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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의 노래

강철환 지음 | 시대정신
마른하늘에 날벼락



1977년 8월 초순. 어제부터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더위를 피해 동무들과 대동강가에 나와 놀고 있던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너 여기 있었구나. 니네 집에 빨리 가보라, 빨리! 니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보다." 나는 친척들이 왔으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 친구의 근심스러운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흙이 묻은 옷을 대충 털며 집을 향해 달렸다. 저만큼 보이는 우리 아파트 입구 쪽에 낯선 지프 두 대가 서 있었다. 어린 생각에도 할아버지 일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우리 할아버지는 당시 '평양상점 관리소'의 부소장으로 일하고 계셨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요즘은 근 한 달 동안이나 아무 연락도 없이 통 집에 들어오시질 않으셨다. 식구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귀국자 가족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일이 종종 생기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더 불안하였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억척스럽게 재산을 끌어 모았다. 덕분에 조총련 교토본부 상공회장직을 꽤 오래 맡았었다. 게다가 항상 조국만을 생각하는 애국자였다. 귀국사업(북송사업)이 시작되자 할머니는 자신이 솔선하여 할아버지를 설득하였다. 그리고 친척들의 완강한 만류를 뿌리치고 그 많던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만경봉호를 타고 북조선으로 온 것이었다. 1961년의 일이었다.

집 안에 들어선 나는 우선 집 안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집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집 안은 험상궂게 생긴 일곱 명의 침입자들로 꽉 차 있었다. 간간이 새어나오는 할머니의 울음소리 외에는 온통 집안살림 뒤집어엎는 소리만이 허공에 울렸다. 그때 침입자 중 높아 보이는 늙수그레한 남자가 할머니 앞으로 다가왔다. "노친네 남편 강태휴는 우리 민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졌소. 그래서 지금부터 동무네 전 재산을 몰수할 것이오. 자, 이제부터 재산몰수등록사업을 시작할 테니 협조하시오." 침입자들은 물건들을 등록하면서 보기 드물게 부유한 우리집에 대한 시기와 증오가 들끓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물건 하나 하나를 꺼낼 때마다 "반동!", "악질 부르주아!", "간첩새끼!"라고 소리치면서 물건들을 내동댕이쳤다. 그들은 마치 우리 식구들을 때릴 것처럼 이를 악물고 눈을 부라리며 발광을 하였다.



여섯 시간에 걸친 등록사업은 할머니가 목록에 서명하고 손도장을 찍음으로써 간단하게 끝났다. 이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온 청춘을 바쳐서 하고픈 것, 먹고픈 것을 참고 절약하여 모아온 전 재산을 한순간에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 하나마다 손때가 묻고 사연이 깃들어 있는 자신의 정든 물건들을 어처구니없게 빼앗긴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그 당시 어렸던 나는 그런 것까지는 헤아릴 능력이 없었다.



새벽 4시쯤.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났다.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불안과 공포로 밤을 지새운 우리 가족은 보위원들의 군홧발에 채여 밖으로 내몰렸다. 현관 앞에는 소련제 신형 '지르' 트럭 2대가 시동을 걸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아직 동트기 전이기 때문에 거리에는 아무런 인적도 없었고 어둠과 정적만이 깔려 있었다. 우리 식구가 차에 오르려는데 책임자가 짐짓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를 불러 세웠다. 당의 배려로 다른 짐을 더 싼 후 뒤따라가기로 되었다는 말이었다. 할머니, 아버지, 여동생 미호, 나 우리 네 식구는 보위원들에게 등을 떼밀려 짐짝처럼 트럭에 올려졌다. 자동차가 어머니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어머니의 모습이 곧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린 생각에도 이상스럽게 이제 어머니를 영영 못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



자동차가 평양시를 빠져나와 가파른 산길을 오르더니 11시 반쯤 차를 세워 잠시 쉬었다. 할머니가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월왕령이라는 고개라고 대답을 한다. 월왕령(越王嶺)이라는 이름은 왕이 넘은 고개라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후에 수용소에 가서 안 것이지만 수용소 사람들은 이 월왕령을 '죽음의 고개'라고 불렀다. 한 번 넘어오면 다시는 살아서 넘을 수 없는 고개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수용소로 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 고개를 넘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경비초소를 몇 군데 지나 어느 부락 앞에 멈춰 서더니 완전히 시동을 껐다. 모두 내리라고 한다. 그곳에서 막내삼촌을 만난 놀라움도 잠시, 우리는 숙소로 이동하여 짐을 풀었다. 짐을 정리할 시간으로 이틀이 주어졌고, 그 다음날부터는 여기 일과대로 생활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얼마 후 할머니와 아버지가 담화실에 다녀오셨는데, 사색이 된 할머니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목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다 내 탓이다. 어쩌자고 내가…. 너희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다 내가 생각을 잘못한 탓이다." 그러자 아버지와 삼촌도 따라 울기 시작하였다.



