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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ㆍ괴물지ㆍ엠블럼

최정은 지음 | 휴머니스트
I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기억의 기술



합리화ㆍ세속화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근대화 과정으로 접어들며 주류담론으로부터 배제되어 점차 잊혀진 것 중의 하나가 기억이론이다. 전통적으로 앎이란 기억과 불가분의 관계였고, 언어는 말과 문자로 구현되어 기억되어왔다. 말과 글을 위해서는 수사학이, 수사학에는 기억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런데 기억이론이 잊혀지게 된 이유는, 기억술이 주로 상징과 은유를 활용하는 형상언어를 사용했던 까닭에 객관적이고 정확한 언어의 추구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 고대와 중세의 자유학예 가운데에서도 중시되었던 수사학의 역할이 근대로 접어들며 점차 축소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형상언어를 활용하는 시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사고 방식들은 한순간에 폐기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상징을 중시하는 비주류적인 담론 안에서 면면히 이어져 나갔다. 반종교개혁, 신플라톤주의, 연금술, 프리메이슨, 타로카드와 카발라적 점성술 마법 등이 그것이다.



고대의 기억의 기술과 수사학

수사학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점차 힘을 잃고 폐기되다시피 했으나 근래 들어 그 위상과 중요성이 부활되고 있다. 고대에 수사학은 왕자의 덕을 쌓는 데 필수 불가결한 웅변술과 관련되어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수사학을 나타내는 신은 경계의 신이자 메신저이자 연결자인 헤르메스이며 지시되는 언어의 실제 내용과 수사법 등 문헌의 모든 것을 분석하는 것이 해석학이다. 그리고 수사학 교본들은 한결같이 기억의 장소(locus 혹은 topos)의 배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능변을 위해서는 적재적소에 기억의 장소들을 불러와 배치할 수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퀸틸리아누스(Marcus Fabius Quint-ilianus, 고대 로마 제정 초기의 웅변가. 수사학자)와 헤르모게네스(Hermogenes, 이오니아 신전의 고안자인 BC 2세기 건축가)는 기억술의 창시자로 시모니데스의 일화를 언급하고 있다. 어느 날 시모니데스는 친척, 친구들과 함께 궁전의 향연에 참석했다. 그가 잠시 홀을 떠났을 때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닥쳐 건축물이 무너져 참석자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으깨지고 말았다. 그 때 시모니데스는 기억술을 통해 그의 친척과 친구들이 앉아 있던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고 한다. 시모니데스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기억이란 근본적으로 장소의 기억이었다. 퀸틸리아누스가 말하는, 기억을 위한 수사학적 체계는 주의 깊게 질서 지어진 장소들(loci, loca)의 연속 그리고 재현된 상들(imagines)에 의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대하여』와 『기억과 회상에 대하여』 등에서 기억의 긍정적 성격에 대해 "인간은 이미지들(판타스마타)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심상들(판타스마타) 없이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육체적인 상사(相似)이다. 그러나 지성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개별자들로부터 개념들이 추상화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추상화하는 지성은 영혼의 기억의 일부분으로 환영(phantasy)을 통해 작동한다. 지각된 것의 이해에는 지성이 필수적이다. 기억이론에서 고대와 중세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는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고전적 기억이론을 전적으로 받아들였고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analogie), 상사(similitude)이론에 그대로 연결된다. 그리고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종일관 모든 것을 간직하는 기억을 찬미하며 현존하지 않는 사물들의 심상까지 모든 감정은 기억으로 돌아간다고 강조한다. 기억 속에서 그는 사물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보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라는 무한한 타자에 도달하기 위해 기억 자체를 부인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나는, 기억이라고 하는 유일한 수단에 의해 당신에게 가 닿고자 하는 열망조차 넘어서 가야만 할 것입니다."



