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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 마그나카르타의 해

존 길링엄ㆍ대니 댄지거 지음 | 생각의나무
가문 간의 전쟁



존 왕은 116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옥스퍼드 버몬트에 있는 왕궁에서 태어났다. 그는 헨리 2세와 엘리노어가 부부로 지낸 15년 동안 태어난 8남매 중 막내였고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8남매 중 아들 하나와 딸 셋은 어려서 죽었다. 존의 어머니인 엘리노어는 헨리 2세와의 결혼이 재혼이었다. 14년간 지속되었던 엘리노어의 첫 결혼 생활에서는 자녀가 두 명의 딸뿐이었다. 첫 남편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엘리노어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1152년 이혼했다. 이혼의 결과 루이는 대략 현재 프랑스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방대한 영토를 잃었다. 이혼의 대가를 너무 비싸게 치른 셈이다. 엘리노어는 루이와 이혼한 지 겨우 8주 후 헨리와 결혼했다. 헨리 2세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었고 부자였다.



당시 다른 가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플랜테저넷 왕가(1154~1339년. 헨리2세를 시조로 한 영국 왕조)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많은 사실이 알려져 있다. 존은 어렸을 때부터 왕가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지 절실히 깨달아야 했다. 그가 겨우 다섯 살이었던 1173년에 그의 맏형 헨리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놀랍게도 엘리노어도 이 반란에 가담했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왕은 물론 플랑드르, 불로뉴, 블루아의 백작들 모두가 가담했고, 푸아투,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의 수많은 귀족들도 뒤를 따랐다. 하지만 헨리 2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의 부하들이 엘리노어를 붙잡는 데 성공하여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반란이 무산되자 그는 세 명의 아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이전 지위를 다시 복원시켜 주었다. 하지만 엘리노어는 대부분의 기간을 윈체스터에 유폐한 채 감시자를 붙였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절대로 풀어주지 않았다. 1173~1174년의 전쟁 때는 아직 너무 어렸던 존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아들 모두가 한편이었다. 하지만 이후 이들은 서로 끔찍하게 싸워댔다. 싸움의 원인은 가문의 상속권이었다.



헨리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남아 있을 것 같은 제국과는 절대 사돈을 맺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왕실의 자산을 구축했고 이것을 아들들에게 나누어주려 했다. 물론 국왕은 딸들에게 줄 것도 생각해 놓았다. 당시 존만이 유산을 받지 못했다. 사실 존은 아버지가 글로스터의 윌리엄 백작의 세 딸 중 하나인 이자벨과 약혼시켰을 때에도 겨우 9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너무 어려서 결혼할 수 없는 아이들을 약혼시키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약혼한 아이들이 결혼에 골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존의 형인 리처드는 처음에 바로셀로나의 백작 딸과 약혼했고 루이 7세의 딸 앨리스와 두 번째 부인으로 약혼했지만 두 여인 모두 리처드와의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정치적 환경이 변함에 따라 새로운 약혼식이 계획되곤 했던 것이다.



존이 14세가 되던 1183년에는 헨리 왕이 앨리스와 존을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앨리스는 1169년부터 줄곧 헨리 2세에 의해 구금당하고 있었다. 교황과 프랑스 왕은 여러 해 동안 헨리에게 앨리스를 리처드와 당장 결혼시키든지 아니면 프랑스의 백작에게로 돌려보내라고 압력을 가했으나 앨리스는 1189년에 헨리 2세가 죽을 때까지 20년간 계속 구금되었다. 헨리 2세가 죽은 후 왕이 이 젊은 여인을 유혹하여 가두어 두었다는 증거가 드러나자, 그녀의 오빠인 존엄왕 필리프(필리프 2세)가 리처드와의 약혼을 깨고 말았다. 이후 필리프는 그의 누이를 욕보였던 가족을 박살내고야 말겠다며, 이를 갈았다.



