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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탄생

이승원 지음 | 휴머니스트
학교종이 땡,땡,땡



근대적 학교는 사회적 개인을 '길러내는' 곳이다. 모든 게 우열 순위로 평가된다. 성적도, 얼굴도, 몸매도, 춤도, 싸움도 모두 순위가 매겨진다. 그 순위 안에서 학생들은 경쟁적으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때로는 기성세대의 비뚤어진 문화를 모방하여 어설픈 어른 행세를 하기도 한다. 게다가 학교는 구성원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제도화했으며, 학생들을 그 구조 내에서 철저하게 시간 규율에 훈련되고 길들여진다. 과연 무엇이 이런 문화를 양산했을까? 명쾌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학교의 기원을 추적하다 보면 그 숨겨진 의미를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서양 사람들이 아이를 잡아간다는 괴소문이 떠돌았다. 내용은 "사악한 외국인들이 조선인들에게 돈을 주어 어린이들을 훔쳐서는 의학에 사용하기 위해 심장과 눈을 떼어 간다."는 것이었다. 마치 옛날 옛적 나병 환자가 어린아이의 간을 빼 먹는다는 괴담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 괴소문은 허황된 소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한다 했을 때, 한국 사람들은 선뜻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소문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괴소문이 거짓으로 밝혀지게 되면서 한국의 청소년들은 근대적 학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조선조 대다수 선비의 꿈이란 입신양명이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며 사서삼경을 외우고, 과거 시험 합격이라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용맹정진 했던 조선조 선비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변했다. 새벽 닭 울음소리를 타고 '과거제도 폐지'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당과 훈장 선생님은 퇴출 위기를 맞았다. 어떻게 보면 세상은 참 공평하다. 과거제도 폐지로 인해 선비들은 자신의 존재기반을 상실했다. 그렇지만 과거제도를 대신한 새로운 근대적 교육제도는 신분의 장벽 속에서 자신들의 꿈을 안으로만 곱씹어야만 했던 더 많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기생, 나무장수, 쌀장수, 갖바치, 머슴 등에게 말이다.



책·걸상이 딸린 교실이 신설되었고,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선생님이 새로 부임했다. 한 손엔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엔 자선냄비를 든 선교사들이 학생들을 기다렸다. 아펜젤러는 의사였던 스크랜턴의 집에 교실을 만들고 학생들을 맞을 준비에 분주했다. 고종은 아펜젤러의 훌륭한 뜻을 치하하기 위해 '배재학당'이란 학교명까지 하사했다. 배재학당이 설립된 지 1년 만에 드디어 여성들을 위한 학교가 설립된다.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에 의해 설립된 것이다. 1896년,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 이 한국 최초의 여학교가 세상에 그 이름을 알렸다.



드디어 첫 번째 학생이 교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김씨 부인으로 알려진 이 최초의 여학생은 정부 관리의 첩(妾)이었다. 그러나 스크랜턴 부인과 김씨 부인의 만남, 역사상에 기록될 이 첫 만남은 동상이몽에 그치고 만다. 김씨 부인이 이화학당에 입학한 것은 배움에 대한 순수한 열망 때문이 아니었다. 정부 관리는 자신의 첩에게 영어를 배우게 해서 황후의 통역으로 보낸 뒤, 그것을 기회로 '한자리' 차지해 보겠다는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시작은 미약했지만 근대 교육의 물꼬는 터졌고, 걷잡을 수 없는 해일이 되어 세상을 뒤엎어 갔다. 선교사들의 자선활동이 이루어졌고, 조사시찰단으로 다녀온 개화 지식인들은 선두에 서서 근대 교육의 중요성을 목청껏 외쳤다. 더 이상 선생도 훈장도 필요 없었다. 단지 '학교'와 '학생'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학교는 근대 사회의 핵심적 상징이 된다.