중세의 동물지와 기억술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신학 이론을 정교화한 중세 교회는 고대의 기억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상(Icon)을 통해 기억하고자 했다. 이미지와 예화를 통한 기억, 그것은 기독교 교리를 설파할 수 있는 적극적인 담론 전략이었다. 세계는 신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교회는 이미지를 통해 문맹자도 말씀을 그림으로써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동물지(Bestiary)』의 기원은 고대의 백과사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인데, 중세에 들어서면 세비야의 이시도르의 『어원학』, 작자미상의 『피지올로구수』 등이 백과사전 역할을 했다. 이런 책들은 기억을 돕기 위해 삽화를 동반했다. 백과사전적인 저작들에는 기본적인 과학 지식에 기독교적이며 도덕적인 내용, 문헌적 사실들이 반드시 추가되었으며, 『동물지』들은 상상동물과 실제동물, 경험 과학적인 관찰과 도덕적인 알레고리(우의 혹은 풍유)를 동등한 층위에서 다루었다. 동물지의 우화는 대개 도덕적 알레고리였고 매력적인 삽화를 통해 내용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했다. 동물지가 기억의 각인을 위해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중세 대중설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의 설교는 설득으로서 수사학의 본질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설교는 그림같이 생생한 묘사가 될 필요가 있었다.



중세의 삽화는 성스러운 혼이 불어넣어져 활력 있게 되어야 한다고 권장되었다. 형상들은 눈을 사로잡아야만 하고, 시각과 청각을 통해 기억되어 성스러움에 이르러야만 한다. 활력이 넘치는 필사본 삽화들의 매력은 그 특수한 추상성에 있다. '성스러운 것'은 대개 사회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사물로, 보통 선물로 주어지며 팔거나 양도할 수 없고 강한 상징적 면모를 가진다. 진리를 나타내고자 하는 그림이 비재현적인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의 것을 닮을 필요가 없을뿐더러 사실적인 묘사는 오히려 환기하고자 하는 개념의 상기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가치로운 물건이란 상징적 가치가 부여된 물건이다. 소유자에게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주는 그것은 그러나 흔히 현실생활에서는 쓸모가 없다. 그것은 물질적 교환의 논리에 포획되지 않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사물은 강한 상징성과 함께 시간의 면모를 지닌다. 제작에 투자된 시간은 추상적으로 계량 가능한 것이라기보다 시간의 밀도, 그 충일성이다.



살라만더의 기억

중세 동물지에서 모든 기억은 기독교의 도그마로 환원되며, 인간의 완성형으로서 왕 중의 왕인 그리스도에 대한 상념은 강력하게 표현된다. 어떤 비분화된 심성, 과학과 철학, 현실과 상상이 혼재된 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물지의 기술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자연과학적이고 경험적인 관찰과 상상속의 행위들 그리고 현실의 사건들은 동물지에 혼융되어 있다. 그것은 중세적인 지식의 형태를 보여준다. 동물지의 특기할 만한 점은 긍정적ㆍ부정적인 예시 혹은 대립되는 양방향으로 해석이 항상 갈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형상언어 특유의 속성인 양가성(Ambivalence)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도마뱀인 살라만더(salamander)는 뱀 또는 용의 상징과 하나의 계열을 이루며 모든 독 있는 생물 중 가장 힘이 세다고 여겨졌다. 살라만더는 기독교적 상징인 동시에 연금술적 완성태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소금으로부터(sal), 그리고 만다라(mandara : 표 또는 탁자)로부터 나온다고 생각되었다.



파라켈수스(Philippus Aureolus Paracelsus, 스위스의 의학자ㆍ화학자)에 따르면 살라만더는 어둡고 물질적인 불이 아니라, '자연의, 영적인 불' 안에 산다. 이 정신적인 불은 육신(flash)으로 만들어졌고, 소금 안에서 그 모양을 형성한다. 소금은 맛을 내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 바다에서 추출한 것 그리고 눈물이다. 상처입지 않고 불 속에 산다고 생각되었기에, 살라만더는 불의 원소를 나타낸다. 불 속에서 의연하게 버틴다는 점에서 이 생물에는 융이 말하는 인간의 완성태인 그리스도적 면모가 있다. 그리스도적인 성스러움이란 지상적인 쾌락의 포기이다. 예컨대 동물지에서 넓은 꼬리를 지닌 비버는 사냥꾼에게 잡히면 고환을 물어 뜯어내고 달아난다. 순결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스로 죄를 발라내어 그것을 악마의 면전에 던져야 한다는 뜻이다. 신화에서 시각과 배설물이라는 은유가 서로 관련된다는 것은 흥미로운데, 배설물이 정기적으로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와야만 신체는 건강한 반면 눈 혹은 시각이란 고통 없이는 제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눈과 살의 탐욕'에 대해 말하듯 시각의 은유는 정념과 관련되며, 거세 혹은 눈멂이라는 은유는 지상적인 쾌락의 포기를 말한다.



