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뿐인 내 인생 이렇게 살고싶다
고바야시 츠카사 지음 | 21세기북스
1. 아, 인생이란 덧없는 인생:아무리 오래 살아도 헛되이 살면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든 백발이 되어 "이제 죽는구나. 그런데 난 지금까지 무얼 했지?" 하고 돌이킬 때, 후회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취생몽사(醉生夢死, 취몽 속에서 살고 죽는다는 뜻으로 '아무 뜻 없이 한세상을 흐리멍덩히 보냄'을 이르는 말)'라는 말처럼 먹고, 자고, 일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한평생도 꿈처럼 지나가고 만다.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노래를 모은 <칸긴슈>에도 '무엇을 하든 한때의 꿈이니 그저 미쳐라'라는 노래가 있다. 이처럼 예로부터 '덧없는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현대인의 삶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신문을 보고 만원버스에 흔들리며 출근하여 직장에서는 매일 같은 일을 되풀이하며 일만 하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얼마 못 가서는 암이나 다른 병을 얻어 죽는다. 죽을 때가 되어서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때는 이미 늦다. 매일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이런 삶은 가치 없고 싫증나는 것이 된다. 또 그 싫증은 절망 상태로 돌변해 환각제 중독이나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아! 모르겠다:1923년 유행했던 '아! 모르겠다'라는 노래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지 모르겠네.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모르겠고 어쩌면 죽는 게 더 나은지도 모르겠네'로 끝을 맺는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지만, '모르겠다'는 사정은 여전하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왜 사냐"고 물으면 넷 중 하나는 여전히 "뭣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중요한 것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더 좋게 사는 것이다. 음미할 줄 모르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으며, 플라톤도 같은 말을 했다. '더 좋게 산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극히 중요한 것, 즉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의미하며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나 이상을 깨닫고 그렇게 사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대다수는 늘 하던 대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상기해 보자. "인간의 삶이 가진 비밀은 단지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 때문에 사느냐에 있다. 만일 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사는가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없다면, 옆에 빵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그 삶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며, 이런 세상에 남을 바에야 차라리 자살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왜 강하게 살아가야 하나요?:도쿄의 16세 여고생 키시모토 미나코가 1986년 5월 25일 아사히신문 투고란에 "왜 강하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담긴 원고를 보내왔다. 친구의 자살로 충격과 슬픔에 잠겼던 그녀는 죽음을 서두르는 젊은이들에게 선생님과 어른들이 "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게 되었다. 그런데 '왜 강하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네가 죽으면 부모님이 슬퍼하실 거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녀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는 목적도 모른 채 그저 명예나 이익만 추구하는 삶을 살아도 되는 건지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다. 이 학생은 7월 18일 다시금 "바로 지금 사는 의미를 알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투고해 왔다. 이 편지에서 그녀는 인생의 목적이야말로, 평생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찾아야 하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죽을 때까지 그 답을 찾지 못하거나 겨우 깨달았는데 실천할 시간이 부족할까 봐 불안해 진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단지 살기 위해서 산다는 타협적인 인생으로 끝을 맺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두 번째 편지에서도 그 소녀는 자신의 의문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솔직하게 그 마음을 밝히고 있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소녀의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2. 인생, 사는 보람을 찾아서 인생의 길을 걷다:흔히 인생은 여행에 비유된다. 그렇다면 사는 보람은 여행의 도착점, 즉 목표에 있는가, 아니면 길을 걷는 과정 자체인가? 목표를 향해 걸어갈 때, 그 목표보다는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삶의 과정에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죽을 때 되돌아보니, 맛있는 음식도 좋은 경치도 관심 없었고, 사람은커녕 즐거운 일들조차 외면하고 오로지 집과 직장만 왔다갔다했다면, 이런 사람을 진실로 '살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스스로 '이 한 생 살아 있어 행복했다'라고 실감하는 순간이 없었다면 그 사람은 '살아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루소는 <에밀>의 도입부에서 "가장 많이 산 사람은 가장 오래 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생을 느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병들거나 절망에 빠지기 쉽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허무란 견딜 수 없는 독이기 때문에 절망에 빠진 사람은 타인에게도 해가 된다. 