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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일본에 전해준 하이테크 이야기

손제하 지음 | 일빛
1장 집과 집짓기



고인돌, 일본으로 건너가다


우리나라에는 고인돌이 많이 있다. 영어로는 돌멘(Dolmen)이라고 하는데, 이는 돌 탁자라는 뜻이다. 이 특수한 무덤은 몇 개의 고임돌 또는 돌무더기를 둘러쌓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얹어 돌방을 만든 뒤, 그 안에 시체를 뉘어놓는 특이한 것이다. 한반도에는 이러한 고인돌이 중국 동북 지방의 일부를 포함하여 그 수가 3,000기를 넘으며, 지금도 발굴되고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거석문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인데, 한반도에 남아 있는 고인돌은 독자적인 거석문화의 유적으로 보아도 좋다.



서일본에도 같은 종류의 것이 있는데, 이는 곧 한반도와 서일본이 오래 전부터 관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해방전까지 우리나라의 고인돌을 북방계의 '탁자식', 남방계의 '바둑판식'으로 이름지어 구분함으로써 남북 문화의 공통성과 동질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또 고인돌의 발생시기에 대해서도 기원전 3~2세기쯤의 '금석병용기'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남방형 고인돌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나라의 고고학자에 의해 북쪽의 황해도, 평안도, 자강도에도 있다는 것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북방형이 한반도 중남부에서도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그 거대함과 화려함으로 볼 때, 권력자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고인돌은 도래인(삼국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로, 도래인의 대부분은 신라에게 패망 후 일본의 칸사이 지방에 정착한 백제인들이다)들에 의해 북규슈에서 구마모토 지방까지 많이 전래되었는데, 요시노가리의 서쪽인 구보이즈미에서는 무려 118기의 바둑판식 고인돌이 발굴되어 요시노가리와 우리나라의 관계를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화덕을 '가마'라 부르는 일본인

인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랫동안 움집에서 살았다. 움집의 집자리 바닥은 원형이나 모서리가 둥근 방형인데, 중앙에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있다. 햇볕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냈으며,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이를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들을 저장했다. 구석기 시대에 시작되는 이러한 주거 시설은 동북아시아의 추운 지방으로 퍼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철기 시대 초기를 지나면서 형태와 구조가 더욱 다양해졌다. 현재까지 수백 개의 움집터가 발견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이미 요시노가리 환호 집락 안에서 약 100호나 발견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야요이 시대(기원전 3~4세기부터 시작)에 움집터가 갑자기 증가했다.



움집의 내부 시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을 때는 화덕인데, 처음에는 움집의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던 화덕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벽 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 난로는 마침내 아궁이로 바뀌고, 밖을 향해 굴뚝을 내는 수준까지 진보해 간다. 아궁이는 찰흙을 굳혀서 만듦으로써 더욱 안정된 형태로 발전했고, 고분 시대 초기에 도래인에 의하여 서일본에도 전해졌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움집은 벽에 두껍게 찰흙을 바르는 등 방한용 주거 시설로 그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방한 위주의 우리나라 온돌식 주거 시설이 알맞지 않았다. 따라서 개방적이며 더위에 견디기 좋게 남방형에 가까운 고상식 집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런데 움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덕인데, 옛날 일본의 주거에도 대개 화덕과 '이로리(마룻바닥 가운데를 사각형으로 도려 파내어 방한용이나 취사용으로 불을 피우는 장치)'가 있었다. 이로리는 마침내 고타쓰(각로라고도 하며 이불속에 놓는 화로)로 변화하였고, 화덕에는 굴뚝을 달았다. 화덕을 일본어로 '가마도'라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가마를 걸쳐놓고 불을 때는 장치인데, 일본에서도 가마를 우리나라와 똑같이 '가마'라고 부르고 있다. 또 재미있는 것은 간사이 지방에서는 화덕을 '구도'라고 하는데, 이 '구도'도 우리말의 '굴뚝'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경주의 첨성대와 일본의 점성대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명물 첨성대(瞻星臺)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 하며, 1,300여 년 전인 647년에 경주에 세워졌다. 이보다는 뒤지지만 28년 뒤인 675년, 일본에서도 점성대(占星臺)를 세웠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고대 국가에서 '첨성대'란 결코 진귀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등을 보면 고구려 시대에도 평양 성내에 첨성대 유적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백제에도 역시 4세기쯤부터 첨성대를 세워 천문 관측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천문 관측대는 일본에 전래되는데, 일본에서는 628년에 비로소 일식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있고, 여기에 이어 643년에는 월식을 관측했다는 기록과 함께 혜성, 유성 등의 관측 기록도 나온다. 그리고 이를 뒤따르듯이 675년에는 '점성대'를 세웠다. 그 주변의 사정에 대하여 『일본서기』「덴지 천황 조」에는 "경술년에 처음으로 점성대를 세웠다"라고 나와 있다. 점성대는 첨성대의 '첨(瞻)' 대신에 '점(占)'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점'은 '점치다', '첨'에는 '우러러보다'라는 뜻이 담겨 있어, 두 글자 모두 별을 우러러 점을 친다는 뜻이 된다.



