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2
박철언 지음 | 랜덤하우스중앙
대북 포용 정책과 북방 정책 1988~1992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북방 정책노태우 정권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북방 정책의 요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냉전 체제가 자본주의의 일방적 승리로 굳어가고 있는 국제 질서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그동안 서방 세계만을 상대로 했던 '반쪽 외교'에서 탈피하여, '전방위 자주 세계 외교의 시대'를 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존 통일 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북포용 정책을 통해 북한을 개혁과 개방의 길로 유도하여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한민족 공동 번영의 시대'를 개막하는 것이었다.
제6공화국이 출범하고 내가 청와대 정책보좌관으로 북방 정책과 대북 정책을 담당하면서, 양자를 상호 연계하여 추진하게 되었고, 그러한 우리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 1988년의 '7ㆍ7특별선언'이다. '7ㆍ7특별선언'의 골자는 '우리가 북한의 우방과 수교하는 대신, 북한도 우리의 우방과 수교하는 데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지원하겠다. 북한을 개방과 개혁의 길로 유도하여 민족 공동 번영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통일 정책의 수립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선 정부 부처 내의 다양한 의견들과 주장들을 통합ㆍ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학계, 법조계, 언론계의 폭넓은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가는, 때로는 지루하기조차 한 과정을 거쳐야 했으며, '88 남북 비밀 회담'을 통해 북한 측의 반응도 파악해야 했다.
1988년 4월 21일, 한시해 북한 대표와 나는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첫 번째인 34차 남북 비밀회담('88회담')을 가졌고, 8월 4일, 36차 남북 비밀 회담을 가졌다. 1988년 10월 18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한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유엔총회 본회의에서 '한반도의 화해와 통일을 여는 길'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는데, 대통령 연설의 포인트는 남북한과 미ㆍ일ㆍ중ㆍ소 등이 참여하는 '6개국 동북아평화협의회의'의 제안이었다.
나는 1988년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3일간 강재섭, 강근택, 김용환 등 수행원 세 명을 데리고 평양을 방문했다. 제6공화국이 출범한 후 첫 번째 평양 비밀 출장으로, 나에게는 세 번째 평양방문이었다. 나는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는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특사로서 적십자 깃발을 단 그랜저 승용차로 군사분계선을 넘었고, 오전 8시, 북측 통일각에 도착했다. 최봉춘의 안내로 준비된 벤츠를 타고 개성역으로 가서 특별 열차로 평양의 용성 하서역에 도착했다. 한시해 수석 대표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서재골 초대소에 여장을 풀고, 점심 후 한시해 대표와 '88비밀 회담'을 가졌다.
12월 1일, 김 주석을 대신한 허담 비서와 회담을 가졌는데, 나는 허 비서에게 대통령의 친서와 친서설명문을 전하면서, 친서설명문의 내용을 구두로 요약 설명해 주었다. 허담 비서는 "박철언 선생,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우리도 노태우 대통령 각하의 북남 관계 개선의지를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아직 이에 상응하는 실천 조치가 뒤따르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남측의 진의에 대해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긍정 반 부정 반의 입장을 보였다. 허 비서는 "주한미군 철수, 군축, 3자 회담 개최 문제 등에 대해 남측이 구체적인 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통일 실현 문제는 외교, 국방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연방제 방안이 전제되어야 합니다."라면서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에 대해 나는 "우리 측이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대폭적인 양보를 하고 있는 만큼, 북측도 더 이상 미군 철수, 3자 회담 개최, 연방제 방안 고수 등 비현실적인 주장에서 벗어나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북한 측의 자세 전환을 촉구했다.
12월 17일 아침, 정주영 회장이 청와대 사무실로 찾아왔다. 정 회장은 금강산 개발 문제와 합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할 생각이라며 상공부에 신청할 예정이라고 했다. 정 회장은 베이징을 거쳐 평양비행장으로 입북할 예정으로 교섭하고 있다면서, 북측에서 베이징 공항부터 안내해줄 예정이고 자세한 일정과 계획은 협의 중이라고 했다. 대략 1989년 1월 20일부터 일주일 내지 열흘 정도 방문 예정이며 허담 비서가 영접할 것이고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도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정 회장은 의욕에 가득 찬 목소리로 "금강산을 관광특구로 만들어 속초에서 금강산을 가고, 또 철원 - 내금강 - 외금강을 연결할 겁니다. 장차 강원도 통천(정주영의 고향)에 자동차 부속품 공장도 설립할 겁니다. 또 남쪽에서 들어가는 사람을 위한 통로도 닦을 예정입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한국의 자본을 끌어들이고 차관도 끌어들일 겁니다. 1월 7일쯤 한 일주일 소련을 방문하고 4월경에는 시베리아도 답사할 겁니다. 앞으로 소련이 살 길은 목재, 가스 석유 개발입니다."라고 금강산 개발 사업과 시베리아 개발 사업의 밑그림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나의 협력과 지원을 요청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88비밀 창구'와 관계 부처와의 정책 조정을 통해 도울 일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1988년 12월 31일 토요일, 본관 서재에서 대통령 주재로 수석비서관 회의가 열렸다. 나는 한 해를 마감하면서 1988년도 대북 정책, 북방 정책 추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정리하여 보고했다. 내가 말을 마치자 대통령은 북방 외교는 여건상 외무부가 주도할 수 없다며, 북방 정책을 둘러싼 잡음을 확실히 교통 정리하여, 나에게 권한과 책임이 있음을 재확인해주었다.
