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 섬의 수수께끼
존 플렌리ㆍ폴 반 지음 | 아침이슬
들어가며 - 이스터 섬의 개관
제1장. 유럽인의 발견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섬의 발견은 1722년 네델란드의 사령관 야콥 로게벤에 의한 것이다. '섬사람들에 관해서는 우리가 이 섬에 머문 것이 아주 짧았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특이하게 높게 세운 대형 석상들 앞에 불을 피워놓은 것을 보았을 뿐이다. …… 이 석상들을 처음 본 우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튼튼한 밧줄은 말할 것도 없고 기계를 만들 정도의 두툼하고 묵직한 목재가 없는 이 섬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석상을 세울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네델란드 사람들이 최초로 섬을 찾은 사람들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추정을 하게 하는 한 가지 단서는 배가 섬에 닿았을 때 섬사람들이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일 섬사람들이 그 이전에 바깥세계와의 접촉이 전혀 없었더라면, 피부가 하얀 사람들을 가득 실은 세 척의 선박이 도착한 사건이야말로 이들에게 오늘날 UFO가 나타나 일으킬 공포와 경악에 버금가는 굉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스터 섬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774년 캡틴 제임스 쿡(영국의 탐험가, 항해가)이 섬을 방문하면서부터이다. 1774년 3월 쿡은 바위투성이 해안을 돌며 적당한 정박장소를 찾아보았다. 다음 날, 작은 배를 타고 다가온 두 명의 섬사람이 그들에게 바나나를 건넸다. 쿡은 몇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물품을 구입하려고 해안가로 내려갔다. 색실과 못과 유리, 그리고 옷가지를 섬사람들에게 주고 대신 고구마, 바나나, 사탕수수와 닭을 받았다. 쿡은 영국을 떠나기 직전에 1770년에 스페인 사람들이 이 섬을 찾아갔다는 정보를 접하긴 했으나 이 섬에 상륙하게 된 것은 분명 계획된 일정은 아니었다. 쿡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이 섬의 주민들이, 기계로 작동하는 힘이라는 건 전혀 생소한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엄청나게 크고 불가사의한 석상들을 들어올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석상의 머리 위에다 어떻게 원통형의 커다란 돌을 올려놓을 수 있었는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의 고고학적 작업이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1886년에 USS 모히칸호의 미국 팀에 의해서였다. 그 이후로 최근 수십 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작업이 섬에 남아 있는 이채롭고 돋보이는 유적들, 즉 석상, 돌산(채석장), 제례용 기단(基壇), 그리고 돌집 등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불가피했다. 이 때 이루어진 작업 중에는 많은 마을과 동굴, 무덤, 암각화, 그림 등에 대한 해석, 555개의 두드러진 석상을 거론하고 일일이 주석을 단 조사작업과 113점의 기단과 제례의식이 치러지는 오롱고 마을에 대한 상세한 기록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라노 카라쿠 분화구를 간단히 발굴한 작업과 전설과 언어에 관련된 많은 정보의 수집, 두 점의 롱고롱고(Rongorongo, 불가해한 문자들이 가득 새겨져 있는 목판) 목판을 비롯한 수많은 연구자료의 수집도 빠뜨릴 수 없다.
1955년에 이스트 섬에 연구분야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토르 헤예르달(노르웨이의 해양학자 겸 고고학자)의 첫 탐험대가 고고학자 팀을 이끌고 섬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고고학자들 가운데는 윌리엄 멀로이도 끼어 있었다. 이 탐험대는 다양한 지역에서 발굴작업을 벌였고, 1978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멀로이는 이 섬의 연구를 계속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스터 섬에 관련된 상당히 많은 연구가 새롭게 이루어져 왔다. 이 연구를 지속해온 사람들 중에는 멀로이의 지도 아래 공부했던 제자들이거나 그의 연구작업에서 영감을 얻은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이뤄낸 작업성과들이 이 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장. 이스터 섬과 그 지형이스터 섬, 남태평양에 작은 점처럼 떠 있는 이 섬은 사람이 상주하는 지구상의 땅 가운데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폴리네시아에서 동쪽으로 맨 끝에 있는 유인도이기도 하다.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가까운 칠레의 콘세프시온은 남동쪽으로 3,599km 떨어졌고, 섬의 남쪽으로는 광활한 남극해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이스터 섬은 수천 년 동안 상주인구가 살아온 섬이다. 그리고 그 긴 세월의 대부분을 섬사람들은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해 왔고, 완벽한 격리와 고립된 상황 속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요즈음에는 칠레 항공사인 '란 칠레' 소유 대형 제트기를 타고 다섯 시간동안 비행하면 이스터 섬에 다다를 수 있다. 혹은 다른 항로로 타이티에서 출발하는 항로를 택할 수도 있는데 산티아고에서 출발하는 경우와 비행길이는 비슷하다. 그러나 이 방향을 택하게 되면 시간변경이 거꾸로 이루어진다. 즉, 여섯 시간의 비행이 시간상으로는 열 시간 이상 걸리는 것이 된다.