고대 국가에서 지배자들은 천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첨성 혹은 점성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다. 『속일본기』「겐메이 천황 조」에 "천도하는 것은 … 태양을 살피고 별을 보아 궁궐의 기초를 세우며, 세상을 점치고 흙을 보고 제읍을 세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첨성에 의하여 도성을 설계하고 헤이조경이 결정되었음을 전해 주고 있다. 그런데 경주의 첨성대는 도시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세워져 있다고 고증하고 있는데, 일본의 점성대의 위치는 어떠했을까? 고대 사회에서 점성은 국가 존립을 점치는 최대의 행사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만큼 일본의 점성대도 수도의 중심지에 있었던 것이 거의 틀림없을 듯하다.



2장 토기와 자기



신석기 토기 - 발해 연안에서 오키나와까지


한반도와 오키나와는 1,000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져 있어서 고대인의 발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먼 곳에 있다. 그런데 고대부터 류큐(오키나와의 옛 이름)의 여러 섬과 한반도 사이에는 신석기 시대, 즉 일본의 조몬 시대 초기부터 토기를 비롯한 여러 문물이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일본 오키나와 나카가미군 요미탄촌 도구지동원 유적에서 출토된 소바타식 토기와 그 아래 자갈층에서 발굴된 조형 토기가 거론되고 있다.



소바타 토기는 발해 연안에서 우리나라의 서남 해안에 분포하며 규슈로 전해진 빗살무늬 토기 계통의 토기이며, 조문형의 토기도 같은 계통의 토기다. 그리고 이 조형 토기는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의 아래층에서 출토된 조문 토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오키나와 고고학회에서 펴낸 『석기 시대의 오키나와』에는 "소바타식 토기는 규슈 조몬 시대 전기에 전개된 문화로서, 그 원류는 한국의 빗살무늬 토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일찍부터 발해만 북쪽 연안에 정착하여 농경과 어로 생활을 하던 우리나라의 신석기인들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1960년 나가사키현 후쿠이 동굴에서 발굴된 덧줄무늬 토기는 바탕흙을 끈처럼 만들어 표면에 붙인 보기 드문 것인데, 그 지층은 구석기 시대부터 조몬 초기에 걸친 발전 과정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일곱 개의 문화층이 정연하게 겹쳐져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이 덧줄무늬 토기는 제3층에서 가늘게 생긴 돌칼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그 바로 위의 제2층에서도 가늘게 생긴 돌칼과 함께 조형문 토기가 출토되고, 그 위인 제1층에서는 눌러 찍은 무늬가 있는 조몬 시대 초기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의 제일 아래층에서 발굴된 토기들은 최근 쓰시마의 고시다카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이 토기가 명백히 빗살무늬 토기보다 앞서는 덧무늬 토기이며, 후쿠이 동굴의 덧줄무늬 토기는 이와 같은 계통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후쿠이 동굴의 덧줄무늬 토기는 약 1만 2,4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카사를 세운 백제의 기술자

