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정석범 지음 | 루비박스
잠시 멈춘 르네상스의 심장, 피렌체우리는 아르노강 남쪽의 카라이아 다리 근처에 있는 사설 유스호스텔에 여장을 푼 후 곧장 도시 남쪽에 자리한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그곳은 피렌체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베티오 다리와 그라치에 다리를 지나 20여분을 걸으니 오른쪽으로 석재로 투박하게 쌓은 산니콜로 문이 보이고 그 뒤쪽에는 언덕으로 향하는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힘겹게 언덕에 올랐지만, 뜻밖의 실망스러운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흐린 날씨와 짙은 안개가 도시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꽃의 도시' 피렌체(피렌체는 꽃이라는 뜻)는 자신의 속살을 그리 쉽게 보여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흐릿한 연무 사이로 드러나는 붉은 색 지붕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드문드문 보이는 돔은 마치 붉게 핀 꽃송이 같다. 남프랑스 도시의 지붕에서 느껴지던 유혹적인 오렌지 빛과는 달리, 이곳의 붉은 빛은 일종의 소박함을 머금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도시 중심의 유난히 큰 돔 하나가 이방인의 시선을 끈다. 그것은 바로 피렌체인의 영적 지주인 두오모 대성당이다.
나는 우연한 계기로 피렌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처럼 시내의 한 서점에서 책 사냥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날 신간코너에서 이 책 저 책 살펴보던 중 우연히 시오노 나나미(1937∼)라는 이탈리아 거주 일본계 여류 작가가 쓴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라는 제목의 책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책은 우리에게 권모술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마키아벨리(이탈리아의 역사가, 정치이론가)라는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군주론』에 드러난 그의 실리적 외교사상은 당시 이탈리아의 약소국 피렌체공화국이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와 달리 내가 정작 이 책에서 관심을 가진 것은 마키아벨리가 아니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르네상스의 도도한 흐름을 탁월한 설교를 무기로 일순간에 멈춰 세운 사보나롤라(1452∼1498)라는 한 반동적인 수도사의 이야기였다.
이 도미니크회 수도사는 처음부터 대중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누더기를 걸치고 널빤지 위에 밀짚 요를 깔고 자는 한 수도사의 구도자적 진실성과 독특한 설교내용에 사람들은 호감을 갖게 되었다. 사보나롤라는 나중에는 밀려드는 신도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 있는 설교사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일약 유명 설교사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을까? 엘리아스 카네티(영국의 작가)에 따르면 카톨릭 교단은 중세 이래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군중 심리를 다각도로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톨릭 신앙이 느슨해질 때마다 교회 지도부는 곳곳에 수도사를 파견, 종말론을 무기로 민중의 동요를 잠재웠다. 그러나 수도사의 설교가 평신도에게 먹혀들려면 최후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언하고 그것을 증명한다거나, 기적을 몸소 실현해 보여야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대중 앞에서 '약발'이 가장 잘 들었던 것은 예언의 시현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당대의 국제정세를 꿰뚫어보고 그 판세를 읽어낼 줄 아는 능력이 필수였다.
국가 간의 전쟁은 수도사에게 있어 자신의 예언적 능력을 내외에 과시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특히 전쟁에서 패할 가능성이 높은 약소국에 주재하고 있는 설교사의 경우 당연히 강대국에 주재하고 있는 설교사보다 군중의 동요를 무마하는 데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바로 피렌체라는 약소국의 설교사라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국제 정세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갖추어서 명설교사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춘 인물이었다. 당시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강대국 사이의 중재 외교로 피렌체의 운명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주던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의 갑작스런 죽음, 그리고 무모한 야심가 샤를 8세(1470∼1498, 루이11세의 아들)의 등장이 전쟁으로 이어지고 피렌체에 엄청난 재앙을 안겨줄 것이라는 점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인들을 향해 회개를 외쳤던 것일까? 그것은 신이 아닌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선언하고 그 모델을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에서 찾으려는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불길이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그 움직임의 정점에 있었다. 이 이단적 사상의 불길은 너무도 강렬하여 카톨릭 신앙의 기반을 뿌리채 뒤흔들었다. 13세기 경부터 모직물업과 은행업으로 부를 축적한 피렌체의 유력한 가문 중 하나인 메디치 가문은 자신이 벌어들인 돈의 상당 부분을 인문학과 예술의 지원에 쏟아 부었다. 그들은 각종 건축물이나 예술작품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메디치가는 인문학자들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특히 신플라톤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신플라톤주의는 태고신학(太古神學), 즉 하나님의 계시는 특정한 인간이나 초인간적인 존재들을 통해 유태민족 뿐만 아니라 이교 민족을 포함하는 태고의 모든 민족들에게 주어졌으며 따라서 그들의 태고문헌은 경이로운 지식의 보고라고 보는 관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즉, 기성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메디치의 이러한 세속 예속 예술 및 불온사상 지원은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특히 신플라톤주의는 기성 교회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거나 물질적 풍요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시켜주는 근거가 되었다.