엘리노어의 반란 이후 헨리 2세는 전과 다르게 여러 여인을 취했다. 불가피하게 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것이 분명했지만, 왕은 젊은 프랑스 공주를 유혹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늙은 왕이 그의 제국을 완전히 쪼갤 생각임에 틀림없다고들 수근댔다. 이에 놀란 아들들은 서로 싸워대기 시작했고, 이 새로운 반란은 아버지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처음에는 장남 헨리와 제프리가 아버지에게 대항했고 뒤이어 리처드가 가세했다. 이런 가족간의 내전은 상대방을 죽이려는 전쟁이 아니었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자기들 몫이라고 믿는 땅들을 빨리 내주도록 압력을 가하려고 했을 뿐이다.



1180년대에 계속된 플랜태저넷 가문 사람들의 반목은 결국 가족의 죽음을 불러왔다. 헨리 2세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던 1183년의 반란은 장남 헨리가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죽어버리자 그대로 끝나버렸고, 1186년에는 제프리가 파리에서 사망하여 노트르담 성당에 묻혔다. 1189년이 되자 전쟁은 병들고 지친 헨리 2세의 패배로 끝났고 리처드와 존엄왕 필리프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늙은 왕은 항복하고 며칠 후인 7월 6일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며 리처드와 존을 비난했다. 헨리 2세가 막내 아들인 존이 자신을 버렸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존은 처음 6년 동안의 가족간 싸움에서 줄곧 아버지에게 충성을 표해왔지만, 늙은 왕을 도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자 미련 없이 배신하고 말았다. 헨리 2세는 오랜 치세 동안 많은 적을 만들었지만 이들 중 아무도 그를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를 때려눕힌 상대는 자신의 가족이었다. 드디어 존은 형의 주장에 따라 글로스터의 이자벨과 결혼했다. 리처드는 왕위를 차지하자 앨리스와 결혼할 마음이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이 그녀와 결혼하는 것도 싫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존과 이자벨이 헨리 1세의 증손자, 증손녀여서 근친이라는 이유로 결혼에 반대했지만 결혼식은 강행되었다.



사실 존은 별로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결혼은 합법적일 수도 있고 무효일 수도 있는 애매한 상태가 되었고, 분명 존도 이런 상태를 즐겼던 것 같다. 당시 잉글랜드의 새 왕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그가 전쟁 중 죽는다면 존이 왕위를 물려받아 그의 아내는 백작의 딸과는 비교도 안 될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었다. 리처드는 동생에게 매우 관대하게 대해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나치게 후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존은 리처드가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오는 길에 독일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를 배신했다. 1193년 1월, 존은 그에게 노르망디 국경의 전략적 요새들을 넘겨주기로 약속한 프랑스의 필리프와 동맹을 맺고, 이자벨과 결별한 후 필리프의 누이인 앨리스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앨리스는 리처드 대신 섭정 중이던 리처드의 어머니 엘리노어가 지휘한 참사관들에게 붙잡혔고, 반역자와 결혼하지 못하도록 구금되었다. 이제 존은 이자벨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1194년 1월에 필리프는 존에게 아르크, 드린코트, 에브루 등 세 개의 주요 노르망디 변경 요새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 존으로부터 동부 노르망디 전부를 할양받았다. 300년 가까이 선조 때부터 내려오던 영토를 마음대로 양도한 것은 십자군에 참가하고 있던 리처드는 물론 전체 왕실에게 충격적인 배신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리처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감옥에서 풀려났고, 존은 다시 한번 입장을 바꾸었다. 어찌나 재빠르게 변신했던지, 아무도 모르게 에브루로 도망쳐서는 아직 존의 배신을 모르고 방심한 프랑스 수비대를 모두 죽여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프랑스 왕도 배신해 버렸다.



