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눈으로 본 제2차 세계대전
김진영 지음 | 가람기획
대전의 서막(1918~1939)
끝나지 않은 전쟁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의 폭주에 간신히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로부터 약 7개월 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커다란 '거울의 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48년 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승리를 선언하고 독일제국의 형성을 축하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독일 대표단은 사실상의 항복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간단히 말해 독일이 영원히 전쟁을 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전쟁능력을 빼앗겠다는 시도는 단순히 군사력을 금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연합국, 그 중에서도 프랑스는 1871년의 패전과 1915년의 위기를 두 번 다시 독일이 몰고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예 국가로서도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 결과 믿기 힘든 거액의 전쟁배상금을 독일에 물리게 되었다. 군대도, 경제도, 영토도 빼앗긴 만신창이의 패전은 당연히 독일에 대혼란을 불러왔다.
1913년 1월 30일, 마침내 히틀러는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 19세기에 탄생한 통일독일제국을 제2제국, 자신이 만든 나치 독일을 제3제국으로 칭한 그의 선언은 그가 독일을 얼마나 단단한 권력으로 붙잡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절대권력을 잡은 히틀러의 최대 목적은 역시 베르사유 조약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1935년 3월, 징병제를 부활시켜 국방군을 늘리고, 공군을 창설한다는 선언과 함께 독일은 재무장을 개시했다. 그 결과 재무장으로부터 불과 4년도 못 되어 독일군은 적어도 육군과 공군만큼은 충분히 영국과 프랑스에게 도전할 수준까지 성장하게 된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침략 개시 사실 유럽의 두 파시스트 대표국, 즉 이탈리아와 독일 중 가장 먼저 공격성을 드러낸 국가는 이탈리아였다.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던 무솔리니의 꿈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권 10여 년 간 사실상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프랑스는 노골적으로 방해했고, 영국은 겉으로는 우호적이었지만 결국 방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 보급선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게 막지는 않음으로써 이탈리아가 반反히틀러 전선에 계속 머물기를 바랐지만 사실상 프랑스와 영국이 고삐를 놓친 이탈리아는 1936년 5월 에티오피아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 틈에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독일이었다. 1936년 3월, 에티오피아 전쟁에 유럽의 신경이 쏠린 틈을 타 라인란트 지방에 독일군을 투입한 것이다. 라인란트는 독일 땅이기는 했지만 1920년대 초에 프랑스군에게 점령된 이후 독일군의 진입이 허용되지 않는 비무장지대로 남아있었고 프랑스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사실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처음부터 친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바로 머리 위에 국경을 맞댄 오스트리아의 후원자를 자처했고,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공공연하게 독일과 합병하려고 덤비는 데 큰 불안을 나타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 자칫 오스트리아와 접한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독일계 주민들까지 움직여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계속 '제국의 꿈'이 방해받으면서 무솔리니는 그 대안으로 점점 히틀러에게 접근했고, 때마침 벌어진 스페인 내전은 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했다. 1936년 7월부터 3년에 걸쳐 벌어진 스페인 내전은 독일과 이탈리아, 특히 독일군에게 대단한 보너스를 안겨줬다. 독일군은 이 전쟁으로 그들이 개발한 각종 무기의 성능과 장단점을 철저하게 테스트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은 병사들을 손에 넣게 되었다. 콘도르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파병된 독일 병사들은 곧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압도하는 중요한 전력의 하나가 된다.
어쨌든 이탈리아가 첫 번째 목표인 에티오피아를 손에 넣고, 독일도 라인란트를 손에 넣자 다음 단계를 밟은 것은 독일이었다. 무솔리니는 독일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이탈리아의 영토만 보장된다면' 오스트리아를 포기하기로 결심했고, 1938년 3월, 독일이 안슐루스라고 부른 오스트리아 점령은 사실상 오스트리아 국민 99%의 지지를 받은 합병이었다. 오스트리아 인에게는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나치 독일의 일부가 되는 편이 과거 대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 나치주의자들과 반대파들의 대립을 마무리 짓는 최선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다음 목표인 체코슬로바키아는 세계적으로도 정평이 난 병기산업의 중심지였고,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놔두면 언제라도 독일의 목 뒤를 찌를 비수나 다름없었다.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의 또 다른 구성민족인 슬로바키아 인들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독일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것을 핑계로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점령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4월에는 이탈리아가 발칸 반도의 최빈국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이제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막을 수 있는 고삐는 거의 다 사라졌고, 남은 것은 이 둘이 언제 '진짜 전쟁'을 시작하느냐 뿐이었다.
