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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을 만나다

지승호 지음 | 북로드
1부 유시민이라는 코드



아픔과 노여움이 많은, 소셜 리버럴리스트 - 지승호



유시민은 분파주의자에 분열적이고 독선적인 개혁론자다?


요즘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이른바 난닝구(합당을 주장하는 실용파)와 빽바지(개혁파) 간의 감정 대립이 극에 달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자, 노빠 주식회사의 대표이며, 노무현의 영혼의 샴쌍둥이'라는 평가를 듣는 유시민 의원이 있다. 비난하는 쪽에서는 그를 '분파주의자에 분열적이고 독선적인 개혁론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여당의 개혁적인 모습을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실망한 나머지 정치에 냉소적인 반응마저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이 집권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지금 하는 것보다 못하려고' 하는 반응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알몸 박정희』의 저자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장 최상천은 "보수는 웃기고, 진보는 낡았다"고 정의한다. 최상천 소장은 '올드 레프트는 뉴 라이트를 이길 수 없다"고 진단한다. 그런 의미에서 뉴 레프트의 이미지라도 심어 줄 수 있는 인물은 열린우리당에서 유 의원이 거의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유시민은 잘 나가는 칼럼니스트에서 돌연 "바리케이트 앞에 화염병을 든 심정으로" 절필 선언을 하고, 개혁국민정당을 만들어 외연을 확대했으며, 정몽준이 지지 철회 선언을 하자 비판적 지지를 호소하며 쓴 글을 밤새 퍼 나르면서 노무현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그 글로 인해 그는 진보 진영에서는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토론의 달인, 정치 천재로 불리기도 하면서 노무현 정권 창출의 특등 공신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 한편 노무현을 공격하던 때와 똑같이 사람들의 '말을 막 한다, 가볍다, 싸가지가 없다'는 비난을 받는다. 유 의원은 정치적 효과 이전에 자신이 상처를 받더라도 해야 할 말은 하는, 몇 안 되는 정치인 중의 하나다. 그가 더러는 남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기도 했으나, 이번 당의장 선거 과정만 보더라도 상대는 그에게 훨씬 더 심한 말을 내뱉었다.



유 의원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상처 준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반성한다"고 했는데, 정작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다. 실제 이지메에 가까운 공격을 받으면서도 유 의원은 공세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그리고 유 의원의 누나이자 민주화 운동의 동지이기도 한 유시춘 선생은 가슴 아파하는 동생에게 '너도 뭔가 잘못한 게 있을 것이다. 이제 정치인이 됐으니 좋은 이야기를 아프지 않게 전달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하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유시민과의 여섯 번의 만남

어쩌다 전문 인터뷰어가 된 나는 <100분 토론>을 진행하던 시절의 유시민부터 국민 경선을 통해 국민이 뽑은 후보를 지키기 위해 절필 선언을 하고 나선 유시민, 국회의원이 된 후의 유시민, 당의장 선거에 출마할 때의 유시민 등 이렇게 여섯 번을 만났다. 그런데 그 여섯 번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유 의원과 나는 사적인 친분 관계가 전혀 없다. 나도 참 드라이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 만났으니 조금은 반가운 척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때도 있는데, 그 바람은 매번 무너지고 만다. 유 의원은 "노무현 후보처럼 '스킨십이 약하다'는 평도 받는 것 같은데요. 정치를 하면서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시지는 않으십니까?"라는 우문에 "그런 것 안 하고도 정치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죠"라는 현답을 하기도 했다. 끼리끼리 밀어 주고 댕겨 주는 정치인들의 스킨십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아 왔던가. 의리 없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지나친 것보다는 못한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친구도, 적도 많은 당대의 돌쇠

유 의원에 대한 평은 극단적이다. 이번 당의장 선거 과정에서 당내에서도 엄청난 지지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고, 한나라당이나 민주당·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전여옥 의원이나 정형근 의원을 혐오하는 만큼이나 그를 혐오한다. 딴지일보의 김어준 총수는 "내가 현재 어디에 와 있고 내 역할은 무엇인지, 자신을 객관화하여 스스로를 역사 속에서 통시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놀랍도록 자연스러워 그에 따른 전술 전략을 자신의 이익보다 먼저 따져 내는 것이 거의 비인간적인 수준에 도달한 그는, 당대의 돌쇠다"라고 평했다. 이런 평가에 대해 유시민은 '상처야 입겠지만,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때 해야 한다. 내가 나중에 더 큰일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당이 대한민국의 미래나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이나 사회 발전을 생각할 때 지금 시점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유 의원의 행보에 대해 비판적인 강준만 교수도 『유시민 : 항소이유서』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시민 비판자들이 한 가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유시민은 지금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출세나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지방대 교수'다. 유시민이 열린우리당 의장이 된다 해도, 설사 그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건 조국을 위한 희생이지 그가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다. 그가 다른 정치인들에게 독설을 퍼부을 수 있는 힘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유 의원은 또한 최선을 다한 결과에 대해서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번에 선거 나가셨다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안되면 어때요? 열심히 해보고 안 되면 그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고, 또 다른 부분에서 제가 할 일을 찾으면 되죠." 그에게서는 늘 이런 식의 대답이 돌아온다.