우리 가족이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곳은 함경남도 남쪽에 위치해 있는 '요덕군'이라는 산간오지였다. 요덕군에 있는 20여 개 리 중 다섯 개 리가 수용소 구역으로 전체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 수용소의 정식 명칭은 '조선 인민경비대 2915부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칭 '15호 관리소'라고 부른다. 이곳이 바로 정치범 수용소이다(북한에서는 수용소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북한은 지주, 친일파, 종교인, 해방전쟁 당시 치안대에 가담한 사람과, 체제구축과정에서 숙청된 이른바 반당종파 분자로 분류된 사람들을 중범자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그 당사자와 가족들을 사회와 완전히 격리시킨다. 당사자는 평안남도 동신이나 개천에 있는 국가보위부 교화소에 수용하지만, 그 가족들은 용평리와 평전리 지구의 완전통제구역에 수용하는 것이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하고 종신 수용되는 곳이 완전통제구역이다. 이 용평 평전지구에만도 3만 4000명 정도의 정치범과 가족이 수용되어 있다 한다.



아버지와 삼촌은 수용소에 들어온 다음 다음날부터 새벽 5시 30분 종소리에 맞춰 본격적으로 일을 나갔다. 그리고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날이 어두워져서야 집에 돌아왔다. 일과는 대개 저녁 8시가 되어야 끝이 나지만 그것도 자기에게 할당된 작업량을 마쳐야 하는 건 물론, 자기가 속해 있는 조의 다른 조원들도 할당량을 다 마쳐야만 작업을 끝낼 수 있다. 그래서 일을 마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조원들에게서 따가운 눈총과 심한 핀잔을 받게 마련이다.



또 휴식시간이 아닌 때에 쉬게 되면 그 자리에서 인간에게 할 수 없는 모진 욕설과 견디기 힘들만큼의 구타를 당하게 된다. 게다가 휴식을 취한 당사자뿐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조의 다른 사람들까지도 모두 작업시간을 연장하는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위 '연대처벌'이 가해지면 억울하게 당하는 다른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됨은 물론이다. 이처럼 그들끼리 서로 투쟁하게 함으로써 수용자끼리 서로를 감시하게 하거나 작업의 능률을 올리려는 데에 연대처벌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종일 혹사를 당하며 있는 힘을 노동에 다 쏟고 나면 집에 돌아올 때는 기진맥진하여 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조차 없게 된다.



수용소 안에도 학교는 있었다. 인민학교(현 소학교)는 학제가 사회와 같은 4학년이었으나 고등중학교(현 중학교)는 5년제였다(사회에서는 6년제임). 우리가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는 마침 여름방학이었다. 미호와 나는 9월 신학기까지 집에서 할머니의 집안 일을 도우며 놀고 있었다. 어린 미호와 나는 달라진 환경 속에서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졌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할머니나 아버지께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1977년 가을



드디어 9월 1일. 첫 등교일이 밝았다. 6시에 작업반 마당에 모인 학생들은 학생감독의 구령에 따라 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지금부터 행군하며 노래를 부르갔다. '혁명화의 노래' 시작! 하나, 둘, 셋!"

사상과 기술의 주인은 우리라

사대주의 수정주의 짓부셔버리자

사상 기술 문화 혁명 더욱 다그쳐

혁명의 주인답게 혁명의 주인답게

살아나가자……



이 노래는 사회에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였다. 이 노래가 바로 '수용소의 노래'라는 것임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옆에서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아이들에게서 어디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나오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행군 중 만일 노랫소리가 작거나 열과 발을 맞추지 못하면 연대기합을 받고 매를 맞아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조회가 끝나고 우리처럼 새로 온 아이들만 따로 불려서 교원실로 갔다. 몇몇 교원의 집중적인 질문공세가 끝나자 한 사람이 자기가 우리의 담임 교원이라며 나섰다. "야, 이 반쪽바리 새끼들아. 너희들 여기를 평양에 있는 학교처럼 생각하면 안 돼! 여기서는 공부보다는 일을 잘해야 돼! 공부를 암만 잘해도 일을 잘하지 않고 빈둥거리면 아무 소용이 없어. 그때는 평양이 아니라 별 군데서 왔어도 따끔한 맛을 보여주갔어. 알갔어?" 그의 첫마디는 위협과 호령이었다. 한마디 한마디마다 우리에 대한 증오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교원의 뒤를 따라 교실로 향하는 우리의 무거운 발걸음은 후들거려 발을 옮기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보위원들이나 교원들은 수용소 안의 사람들을 전혀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보위원들은 38선 경비대와 마찬가지로 '전투가학금'이라는 것을 받고 있었다. 그 얘기는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고 포로들에게 하듯이 개돼지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학교 교원이라는 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학교 교원이라는 치들도 사실은 교원 자격증도 없는 악랄한 보위원들이었다. 그들은 가르칠 만한 실력도 없고, 아예 그러려는 마음도 없는 작자들이었다. 그저 까닥하면 학생들을 보고 '새끼','반동'이라는 욕을 물 마시듯 하였다.