허무는 자신의 삶과 주어진 상황을 어쩌지 못하는 무기력감에서 오며 이것은 얼마 안 가 고통에 찬 불안과 절망으로 이어진다.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도 삶에 대한 태도나 목적의식의 유무는 저마다 다르게 갖고 있다. 이 차이는 바로 사는 보람의 문제에 있으며, 활기찬 삶을 영위하려면 사는 보람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며,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 보람을 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는 보람'이란:'사는 보람'의 사전적 의미는 '①살아 있는 의의나 가치. 살아 있음에 의의나 기쁨을 느끼는 마음의 보람. 살아 있다는 실감. 세상에 살고 있다는 증표. ②사는 목표. 충족감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사는 보람으로의 여행』을 쓴 모리모토 테스로는 "사는 보람이란 각자가 가진 가치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목표의식이다. 그 목표가 얼마나 확고한가에 따라 보람의 선명도도 달라진다"라고 말했다.『늙음의 미소』를 쓴 나카무리 미츠오는 "우리는 자신의 주관에 따라 살고, 바르다고 믿는 바를 행하려는 본연의 욕구가 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계획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인생의 의미, 또는 사는 보람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 사는 보람의 특징 6가지 (카미야 미에코의 정의)- 다른 사람에게 사는 보람을 느끼게 만든다
- 반드시 실익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 하고 싶다는 자발성을 가진다
-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동시에 자아의 표현이다
- 사는 보람을 느끼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가치 체계를 만들려는 성질이 내재한다
- 그 안에서 편하게 살수 있도록 자기만의 마음의 세계를 만든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시라이시는 사는 보람이란 '잘사는 것'이며 '잘사는 것'이란 '아름답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내면에서 풍기는 아름다움, 인품과 생활 태도, 마음가짐과 살아가는 자세 모두를 포함한다.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생의 목표와 자신만의 세계 그리고 여유를 가질 것이 요구된다. 사람은 스스로가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고 느낄 때 사는 보람을 느끼는데, 이는 산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직업도 세상사의 흐름이나 수입을 떠나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찾아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목표를 행해 나가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면목이 서지 않아, 결국 스스로를 속이려 들게 되고 만다. 반대로 사회,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무와 하고 싶은 일이 일치할 때, 사람은 가장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초라해도, 자신을 초월한 무언가에 한 몸을 바치고자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사는 보람에는 정열이나 집념이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사는 보람은 살아 있음에 대한 충만감이며, 인간이 체험을 통해 변화하는 것처럼 기쁨과 용기, 희망 등으로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채워나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의 생이란 욕망이 강할수록 정신적으로는 힘들어도 풍요로운 보람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는 보람:매슬로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점차 고차원적인 것을 원하게 되는데, 안전, 애정, 존경 등 기본적 욕구가 충족된 후에야 비로소 자아실현이나 의미에 대한 욕구가 생겨난다. 그래서 욕구의 최고 차원으로서의 사는 보람은 '내부의 가능성을 외부로 뻗치는 과정', '살아가는 의미를 주는 것들'이 된다. 하지만 현재 사는 보람이라는 단어가 '일하는 것이 내 사는 보람'이라든지 '내 삶의 보람은 게이트볼을 치는 것'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 것처럼 모호하게 쓰이는 경향이 있다. 사는 보람은 단순히 좋아하는 일을 하는 취미생활이 아니다. 세상 누구도 "내 사는 보람은 늦잠을 자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에 몰두하면 '일하는 보람'이 있는 것이고, 놀기를 좋아하면 '노는 보람'이 있을 뿐이다. 사는 보람이란 '일하는 보람'이나 '노는 보람'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는 의미를 주는 것'이나 '자기의 가능성을 발전시키는 자아실현의 과정'이다.
3. 고통, 아우슈비츠의 사람들 내일이 없을 때조차:세기를 통틀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만큼 잔혹한 역사도 없을 것이다.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사회적 신분은 물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를 박탈당했고, 매일같이 2000명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살아 있는 사람들도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학살의 소용돌이에서 가족을 잃고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절망적인 나날이 언제 끝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런 잔혹한 상황 속에서도 과연 사는 보람을 가질 수 있을까? 사실 비참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열등감, 분노로 인해 인간성을 포기한 사람들도 수용소에 갇힌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럴 때 다시금 미래의 목적에 눈뜰 수 있는 희망을 가지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반대로 실망과 낙심에 빠져들면 그 사람은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독을 품게 된다.