입학시험 - 무시험에서 부정행위까지



학생이 있어야 가르칠 것 아닌가. 그런데 수업을 들을 학생이 없었다. 학생들이 신식 학교로 앞다투어 몰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이 없는데 입학시험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학생들이 가끔 입학을 했지만 지금과 같은 어린 학생들이 아니었다. 상투 틀고, 갓 쓰고, 도포 입고, 장가가서 아이가 서넛 딸린 사람들이 학교에 들어왔다. 1885년 설립된 배재학당의 경우 학생들을 시험을 통해 선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학생들에게 공책과 연필, 그리고 점심 값을 지불했다. 여학생 얻기는 더욱더 어려웠다. 1886년에 스크랜턴 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은 학생 구하기가 힘들어서 천연두에 걸려 광화문 밖에 내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치료를 해준 후 제자로 받아들였다. 학생이 귀했던 시대, 경쟁할 학생이 없었던 시대, '학생 품귀 현상'을 보였던 시대의 진기한 풍경이다.



차차 학생 수가 늘어나고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학교들도 궤도를 수정한다. 입학시험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국·영·수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능력평가제는 아니었다. 우선 학교의 등급에 따라 나이 제한을 두었다. 나이 제한을 통과한 학생들은 신체 검사를 받았다. 질병의 유무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험을 보았다.



그러면 입학시험을 치던 학생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지금의 학생들처럼 엄청난 시험 공포증을 그들도 겪었을까? 당시의 학교는 귀하디 귀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용돈도 듬뿍 주었을 뿐 아니라 시험 스트레스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구습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명예로운 계층으로 등극한 신분, 그것이 바로 '학생'이었다.



개화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정부가 설립한 관·공립학교에서부터 민간자본을 기반으로 한 사립학교까지. 서당은 점점 간판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한국 땅에 설립된 학교에 입학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개화풍의 본거지로 떠나 서양의 문물과 학문을 직접 배우려는 야망을 지닌 청년들도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사비를 들여서 유학을 떠나기보다는 국비 장학생 신분으로 바다를 건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학교는 아직 부족한데 입학하려는 학생들은 많아졌다. 사회 일각에선 입시도 생존경쟁의 각축장이라며 떠들어댔다. 과외도 활성화 됐고, 예상문제집이니 기출문제집이니 하는 책들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입시가 과열되자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하자는 의견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지만 쉽게 결론을 짓지 못했다. 1930년대엔 조선 총독부령 제 73호 및 78호에 의거하여 입학시험 폐지가 공식화되었다. 사범학교, 중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고등여학교, 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는 입학시험 대신 각 학년 수료 및 전(全) 학년의 평소 성적으로 입학시험을 대체했다.



통학 길 - 학교 가는 길에 벌어진 에피소드들



지금도 학생들은 학교 가는 길에 우연히, 아니 우연을 가장한 듯한 운명적인 인연을 꿈꾼다. 어떤 광고처럼 따사로운 햇살이 버스 창문으로 스며드는 어느 날, 홀로 앉아 있는 여학생을 보자, 친구의 아는 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옆 좌석에 씩 웃으며 자리를 잡을 수도 있다.



100년 전 학생에게는 그런 용기가 부족했을까?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학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용기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학생들은 스스로를 문명개화와 조국의 미래를 이끌 존재로 생각했다. 신식 교육을 받는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서구의 학문에 열중해서 문명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전념해야 했고, "독립할 수 있는 시대를 열어야"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에게 연애는 부차적이었다. 더욱이 이 시기는 전통사회의 보편적인 결혼양식이었던 '조혼'이 전 사회적으로 비판받았던 시대였다. 문명부강을 지상과제로 삼는 계몽주의자들은 조혼을 구시대의 악습이라며 맹공격을 펼쳤다.