그는 『유시민의 경제학 까페』,『거꾸로 읽는 세계사』 등 많은 베스트셀러를 내고 <100분 토론> 같은 TV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산이 1억이 넘지 않는다는 발표가 나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면이 젊은 네티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요소인 것 같다. 유 의원은 대학 신입생 시절 구로공단 봉제공장의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 달치 월급이 대학촌의 하숙비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뒤로는 밥을 남긴다든가, 미팅을 한다든가, 첫 시간 강의에 지각을 하게 되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 마냥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행동과 말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깜이 아니다. 철이 들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오히려 그의 친구이자 진보역사학자인 한홍구 교수는 '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라고 그를 옹호하고 나선다.



유 의원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칫 실수로 보이는 행동으로 인해 그 이상의 과도한 매를 맞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상당한 관용과 포용력을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유 의원이 어느 개인이 미워서 독설을 퍼부은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공적으로 '싸가지 없다'는 말까지 내뱉은 후 '그래도 동지라고 생각한다. 경선 끝나고 소주 한 잔 하기로 했다'고 그는 말하곤 했다. 역겹게 말하는 이들을 향해 그는 한 번도 쓴 소리를 내뱉지 않고 감내해 왔다. 더구나 그는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고 말이지만, 많은 사람들한테 상처를 줬던 것 같다'고 끊임없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슬픔과 노여움이 많은, 소셜 리버럴리스트

유 의원은 자신의 정치 참여의 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부 부패가 없는 깨끗한 정당, 지역으로 분열된 국민을 통합하는 정책 정당, 당원들이 책임을 다하고 권한을 행사하는 참여민주주의 정당, 인터넷을 기반으로 저비용 고효율 정치를 실현하는 미래형 정당, 저는 이런 정당이 있어야 정치를 개혁하고 권력 부패를 청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일을 해주었다면, 저는 당원으로 참여하고 열심히 돈을 보내는데 그쳤을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유신시대 민주화 운동에 나섰던 학창 시절 그랬던 것처럼, 저는 이것을 역사가 제 앞에 놓아 둔 쓴잔으로 받아들입니다. 피할 수 없는 잔이라면 비록 쓰다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마시자. 이런 심정으로 하루하루 정치인 생활을 겪어 나가는 중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실패할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해 보는 것, 이런 것이 삶의 묘미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살아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유 의원은 자유주의자다. '영원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은 항소이유서에서 인용한, 러시아 시인 네그라소프의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말처럼 슬픔과 노여움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부끄러움이 더 많아졌다고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그를 자신이 열린우리당의 노선에 대해 이야기한 바대로 '소셜 리버럴리스트'라 부르고 싶다. 또한 누나 유시춘은 그가 '슈퍼 울트라 리버럴리스트'라고 말한다.



의심을 동반한 믿음, 햄릿형 소신 - 정혜신 (정혜신M연구소 대표)



부끄러움이 많은 남자

유시민은 1959년생이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는 주로 수도권에서 살았지만,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란 '토종 TK'다. 1978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는데,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서울역 시위를 주도해 그 해 5월 17일 계엄포고령과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 제적된 뒤 3개월만에 풀려나 같은 해 9월 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1984년 9월 복학한 그는 복학생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서울대에 들어온 외부인을 프락치로 알고 집단 구타한, 이른바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두 번째로 제적되었다. 그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옥중에서 작성한 '항소이유서'는 서슬 퍼런 기개와 논리 정연한 문장, 진솔한 내용으로 유시민이란 이름을 하나의 전설로 만들었다. 1985년 10월 만기 출소한 유시민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88년 여름에 재복학하여 약 2년 동안 당시 평화민주당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5공 청문회 광주특위 등에서 활약했고, 1991년에야 13년 만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계약직 공무원으로 7개월 정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이란 정부 산하 단체의 기획실장으로 근무했고, "역사 발전에 의미 있게 참여하기 위해서는 좀더 정확하고 깊이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독일 유학을 떠난다. 독일 마인츠의 요하네스구텐베르크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박사 과정을 밟다가 'IMF 귀국 유학생'이 된 1998년 이후에는 시사평론가라는 타이틀과 자유기고가라는 직업으로 살아갔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지식소매상'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규정한다. 지식소매상이란 유통업의 일종인데, 어떤 사람이 창조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널리 퍼뜨려 많은 사람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지식을 대중화하는 직업이란다.