이탈리아에 전운이 감돌게 되자 사보나롤라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중 설교에서 하느님의 심판이 곧 닥칠 것이며 외국군대가 알프스를 넘어와 타락한 도시 피렌체를 단죄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을 설파했다. 사치와 방종에 빠져있던 피렌체의 '어린 양'들은 그의 핏발 선 예언에 그저 파랗게 질릴 따름이었다. 로렌조 데 메디치가 죽은 후 이탈리아 원정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프랑스의 샤를 8세는 1494년 나폴리의 페란테 왕이 죽자 나폴리에 대한 앙주 왕가의 영유권이 자신에 있음을 구실로 즉각 자신의 야망을 실천에 옮겼다. 샤를은 토스카나에 요새를 확보해야 했고 또 계속해서 남진하길 원했기 때문에 피렌체 영내에 침입,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을 감행했다. 이에 사보나롤라는 공포에 떠는 피렌체 군중 앞에서 목청을 더욱 높였다. 이때 겁먹은 건 순진한 군중들만이 아니었다.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화가 보티첼리도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평소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공감하고 있던 이 소심한 화가는 이교적 신화를 바탕으로 한 약간은 관능적인 여체를 그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적지 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몇 달간의 고심 끝에 그는 앞으로 신을 찬미하는 그림 외에는 어떠한 그림도 그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후대인들은 그의 숭고한 결심 이후에 제작된 그림에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한편 프랑스군의 약탈을 계기로 민심은 이반되어 메디치가가 축출되었고, 피렌체에는 사보나롤라를 주축으로 한 신권 정부가 구성되었다.
우리 일행은 먼저 사보나롤라가 "신의 칼날이 내리 친다."며 대중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두오모 대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뇨리아 광장을 지나 북쪽으로 5분 정도 가자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크다는 그 거대한 성당이 위용을 드러냈다. 놀라운 것은 그 거대한 규모의 건물 외벽이 온통 기하학적 문양의 흰색, 검정색, 붉은색, 녹색의 대리석으로 뒤덮여 있다는 점이다. 이 화려한 색채의 대리석들은 이탈리아 각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천재적인 르네상스 건축가 브루넬레스키(1377∼1446)가 만든 거대한 붉은색 돔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이곳을 찾은 경건한 피렌체인들은 그 붉은색 돔을 보면서 절대자를 향한 신앙심을 불태웠으리라. 성당 내부에 들어서니 벽을 따라서 많은 그림과 조각이 배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지옥, 연옥, 천국의 모습을 배경으로 자신이 쓴 『신곡(神曲』을 보여주면서 신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단테(1265∼1321, 이탈리아의 시인. 피렌체 출생)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의 가엾은 양들을 한창 윽박지르기 전부터 이미 그 자리에 걸려있었다. 갑자기 성당의 내부가 어두워진다. 일몰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어둠이 깃든 단테의 얼굴 속에서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환영이 기분 나쁘게 어른거린다.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이튿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우피치 미술관에 가기 위해서였다. 우피치(Uffizi)는 원래 '사무실'이란 뜻으로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1세(1519∼74)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기관들을 한 군데 모아 정무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조르조 바사리(1511∼74)에게 명하여 세운 것이다. 그는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메디치가의 수장품들을 한데 모아 이곳에 보관하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작품들을 주문·수집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메디치가가 실각한 18세기 초까지 계승된다. 따라서 이곳에 소장된 미술품 중에는 명품이 수두룩하니,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의 르네상스 회화가 많은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보나롤라의 눈으로 보면 이곳에 진열된 르네상스 미술품들은 카톨릭 신앙을 위협하는, 그야말로 어린 양들을 좀먹는 온갖 악의 물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악의 물건들' 중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티치아노(1485∼1576)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였다. 수많은 비너스상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손꼽히는 그 두 '미의 여신'과의 만남만큼 나의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은 없었다.
미술관 3층의 오른쪽 날개 중앙에 위치한 대형 전시실에 들어서자 저만치 비너스가 보인다. 직접 본 비너스의 자태는 정말 눈부셨다. 좌우로 풍신(風神), 뇌신(雷神), 봄의 여신의 호위를 받으며 바다 속에서 탄생의 순간을 맞고 있는 비너스. 그 가녀린 팔등신의 몸매를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로 휘감은 채 약간은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미의 여신 앞에 만물은 부끄러워 몸을 숨길 수밖에 없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화 받아 종교화에 투신하기 전에 그려진 것이다. 중세의 천년 세월 동안 종교화의 제약 속에서 억압된 채 면면히 이어져 온 어느 장인의 예술적 끼가 보티첼리라는 르네상스 화가를 통해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고나 할까? 이 그림은 민중이 종교로 가장한 자기기만적 외투를 벗어던지고 주체적인 감성과 뜨거운 피가 살아 숨쉬는 인간임을 당당히 선언한 인문주의 사상의 시각적인 표현이다.