존은 공공연하게 아버지에게 대항했고 심지어 리처드가 했던 것처럼 무기를 들기까지 했지만, 충성을 맹세하는 척하다가 상대방이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 곧바로 충성 대상을 바꾸어 버렸다는 점에서 리처드와 다른 면을 보였다. 1194년 이후 존은 형제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1197년이 되자 모든 리처드 영지의 추정 상속인으로 간주되었다. 전쟁 중 화살에 맞은 상처가 썩어들어 가면서 목숨을 위협하자 리처드는 존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리처드는 1199년 4월에 적자를 남기지 못한 채 죽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혼란스러운 플랜태저넷 왕가의 막내였던 존이 왕관을 쓰게 되었다. 존은 1200년 8월에 즉위한 후 아이가 없던 이자벨과 이혼하고 앙굴렘의 이자벨라와 결혼했다. 첫 번째 아이였던 헨리는 1207년이나 되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1215년에 어떤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기엔 너무 어렸다. 1215년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존 왕의 반대파가 그 사람에게 의지했을 것이고, 마그나카르타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존 왕



1199년 대축일(부활절 후 40일째 목요일)에 존은 차양을 든 봉신 네 명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갔다. 형이 10년 전에 했던 것처럼 그는 주 제단에 무릎을 꿇고 평생 신과 교회를 위해 평화, 명예, 위엄을 지키고, 휘하의 사람들을 공정하고 평등하게 대하며, 이 땅에 도입되는 좋은 법은 지키고 악법과 악습은 타파하겠다는 3가지 대관선서를 했다. 대주교는 그를 주 제단으로 인도하고, 맹세한 서약을 진심으로 지키지 않으려면 왕관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엄명했다. 존은 신의 도움으로 그 모든 것들을 지키겠노라 대답했고, 대주교가 그에게 왕관을 씌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대주교는 의식의 지팡이인 장(杖)과 홀을 주고, 존 왕은 옥좌에 올라 미사를 드렸다. 미사를 끝내고 존은 왕관을 쓰고 왕홀과 왕장을 든 후 궁정으로 돌아가 대관식 연회에 참석했다.



존의 형인 리처드의 부음을 들은 프랑스의 필리프는 즉시 몇 년 전 존이 프랑스군을 학살했던 도시인 에브루에 군대를 보냈고, 그 2년 후에는 노르망디, 앙주, 푸아투까지 점령했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재앙이 존이 앙굴렘의 이자벨라와 결혼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존은 즉위 후 주교 몇 명을 설득하여 글로스터의 이자벨과의 결혼을 취소하고는, 사절이 돌아오기도 전에 앙굴렘 백작 오드마르의 딸이자 상속녀와 결혼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고, 특히 이자벨라의 약혼자이자 가장 강력한 영주 중 하나였던 푸아투의 위그 드 뤼지냥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존에게는 앙굴렘과 같은 어느 정도 자율적인 영지가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오드마르 백작 영애와의 결혼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뤼지냥 가는 앙굴렘 대신 적절한 보상을 받으려 했지만 존은 그 청원을 무시했고, 뤼지냥 가는 결국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필리프 왕에게 호소하게 되었다.



분노한 뤼지냥 가의 고발을 받은 필리프 왕은 존을 궁전으로 소환했다. 존이 불응하자 필리프는 프랑스에 있는 존의 토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하고는, 아르튀르(존의 조카, 브르타뉴 공장 제프리의 사생아)에게 푸아투, 앙주, 멘, 투렌을 하사하고 동생인 마리와 결혼을 주선했다. 그리하여 필리프와 불로뉴의 백작이 동부 노르망디로 진격했고, 아르튀르와 뤼지냥은 푸아투의 미르보에서 아키텐의 엘리노어를 함정에 빠뜨렸다. 존 왕은 르망에서 그 소식을 듣고 80마일 이상 떨어진 먼 거리를 48시간 만에 달려갔다. 아르튀르와 추종자들은 아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엘리노어가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라며 느긋하게 있었으나 존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쳤고, 아르튀르와 2백 명 이상의 귀족, 기사들이 포로 신세가 되었다.



존은 아버지나 형보다도 철저히 적들을 무찔렀으나 가장 큰 군사적 승리는 순식간에 가장 큰 정치적 실수로 이어졌다. 그의 승리는 투아르의 에이머리와 윌리엄 로체스라는 강력한 두 앙주 귀족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할 수 있었는데 포로 처리에 대한 이들의 발언을 무시하고 모든 포로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다. 결국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에이머리와 윌리엄은 존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들은 앙주의 중심 도시인 앙제를 점령했다. 1203년 1월에 존은 노르망디로 퇴각했고, 필리프는 아무 문제없이 앙주, 메인, 투렌을 차지했다.



