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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교과서

이시와타 노부오 외 지음 | 작가정신
1. 한국 - 민족주의사관에 의거한 역사

세계사에서 사라진 한국사
: 한국인들이 갖는 일본에 대해 강한 반감은 식민지 체험, 언론, 교육, 유교문화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식민지 체험이 대대로 전해지는 가운데 일본에 대한 이해를 오도하는 언론과 교육을 통해 침략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이어져 오고 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일본인은 야만적이고 대륙에 대한 콤플렉스로 대변되는 섬나라 근성을 갖고 있으며, 겉과 속이 달라서 신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일본현대문명에 대해 강한 동경을 갖고 있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는 이상하게도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술이 거의 없다. 대신에 민족발전사와 민족독립사가 들어있다. 즉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치를 가늠하지 않는 문제점을 갖고 있으며, 한국사 전체가 민족주의사관으로 관철되어 있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학교교육의 영향이 커서 한국인들은 지역이나 계층을 불문하고 똑같이 교과서적인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주 지배설: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삼국문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중국과 일본을 다루는 시각이 아주 판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주었다'는 시혜론을 펼치는 반면, 중국에서 문화를 전해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자율적인 수용론'을 펼침으로써 자국의 문화적 자립을 강조한다. 문화란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다른 곳에서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해 유독 '가르침을 주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민족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의 뿌리인 고조선이 만주를 지배했다는 '만주 지배설'은 유교적 발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국과의 마찰을 일으킬 소지를 갖고 있다. 분명 당시 만주에는 한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다른 민족과 어울려 살고 있었지만,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단일 민족임을 주장하여 타민족과의 공존을 경시하고, 그 사람들의 존재를 무시한 채 역사를 바라보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유교적 발상의 흔적은 '홍건적의 난'에서의 '적(賊)',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츠시마정벌'을 했다는 식으로 '정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각이 현 교과서에도 그대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에 대한 평가: 한국 교과서에서는 안중근을 애국자이자 사상가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이토를 살해한 애국자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으나, 그가 메이지 천황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있다. 안중근은, "이토는 한국 황제와 메이지 천황을 배신했다. 그래서 나는 이토를 죽였다"고 말했었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동양평화를 위해서"라는 메이지 천황의 주장을 믿었던 시대적 한계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과서는 그의 이러한 측면을 다루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며 침략국인 일본의 지도자를 사살한 애국자로만 칭송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부정: 한국의 교과서가 전체적으로 민족주의사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은 민족적 자부심을 육성한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일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은 우리민족은 훌륭하며, 어떠한 고난에서도 독립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고, 일본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사관은 자민족을 상대화하거나 객관화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으며 불편한 역사는 숨겨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대에 일본의 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지도했다고 알려진 '임나'라는 나라를 '왜철'이라는 물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시에 문화, 그리고 군사력으로도 뒤떨어진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했을 리가 없다는 민족주의사관으로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사관으로 인해 숨어버린 역사: 중세에 일본의 해적을 지칭하는 '왜구'는 모두 일본인으로만 알고 있는데 실제로 후기 왜구는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으로 이루어진 국제연합부대였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주의사관에서 볼 때 아주 불편한 내용이라 그럴 리가 없다고 제외시켜 버린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전장에서 도망친 일본군 중 철포 기술을 가진 사람이나 전략가 등을 조선에서 우대한 점, 길 안내를 맡는 등 일본 측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조선인이 적지 않았다는 점도 모두 역사적 기술에서 빠져 있다. 식민지 시대에 이광수, 최남선, 손기정 등과 같은 지식인이나 유명인이 학도병 지원을 부추긴 배신행위, 실제로는 많이 존재했던 사회주의자의 항일 운동 등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자국의 역사를 논할 때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제시하면서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정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종군위안부 문제도, 한국과 일본이라는 선을 넘어 서로 관련된 역사를 명확히 밝혀나가면서 여성문제, 인권문제로 접근할 수 있다면 좀더 빨리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매개로 한 한일의 미래 구축: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받은 교사들은 지금까지의 교과서 기술을 넘어서는 역사 교육을 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역사는 일본의 침략사가 되어버렸다.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일본인=나쁜 사람, 일본인=일본국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일본인들 중에도 다양한 사람이 있을 터이므로 일본인과 일본국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의 우호적인 면을 강조하는 교사는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로 규탄을 받기 쉽다. 또, 일본을 극복할 대상으로 보는 '극일론'도 한국과 일본의 올바른 관계 형성을 위해 넘어서야 할 또 하나의 벽이다.