그런 산고를 거치면서 새로운 통일 방안은 점차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89년 9월 11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했다. '자주ㆍ평화ㆍ민주'의 3원칙에 입각하여 민족 자결의 정신에 따라 자주적으로, 무력행사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민족 대단결을 도모하고 민주적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통일 방안이었다. 구체적으로 통일 단계를 '신뢰 구축 협력 → 남북연합 → 단일 민족국가'로 설정하여 민족 공동체 회복 단계를 거쳐 최종 통일국가를 완성하며, 그 중간 과정의 과도기적 통일 체제인 남북 연합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현실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소련과 수교 협상아무래도 북방 외교 정책의 핵심적 과제는 소련과의 수교였다. 통일 여건의 조성과 수출의 다변화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명실상부한 '전방위 세계 외교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군사 초강대국이요, 범세계적인 세력인 소련과의 관계 개선은 막중한 과제였다. 소련과의 수교는 제6공화국이 출범한 직후인 1988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990년 6월 4일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정상 회담을 거쳐, 1990년 9월 30일에 한ㆍ소 외교 관계 수립에 이르게 된다. 추진과정을 살펴보면, 1988년 8월 28일부터 9월 10일까지 나는 염돈재 비서관과 통역을 맡은 하만경 재미교수와 함께 소련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소련 외무성에서 루킨 차관보 등과 비밀 회담을 하고 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였으며, 소련의 대외 정책 방향을 연구ㆍ제시하는 동양학연구소, 미국ㆍ캐나다연구소, IMEMO(소련 과학아카데미 소속 세계 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 등의 고위 관계자들을 차례로 만나, 공ㆍ사적인 유대를 구축하고 제6공화국의 변화된 정책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때의 소련 방문을 통해 얻은 결실 중 하나가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비밀 접촉 창구를 개설한 것이었는데, 소련 측은 비밀 접촉 창구로, 노보스티 통신 도쿄 지국장인 두나예프를 지정해주었다. 두나예프는 크렘린 궁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비서실장인 체르니아예프의 심복으로 고르바초프와도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나는 두나예프와 핫라인을 형성하여, 그의 상부선인 체르니아예프 비서실장의 지원 아래, 일본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접촉하며 샌프란시스코 한ㆍ소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막후에서 한ㆍ소 수교를 계속 추진하였다.
1990년 3월 19일, YS와 함께 소련 방문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고르바초프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경축 사절단 겸 최고위급 우호 촉진 사절단의 정부 대표 자격으로 갔다. 3월 22일 오전 10시부터 세 시간에 걸쳐 소련 공산당 국제부 수석 부부장인 브루텐스와 1차 비밀 회담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고르비 대통령을 만나 수교에 합의했다. 한반도에 전쟁은 끝났다."는 YS의 발언(이 요약본의 'YS와의 갈등'부분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음)에 대해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회담에 들어갔고, 나는 대통령의 친서를 전하고 친서의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이번 친서가 1988년의 친서에 이은 두 번째 친서임을 강조하면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답신을 달라고 요구했다. 브루텐스 부부장은 북한과의 관계를 내세우며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도박을 한다는 심정으로 강하게 나갔다. "지구상의 온 나라가 친구가 돼야 하고, 대화로써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고르바초프의 철학에 공감해 나는 2년 전에 수교하기 위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 수교 협상을 질질 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돈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수교한 후에는 경제 협력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수교의 조건으로 경제 지원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방문단의 김영삼 대표와 나를 정식으로 접견하지도 않았습니다. 출국하기 전까지 고르바초프 대통령으로부터 한ㆍ소 수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노력하겠다는 노트(note)라도 주지 않는다면 친서를 돌려주십시오."라고 말하자 브루텐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3월 26일, 11시 10분부터 12시 50분까지 공산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브루텐스 수석 부부장과 2차 비밀 회담을 가졌다. 브루텐스는 "다시 만나 기쁘게 생각합니다. 좋은 결과로 이야기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귀 국의 노태우 대통령에게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말씀을 전달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부르텐스가 전하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답변은 "노 대통령께서 본인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또한 본인의 대외정책을 높이 평가해주신 데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본인은 소ㆍ한 관계를 계속 증진할 필요가 있다는 각하의 견해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또한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 관계의 구체화에 대한 한국 측 의견을 흥미롭게 접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장관 각하가 포함된 대한민국 대표단의 모스크바 방문을 환영합니다. 