곧 존은 조카인 브르타뉴의 아르튀르에게 닥친 운명에 대한 소문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르튀르가 존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고 확신했다. 정말로 존이 아르튀르를 죽였다면 그것은 기사도를 최고의 가치로 알던 당시의 정치적 기준으로 극악무도한 범죄였으며, 직접 죽이지 않았더라도 노르망디의 방어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존은 이런 소문을 없앨 수도, 없애려고도 하지 않았다. 존은 1203년의 대부분을 영지에 머무르며 영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은을 건네받았다. 그러나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를 믿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그가 믿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존은 방어할 때도 안전하게 멀찌감치 떨어지려 했고,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는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203년 12월에는 드디어 노르망디를 버리고 잉글랜드로 떠나고 말았다. 미르보에서의 놀랄만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후 몇 년간의 비겁한 행적으로, 존에게는 물검(Soft sword)이라는 새로운 별명까지 생겼다. 결국 존은 모든 재산을 잃고 말았다.



1203년 노르망디에서의 소극적인 방어가 아내와의 관계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1203년에 프랑스 왕의 군대가 노르망디를 침략하자 존은 대항하지 않은 채 왕비와 루앙에 머물렀다. 프랑스가 존의 본거지를 점령했는데도 별로 상관없다는 듯 매사냥과 왕비에게만 열중했다. 존은 이런 정치적 곤경의 원인이 이자벨라와의 결혼 때문이라는 가십을 인용하여, "보시오 부인, 당신을 얻기 위해 내가 잃은 것들을…"라고 비꼬는 식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이에 그녀는 반박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세계 최고의 기사를 잃었지요." 이자벨라는 1207년부터 1215년까지 존에게 다섯 명의 자녀를 안겨주었다. 1216년 존이 죽자 이자벨라는 앙굴렘으로 돌아갔고, 30세 가량 되었던 1220년에 자신의 아버지가 죽자 바로 20년 전 약혼했던 위그 뤼지냥과 재혼했다.



1205년 존은 권위를 회복하려고 발버둥쳤다. 그리고 1206년 9월 존은 루아르를 건너 앙주를 약탈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필리프가 즉시 군대를 보냈고, 존은 급히 퇴각했다. 10월에 두 왕은 현상유지를 기본으로 정전협정을 맺었다. 존이 회복한 영토인 가스코뉴와 푸아투 남서쪽은 본래 필리프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후 플랜태저넷 왕조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노르망디와 루아르 계곡은 완전히 프랑스 왕의 관할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마그나카르타의 첫머리와 존 왕이 발표한 헌장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신의 은총에 연원한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의 영주,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공작, 앙주의 백작인 존.'

영국 역사에서 1203~1204년 사이의 왕권 상실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까지 프랑스의 왕자였던 헨리 2세, 리처드, 존은 프랑스를 통치하면서 가끔 잉글랜드를 방문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1204년 이후부터는 완전히 바뀌었다. 존과 후손들은 가스코뉴를 가끔 방문하고 나머지 시간은 잉글랜드에서 보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 영국 사학자들은 1203~1204년의 패배를 '호재'로 간주한다. 빅토리아 시대 역사학자인 윌리엄 스터브스는 '존의 무능력이라는 행운'이 잉글랜드를 '노르망디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다고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역사학자도 1203~1204년의 사건을 '호재'라고 평가했다. 미슐레 같은 작가는 헨리와 그 아들을 '대영제국'의 통치자로 생각했으며, 프랑스에서 쫓아내야 할 영국인들로 간주했다.



1204년은 존의 명예가 비극적으로 실추된 해였다. 10년 후 명예를 회복하려는 그의 노력은 마그나카르타 제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존은 1206년 이후 5년 동안 영국 제도를 장악하고 재물을 긁어모으는 데에 전념했다. 명예와 잃었던 통치권을 회복하려면 전쟁자금을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212년에는 200,000마르크 정도(당시 유통되던 전체 동전의 절반 정도)를 왕성에 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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