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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제국

도리스 부르하르트 지음 | 참솔
1장 아름다움을 향하여 세찬 파도가 밀려오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



헬레나 루빈스타인 - 화장품 역사의 첫 장을 열다


헬레나 루빈스타인은 1870년 크리스마스 날 폴란드의 크라카우에서 태어났다. 헬레나에게는 여동생이 7명이나 있었다. 그녀들은 유복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나 대학교 근처의 오래된 대저택에서 자랐다. 헬레나는 어머니가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동생들의 머리를 빗겨주는 일을 좋아했다. 헬레나의 어머니 아우구스타는 매일 크림을 발라 피부를 관리했고, 저녁에는 딸들에게도 발라주었다. 훗날 헬레나는 말한다. "이때의 경험이 바로 내가 확립한 피부 미용의 기초였다. 처음으로 발라본 크림이 내 인생의 초석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크림에 애착이 많으셨고, 결국 그 애착으로 다른 사람은 절대로 생각하지 못할 큰일을 해내셨다." 아우구스타는 헝가리 화학자 리쿠스키 박사(아우구스타의 친척)에게 크림을 개발하도록 권유했다. 리쿠스키 박사는 약초와 편도기름 그리고 상록수의 목피 추출물을 혼합하여 크림을 개발했고, 이를 폴란드의 국민배우 헬레나 모데스카(아우구스타의 친구)가 적극 추천하여 생산에 들어갔다.



헬레나의 아버지는 헬레나를 의대에 보내고자 했다. 그 당시 의학은 남자들만의 영역이었다. 헬레나는 진지하게 노력했지만, 비위가 약한 탓에 피를 보는 일이 너무 끔찍했고 끝내 의학공부를 포기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헬레나를 결혼시키고자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안에 불화가 그치지 않자, 어머니는 오스트레일리아 콜레인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헬레나의 외삼촌에게 당분간 헬레나를 맡아달라고 편지를 썼다. 루이스 삼촌으로부터 와도 좋다는 답장이 오자, 헬레나는 이제 더 이상 결혼하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당장 짐을 쌌다. 미용크림 12통도 가방 안에 함께 넣었다. 그러나 헬레나는 루이스 삼촌댁에서 사는 것이 서서히 불편해졌다. 그녀는 도시에서 자란 온실의 화초였으므로 힘든 농장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또한 삼촌 밑이라 자유롭지도 못했다. 결국 헬레나는 콜레인에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멜버른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가 주신 기적의 크림이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크림을 이용해 자립하고자 하는 생각은 헬레나의 머리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마침 헬레나가 배에서 만난 영국 여인인 헬렌 맥도날드는, 헬레나의 사업구상을 듣고 성공을 확신했다. 그녀는 헬레나에게 착수금으로 250파운드를 빌려주었다. 헬레나는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빚을 지지 않았다. 헬레나의 사업은 몇 달 지나지 않아 대출금을 이자까지 붙여 상환할 만큼 번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드니의 한 기자가 헬레나의 살롱을 찾아왔다. 흠잡을 데 없는 그녀의 피부를 직접 확인한 그는 헬레나 루빈스타인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전국에서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헬레나는 리큐스키 박사에게 오스트레일리아로 와서 크림 제조법을 가르쳐주고, 자기와 함께 수렴 화장수, 클린징크림, 약용비누 등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박사는 흔쾌히 수락했으며, 그리하여 탄생한 '발라제 크림'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헬레나는 미용실에 갈 시간조차 없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루빈스타인 헤어스타일'이 탄생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하나로 모아 위로 틀어 올린 모양으로, 매우 편한 스타일이었다.