『일본서기』에는 588년 백제에서 사공, 노반 박사, 화공들과 함께, 마나몬누, 요키몬, 료키몬, 샤쿠마다이미라는 네 명의 와(瓦) 박사가 일본에 와서 아스카사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 최초로 본격적으로 기와를 얹은 사원이 백제에서 건너간 기술자 그룹에 의해 세워졌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신라의 기와 공예는 삼국 통일 이후 급속하게 발달하여 뛰어난 진흙 조각가 양지 등이 배출됐고, 우아하고 섬세한 벽돌, 녹유(토기에 사용되는 유약의 하나), 귀면와 등도 생산하여 마침내 기와 공예로 다른 나라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신라의 기와 굽는 기술의 토대는 일본의 독자적인 도기 기술의 전통으로도 이어진다. 1986년 7월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8세기쯤의 채색 토용(흙 인형) 20여 점이 처음 출토되었는데, 여기서도 기와 공예의 관록을 엿볼 수 있다. 백제의 뒤를 이은 이러한 통일신라의 기와 기술은 유명한 일본의 하쿠호 시대, 덴표 시대의 와전 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백제의 수도 부여 땅을 밟으면 일본 아스카사의 기와와 똑같은, 뒷면에 포목 무늬가 찍힌 기와 조각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부드럽고 우아한 연화문 기와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놀랍게도 아스카사의 연화문 기와와 꽃잎 숫자만 다를 뿐 완전히 똑같다. 아스카사의 중금당에서 출토된 도기 조각은 백제 부소산 유적에서 나온 치미(망새. 전통건축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상징적인 장식물)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까지 부여 지방에서는 약 10군데의 기와 굽던 가마가 발견되고 있는데, 장암면 정암리의 가마는 길이 4.5미터에 폭 1.9미터의 중형으로, 최근 일본 나라 지방에서도 같은 모양의 가마가 출토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들

오늘날 세계의 도자기 중에서 우리나라의 청자나 백자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는 중국의 도자기도 미치지 못하는 기교와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람인 서긍은 1123년에 고려를 찾아, "도자기의 색이 파란 것을 두고 고려인은 비색이라 한다. 최근 들어서 제작 기술이 정교해지고, 색조는 더욱 아름다워졌다"(『선화봉사 고려도경』)고 말하고, 중국의 월주, 여주 도자기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하였다.



또 일본에서 고마모노, 즉 조선 자기에 대한 평판은 대단하여, 일반 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그늘에는 도공들의 슬픈 이야기가 있다. 1597년(정유재란이 일어난 해) 전라도 남원 공략에 참가한 사쓰마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 수군의 해상 공격에 대패하여 불과 50여 척의 배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이런 절박한 순간에도 도자기에 욕심을 내어 송, 정, 이, 장, 변, 박, 황, 임, 차, 주, 노, 나, 연, 강, 하, 진, 최, 정, 신, 백, 심, 김 등 22성 84명의 남녀 도공을 남원, 김해, 웅천 등에서 연행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도공들의 슬픈 이국 생활이 사쓰마의 구시키노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나와시로천에서 조선 백자 재생에 종사하기를 20여 년, 박평의(1558~1623. 조선인으로 일본 사쓰마도기[薩摩燒]의 창시자) 등의 공으로 유명한 '시로사쓰마'를 구워내는데 성공하였다. 또 이 가운데 한 사람인 장헌공은 류큐(오키나와의 옛 이름) 왕의 요청을 받고 1617년 슈리성에 살면서 미시마테(분청사기) 기법을 전하였다.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는 특히 시로사쓰마를 사랑하여 이것을 도쿠가와 쇼군과 여러 다이묘에게 보내 세상을 놀라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19세기에는 유럽에도 수출되어 막부를 토벌하고 천황권을 확립하려는 세력의 재정을 크게 돕게 된다. 오늘날 이곳 친주의 숲, 다마야마궁(玉山宮)에서는 우리 민족의 건국 시조 단군을 제사지내고 있으며, 축문과 제사 도구도 모두 우리 식으로 되어 있다.