동물지는 우습고 재미있는 한편 끔찍하고도 잔인한 진리가 기록되어 있다. 신화를 만들어내는 원시적 폭력이 알레고리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꿀벌의 상징이다. 꿀벌은 달콤함과 쓰디씀(침을 쏜다)을 동시에 갖는다. 꿀벌이 순결을 상징하게 된 것은, 고대부터 교미하지 않고 "말의 시체에서 저절로 생긴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고대에 여왕벌은 수컷이라고 여겨졌고 순결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교황의 상징으로 변한다. 그러나 말의 시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희생양이자 (상징적) 그리스도의 시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모방하여 일어났던 중세의 여러 엽기적인 범죄 기록들을 해독한 학자로부터 우리는, 꿀벌의 순결한 탄생에 대한 믿음이 제의적인 초석적 폭력과 상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양철북>의 해안에서 발견되는 죽은 말의 머리, 곰돌이 푸의 당나귀 이어로의 말꼬리가 반복하여 빠지는 데에는 인간성의 아득한 심연에 잠재된 원시적인 폭력의 깊은 어둠이 있다.



여기서는 다만 그리스도와 관련된 몇 가지 기억에 대한 예를 들고 있으나, 동물지의 내용은 끝이 없다. 동물지는 경험적 관찰과 문헌학과 철학이 분리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던 시기의 사고 방식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동물지의 해석을 통해, 지금 우리는 상징으로부터 충분히 자유로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표상은 우상이 지워진 결핍의 자리에, 예기치 못한 모든 사물, 모든 언어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표상을 단죄하여 거부하기보다는 형상의 역사를 살펴 기호를 해독해 나가는 가운데 보다 자유로운 사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기억의 바퀴, 기억의 인장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유물론자, 범신론자이자 봉건적 신학 세계의 비판가)의 기억론은 각각 영국에서 씌어진 『봉인(Ssal)』『그림자(Shadows)』『키르케(Circe)』 등의 저서를 통해 전개된다. 특히 『그림자』에서 언급되는 브루노의 '기억의 바퀴'는 30개의 부분으로 분할되어 알파벳 문자와 상응되고 이것이 다시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기억해야만 하는 150개의 이미지와 대응하도록 체계화되어 있다. 브루노의 기억의 바퀴는 현대의 많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예컨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아르헨티나 시인ㆍ소설가)는『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기억의 바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발굴된 것이라고는 고작 실험 연대보다 뒤늦은 시기의 '흐뢴(hrön, 생각을 하면 그에 따라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사물)'인 수레바퀴 하나 뿐이다." "나침반이 신비롭게 진동하고 있었다. 공주는 나침반을 알아보지 못했다. 파란색 자침은 자북(磁北)을 간절하게 가리키고 있었고, 금속 케이스는 오목한 모양이었다." 수레바퀴란 운명(fortune), 우발적인 행운, 부(富)이다. 수레바퀴는 전적으로 우발적인 '헤르메스의 선물'이다. 그것은 기억의 바퀴이다. 공주는 나침반을 읽지 못한다. '기억의 바퀴'의 문자나 상형문자의 가능한 조합은 마음으로 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리를 환기시켜주는 장치이며, 해석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기억의 바퀴'는 여러 종류의 다이어그램들을 기억의 장소의 배치로서 활용하던 '기억의 기술'과 관계가 있다. '기억의 바퀴' 모델은 중세 전성기의 철학자 라이문두스 룰루스(Raimundus Lullus, 13∼14세기 스페인 철학자)의 『새로운 논리학』에 나오는, 기억을 위한 문자의 원반이다. 룰루스는 성스러운 개념들을 문자 B∼K에 할당했다. 