오직 사업이 전부였던 헬레나는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2,000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저축하게 되었다. 헬레나는 당시 18세이던 동생 체스카를 오스트레일리아로 불러들였다. 훗날 영국에 개설한 헬레나의 살롱은 모두 체스카가 경영하게 되었다. 헬레나는 체스카 외에도 보조원을 몇 명 더 채용했는데, 이들은 훗날 오스트레일리아의 지점들을 각자 맡아 운영하게 된다. 갓 스물의 나이에 헬레나 루빈스타인의 이름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전체에서 화제가 되었다. 체스카와 다른 보조원들은 헬레나의 사업을 대단히 잘 이끌었으므로, 이제 헬레나가 직접 관여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다행히도 여유 시간이 생긴 그녀는 인체의 구조와 최신 의학 지식, 그리고 피부관리에 대하여 철저하게 공부했다. 낮에는 베르틀로의 실험실에서 일하며 피부의 구조와 외모를 관장하는 요인에 대해 자세히 배우고, 밤에는 전문서적을 읽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그때 즈음에, 예기치 않게 헬레나의 인생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첫눈에 그에게 반했고, 이내 그와 보내는 시간이 '부엌'(헬레나는 자신의 실험실을 이렇게 부르곤 했다)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더 많아졌다. 그는 에드워드 윌리엄 티투스라고 하는 폴란드 혈통의 미국인 기자였는데, 견문이 넓고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프로포즈했지만, 1907년 헬레나는 세계제국 건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런던으로 가면서, 에드워드에게 일과 사랑 사이에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에드워드는 런던으로 곧 뒤따라가겠노라고 약속했다. 런던은 삭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헬레나는 이 흥미진진한 국제도시 런던에 푹 빠져버렸다. 그녀는 살롱을 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헬레나에게 운명의 한 가닥이 완성되었다. 그녀의 새 살롱 문 앞에 바로 에드워드가 서 있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줄곧 헬레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두 번째로 청혼했으며, 헬레나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신혼부부는 살롱 개업에 맞춰 런던으로 돌아왔다. 살림집은 3층에 꾸미고 맨 위층을 '부엌'으로 썼다. 문 옆에는 '헬레나 루빈스타인'이라고 쓰고, 그 아래 조그맣게 '살롱 드 보테 발라제'라고 쓴 간판을 달았다. 이 로고는 그 후 몇 년 동안 더 사용되었다.



헬레나는 피부색 파우더뿐만 아니라 립스틱도 유행시키고자 했다. 당시의 수상인 허버트 애스퀴스 경의 부인 마고 애스퀴스는, 우아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여인이었다. 헬레나는 레이디 애스퀴스에게 처음으로 립스틱을 선보였다. 레이디 애스퀴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그로 인해 더 많은 고객이 헬레나의 살롱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체스카와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프랑스에서는 패션잡지에 난 기사와 광고 덕분에 제품과 그 사용법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다. 당시 최고의 디자이너 푸아레와 알게 된 것도 레이디 애스퀴스를 통해서였다. 헬레나는 1미터 45센티미터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멋진 스타일을 만들어주는 푸아레의 실력을 믿었다. 헬레나가 1908년 런던에서 그 해의 베스트 드레서로 뽑힌 것도 모두 푸아레 덕분이었다. 헬레나는 파리에도 살롱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1909년 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로 그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듯했다. 임신을 한 것이다. 하지만 헬레나는 사업장과 분리된 새 집을 구한 후, 출산 3개월 전, 파리의 루 생 오노레에 드디어 살롱을 열었다. 런던에서 출산을 하는 동안 사업을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했으므로, 헬레나는 바로 아래 동생인 파울리나를 파리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아들 로이를 순산했다.



엘리자베스 아덴 - 아름다움에 삶의 전부를 걸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그레이엄은 1878년 12월 31일 캐나다 토론토 근교 우드브리지에서 태어났다. 플로렌스의 부모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고, 플로렌스는 다섯 남매 가운데 넷째였다. 플로렌스의 어머니는 그녀가 6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플로렌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그녀의 학비를 대던 외가의 어른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그녀의 이름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간호사가 되라고 말했다. 플로렌스는 펨브로크라는 소도시 근방에 있는 영국 수녀회를 찾아갔다. 그 수녀회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 냄새가 역겨웠고, 그곳을 지배하는 절망적인 분위기도 참을 수 없었다. 병원에 있을 때 플로렌스는 어느 화학자가 피부병 치료연고를 제조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아두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올 때 그 제조법을 익혀서 나왔다. 그녀는 치료와 동시에 피부를 아름답게 가꾸어주는 크림을 만들고 싶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실험을 시작했고, 자매들은 플로렌스가 만든 크림을 피부에 직접 발라보는 실험대상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늘 실패였다.