풍경 : 섬의 전체 모양은 삼각형이고 총 면적은 171㎢에 불과하다. 섬에는 두드러진 봉우리가 세 군데에 있는데, 이 세 봉우리가 모두 삼각형 지형의 모서리에 가깝다. 가장 높은 북쪽의 테레바카는 해수면에서 510m 높이로 솟아 있다. 이보다 작은 동쪽의 포이케는 410m 정도이고 남서쪽의 라노 카우는 겨우 300m 밖에 되지 않는다. 비행기가 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이한 풍광이 자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해안선을 따라 보이는 수많은 절벽들은 끊임없이 철썩이며 부딪치는 파도가 빚어놓은 것이다. 더 작은 분화구들도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섬은 그 근원이 본래 화산섬인 것이다. 섬의 탄생은 바다의 바닥에서부터 점점 자라서 마침내 해수면 위로 불쑥 튀어나오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스터 섬은 아직도 활발하게 살아 있는 화산섬이라서 언제 격렬하게 폭발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섬에 살았던 수천 년의 세월동안에는 화산폭발이 전혀 없었다. 화산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암석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현재 이스터 섬에서 보이는 암석의 범위는 놀랄 만큼 폭넓다. 섬에 있는 세 곳의 봉우리는 주로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현무암은 용암이 응고되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이스터 섬의 해안선은 폴리네시아(오세아니아 동쪽 해역에 분포하는 수천 개 섬들의 총칭) 제도에 속한 섬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산호초가 적다. 물론 작은 산호충들이 자라긴 하지만 바닷물의 온도가 겨울에는 섭씨 21도까지 떨어지기 때문에 산호초를 이루는 타입의 산호충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낮은 온도이다. 그런데 이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해안에 보호벽이 전혀 없다는 의미가 된다. 사나운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침식이 일어났고, 그리하여 포이케, 라노 카우 주변과 테레바카의 북쪽 지역에 300m 높이에 달하는 가파른 절벽이 생겼다. 오직 남쪽 해안만 이런 규모의 침식을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남쪽 해안은 부드럽고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해안선이 폭넓게 펼쳐져 있다. 아열대 기후와 적당량의 강우의 영향을 받아 이스터 섬의 암석들은 서서히 풍화를 거침으로써 다양한 색조의 붉은 빛이나 갈색빛이 도는 점토토양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가장 가파른 절벽들이 있는 지역과 형성된 시기가 가장 짧은 화산암이 퍼져 있는 지역들을 제외한다면 이 섬의 대부분의 지역들에 나무가 자랄 정도로 충분한 양과 질의 토양이 마련되어 있다.
기후 : 섬의 연평균 기온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섭씨 20.5도이다. 낮과 밤의 일교차도 심하지 않고 적절하며 일년 내내 내리는 강우는 다소 불규칙하고 연평균 강우량은 1,198mm이다. 이 섬은 바람이 아주 많이 부는 지역이다. 바람이 잠잠한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폭풍우가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다가 괜찮은 항구가 없기 때문에 배가 오가는 데 심각한 문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스터 섬에는 바람이 완전히 차단되는 지역들이 있다. 널리 알려진 지역이 라노 카우 분화구 안이다. 사실, 라노 카우는 일종의 천연온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단점을 말하자면 지표면에 물이 없다는 것이다. 담수를 얻을 수 있는 자연환경으로 이 섬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이 기댄 것은 세 군데의 화구호들 -라노 아로이, 라노 카우, 라노 라라쿠- 이었다. 북쪽 해안에 있는 몇 군데 용암 동굴의 물웅덩이를 제외하고는 이것이 물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정착한 사람들이 차츰 빗물을 받아서 보존할 수 있도록 암석 사이를 뚫어서 작은 물웅덩이들을 만들게 된 것은 당연하다.
