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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역사다

정옥자 지음 | 현암사
1. 사람 속에 길이 있다



유년시절과 전쟁


나는 1942년 5월 강원도 춘천에서 1남 4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며 단말마의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때였다. 내 이름에 자子가 들어간 것도 그 시대 배경에 원인이 있다. 나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별 아쉬움을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는 경기도 분이었는데 자수성가해 춘천에 터를 잡고 유기공장을 경영하셨다. 공장과 붙어있는 집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 대었는데 공장 사람뿐만 아니라 이러저러한 이유로 친척이 끊이지 않고 드나들었다.



춘천은 삼팔선과 거의 붙어 있는 도시여서 가끔 귀순용사 환영회가 공회당에서 열렸다. 유치원에 다니던 나는 가끔 화동으로 뽑혀 꽃다발을 전달했는데, 처음 공회당으로 향할 때는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막상 꽃다발을 전해줄 때 쳐다보니 귀순 용사는 뿔 달린 도깨비도 아니고 새빨간 괴물도 아니었다. 그 뒤로는 화동 노릇도 기꺼웠다. 딸 부잣집으로 통하던 우리 집은 어머니가 딸들의 입성을 챙기는 정성이 유난스러웠다. 그래서 설날에는 해마다 새로 지은 설빔을 차려입고 동네를 돌았다. 그러면 동네어른들은 곶감이나 산자 등 넉넉한 인심으로 사랑을 나누어주셨다. 유년의 뜰은 언제나 사랑과 기쁨으로 넘쳤다.



행복한 유년의 추억은 1950년 6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끝장이 났다. 전쟁이 나기 얼마 전에는 학예회가 있어서 학교생활이 좀 들떠있던 때였다. 나는 학예회 때 보랏빛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학예회의 하이라이트인 독무를 추었다. 그 들뜬 분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 6.25가 발발했다. 삼팔선 부근에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아 모두 '또 그러려니'하다가 피난민이 춘천 시내로 몰려들고 총알이 빗발치게 되자 우리는 피난을 서둘렀다. 곧 돌아오게 되리라는 생각에 주먹밥과 미숫가루를 만들고 옷가지와 귀중품만 간단히 챙겼다. 게다가 여섯 살, 네 살, 두 살의 세 여동생이 있어서 우리는 많은 짐을 챙겨갈 처지가 아니었다.



전쟁이 그렇게 길고 무서울 줄은 상상도 못한 듯 어머니는 우리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힌다며 추석에 입었던 꼬까옷과 학예회 때 입은 보랏빛 치마저고리를 입혔다. 피난길에 우리 자매의 화려한 때때옷은 얼마나 생경스런 광경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청평 호수까지 피란길의 아름다운 자연은 지금도 눈앞에 가득히 떠오른다. 산길 가득하게 향기를 뿜어내는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눈뜬 것은 이 피난길에서였다. 그러나 전쟁의 공포는 꼬마들에게도 다가왔다. 인민군이 이미 서울을 점령해 "우리는 독안에 든 쥐 신세야"라고 한탄하는 어른들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어른들은 서울 쪽으로 더 가봐야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춘천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청평호반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며칠 동안 비를 피하며 쉬다가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금붙이로 쌀과 닭을 사서 푸짐하게 일행을 먹이고, 더는 어린애들을 이끌고 걸어서 되돌아갈 수 없으니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자며 배를 한척 세내었다. 배 한쪽에 우리 가족이 타고 반대편에 다른 가족들이 모여 앉았는데 아마 스무 명이 넘었던 것 같다. 배가 청평 호수 가운데로 나아가는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모두 피곤에 지치고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서였을 것이다.