미술관 2층의 왼쪽 날개 초입에서 만난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성의 극대화를 꾀한다.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이상적인 미의 세속화를 의미한다면,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세속적인 관능미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우수에 찬 시선이 내면을 향하고 있는데 비해,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마치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관람자를 쏘아보는 듯하다. 그런데 그 점이 오히려 감상자의 관음증을 부채질한다. 이 작품은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1835∼1910)으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비열하고 외설스런 그림"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미술사상 가장 아름다운 누드 작품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그림들이 군중의 신앙심을 이완시킬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카톨릭 교단 측의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도 당연했다.
사보나롤라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 교황이 된 알렉산드로스 6세는 프랑스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구축하고 분투하였으나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었고 경제적 손실만 입었다. 그런데도 사보나롤라는 '하나님의 전령'인 샤를 8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지키면서 이 전쟁에 일체 간여하지 않는다. 교황은 일개 수도사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게다가 침략자를 지지하는 설교를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하느님의 대변자라고까지 주장하는 사실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즉각 설교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가 이에 응하지 않자 마침내 1497년 그를 파문조치 한다. 피렌체 내부의 상황도 사보나롤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토스카나 지방에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프랑스 왕은 점령지 피사를 피렌체에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그곳에 독립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자 도미니크 수도회의 라이벌이었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인 프란체스코 다 불리아 수사는 신의 계시에 대한 사보나롤라의 주장에 즉각 의문을 제기했다.
예언자는 군중을 기적과 예언으로 제압할 수 있지만, 그 효력이 상실되는 순간 군중의 희생양이 되기 마련이다. 산 마르코 수도원에는 성난 군중들이 밀어닥쳤고 결국 사보나롤라는 체포되어 그의 두 제자와 함께 시뇨리아 궁의 탑에 감금된다. 5월 22일 세 명의 수도사는 이단죄와 종파분립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언도받는다. 이튿날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보나롤라와 두 수사에 대한 화형식이 거행됐다. 두오모 대성당을 쩌렁쩌렁 울리던 설교사의 기세는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재로 변한 사보나롤라의 시신은 베키오 다리 아래로 던져졌다. 사보나롤라가 기거하던 장소도 보고, 그가 처형당하던 상시의 생생한 장면을 보여주는 그림도 보기 위해 겸사겸사 우리는 피렌체 시내 북쪽에 위치한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산타크로체 성당에 들렀다. 이곳에는 마키아벨리와 보카치오를 비롯한 르네상스의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카톨릭 교회의 공적(公敵)들이 성당의 안방을 대거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는 이렇게 늘 아이러니로 점철되나 보다.
산타크로체 성당의 내부는 무척 어두웠다. 그저 벽에 그림이 걸려있다는 느낌만 가질 수 있을 뿐 그것이 어떤 그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산타 크로체 성당 주변의 중앙시장을 빠져나와 산 마르코 수도원에 도착한 건 오후 1시 반경이었다. 2시에 문을 닫는다는 소릴 듣고 우리는 1층을 볼 겨를도 없이 부랴부랴 2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보나롤라의 최후를 그린 작품만큼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보나롤라의 처형>은 12호실에 있었다. 드넓은 시뇨리아 광장 중앙에 화형대가 마련되어 있고, 사보나롤라를 포함한 세 명의 수도사가 타오르는 불길 위에 축 늘어진 채로 매달려 있다. 한 쪽에선 인부들이 시체를 태울 장작더미를 화형대로 나르고 있고, 피렌체 시민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이 비극적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곧 문을 닫는다는 관리인의 재촉에 밀려 우리는 12호실에 걸린 이 불운한 수도사의 초상을 뒤로 한 채 쫓겨나듯 수도원을 나와야 했다. 미술관과 성당만 돌다 보니 도시를 찬찬히 살펴보지 못한 것 같아서 시내 구경을 한 후 베키오 다리를 거쳐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레푸빌리카 광장 근처의 한 골목에 있는 골동품 가게의 쇼윈도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들려왔다. 바흐의 성가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이시네> 였다. 이어서 <토카타와 푸가>가 흘러나왔다. 그 엄숙하고 장중한 멜로디를 접하는 순간 다시금 내 눈 앞에 사보나롤라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토카타와 푸가>는 마치 그를 위한 음악인 듯 들렸다. 듣는 이를 전율케 하는 그 장중한 멜로디 속에는 어딘지 모르게 묵시록의 분위기가 풍기니 말이다. 시내는 온통 일본의 젊은 여성들에게 점령당한 듯했다. 그녀들은 저마다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다. 마치 피렌체의 명품이란 명품은 모조리 쓸어갈 것 같은 기세다. 그녀들은 이 기만적인 도시에서 사치품을 쇼핑하고 호화 레스토랑에서 허영으로 포장된 음식을 먹는다. 그 모습은 사치와 향락이 판치던 르네상스기 피렌체의 모습과 다름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