동물군과 식물군 : 이스터 섬은 극단적으로 고립된 섬인 까닭에 늘 식물군과 동물군이 빈약한 상태였다. 이 섬의 자생종인 육상 척추동물은 하나도 없다. 양과 돼지, 말과 축우들은 1866년에 유입되어 오늘날까지 살고 있다. 이 섬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육지새는 작은 매인데, 칠레산 엽조와 남아메리카산으로 메추리와 비슷하게 생긴 티아모우와 함께 유입되었다. 섬으로 이주해올 때 사람들이 조류 갈루스 도메스티쿠스를 데리고 왔다. 이는 대표적인 식량원이 되었고 폴리네시아말로 모아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주를 함축하고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정말 사람들이 이주했다면 어디서 어디로 했는지, 그 이주방향에 대해서는 그다지 명확한 게 없다. 이스터 섬에는 등각류와 거미, 곤충, 벌레의 종은 몇 안 되고 달팽이도 한 종뿐이다. 한편 귀뚜라미와 전갈은 어디를 가더라도 퍼져 있는데 종류가 다양하고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라 한다.
이스터 섬의 환경은 다소 특별하다. 이 섬의 고유한 식물군이 나무 한 종(2%)과 관목 두 종(4%)뿐이라는 사실은 놀랄 만하다. 이것은 태평양 해역의 다른 '높은' 섬들과는 상당히 어긋나는 현상이다. 다른 섬들의 경우에는 나무 식물군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70%). 그리고 섬의 고유 수종 소포라 토로미로는 섬 주민들의 약탈과 파괴 행위 때문에, 그리고 유럽인들이 풀을 뜯어먹는 가축들을 들여와 방목하게 됨으로써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토르 헤예르달이 이 섬을 찾았을 무렵에는 눈에 띈 토로미로가 라노 카우 분화구 속에서 죽어가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기적처럼 토로미로는 스웨덴에서 부활했다. 헤예르달이 채집한, 섬에 마지막 남아 있던 이 수종의 씨앗들이 스웨덴의 혜테보리의 식물원에서 발아했던 것이다. 토로미로 수종을 이스터 섬에 다시 들여오려는 공동의 노력이 현재 진행 중이다. 그리고 요즘 이스터 섬을 찾은 사람이라면 100종이 족히 넘는 꽃나무와 양치류 식물이 자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이 식물의 대다수는 최근에 섬으로 유입된 종류이다.
제1부 최초의 '보트 피플'
제3장. 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동쪽일까, 서쪽일까? : 이스터 섬 사람들과 관련된 가장 근본적인 질문, 나머지 다른 많은 이슈들을 좌우하는 질문은 바로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가?'하는 것이다. 이 화산섬의 반경 15km를 심해가 에워싸고 있으므로 사라진 대륙의 자투리땅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섬에 사는 주민들은 태평양 해역의 다른 섬들에 사는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어딘가에서 이 섬으로 이주하여 군락을 이루게 된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다른 어디'라는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섬의 지리학적 위치상 기본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즉, 동쪽(남아메리카) 혹은 서쪽(폴리네시아)이다.