배가 호수 한복판쯤 이르렀을 때였다. 아버지는 나를 향해 두 살배기 막내 동생을 데려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어머니가 안고 있던 동생을 아버지께 안겨드렸다. 그러자 네 살, 여섯 살 난 두 동생이 "아빠! 나두 나두"하며 아버지한테 달려들었다. 아버지는 동생들을 안아 올렸고, 그 순간 아버지의 몸이 기우뚱 하면서 아버지와 동생들이 한 덩어리가 된 채 강물로 빠져들었다. 그때 동생의 기저귀를 뱃전에서 물에 헹구고 계셨던 어머니가 놀라 돌아보았을 때는 배 밑으로 사라지는 둘째 동생의 분홍 치맛자락만 보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앉아있던 자리에서는 유서가 발견되었다. 아버지는 자살을 하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려고 하셨다. 내가 놀라 발악을 하고 사람들이 말리는 사이 어머니는 기절을 하셨다. 사람들을 동원해 일주일 동안 시체를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패물도 동이 나 춘천에 돌아왔을 때는 무서운 공습이 가해졌다. 우리는 급하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방공호로 피신하였다. 어느 날인가, 나는 앞집 아저씨 댁에서 밥을 먹다가 비행기 소리가 나자 밥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방공호로 냅다 달려갔다. 어머니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조건 달렸다. 방공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들린 엄청난 굉음에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니 안방에 누워 있었다. 나는 무너진 방공호 속에서 구조된 것이었다.



그 즈음 청평에서 아버지와 동생들의 시신을 찾았다는 소식이 왔다. 어머니와 친척들이 시체를 수습하러 갔는데, 사흘 만에 돌아온 어머니의 얼굴은 흙빛이었고 아무 말이 없었다. 뒤에 들은 얘기로는 시체 네 구가 서로 꼭 붙어서 처음 빠졌던 호수 근처로 떠 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삶을 포기하다시피 한 어머니는 피난이 무의미하다고 여겨 춘천에 남았다. 초등학교 친구는 공산당 소녀단장이 되어 자꾸 나를 부르러 왔고, 어머니는 부역에 끌려 나갔다가 퉁퉁 부은 다리를 끌며 더위에 지쳐 돌아오셨다. 그러다가 9ㆍ28 수복 후 군인들이 다시 후퇴할 때 군인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우리는 서울을 향한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 행렬을 실은 군용트럭들은 가평근처의 산기슭에서 빨치산의 습격을 받았다. 트럭은 일시에 흩어지고 각자 알아서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트럭에서 뛰어내려 어머니도 아랑곳없이 남들이 달리는 방향으로 정신없이 달렸고, 어머니는 나를 쫓아 달리셨다. 그러다가 어른 목까지 차는 여울 앞에 이르렀는데 뒤따라오신 어머니는 털썩 주저앉더니 "이제 그만 여기서 죽자"라고 하시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나는 그만 "으앙"하고 소리쳐 울었다. 바로 그 때, 옆을 스치며 달리던 군인이 나를 들춰 업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뒤를 따랐다.



물살이 세어서 나를 업은 군인은 자꾸만 하류로 밀려갔다. 그렇게 가까스로 강을 건넜을 때 군인은 무엇에 찔렸는지 발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발을 싸매주려고 하자 그는 그럴 시간 없다며 뒤도 안돌아보고 사라졌다. 자기부대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평생 이 일을 두고 애석해하며 '이름 석 자라도 알아둘 걸' 하시며 후회했다. 그의 존재는 평생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다. 기아와 공습이 이어지던 피난시기에 방금 전까지 저쪽 길로 걸어가던 사람이 시체로 나뒹구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삶이 곧 죽음이라는 사생관을 심어주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 탓인 듯싶다.



텅 빈 그릇의 공명이 크듯

세상살이에는 몇 번의 기로가 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느냐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 내게 있어서 그 첫 번째 기로의 선택은 대학을 진학할 때의 전공 선택이었다. 문학에 대한 꿈을 접고 역사를 선택한 것은 학문으로서 문학은 어떤 모습일지 막연한 생각이 들었고, 역사는 확실한 사실에 근거하고 문학의 사촌쯤 되리라는 생각에 역사를 선택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 접한 역사는 한없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실의 나열과 실증이었다. 그래서 대학생활 내내 문학을 기웃거리다가 졸업 후 결혼하면서 역사와는 아예 작별을 했다.