플로렌스는 뉴욕에 살고 있던 오빠 윌리엄으로부터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무한한 자유의 나라, 부유한 여자들이 사는 나라, 최첨단 패션과 미용 살롱이 있는 나라, 미국으로 가야 해! 그녀는 결심했다. 1908년 플로렌스는 완강하게 반대하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오빠가 있는 뉴욕으로 갔다. 플로렌스의 인생여정에서 그 다음 단계는 결정적인 운명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성공한 화장품 회사인 엘리노어 아데어에서 운영하는 살롱의 경리로 취직한 것이다. 간호사 시절부터 마사지에 소질이 있던 플로렌스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미시즈 아데어에게 전문적인 마사지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했다. 미시즈 아데어는 월급을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후, 곧 손님들 사이에 그녀의 손은 '자석 손'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플로렌스에게는 예약손님이 넘쳐났다. 마사지일을 하는 와중에도 플로렌스는 화장품 생산의 기초적인 법칙을 배웠고, 경리일을 보면서 미용산업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플로렌스는 마사지 실력으로, 또 판매원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욕심이 많아 일주일에 6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고, 쉬는 날에도 다른 살롱을 찾아다니며 그곳에서 사용하는 기술과 제품을 알아보았다. 살롱 순회를 하던 중 플로렌스는 엘리자베스 허바드를 만나게 되었다. 허바드의 마사지 기술은 뛰어나진 않았지만, 대신 아데어의 크림보다 더 나은 제품을 그녀에게 제공했다. 플로렌스와 허바드는 곧 두 사람의 재능을 한곳에 합치면 대단히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909년 두 사람은 공동으로 살롱을 열었다. 손님들은 플로렌스의 흠 잡을 데 없는 피부와 날씬한 몸매에 감탄하며, 그녀에게 피부관리를 맡겼고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허바드가 자신은 제품 생산에만 전념할 테니, 플로렌스가 혼자 판매와 서비스를 맡아 집세와 운영비를 조달하라고 요구했다. 두 사람은 심한 언쟁을 벌인 뒤 곧바로 결별했다. 다행히 플로렌스는 집주인과 사이가 좋아 살롱에 남을 수 있었다.



2장 향수가 사랑의 욕구를 자극하다 (1910년 ~ 1920년)



헬레나 루빈스타인 - 런던·파리·뉴욕에서 사교계의 여왕으로

1914년 8월, 유럽에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초에 폴란드계 미국인이었던 에드워드는 미국으로 가자고 아내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헬레나는 다시 동생 파울리나에게 사업의 총수역을 맡겼다. 1916년 헬레나는 이스트 49번가 15번지에 미국에서의 첫 살롱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모퉁이만 돌면 바로 엘리자베스 아덴의 살롱이 나타났다. 헬레나는 아덴의 모든 제품을 면밀하게 검사했는데, 1950년 한 어느 인터뷰에서 헬레나는 '엘리자베스 아덴은 화장품 용기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가능한 한 예쁘게 만들고자 하지요. 그러나 나는 용기 안에 든 내용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아덴의 제품은 주로 선물용으로, 루빈스타인의 제품은 자신이 쓸 목적으로 사곤 했다. 헬레나는 살롱 벽에 짙푸른 빌로드를 펼쳐 분홍색 목재틀 사이에 고정시키고, 고풍스러운 가구는 하늘색 실크로 씌웠다. 개업 준비는 세부사항까지 철저하게 고려해야 하는 치밀한 군사작전과도 같았다. 이 일에 에드워드는 없어서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그는 어느 신문사 편집실을 통해, 호텔과 신문사를 소유한 제이콥 애스터의 부인 미시즈 애스터가 초대한 무려 1,500명에 달하는 고객명단을 손에 넣었다. 뿐만 아니라 기자회견도 했다. 에드워드는 기자회견에 대비해 모든 자료를 준비했다. 거기에는 물론 자기 아내에 대한 자료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보도자료에서 헬레나의 나이는 실제보다 11세나 낮춰져 있었다. 이것은 라이벌인 엘리자베스 아덴의 나이가 상대적으로 많아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몇 년 후에는 아덴도 나이를 낮춰 다시 헬레나보다 4세 아래가 되었다.