토르 헤예르달과 콘 티키 탐험대 : 태평양 해역의 이 지역에서 우세한 바람과 해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토르 헤예르달이 폴리네시아에 정착한 사람들은 오직 신대륙에서 왔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헤예르달은 1947년에 유명한 콘 티키 탐험대를 이끌고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로 마음먹었다. 대단한 용기와 넘치는 상상력으로 뭉친 헤예르달과 다섯 명의 탐험대원은 가볍고 단단한 열대 관목 발사로 만든 뗏목을 타고 페루에서 여정에 올랐다. 그것은 '일방 해상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면 간단한 뗏목을 타고도 폴리네시아 동쪽으로 떠내려 간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완벽하게 격리된 채 몇 달을 항해하면서 악천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대원들은 육지가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바다에서 보낸 지 101일 만에 콘 티키호는 타히티 동쪽에 있는 투아모투의 한 모래톱에 부딪치듯 다다랐다. 콘 티키가 '항구적인 무역풍과 강력한 동반성 해류'에 관련된 자신의 이론을 입증했다고 확신한 헤예르달은 이 섬에 전래되는 이야기와 섬사람들의 기억, 식물의 생태, 물질문화, 언어체계, 형질 인류학적 자료들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선별적으로 활용했다.
콘 티키호 - 숨겨진 증거: 콘 티키호의 탐사항해는 여러 측면에서 관심을 끌긴 했어도 정작 폴리네시아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이 남아메리카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힐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선사시대의 페루인들은 세 개의 통나무로 만든 작은 뗏목을 타고 해안을 벗어나 실제로 항해를 해보았으나 그것은 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였다. 그리고 선사시대에 "망망대해의 긴긴 항해에서 살아남을 만한 선원"을 태운 뗏목이 있었다고는 페루 해변 전역을 통해 알려진 바가 없었고 카누를 만드는 데 긴요한 큼직한 나무도 없었다. 더욱이 콘 티키호 후로 잇따라 이루어진 실험들은, 기껏해야 남적도 해류와 남동 무역풍이 페루에서 마르케사스 제도나 혹은 투아모투 제도로 배를 끌고 가고 이스터 섬으로는 데려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어쨌거나 콘 티키호 황해와 선사시대 배가 표류 항해한 것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별로 공정하지 않다.
바람과 해류, 그리고 항해 : 바람이나 해류 그 자체로 시사해주는 바가 별로 없다면 고대 폴리네시아인과 남아메리카인이 지녔던 항해기술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집단이 이스터 섬으로 향하는 길고 위험한 항해를 하는 데 적합한 최상의 자질을 갖추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고대 폴리네시아인들이 놀랄 만큼 탁월한 항해술을 갖추었고 광활한 태평양을 가로질러 하와이와 뉴질랜드처럼 아득히 먼 지역을 식민지화했다는 내용을 입증할 만한 풍부하고 탁월한 증거자료들이 있다. 그리고 역방향으로 움직인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동쪽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증거들도 있다. 한편 우리에게는 고대 남아메리카인들이 이러한 형태의 항해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도 없다.
구비문학, 식물학적 증거 : 이스터 섬의 전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호투 마투아(Hotu Matu'a) 즉 이 섬의 초대 왕이다. 그는 서쪽으로부터 와서 해가 솟아오르는 곳을 향해 갔다. 그의 고향은 히바(Hiva)라고 불리는 섬이었다. 이 이름이 이스터 섬에서 북서쪽으로 3,641km 떨어진 마르케사스 제도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걸 느낀 호투 마투아는 성지인 오롱고(섬의 서쪽 끝)로 가서 떠나온 고향땅을 바라보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폴리네시아의 전통에서는 맨 서쪽 끝의 땅을 영혼이 떠나는 지점으로 본다. 이와 유사하게, 알프레드 메트로는 섬사람들은 시조가 살았던 땅의 이름을 '마라에 엘가'라는 서쪽에 자리한 큰 섬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곳이야말로 폴리네시아 섬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리고 분류학은 이스터 섬을 개척한 사람들이 신세계에서 왔다는 헤예르달의 이론에 분명하게 이의를 던졌다. 유럽인이 들어온 무렵이나 헤예르달이 직접 조사를 위해 최초로 꽃가루 분석을 해 보았을 당시에도 이 섬에는 남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자원인 옥수수나 콩, 혹은 호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미술과 민속 공예품 : 20세기에 이루어진 연구와 발굴작업, 특히 지난 수십 년간의 연구와 발굴작업을 통해 남태평양을 연구하는 고고학계의 대다수 전문가들은 라파 누이(19세기 이래 주민들이 부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