십여 년의 전업주부 생활동안 나는 동면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십년 만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두 아이가 여섯 살, 일곱 살이었고 당시만 해도 살림하는 여자가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결심을 하고 진학한 대학원에서 한 학기를 끝내기도 전에 나는 임신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다시 셋째 아이를 순산하고 복학하려니 서울대는 관악산 밑으로 옮겨져 있었다. 학교에 오가는 시간이 오래 걸려 힘이 드는데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아니, 그만둔 줄 알았더니 또 돌아왔느냐?"는 말을 들을 때면 너무 서운하고 고까웠다. 그래서 나는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려 진정으로 역사라는 학문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런 과정을 겪고 교수가 된 후에는 더 많은 공부를 하느라 세 아이에게는 늘 모진 엄마가 되어야 했다.



인생에서 만난 몇 가지 말

사람은 무엇보다 뜻을 세우는 입지(立志)가 중요하다. 입지는 꿈에서 출발한다. 내 스무살 시절은 5ㆍ16혁명이 일어난 해이다. 바로 전해 일어난 4ㆍ19가 갑자기 쏟아져 내린 햇살이었다면, 5ㆍ16은 느닷없이 불어 닥친 한파 같았다. 서구 문물의 홍수 속에 감성과 이성의 균형을 찾지 못하여 휘청거리던 그 시절, 나의 정신을 뒤흔든 책이 『장자』였다. 『장자』는 노자의 『도덕경』과 함께 중국 고대 제자백가 중 가장 독특한 경지를 개척한 도가사상의 백미다. 『도덕경』이 도가의 원론적 이론서라면 『장자』는 풍부한 예화로 도가를 설명한다.『장자』의 여러 편 중 가장 철학적이며 존재론적인 논설인 「제물론」은 사물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고르게 하려는 의도로 쓴 글인데 「인간세」편의 예화를 들어보자.



「어느 목수가 제나라 곡원에 도착하여 성황당 앞에 서 있는 큰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의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고, 높이는 열 길이나 돼 그 가지를 자르면 배 십여 척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목수는 그 나무를 못 본체 지나쳤다. 그는 그 나무가 고목이라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날 밤, 목수의 꿈에 상수리나무의 정령이 나타났다. 그리고 말하기를 "과일나무를 보아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열매를 뜯기고, 가지를 뜯기느라 점지된 수명을 누릴 수 없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해서 나는 쓸모없는 것이 되려고 오랫동안 애써왔다. 내가 어딘가에 쓸모가 있었다면 이렇게 높이 자랄 수 있었겠느냐."하고 꾸짖었다. 목수는 꿈을 깨고 나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상수리나무의 교훈은 '세속적인 쓰임새나 출세의 욕망이 생명력을 소모시키고 끝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으니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여 청정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처세의 도를 제시한 것이었다.」



율곡 이이는 47세에 잠시 해주에 칩거하며 어린이를 위한 수신 교과서로, 『격몽요결』을 집필했다. 서문을 보면 율곡이 인순(因循:구태의연하게 살아감)을 근심하여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썼음을 알 수 있다.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대학자가 매너리즘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을 중단하지 않았음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격몽요결』은 세상 모든 일이 뜻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처할 경우, 혼자 이겨낼 수 없을 때는 부모나 형제, 친지 등 주변의 도움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손을 내밀기 앞서, 매사에 임하는 자신의 생활 태도를 성찰해 봐야 한다.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남들도 돕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2. 사직상소가 그립다