1916년의 대대적인 기자회견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푸아레의 의상을 입은 헬레나의 모습이 안 나온 잡지가 없을 지경이었다. 쇄도하는 주문과 일상의 일들을 모두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헬레나는 대서양 건너 런던에 있는 동생 망카에게 도움을 청했고, 2개월 후 드디어 망카가 뉴욕에 도착했다. 망카가 살롱을 맡아준 덕분에 헬레나와 에드워드는 미국 전역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1917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살롱을 열어 스웨덴 식 마사지로 즉각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어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에도 살롱을 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라이벌 아덴의 텃밭인 워싱턴과 시카고에도 자신의 시장을 개척했다. 캐나다 시장에는 토론토 지점을 열어 아덴보다 일찍 진출했으나, 아덴은 1920년에 파리에 살롱을 열어 반격해 왔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헬레나를 도왔다. 백화점들이 그녀의 제품을 판매하겠다고 나섰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는 아덴의 제품을 유치하는 데 실패한 곳들이었다.



그 시절 영화배우들은 새로운 미인의 전형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메이크업은 여전히 그들에게만 허용된 일이었지만, 점점 더 많은 미국 여성들이 배우들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무성 영화배우 테다 바라 덕분에 헬레나의 사업은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여배우 테다 바라는, 폭스 사에서 미국 최초의 섹스심벌로 키운 스타였다. 그러나 당시의 카메라로는 유난히 아름다운 그녀의 눈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러자 스튜디오 측은 헬레나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헬레나는 테다 바라를 뱀프 스타일(vamp style, 미국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 전형)로 꾸몄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모습은 완벽 그 자체였다. 언론은 갈채와 더불어 홍보를 아끼지 않았으며, 헬레나는 어떤 여성이든 루빈스타인 제품을 사용하면 눈이 몰라지게 아름다워진다고 지칠 줄 모르고 강조했다.



엘리자베스 아덴 - 일에 몰두하고, 사랑에 빠져들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그레이엄은 자신의 이름이 회사의 세련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록 옛 동업자 엘리자베스 허바드와는 한때 다투기도 했지만, 그녀의 이름에서 엘리자베스를 땄다. 한편으로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소설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독일 정원>에서 따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아덴이라는 성(姓)은 영국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낭만주의 시 <이녹 아덴(Enoch Arden)>에서 따왔거나, 단순히 알파벳의 첫글자 A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정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플로렌스는 이 이름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사이 건축업자로 성공한 오빠가 6,000달러를 그녀에게 빌려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돈을 살롱의 설비에 투자하고 상품원료를 구입하는 데 썼다. 살롱의 문은 붉은 야광으로 칠하고 벽에는 핑크빛 천을 붙여 분홍빛 공단으로 테를 둘렀으며, 가구는 프랑스 풍이나 베네치아 풍으로 했다. 분홍색을 좋아하는 아덴이 살롱 이름은 왜 '레드 도어'라고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튼 회사 이름과 마찬가지로 살롱 이름도 성공을 거두었다. 레드 도어는 오늘날에도 아덴의 심벌로 남아 있다.



엘리자베스는 쉬지 않고 일했다. 살롱 영업이 끝난 후에는 실험실에 틀어박혀 새로운 제품을 연구했으며, 특히 립스틱과 부드러운 색조의 파우더 개발에 정성을 기울였다. 1914년 엘리자베스는 수도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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