2. 중국 -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기술

중국 교과서의 전쟁 기술
: 1911년 신해혁명부터 1945년까지 중국 교과서의 역사 기술에는 해방, 민족독립사상이 깔려 있으며, 특히 식민지화를 추진한 제국주의와 어떻게 싸워서 이겼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중국의 교과서는 청일전쟁에서 중일전쟁에 이르는 과정을 민족적 위기의 시작과 심화라는 관점으로 서술한다. 중국 교과서의 특징은 전쟁에 나가서 싸운 장군과 병사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그들의 행적을 영웅적인 미담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역사적 사건을 날짜를 사용하여 명명하며, 현장감 넘치는 서술 방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일본 패전에 대한 기술: "중국 인민과 세계의 반파시스트 세력의 통렬한 반격을 받고,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는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은 중국 인민의 위대한 승리로 끝났다. 9월 2일, 일본 정부는 연합국에 대해 항복문서를 제출했다. 9월 9일, 중국 정부 대표 허잉친은 난징에서 일본 침략군 대장 오카무라 레이지의 항복문서를 받았다. 1월 25일, 주 대만 일본 총독부는 중국 정부 대표에게 항복문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하여 50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던 대만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항일전쟁의 승리는 100년 동안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지기만 했던 중국 인민에게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고, 식민지의 인민이 잔혹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며, 중국 인민은 세계의 반파시스트 전쟁의 승리에 공헌했다."

중국의 교과서는 전쟁 종결 부분을 위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관되게 항일전쟁 승리의 길을 구체적인 전장, 전략, 전술 등을 포함하여 생생하게 묘사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학생들에게 생생한 전투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영웅적인 모습을 전하는 서술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중국 교과서의 목표: 인민교육출판사판의 집필자 대부분은 그 출판사 사람들로서, 역사연구가이자 역사교육 전문가이다. 또한 특급교사 또는 일급교사가 집필을 하기도 한다. 모든 교과서에는 애국심, 중국 공산당에 대한 사랑, 사회주의 건설, 당의 기본 원칙 엄수라는 네 가지 목표가 있다. 당의 기본원칙은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의 지도와 사회주의 노선,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한다. 모든 교과서는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 규범을 지키고 있고, 기술 내용이 틀에 박혀 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해설을 내용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교과서는 애국적인 영웅을 찬양하며, 그런 사람들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 전체의 전쟁 책임에 대해: 중국인은 전쟁 책임에 대해 설명할 때 일본 군국주의와 일본인 일반을 구별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일본인 전체의 책임을 추궁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 책임을 포함하여 역사인식을 갖도록 하는 게 관건이다. 일본인이 명백히 밝히고 청산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알아야 하고, 50년이 지난 만큼 전후의 책임 문제를 진솔하게 생각할 때이다. 그때의 전쟁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중일의 역사연구자를 비롯하여 교육자와 국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청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넘어서서, 역사인식을 분명히 하는 일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과거와 같은 역사를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인민연대의 평화사상에 입각하여,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대해 중국 인민이 일본인들과 연대하여 싸워야 한다는 중국의 목소리에 일본인들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베트남 - 역사교육과 '과거의 기억'