참선비를 기다리며


외국에 유학하여 정치, 행정, 사회과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선비학회를 만들어 강연을 요청해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외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자부심에 엄청난 혼란을 겪은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전통에서 긍정적인 것을 찾아 공부하고자 이 학회를 결성하였다는 것이다. 연구 성과가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십여 년이 걸리고 아직도 식민사관과 민중사관의 흐름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조선시대 선비정신이야말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비란 조선시대 지식인을 통칭한다. 조선시대의 선비는 성리학을 주 전공으로 하여 그 이념을 실천하는 학인으로, 선비의 수기(修己)는 『소학』에서 시작한다. 『소학』은 초등학교 정도의 어린이에게 사람이 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행위 규범부터 가르쳤다. 선비는 문학ㆍ사학ㆍ철학을 통해 이성 훈련을 하게 되는데 그 방법이 격물치지(格物致知)였다. 격물은 사물에 대한 관찰과 실험의 단계로서 앎의 기초를 말하고, 치지는 앎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선비는 이를 통해 세상 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자기성찰을 하여 완벽한 인격을 갖춘 인간형에 도달하려 했다.



선비는 인정과 의리를 잘 조화시키는 사람을 추구했다. 너무 인정에 치우치면 기준이 모호해져 부패하기 쉽고, 의리만 따지다 보면 세상살이가 삭막해지므로 이 둘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 따질 일은 분명히 따지는 인간이 되고자 했다. 그들은 공적인 의로움, 즉 공의(公儀)를 추구하여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후한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정신을 익혔으며, 이기심과 욕망을 이겨내어 예로 돌아가 모든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최종 목표로 삼았다.



우리나라의 지식인은 시대마다 사회 정치적으로 중심에 서 왔다.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에 실현하고자 애쓴 그들은, 항상 권력의 주변에서 참모 역할에만 그친 서양의 지식인과는 토대나 체질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기본으로 하였다. 인격과 학문을 닦는 과정인 수기가 제대로 되어야 남을 다스릴 수 있는 치인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여기서 수기의 단계는 사(士)이고, 치인의 단계가 대부(大夫)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문과 잠언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 신흠(申欽)이라는 인물은 당대를 주름잡은 문장가였다.



신흠이 남긴 잠언 중에는 「원춘사잠(元春四箴)」이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새봄을 맞아 임금에게 네 개의 잠언을 지어 바친 것이었는데 그 중 '진학잠'은 배움을 진작시키는 잠언으로서 "넓게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거니와 암기하여 외우는 것도 참된 배움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인격 도야야말로 배움의 핵심이며, 지행일치를 하는 것이 학문에 임하는 바른 도라는 것이다.



사직 상소를 그리며

조선시대는 선비의 시대이고 선비의 지향은 '맑음의 미학'이다. 부패지수가 극에 다다른 오늘 청백리를 기대한다면 연목구어(緣木求魚)라 비웃음을 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과 사회구조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청백리상을 조명하고 부패방지법에 해당하는 장죄를 참고삼는다면 어떨까. 전통시대 관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아는 것이었다. 국가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나아가고 더는 필요치 않다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자리에서 물러나 거기에 필요한 인재에게 양보하는 것이 애국이자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었다. 그런 인식으로 사대부는 관직을 사양하는 사직소를 올렸다.



오늘날엔 누구나 검증 없이 정치판에 뛰어들 수 있으니, 정치 현실이 혼란스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얼마 전에는 자신이 장관에 임명된 것을 오로지 임명권자의 은혜로만 받아들여 충성심을 전근대적으로 표현하려다 며칠 만에 물러나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만일 그가 사직소를 올렸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투표로 선출된 이들이 실수나 비리를 저질렀다면 유권자에게 사죄하고 사직소를 올린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이름을 낚는 사람

명예와 자존심을 최고 가치로 삼은 전통시대에 '조명지인(釣名之人)'이라는 말은 욕설에 가까웠다. 대의명문에 이름 석 자를 내세워 지사로 행세하려 할 때 흔히 '이름을 낚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이렇게 불린 사람은 진실을 증명하려고 목숨까지 바쳤다. 오늘날 흔히 '인기에 편승하는 사람'이 조명지인의 현대적 표현일 것인데, 바른 소리하는 이들을 때로 조명지인으로 내모는 것은 아닌지도 경계해야 하지만, 그들도 이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언행일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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