등교 첫날부터 얻어터지고 작업장에 동원되어 들볶였다. 아침 정상수업은 8시 30분부터였다. 인민학교에서는 '혁명역사' 과목을 제외하고는 모든 과목을 담임선생이 직접 가르쳤다. 모든 수업은 그야말로 공포분위기 속에서 침도 못 삼킬 만큼 긴장된 채 진행되었다. 한번은 어느 학생이 옆 사람과 소곤소곤 잡담을 하다가 선생에게 발각되었다. 있는 힘을 다해 던진 지우개를 피하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선생은 잡담하던 학생에게 달려가더니 박달나무 지휘봉으로 머리고 등이고 닥치는 대로 후려갈겼다. 선생은 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두들겨 패고 나서야 매를 거두어들이더니 욕설을 퍼붓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목숨은 참으로 질긴 것 같았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아이는 여기저기 흐르는 피를 닦으며 꿈틀거렸다.



넷째 시간에는 각 조별로 오후에 할 일에 대한 과제가 주어졌다. 나는 학교 뒷산에 돌을 쌓는 조에 속했다. 이 일은 학교 뒷산을 깎아내 평지를 만들기 위해 흙을 퍼 나르는 작업이었다. 새로 온 다른 학급 학생 하나가 짐통 무게에 못이겨 비틀거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니까 선생도 어쩔 수 없는지 나무 그늘에서 쉬도록 지시하였다. 그러자 그 옆을 지나는 아이들마다 욕질을 해댔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악다구니밖에는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원 중에 한 사람이라도 쓰러지거나 빠지게 되면 그가 할 작업량을 나머지 조원들이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몸이 약해 쓰러진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동정을 받게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저주와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학교생활의 하루하루는 매번 이런 식으로 반복되면서 힘겹게 겨우겨우 지나갔다.



수용소에서의 생활 중 매일 부과되는 작업량도 힘에 겨웠지만 그보다 더 큰 괴로움은 배고픔이었다. 시간은 어차피 흐르는 것이니까 시간 내에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남아서 매를 맞으면서라도 끝마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눈이 뒤집힐 정도로 배가 고픈 것은 문제가 달랐다. 이곳에서는 식량으로 하루 350그램의 옥수수쌀(옥쌀)이 배급된다. 수용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 옥쌀밥을 먹고는 설사병을 만나게 된다. 지독한 설사병에 걸린 사람은 심지어 6개월씩 설사를 계속 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수용소 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기가 바로 처음 1년 간이다. 이 기간을 무사히 견뎌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고도 볼 수 있다. 우선 처음에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수용소로 끌려온 사람들은 그 정신적 충격을 견뎌내기가 무척 힘이 든다. 게다가 식량이라고는 매일같이 소화도 안 되고 영양도 없는 옥쌀만 먹어야 한다. 그리고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중노동에 시달린다. 또 집 안이고 옷이고 머리고 간에 이와 빈대, 벼룩 등이 득시글거리게 된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영양결핍과 불결한 환경이 초래하는 전염병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병으로는 펠라그라(영양 부족에서 오는 일종의 피부병)와 폐결핵, 위장병, 치질, 늑막염, 동상 그리고 정신병이 있다.



이 수용소 안에는 정신병동과 결핵요양소말고도 사람을 격리 수용하는 곳이 또 한군데 있다. 바로 '구류장'이라는 곳이다. '구류장'에 갇힌 사람들 중에는 밭에 있는 옥수수나 콩을 훔치다가 발각된 경우가 가장 많다. 결국 배고픔이 유죄인 것이다. 일단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아침 5시에 기상한 이후부터 밤 12시 취침하기 전까지 계속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한다. 단지 무릎을 펼 수 있는 시간은 식사시간과 대소변을 볼 때뿐이다. 이처럼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생활을 한 달씩이나 하고 나면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이라도 폐인이 되다시피 한다. 구류기간이 끝나고 혼자서 걸어나오는 사람이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기아와 질병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한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같이 무자비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처신을 잘해야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물론 가족도 민족반역자로 낙인찍히게 되고, 수용기간도 5년 더 연장시킨다. 그래서 우리 삼촌도 처음 수용소에 들어와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몇 번씩 자살하려고 마음먹었으나, 차마 할머니 때문에 그럴 수가 없더라고 했다. 이렇게 보위부가 별별 수단을 다 써가며 자살을 막으려 하지만, 자살건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한 달에 몇 건씩은 꼭 자살사건이 발생하였다. 자살한 사람의 시신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 현장에서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가지고 간다. 그리고는 인부들을 시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파게 하고 시신을 묻는다. 그곳은 다시 예전처럼 평평하게 길을 만든다. 그 이유는 아무도 묘를 찾을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이것을 '평토해치운다'고 말한다. 이렇게 평토해치우는 경우는 자살자 외에도 사형 당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1977년 겨울



평양이라면 아직 초겨울일 11월, 이곳 요덕은 벌써 한겨울이었다. 더군다나 내 집이 아닌 수용소에서 처음 겪는 겨울이었다. 정말 이렇게 지독한 겨울은 예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수용소의 겨울은 평균기온이 영하 20도를 맴돌았다. 봄가을이 짧다보니 눈도 여름이 다 되어서나 녹을까말까 했다. 수용소에서 추위를 타는 것은 처음 온 우리들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온 지 10년씩 되었다는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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