첫 번째 글자인 A는 신의 성스러운 절대적인 측면을 지시하기 위해 보류되었다. 이 원반에는 문자들과 상관되는 아홉 가지 주요한 질문들, 각각의 미덕과 악덕의 주제들이 할당되어, 이것을 회전시킴으로써 문자들의 열이 다른 고리의 코드와 상관되도록 고안되었다. 이것은 개념들의 가능한 모든 조합을 쉽사리 환기하여 기계적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였다. 룰루스의 '기억의 기술'은 중세적인 스콜라 철학의 위계적인 논리 구조의 제약으로부터 사고를 자유롭게 조합하고 펼치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환영받았다. 개념들은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관계의 새로운 조합과 배열 속에 열려 졌다. 원반에 배치된 각각의 칸에 들어간 개념이나 단어가 작은 우주의 행성처럼 회전해 서로 결합하여 계열에 따른 의미를 생성해 내는 이것은, 구조는 단순하지만 그 표현 가능성은 무한하며, 이후 시대의 이성 중심의 경직된 사유 방식과는 다른 유연한 사고의 예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근대적 이성의 정합성을 뛰어넘는 이러한 시도의 놀라운 점은 이런 체계가 일종의 기계처럼 작동한다는 데 있다. 범주적 경계 없이 사물의 의미와 언어는 조합되고 결합될 수 있다. 접속에 따라 전체 의미와 진리가 달라진다. '조합의 기술'을 예견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스콜라적 논리학을 탈구시키는 수단이 되었으며, 조르다노 브루노까지 기독교 카발리스트들에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천문학, 점성학, 마법적인 사유에 활용되었다. 회전하는 기억의 바퀴는 모든 생성적이고 발전적인 과정의 원형으로 연금술사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583년 런던에서 출판된 브루노의 『인장들』은 인간이라는 소우주가 대우주를 내포할 수 있다고 본 것으로, 한 마디로 기억의 기술이다. 여기서의 세계는 신의 내포된 이미지이며, 그것은 '정신의 눈, 영혼의 감각'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비전이다. 그렇다면 인장이란 무엇인가? 인장이란 연쇄되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상(像)의 봉인이다. 브루노는 자신의 글을 통해 일종의 정신적 연금술을 기획했다. 그는 세계의 모든 지식을 조합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노력했고, 조합 가능한 기억들을 좀더 과학적으로, 동시에 강력하게 만들고자 했다. 브루노는 『키르케』와 『그림자』에서 점성학적인 배열들의 변주들, 룰루스적인 사유의 장치(device), '영혼'의 진정한 (기계적인) 작동 방식을 찾기 위해 유대 경전인 『카발라』를 끌어들였다. 이 탐색은 항상 '인장들의 인장'에 대한 생각으로 귀결되는, 고전적인 옛 기억술에 대한 마술적 변주였다. 정리해 보면 '인장'이란 기억해야만 할 것을 명시해 두는 상(像)의 봉인이다.



브루노가 기억술을 위해 채택하는 주요한 이미지들은 집단무의식적인 형상언어를 만들어내는 심성의 심층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좀더 세밀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근세의 비결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완성이란 외부적이고 물리적으로 주어지는 무엇이 아니라, 자연의 기호를 읽어가는 가운데 내면적으로 깨우치며 발전해야만 하는 내재적 여정 또는 상승과 하강의 단계로 보았다는 점에서 현대 심리학의 선구자들이라 할 만하다. 이성의 옹호, 합리화의 길을 가는 근대사로부터 망각된 기억의 시도에서 한 가지 주목하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신플라톤주의적인 마법사들이 기억의 기술을 통해 당시의 주류담론에서 배제된 것, 예컨대 이슬람적 사유 방식이나 유대교적 경향, 카발리즘을 포괄함으로써 기독교의 정통담론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언어의 한계를 직시하고 형상언어에 관심을 쏟았으며, 정통 기독교 외부의 사유를 끌어안고 소화하려 했고, 지식의 기계적인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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