살아남아라: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오직 혼자만의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 "내 고민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강제수용소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통을 직시하고, 고민의 극한까지 다다라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깨달아 인생이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고, 내 움직임을 바라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중대한 책임을 느끼게 되면 스스로의 생명을 쉽게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의 생명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의미가 있으며 심지어 고민과 죽음 속에서도 빛난다. 내 삶과 죽음 모두가 의미 있음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계상황에 닥쳤을 때:한계상황에 이르면 사람은 더 이상 사회적 역할이나 문화와 교양을 지닌 존재가 아닌 벌거벗은 영혼이 되어 그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데, 보통은 죽음, 고통, 투쟁, 변절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친한 누군가가 죽는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것을 겪은 사람은 슬픔과 고통에 가득 찬 인생, 과연 열심히 살 가치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또 난치병에 걸리거나, 삶의 꿈이 깨어지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혹은 죽음에 직면해도 역시 한계상황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리 죽음이 뒤쫓아온다 해도 남은 시간 동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의 삶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인간의 존재는 미래에 의해 형성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슬픔을 넘어서:펄벅은 <슬픔의 시작>에서, 슬픔을 극복하려면 "이것이 내가 놓인 상황이고, 나는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 나만 이런 어려움 속에 놓였을까?' 하는 자기중심적인 회한에 빠지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갇히고 만다. 하지만 이 중심을 자기로부터 떼어내 먼 곳으로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슬픔을 견디는 법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펄벅은 단기 목표를 세워 슬픔에 집중할 틈을 없애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사용했다. 사는 보람을 잃어도 또 다른 보람을 찾으면 내·외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괴로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며, 나는 이 안에서 늘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타인에게 손 내밀 수 있는 적극성을 얻게 된다. 결국 펄벅은 선천적으로 모자랐던 자신의 아이가 더 큰 세계로 나아가 인류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심은 그녀의 마음속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카미야 미에코가 말했듯이 '괴로움의 사회화', '소망의 사회화'가 필요한 것이다.
아버지 없는 사회:타인지향적인 현대인은 타인을 의식하느라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스스로를 책임지는 삶을 살려면, 왜 이런 무서운 약점이 생겼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아버지 없는 사회를 향하여』에서 알렉산더 미첼리는 개인의 주체성이 사라진 원인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가치관의 전도와 혼란, 고도 산업사회를 맞아 부권사회의 중심인 아버지의 권위적인 모습이 사라진, 즉 '아버지 없는 사회', '모범으로서의 아버지'로 대변되는 전통적 가치의 붕괴에서 찾았다. 옛날 부권사회에서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일하면서 삶을 배우고, 아버지의 가치기준에 밀착해 양심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부권이 약해진 지금, 자식들은 본받을 대상을 잃어버림으로써 인격형성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은 성장한 뒤 사회에 진출해도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없으며,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을 피하게 되고, 나아가 질투심과 경쟁심만 가득한 군중의 일원이 된다. 한편 아버지와 건전한 동일화를 이루며 자란 자식은 아버지를 떠난 후에도 그를 내적 대상으로 간직하게 되어 설령 미워하더라도 '아버지 같은 사람은 안 되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 대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나는 도쿄에 사는 고바야시입니다. 조치 대학교 교수이고 정신과 의사죠"라는 자기소개처럼 세상에 그 조건이 들어맞는 사람이 오직 나 하나뿐이라면 이것이 바로 정체성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나는 무엇인가'라는 자아 정체성(Identity)을 자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겉모습만으로 '나는 시청 직원 스즈키다'라고는 말해도 '나는 죽기 전에 좋은 소설을 쓰고 싶은 스즈키다'라고 소개하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대다수 타인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돈을 벌거나 실적을 올리는 것만이 인생이 아니며, 인생이란 자기 안의 것들을 키워내 가장 나다운 나를 만드는 일이다. 나답게 사는 것을 실천하려면 그것을 발견할 줄 아는 안목도 필요하다.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각자에게 달려 있지만, 분명한 것은 자아실현을 이뤄낸 사람은 마지막 순간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게 될 것이다.
4. 일, 인생의 딜레마 늘어만 가는 여가 시간:근래 '일하는 것이 사는 보람'이라는 생각이 줄고 있다.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퇴직 후의 여생이 길어져서 일을 하지 않는 그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16세기에 토머스 모어는『유토피아』에서 여가는 자유로운 정신활동과 교양에 써야한다고 말했다. 오코치 카즈오도『여가 권하기』에서 "여가는 인간소외를 극복해 노동의 감옥에 갇힌 인간성을 되찾는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여가는 일 속에서 나를 구하기 위한 때이며, 그 안에서 일의 인간적 의의를 체득하는 때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