3장 농사짓기와 술 빚기



벼농사가 퍼져나간 길


일본으로 쌀이 전래된 길은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중국 남부지방에서 화중, 화북, 한반도 북부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설, 두 번째는 중국 남부 지방에서 한반도 남부를 거치면서 일정 기간 재배 경험이 쌓인 후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설, 세 번째는 중국 남부 지방에서 직접 일본으로 들어갔다는 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으로 직접 전해졌다는 설이다.



이 네 가지 설 가운데 두 번째 설, 즉 중국에서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적, 지리적 여러 관계와 농사에 이용하는 농기구의 유사성으로 볼 때 이 경로가 점점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또 중국 대륙에서 동쪽으로 전해진 벼농사는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기후 풍토도 적합한 한반도 남부에서 일정 기간 기술적으로 발전을 이룬 뒤에 인간 집단의 이주와 함께 일본으로 들어갔다는 학설이 가장 믿을 만하다.



고고학에서는 1919년 김해의 조개더미에서 탄화된 한줌의 쌀알이 초기 철기나 석기와 함께 발굴됨으로써 기원 전후에 중국에서 벼농사가 들어왔다는 설명이 나왔다. 그런데 1967년 한강 유역인 경기도 여주군 혼암리 유적에서 기원전 6~7세기쯤의 민무늬 토기와, 벼 수확에 없어서는 안되는 반달 동칼 5개가 탄화된 쌀, 보리, 수수 껍질과 함께 발굴되었다. 이어서 1981년 6월 평양시 남경 유적에서는 기원전 10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탄화미가 조, 기장, 수수, 콩, 그리고 민무늬 토기, 돌도끼, 반달 돌칼과 함께 발견되어 우리나라에서 벼농사의 시초를 한꺼번에 1,000년이나 끌어올렸다. 이렇게 우리나라 벼농사의 역사는 오래되었으며, 기후 풍토 때문에 북부보다 남부에서 더욱 발달하였고, 일본에서도 쉽게 도입하여 야요이 문화의 여명을 재촉한 것이다.



일본의 된장과 간장

삼국 시대 우리나라의 막걸리는 찐쌀에 밀 누룩을 섞어서 발효시킨 것인데, 이것이 일본에 건너가 전통적인 밀 누룩 대신에 쌀누룩을 사용하게 되었다. 즉 찐쌀에 쌀누룩을 섞어서 발효시켜 쌀만으로 만든 술인 시로나(탁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인은 에도 시대 초기(17세기)에 투명한 술, 말하자면 오늘날의 '일본주'로 그 기술을 발전시켰다. 일본에서 '막걸리'가 청주로 발전하는 데는 풍부한 벼농사에 기댄 바가 큰데, 결국 벼농사의 보급은 술 빚는 기술도 촉진한 것이다.



그러면 된장, 간장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 어떤 사람이 익힌 콩을 짚단과 함께 내버려둔 데서 맛있는 낫토(삶은 콩을 발효시킨 일본 음식)가 생겼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이 일본 된장의 시작이라던가? 과연 볏짚에는 몇억 마리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낫토 균이 붙어 있기 때문에 낫토는 아무래도 벼농사의 전래와 관계가 깊은 듯하다. 하지만 일설에 따르면 이 훌륭한 발효 식품은 약 2,000년 전에 중국에서 생겨나 유명한 감진화상이 일본에 전했다고 하며, 미나모토 요시에(1041~1108)가 오쿠슈 평정 때 군량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탓인지 오늘날 낫토를 서부 일본보다 동부 일본에서 더 잘 먹는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에 이러한 식품 가공법이 발달하여 된장, 간장의 양조 기술이 발전했다. 된장은 콩에 쌀이나 보리 등을 섞어서 찧고, 여기에 소금과 누룩을 섞고 통에 재어 발효시켜 만든다. 우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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