. 정수리 위로 내리 꽂히는 정오의 태양. 어두운 극장에서 나온 것처럼 몹시 눈이 부시다. 오늘 모술의 기온은 섭씨 45도란다. 마중 나온 현지 직원이 방탄조끼를 나누어준다. 모술 지역 연합군 민간 협력 담당 장교가 우리 일행 9명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 유엔의 엄격한 무게 제한으로 겨우 20킬로그램짜리 배낭을 메고 있을 뿐인데 갑자기 어깨가 뻐근하게 무겁다. 다시 전쟁터에 온 것이다.



긴급구호 요원의 몸값

긴급구호 지역의 안전 상황은 네 가지 색깔로 대별된다. 코드 그린은 안전, 코드 옐로우는 위험소지 있음, 코드 레드는 위험, 코드 블랙은 철수다. 지금 이라크는 코드 레드, 사업을 진행할 수는 있으나 위험 수위가 대단히 높아 상황이 나빠지는 즉시 철수해야 한다. 만약 긴급구호 요원이 인질로 잡히더라도 우리의 몸값은 0원이다. 우리 단체는 납치범들과 몸값 협상을 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 후원자가 한 푼 두 푼 모아준 후원금으로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호 단체 직원을 인질로 잡아 몸값을 뜯어내는 그런 세력에게 돈을 주면 그 집단의 힘이 점점 세져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도우려는 사람들을 더욱 괴롭히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요원이 인질로 잡히면 우리 단체는 즉각 전문 협상가를 현장으로 파견해 요원이 안전하게 풀려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나, 인질범이 몸값을 요구하면 그 즉시 우리 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난다. 그 후로는 사건이 발생한 나라와 그 직원의 모국 관련자들이 협상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니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약 잡히게 되면 현명하게 대처해서 살아남는 것은 순전히 우리 요원들의 몫이다.



내 별명은 마이꼬리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에서 나는 한국, 미국, 호주가 지원하는 식수사업 총괄책임을 맡았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이라크의 상하수도와 사회 기반시설은 이웃 나라의 부러움을 샀다. 특히 티그리스 강이 흐르고 막대한 저수량의 댐을 끼고 있는 모술은 항상 물이 풍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차례의 전쟁과 경제 제재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특히 이곳은 화장실 처리를 휴지가 아닌 물로 하는 풍습을 갖고 있는데 물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수인성 전염병과 불결에 따른 각종 질병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이곳 물 사정은 생각보다 훨씬 열악했다. 수돗물이라고는 5일에 한 번도 구경하기 힘든 동네가 태반이었고, 주민들은 물탱크 차에서 물을 사 써야 하는데 그 물 값이 1천 리터에 노동자 일당의 절반이다. 사정이 이러니 한낮 기온이 50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에도 씻기는커녕 먹을 물도 아껴야 할 형편이다. 수백 명이 다니는 학교도 사정은 마찬가지. 조사 나간 학교에는 식수대는커녕 화장실이 하나도 없다. 볼일이 급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선생님들은 바로 옆의 교장 사택으로 달려가고, 학생들은 하루 종일 참거나 급하면 아무 데서나 일을 본단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