전격전과 유럽의 붕괴(1939~1941)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1939년 8월 31일 밤, 폴란드 국경에 가까운 독일 소도시 글라이비츠의 한 방송국에 무장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방송국을 점거한 직후 독일군과 짧은 총격전이 벌어졌고, 얼마 뒤 방송국에는 폴란드 군복을 입은 여러 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다음날인 9월 1일 새벽 5시 40분, 히틀러는 "폴란드의 침략을 방치할 수 없다"는 연설을 전 국민에게 방송했지만, 이미 그보다 한 시간 전에 전쟁은 시작됐다. 글라이비츠의 방송국에 나뒹군 시체가 진짜 폴란드 군이 아니라 독일 강제수용소의 죄수였고, 그 배후에 나치 친위대(ss)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내내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독일의 뒤통수를 겨눈 또 하나의 비수라고 여겨진 폴란드를 '응징'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9월 15일, 바르샤바는 완전 포위되었고 이제 폴란드 군은 동쪽으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 군에게는 숨 돌릴 틈은커녕 생존의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9월 17일 새벽, 이번에는 동쪽에서 소련군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폴란드 군이 궤멸 직전에 몰리자 소련은 마치 썩은 고기에 덤벼든 하이에나처럼 독일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폴란드가 양쪽에서 찔러든 칼날에 숨통이 끊어지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두 나라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기는 했지만 폴란드가 기대한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않았다. 사실 이때 영·프 연합군이 독일을 공격했다면 독일은 궤멸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전차와 항공기의 새로운 조합으로 그때까지 상상하기 힘든 속도전을 펼친 독일군의 승리는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 정도로 충격이 대단했지만, 전격전의 실상은 20세기의 새로운 전쟁 스타일이라기보다는 가장 전통적인 기동과 포위전술의 재현이었다. 사실 당시 독일군의 전술은 선제공격을 통한 빠른 진격으로 적의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전통적 프러시아 군 전술의 재현이었고, 19세기까지 그 선봉을 맡은 것은 기병대였지만 이제는 전차와 폭격기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나 이 '현대적 기술로 벌인 프러시아 식 기동전'은 아직도 제1차 세계대전 참호전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다른 나라, 특히 프랑스에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된다.
프랑스를 집어삼킨 전격전의 불꽃 1939년까지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했다는 증거는 꽤 많이 발견되지만, 폴란드 침공이 결국 두 나라의 반대에 부딪히고 선전포고까지 당하자 히틀러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1940년 5월 10일 새벽, 마침내 독일의 공격이 시작됐다. 공격의 시작은 일견 엽합군의 예상대로 되는 듯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로 독일군이 밀려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속도는 연합군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특히 기대됐던 벨기에의 에번-에마엘 요새는 한나절도 버티지 못했다. 네덜란드에서도 독일군 공수부대는 비행장과 다리를 신속하게 점령해 독일군 기갑부대의 진격로를 마련했고, 네덜란드 군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3일 만에 독일군은 네덜란드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의 운명은 이미 끝났다. 벨기에와 북프랑스에서 주력 세력을 잃은 프랑스군의 저항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고, 프랑스의 레노 내각은 무너졌다. 그 뒤를 이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페탱은 결국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6월 22일에 정식으로 독일에게 항복함으로써 프랑스에서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친나치정권인 비시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한 명의 장군이 이런 굴욕을 거부하고 런던으로 도망쳤다. 샤를 드골 소장이 그 주인공으로, 그는 독일군에게 제한적이나마 성공적인 반격을 펼친 몇 안 되는 프랑스 지휘관이었고, 비시 정부에서도 장관 자리를 제의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런던으로 망명했고, 얼마 뒤 '자유 프랑스 정부'를 런던에 차리게 된다. 프랑스가 해방되면서 그는 새로운 중요 인물로 떠오르지만, 그것은 4년 뒤의 이야기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과 프랑스 비시 정부와의 관계는 적대관계로 돌변한다. 프랑스는 무너졌지만 전쟁 전에 세계 4~5위를 다투던 프랑스 해군력은 프랑스 본국과 아프리카의 식민지 알제리에 분산되어 거의 온전했고, 이것이 독일군의 손에 들어가면 독일 해군력을 영국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릴 판이었다. 처칠의 명령으로 영국 해군은 알제리의 프랑스 함대를 기습해 3척의 프랑스 해군 주력함을 격침시키거나 크게 파손시켰고, 1,300명이 넘는 프랑스 수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비시 정부와 영국은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은 관계로 돌입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히틀러는 이제 유럽 대륙의 실질적 지배자가 됐지만, 영국을 그대로 놔둘 생각은 없었다. 비록 바다와 맞닿아 있어 대륙과는 떨어져있는 영국이지만, 여전히 굴복을 거부하는 이 골치 아픈 나라는 여전히 세계 2위의 해군력과 광대한 식민지를 가진 만만찮은 상태였고, 어떤 형태로든 굴복시키지 않고 놔둔다면 언젠가 힘을 회복해 독일의 뒤통수를 후려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영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원래 없었다. 지상군은 이제 영국과 비교도 안 될 우위를 누리는 독일이었지만 여전히 독일군보다 우세한 영국 해군을 상대로 대대적 침공작전을 벌일 입장이 아니었다. 바다를 건너지 않고서는 침공할 수 없는 섬나라 영국을 상대로 할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실제로 '바다 사자' 작전을 입안한 독일 육군은 영국 침공 첫 단계에서 25만 명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독일 해군의 능력은 상선을 긁어모아도 15만 명을 운반할 수 있을 뿐이었다. 수백 년 간 영·프 해협은 영국을 지키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고, 이것은 히틀러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의 독일에는 16세기의 스페인 무적함대나 19세기의 나폴레옹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공군이었다.