김상현도 그랬다. 학생 신분으로 연애에 관심을 갖는 것은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 짓은 학생 신분을 사칭한 불량배들이나 하는 일이라 여겼다. 그렇게 시간만 흘러갔다. 아침마다 그녀를 바라만 본 지 근 3년이 지났다. 빛나는 졸업장을 둘둘 말아서 광화문을 거쳐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김상현에게 그녀의 모습이 먼발치에서부터 쑥 들어왔다. 보아하니 그녀의 손에는 우산이 들렸고, 책가방에는 졸업장이 끼워져 있었다. 순간 아찔했다. 묘안이 떠올랐다. 후에 중매쟁이를 끌어들여 결국 청혼 승낙을 받아내게 된다.



3년 동안 이 둘을 만나게 했던, 서로의 가슴을 두근거릴 수 있게 만들었던 건 모두 학교가 생겼기 때문이다. 장옷과 쓰개치마를 벗어 던지고 대로를 활개치며 거닐 수 있었던 박정애. 학교로 향하는 통학 길은 어쩌면 평생 만날 수 없었던 이 둘의 인연을 붙잡아 맸다. 바야흐로 통학 길이 새로운 연애의 공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는 최찬식의『안의 성』(1914)에 나오는 얘기다.



예전에는 한 마을에 살아도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다른 지방에 사는 처녀와 총각이 우연하게 만나기란 대추나무가 벼락을 맞을 확률과 비슷했다. 그러다 학교가 문을 열었다. 평등한 교육의 목표 아래 처녀 총각들이 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학교로 가는 길목에서 서로를 탐색했다. 더욱이 교통기관의 발달로 학생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에도 쉽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이성 간 선택의 폭도 넓어지게 된 것이다.



또 학생들 사이에서 묘한 패거리의식이 형성되기도 했다. 서로 친한 학교들끼리 뭉쳤던 것이다. 예를 들어 동덕여고와 숙명여고가 서로 친했고, 이화여고와 진명여고가 서로 친밀했다. 따라서 기차를 타면 먼저 탄 학생이 자리를 잡아놓고, 자기와 친한 학교 학생에게만 자리를 양보하는 일도 벌어졌다.

청소년기 학생들에게 연애는 무엇보다 흥미로운 일이다. 비록 학업과 시험이라는 스트레스가 학생들의 일상을 짓눌렀지만 연애에 대한 그들의 욕구를 완벽하게 억누를 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샛별보기 운동을 하면서 이른 새벽부터 힘겹게 등교 길에 올랐지만, 그래도 그들의 마음을 기쁨과 설렘으로 이끄는 일들이 생겨났다. 이처럼 기차라는 공간은 연애의 기회를 알선해주는 매파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교과서와 수업시간 -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웠나?



근대 19세기 후반은 전 세계적으로 어린이들의 신체교정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서구 열강은 물론 일본에서도 어린이들, 특히 초등학생들을 위한 체조법이 개발되어 학교에 보급되었다. 따뜻한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공부하던 시절이 지나가고, 딱딱한 의자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공부해야만 하는 시절이 온 것이다.



초기 교육에 관한 주된 방침은 서구적 학제와 교과과정을 모방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이었다. 계몽가들과 교육가들은 구시대적인 발상과 인식체계를 송두리째 바꾸려 하였다. 그렇지만 500년 동안 지속되었던 유교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수업은 옛것과 새것의 아슬아슬한 공존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수업의 편성은 수신(修身)·작문·독서·문법·역사·산술·지리·과학·체조 등이 중심을 이루었고 수업시간은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을사조약(1905)이 체결된 후 1년이 지난 1906년에 '보통학교령'이 공포되면서 그동안 없었던 일본어가 주당 6시간으로 늘어났다. 즉 이때의 국어는 '일본어'였다.



전시대의 수업과 달라진 것은 첫째, 강의 수용자의 인적 구성이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둘째는 강의 공간의 변화다. 칠판과 교탁과 책상과 의자가 구들장과 좌탁을 대체했다. 셋째, 강의 컨텐츠의 변화. 그것은 동양적인 전통 교과과정과 서구의 새로운 교과과정의 공존이었으며, 물론 관심의 초점은 '새로운 것에' 맞춰지게 되었다.