근현대사를 중시하는 교과서
: 현재 베트남 중ㆍ고등학교의 역사교과서의 특징은 근현대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년의 한 학기를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세계사에 할애할 정도다. 1986년에 '도이모이'(새로운 경제, 사회건설을 지향하는 정책)가 시작되었는데, 교과서 내용도 2차 세계대전 부분에서 많은 변화를 보인다. 이전에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 이야기가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자본주의 국가에 관한 기술이 크게 늘어났고,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가입국으로서 주변 아시아 국가 기술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반면 구소련의 교과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2차 세계대전까지의 역사 기술은 거의 변화 없이 유럽전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교육의 목표: 현재 중학교 최고 학년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에 실린 '2차 세계대전'에서는 네 개의 질문이 설정되어 있다. '일본 군국주의는 어떻게 붕괴되었나, 미국의 원폭투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차 세계대전은 어떻게 종결되었나, 전시 소련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이다. 이 질문을 통해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군국주의가 베트남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일본 군국주의가 베트남 혁명의 적이었다고 말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의 원폭투하를 다루는데 이것은 베트남전쟁 과정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베트남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수도 있다는 자신의 역사를 염두에 둔 기술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질문의 구성에는 원폭투하가 군국주의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꼭 필요했다는 식의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8월혁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 1990년대에 들어 종래의 8월혁명(1945년 8월 프랑스 식민당국의 통치를 무력화시키고 베트남에서 실권을 행사하던 일본의 항복으로 생긴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베트민이 정권을 장악한 혁명)에 대한 시각 변화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뛰어난 지도로 8월혁명이 성공했다는 점이 강조되었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호치민의 독립선언에 공감하고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즉 북부, 중부를 포함하여 베트민(越盟, 베트남의 공산주의적인 독립운동단체 겸 정당)의 조직이 거의 없었던 남부에서도 전국적으로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8월혁명은 전국에서 일어난 다양한 애국주의가 합류한 결과로 성공한 것이지 결코 공산당이 독점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학계의 이러한 변화에 반해 교과서는 원칙적으로 정통적인 관점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역사교육에서는 향토사로서 8월혁명에 대한 인식을 가르치면서도 공산당과 호치민의 지도적인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 베트남전쟁에 대해 한국은 자유 베트남을 지키기 위한 정의의 싸움이었다고 하는데, 베트남 교과서에서 당시의 한국군 참전에 대한 기술은 50만이 넘는 괴뢰군, 미군 진영의 나라들이라는 표현 속에 나온다. 전쟁 당시 한국군이 잔혹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지만, 그 내용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베트남 투자국 중 3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투자를 하는 한국 측도 전쟁 당시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여, 베트남전쟁에서 저질러진 악행을 주로 전시하는 호치민시의 전쟁기념관에 한국 기업이 상당한 액수를 기부하고, 베트남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양호시설에도 원조를 하는 등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분단의 역사: 베트남은 오랜 세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는 통일 후에 동족 간에 서로 죽이며 싸운 역사를 어떻게 기술할 것인지를 두고 벌써부터 숙고하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현재, 베트남전쟁에 대해 베트남 민족 간의 싸움이 아니었다는 논리를 구사하며, 미국과 베트남의 싸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남쪽의 해방전선과 북쪽의 정규군에서 싸운 사람들에게는 국민연금이 지급되고 있으나, 사이공 정권에 가담하여 싸웠던 사람에게는 지급되지 않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전쟁 때의 입장 차이를 두고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는 도이모이가 시작될 무렵 나오기 시작했다. 나라를 통일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다른 입장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국민이 되었음을 뜻하므로, 아직은 조건적이지만 평등한 대우로 변화시키는 쪽으로 서서히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남베트남 마지막 대통령에 대한 평가: 베트남전쟁 당시 마지막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두옹반민의 경우는 역사의 평가에서 변화가 보이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사이공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는 평가는 당시부터 있었지만, 그런 식의 평가는 공적인 문서로는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리 두옹반민이 전쟁 종결을 위해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괴뢰정권의 대통령이 평화에 공헌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껄끄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서 해방전선에 관해 쓴 회고록에서 두옹반민의 고문이었던 사람들이 쓴 글 중에는 "두옹반민은 권력을 잡기 위해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혼란에 빠진 전쟁을 종결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처음부터 무조건 항복을 각오하고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여러 증언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는 자료가 나온 것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두옹반민은 사이공 시민을 희생시키지 않고 전쟁을 종결시킨 위대한 애국자"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면, 이것 또한 베트남 역사 기술의 상당한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독일 - 역사를 현대의 문제로 생각한다

역사수업과 교과서
: 독일의 역사 수업은 7학년부터 시작되며, 중학생에 해당하는 12~15세에 걸쳐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배운다. 저학년 때는 고대의 생활상을 현대의 생활상과 비교하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복잡한 사회문제를 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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