1940년 8월 13일, 마침내 독일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영국 각지의 공군기지를 뒤덮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독일 쪽의 손실이 예상을 어이없게 뛰어넘었다. 영국 공군기는 95대가 파괴됐지만, 독일 공군은 236대를 잃은 것이다. 영국에는 두 가지 결정적 무기가 있었다. 영국은 1935년쯤에 이미 레이더의 기초 원리를 완성했고, 1940년쯤에는 영국 해안을 연결하는 본격적인 레이더 경보망이 이미 가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이 레이더 때문에 자기들의 움직임이 훤히 드러난다고 불평하는 사이, 영국은 레이더보다 더 무서운 무기로 독일 공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독일 공군 자신의 무선통신이었다. 독일 육해공군은 모두 에니그마라는 암호기를 사용했고, 타자기처럼 생긴 이 기계는 무선통신을 아무도 해독할 수 없다고 여겨진 암호로 주고받는 획기적인 물건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폴란드와 프랑스 정보국은 스파이와 수학자들을 총동원, 에니그마의 원리를 알아냈을 뿐 아니라 그 암호를 해독하는 기계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영국으로서도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독일 공군은 영국보다 많았고, 그 숫자를 이용한 파상공세를 꾸준히 이어가자 영국으로서는 아무리 정보를 미리 알아도 곤경에 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은 승리를 너무 일찍 과신했다. 9월 7일, 마침내 런던에 독일의 대공습이 시작됐다. 블리츠Blitz(독일어로 '벼락')로 부르는 도시 대공습의 서곡이었다. 하지만 목표를 영국 공군에서 대도시로 돌린 히틀러의 판단은 엄청난 실수였고, 이는 영국으로서는 생각도 못한 행운이었다. 독일이 목표를 수정하는 단 며칠의 여유가 영국 공군에게는 파괴된 기지와 항공기를 정비하고 조종사를 재비치하는 등 전력을 재구성하는 귀중한 시간이 된 것이다. 물론 독일의 공습이 영국의 시민들에게는 재앙이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결코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9월 15일, 독일 공군이 마침내 대규모 공세를 영국에 감행했지만 이날 공격에서 독일은 60대를 잃었고, 영국의 손실은 26대에 불과했다. 결국 히틀러는 '바다 사자' 작전을 포기했다. 영국은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영국인들의 고난은 오히려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독일은 영국 대도시들에 대한 야간폭격을 오히려 늘렸고, 결국 1941년 봄까지 거의 4만 명의 민간인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인류 최대의 충돌(1941~1942)
거대한 충돌 -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봄, 독일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대영제국은 북서유럽뿐 아니라 남유럽에서도 완전히 쫓겨났고, 북아프리카에서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영국과 함께 최대의 위협이던 프랑스는 이제 독일의 지배하에 놓였고, 비록 영국이 아직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더 이상 독일이 대륙에서 하는 일을 방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이제 영국을 무력화시킨 히틀러는 소련으로 눈을 돌렸다. 소비에트 러시아를 무찌르고 그곳의 '공산주의를 퍼뜨리고 다니는 쥐새끼만도 못한 열등인종' 슬라브 인을 모조리 우랄산맥 서쪽의 영구 동토지대로 몰아넣은 뒤 방대한 석유와 천연자원, 비옥한 농업지대를 게르만 인의 손으로 개척해 세계에 군림하는 명실공히 '제3제국'이 되겠다는 히틀러의 꿈은 분명 독일인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이미 1940년 겨울에 독일군은 프로이센의 붉은 수염을 가진 전설적 군주의 이름을 딴 '바르바로사' 작전의 틀을 완성했지만, 그 와중에 소련은 어땠을까? 어이없게도 스탈린은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잘 지켜 결코 전쟁을 먼저 벌이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독일을 절대로 자극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영국은 해독한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에서 발견한 독일의 매우 구체적인 소련 침공의도를 소련에 알려줬고, 독일 신문기자로 위장해 일본에 머물던 스파이 조르게는 독일 대사관을 통해 독일군의 소련 침공계획을 빼냈을 뿐 아니라, 6월 22일 이라는 침공 날짜까지 정확히 알아내 모스크바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정보라면 아무리 상대가 '종이호랑이' 소련이라도 독일의 침공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 충분했지만, 놀랍게도 스탈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정보들을 독일과 소련을 전쟁에 빠지도록 이간질하려는 영국과 미국의 역정보라고 믿을 정도였다. 6월 22일 새벽 3시, 마침내 소련은 '뻔히 알고 당하는 기습', 그것도 철저한 기습을 당했다.
마침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군대가 소련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하늘을 지배하는 공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