새로운 사상치고 불온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는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주장하지 않는다. 일종의 '햄릿형 소신'이라고 할까.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절대적으로 옳거나 틀린 것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새로운 사상치고 처음에 불온하지 않았던 것은 없다. 세상을 보는 눈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상이한 여러 사상 사이에서 대립과 경쟁을 거쳐야 알 수 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행동은, 자기가 반대하는 사상과 견해를 가진 이가 그것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박해받을 때 거기에 대항해서 함께 투쟁하는 것인데, 그것은 용감하고 의미있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라는 게 유시민의 신념이다. 그러니까 그의 '소신'이나 '주의'는 단순히 햄릿처럼 사색하고 회의하며 우유부단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실천력을 동반한다. 그렇게 본다면 유시민의 신념을 '햄릿형 소신'이라고 표현한 나의 표현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나의 동생, 유시민 - 유시춘 (작가,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뜻을 나눈 동지

유시민과 나는 혈육으로는 오누이 사이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진한 동지애가 있었지 싶다. 1985년 5월, 항소심 법정에서 만난 이돈명 변호사가 내게 지나가는 말처럼 "시민이 항소이유서 읽어 봤소?" 하시기에, 이튿날 사무실로 가서 어눌하게 그걸 좀 보고 싶다고 했다. 줄이 그어진 구식 편지지 30여 장에 쓴 꽤 두툼한 분량이었다. 26세의 청년이 영어의 몸이 된 처지에서 참고 문헌 하나 없이 써내려간 글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돈된 미문이었다. 나는 친지 몇 사람이라도 함께 읽어 봐야겠다 싶어서 그것을 들고 을지로3가 인쇄소 한 곳으로 들어가 500부를 찍었다.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 사무실, 법원 기자실, 서울대 총학생회 등 몇 곳에 갖다 놓은 그 항소이유서는 전국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런 일이 있은 직후에 나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의 모태가 된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여러 대학교를 돌며 대학생들을 선동한 죄로 재직하고 있던 고등학교에서 강제 해직을 당했다.



유시민으로 인해 가슴 베이는 아픔이 많이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계엄군이 서울대를 덮친 후, 누군가는 유시민이 권총을 이마에 들이댄 군인에 의해 끌려갔다고 했고, 혹자는 이미 죽었다고도 했다. 1984년 복학 이후, 유시민이 폭력 과격 학생의 대명사처럼 되어 관제 언론에 의해 난도질당할 때에도 그랬다. 그렇게 온유한 성격의 천태적 페미니스트가 마치 악당처럼 매도당하는데도 속수무책인 것이 서럽고 슬펐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우리 오누이만의 설움이겠는가. 그것은 당시 군사정권에 저항한 숱한 양심이 함께 겪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2부 유시민과의 만남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며 절필 선언을 하다

2002년 9월,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국민 경선의 원칙이 지켜지는 것을 보기 위해 절필 선언과 함께 국민 후보 지키기에 나서는 한편, 8월 29일에는 '정치 혁명과 국민 통합을 위한 개혁적 국민 정당(가칭)'에 참여해 대변인을 맡고 있는 유시민을 만나 정당 추진 상황과 더불어 현 정국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들어 보았다.



지승호 : 절필 선언까지 하고 노 후보 지지를 선언하지 않으셨습니까?



유시민 : 제가 노 후보를 지지하기 때문에 글쓰기를 그만두고 여기에 뛰어든 것이 아니에요. 저는 기본적으로 국민 경선이라는 민주적 절차, 이것을 살리는 것이 우리의 정치 발전과 미래 사회를 위해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뛰어든 것입니다.



지승호 : 어느 강연에서 노 후보에 대해 "가치관과 인생관의 면에서 놀라운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끼십니까?



유시민 : 그는 1981년 이후 약 20년 간 부산 민주화 운동 진영의 선두에 서서 일을 했고, 노동자들의 권익과 관련한 활동을 많이 했어요. 그것도 30대 중반에 시작한 것 아닙니까? 보통 서른 다섯에 돈 잘 버는 변호사에서 재야 운동가로 변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놀라운 일이에요.



지승호 : 20대의 정치 무관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시민 : 저는 젊은 유권자들이 무관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을 안 하고 있는 거죠. '너 아직도 정치에 기대하냐?'는 식으로 바보 취급하는 분위기에서 누가 정치에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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