한반도의 정세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그렇게 되도록 협조하겠습니다. 한반도 정세의 정상화는 모든 인민들의 이익에 부합할 것입니다."였다. 브루텐스는 "이 같은 대답이 오늘 날짜로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고르바초프 대통령께서 친절한 답변을 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내가 귀국해서 우리나라 대통령께 구두로 전할 수는 없습니다. 문서로 작성해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한참을 밀고 당기던 끝에 고르바초프의 비서실장인 체르니아예프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두 차례에 걸쳐 받았고, 그에 대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라는 메모를 하고, 체르니아예프가 서명하여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1990년 4월 23일 오전 10시 30분, 프라자호텔 23층에서 김종휘 외교안보보좌관과 만났다. 나는 소련 방문 후에 YS와의 갈등으로 4월 13일 정무장관직을 사퇴하고, 4월 26일부터 5월 19일까지 장기간 해외 출장을 준비 중이었다. 그때 노태우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적극 추진하고 있던 때였다. 김종휘는 "대통령 각하의 워싱턴 방문이 5월 30일 11시에 도착, 5월 31일 10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5월 30일 오후에 워싱턴 도착할 예정입니다. 5월 30일 저녁 후에 부시 대통령, 고르비 대통령과 대통령 각하의 티타임을 추진해주십시오."라며, 노 대통령의 지시라고 하면서 나의 비밀 소련 라인을 동원해 한ㆍ소 정상 회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래서 나는 알겠다고 하고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ㆍ소 정상 회담 추진을 위해 막후 협상을 진행 중에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 뒤 소련 측은 내가 정무장관을 사퇴하고 출국하여 부재 중이어서, 1990년 3월 27일 모스크바에서 나와 브루텐스 수석 부부장의 3차 비밀 회담에서 합의한 상호 연락 창구 세 개 중 하나인 주소 영사처의 공노명처장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도브리닌 대통령 외교고문이 곧 서울을 방문하여 노 대통령과의 면담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공 처장은 이 엄청난 소식을 청와대 김종휘 외교안보보좌관에게 바로 보고했고, 김종휘가 대통령에게 이를 직보했다.
그런데 문제는 김종휘 보좌관이 샌프란시스코 정상 회담을 준비하면서, 수행자 명단에서 나는 물론이고 아예 안기부 염돈재 국장조차 제외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기부의 서동권 부장이 강하게 항의했다. 그제야 마지막 단계에서 염돈재 국장을 수행자 명단에 포함시켰으나, 김종휘는 염돈재에게 아무런 역할도 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에 역사적인 한ㆍ소 정상 회담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나와 염돈재 라인을 제외한 채 회담을 하려다 보니 내용에 있어서는 한마디로 실패작으로 끝났다.
노태우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에게 경제 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고 경제 문제에 비중을 두고 얘기를 진행시키려 하자, 고르바초프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한ㆍ소 수교를 돈으로 풀려 했던 참모들이 제대로 상황 판단을 못한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계속 '선수교, 후경협'을 주장했는데, 김종휘ㆍ김종인 라인에서 수교를 위해 30억 달러의 경협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노 대통령의 '정상 회담 말씀 자료'의 포인트는 이미 크게 잘못되어 있었던 듯싶다.
소련 측에서는 그동안 막후 핫라인이었던 박철언의 모습을 볼 수조차 없고,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미수교 상태의 분단된 남한의 대통령이 어려운 첫 대면에서 경제 지원 문제를 공식적으로 먼저 꺼내는데 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한ㆍ소 수교 문제에 관하여 아무런 합의가 없는 실패한 정상 회담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한ㆍ소 정상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노태우 대통령은 격노했다. 노 대통령은 박철언 라인을 활용하여 다시 한ㆍ소 수교와 정상 회담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1990년 6월 4일의 샌프란시스코 정상 회담 이후에도 여전히 한ㆍ소 수교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처음 소련의 문을 두들겼던 사람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내가 시작한 일은 내가 마무리해야 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새로운 위험한 접근'을 하게 된다. 당시 소연방 대통령인 고르바초프 측에서는 경협만 요구하는 데 반해, 러시아 공화국의 옐친 대통령 쪽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더욱이 이미 고르바초프는 '지는 해'요, 옐친은 '떠오르는 태양'이었고,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강력한 경쟁 관계에 있었다.
나는 1990년 8월 4일부터 8월 11까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표드로프 박사의 초청으로 소련과 러시아 공화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표드로프 박사는 1986년 '라식 수술 기법'을 개발한 안과의사로서, 소련 최고의 부호이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 공화국의 옐친 대통령과도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그리고 우리 내외와 가까운 소련 전문가 윤성열 박사 내외가 표드로프 박사 내외와는 두터운 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