학부의 인가를 거친 정식 교과서 이외에 당시 학생들로부터 인기몰이를 했던 참고서가 얼굴을 내밀었다. 바로 '영웅전기'이다. 급박한 시대를 반영하듯이 '영웅대망론'이 전 사회를 휘몰아쳤고, 위급한 시대일수록 불세출의 영웅이 나타나 이 위기를 구해줄 것이라는 대중의 열망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청년 학생들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깨끗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계층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순결한 유관순 누나와 잔 다르크처럼, 똥구멍 찢어지는 가난과 신체적 결함, 그리고 수시로 들이닥친 시련을 극복한 나폴레옹처럼, 원수의 모함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던, 그리하여 죽는 그 순간까지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비장한 말을 토해낸 이순신처럼 거듭나야만 하는 존재들이었다. 애국의 의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욕망이 거세되는, 억압적인 '금욕주의'가 당대 사회를 휩쓸고 있었다. 그런데 애국을 하든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의 문제였다.

학생들의 체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도입된 교과과목은 체조였다. 그렇지만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방식이 굳이 체조일 이유는 없다. 당시 체조의 본질적 속성은 청소년들의 신체를 규격화하고 규율에 길들이는 데 있었다. 길들여진 신체란 다름 아닌 명령에 복종하는 몸을 말한다. 근대 초기 학생들에게 하달된 명령은 아마 '애국정신'이었을 것이다. 애국의 열정이 과도하게 집중되면 파시즘과 다름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건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화했던 상황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일본은 한국을 강제 점령하면서 체조를 학교 교육의 핵심과목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황국신민체조와 라디오체조를 각 학교에 보급한다. 이를 통해 일본이 바랐던 건 '순종하는 신체'를 양산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침마다 운동장에서 선보였던, 확성기를 통해 울렸던 구령소리에 맞춰 하기 싫은 춤을 췄던 그 체조의 기원이 바로 여기였다.



신체검사 - 위생과 단발



1897년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면서 단발령을 철회하기는 했다. '짐이 그때 단발령을 내린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친일세력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짐은 다시 명하노니, 이후로는 편할 대로 하라.' 그런데 학생들은 황제가 편할 대로 하라고 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알아서 하라'는 말을 완곡법으로 받아들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단발이 편해서였는지, 여하튼 그동안 고이 길러왔던 댕기를 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댕기동자의 시대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에 활약한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김기림은 근대 초기 한국의 역사를 '단발의 시대'라고 선언한다. 단발은 조선 전체를 들썩이게 했던 대단한 유행이었다. 단발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것은 양반과 상놈의 구별을 없애주는 상징적 행위이기도 했고, 야만인에서 문명인이 되는 계기이기도 했으며, 변화된 신체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설렘과 매혹과 공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이었다.



위생을 통해서 건강한 국민을 육성하려는 시대적 과업은 단발마저도 위생개혁의 일환으로 선전했다. 단발만이 아니었다. 망건 착용을 금지했으며, 양복 착용의 정당성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또한 남녀유별의 강력한 도구였던 내외법(內外法)에 대한 폐지도 논의됐다. 내외법의 상징이었던 여자들의 쓰개치마 착용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지나가는 에피소드지만, 단발령의 실시로 갓을 만드는 사람들은 폭삭 망하고 대신 모자를 만드는 사람들이 돈을 벌었다 한다.



1821년 이후로 한국에 콜레라가 크게 창궐한다.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좀벌레처럼 일상의 즐거움을 갉아먹었다. 유길준 또한『서유견문』에서 '전염병이 전쟁보다 더 무섭다.'고 말하며 위생사업의 중요성을 목울대에 힘을 주어 외쳤다. 급진 개화파들은 서구 여러 나라가 문명국이 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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