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역사청문회
이태진ㆍ김재호 외 9인 지음 | 푸른역사
『고종시대의 재조명』, 조명 너무 세다 : 김재호이태진 서울대 교수의 고종 시대에 관한 논고를 모은 논문집『고종시대의 재조명』(2004)은, 저자의 논문 발표 목적이 '우리나라 근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고종은 개항기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의 주체였으며, 영조와 정조의 근대 지향적인 민국정치(民國政治)이념을 계승한 '계몽절대군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대한제국의 전제군주정은 근대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으며, 고종의 근대화 노력은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光武改革)에 의해 실현됐으나, 그의 근대화 정책은 일본의 침략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왕정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당시의 정치제제를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시민을 보호하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로 요약될 수 있는 '영ㆍ정조의 탕평군주와 그 계승자 고종의 비전 위에 근대사회를 수립할 수는 없다'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왕조의 이러한 비전을 문제 삼아 발흥한 것이 당대의 서학수입과, 동학이다. '한 인간은 그 사람이 먹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를 평가할 때도, 국왕의 생각을 살필 것이 아니라 그 재정부터 살펴야 한다. 대한제국의 재정제도와 재정 상태는 어떠했는가?
'대한제국기'는 황제 권력의 강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궁내부(왕실사무를 총괄하는 관청)와 내장원(왕실 재산을 관리한 관청)의 재정 팽창으로 인해 정부가 재정 곤란에 빠졌고, 이러한 정부에 지세수입을 담보로 대부를 해줄 지경이었다. 요컨대 황실재정에 의한 정부재정의 지배라는 양상을 띄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환국(조폐기관)은 황제의 사금고 역할을 했으며 백동화 남발로 대한제국의 화폐제도는 문란했다.
식민사관의 덫을 경계해야 한다 : 이태진김재호 교수는 내 책『고종시대의 재조명』에 대해 고종의 업적을 과잉 강조했다고 평하며, 대한제국은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을 탄압할 정도로 전제주의였고, 대한제국이 제정한 헌법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무한한 군권과 전제정치를 규정하고 있으므로 대한제국을 근대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명치(明治)일본의 헌법에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명치 일본도 봉건왕조로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대한국국제'에는 일본헌법과 같은 의회 규정이 없지만, 황제와 인민협회 추천으로 구성되는 중추원을 탄생시켜 이에 법률 칙령의 폐지, 개정의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서학수용과 동학 발흥으로 보아 영ㆍ정조와 대한제국의 민국정치 이념이 새 시대를 이끌 사상체계로 평가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탕평군주들의 사상에는 평등주의가 이미 반영되어 있었다. 정조는 죽기 직전 공사노비(公私奴婢) 전면 혁파 결정을 내렸고, 동학도 반 왕조, 반 유교적이지 않았다. 동경대전(東經大全:최재우가 저술한 천도교 경전)은 유교적 윤리의식이 묻어 있으며, 동학교도들은 유교사상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실현 주체로서 서학을 이기겠다는 의지를 다졌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재정제도에 대한 김재호 교수의 비판에 대해 우선 간략하게 변론하자면 대한제국의 재정제도는 근대화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황후의 장례 등의 황실 의전 관계 예산을 다소 많이 책정한 때도 있었지만, 궁내부는 단순한 황실관리 부처가 아니라, 황제 주도의 근대화 사업 집행부나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일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염려하여 근대화 사업을 황제권이 더 쉽게 발동할 수 있는 궁내부가 수행하도록 체제를 짰으며, 내장원이 예산을 지세수입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늘인 것은 전횡 때문이 아니라 근대화 사업을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논쟁일지 1
'고종 시대' 악센트는 '시대'에 있다 : 이태진김 교수는 민중운동이 신분철폐를 낳았다고 주장하지만, 갑오개혁의 신분제 철폐는 정조가 민국이념 차원에서 결정한 공사노비제 전면 철폐와 고종의 사노비 세습 혁파 재천명(1886) 등을 배경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조선왕조는《경국대전》이래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법전을 여러 차례 편찬할 정도로 법치 기반이 강했다. 대한제국의 예산 자료는 의정부주의(議政府奏議)의 주본(奏本)에 정리되어 있는데, 여기서 '주의'란 의정부 회의를 거친 예산안이 황제에게 올려진 것을 뜻한다. '중추원관제' 규정에 따르면 이 절차를 거친 예산안이 중추원의 심의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중추원 구성원의 절반은 사회단체 대표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그동안 고종을 주로 거론한 것은 이 시대 역사 왜곡이 그의 무능을 핵심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근대화라는 시대적 대 과제를 황제 1인이 이룰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그의 노선을 지지하고 임무를 수행한 많은 신료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서얼 출신이나 변방 상공인 출신 등 비 양반 출신들이 많았다. 고종은 근대국가 만들기에 관민(官民)이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할 필요성을 절감해 독립협회 발족 안을 스스로 내었다. 그러나 일본은 친일분자들을 침투시켜 만민공동회 시위를 벌이게 하는 등으로 대한제국의 안정을 뒤흔들었다.
일제 영향력에 관한 연구에 반짝 불을 켜라 : 왕현종대한 제국의 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점에서 김재호 교수가 지적한 '중추원이 의회와는 다르며 대한제국은 전제 군주정이었다'는 것은 서구의 보편정의에 따른 것으로, 한국 근대사의 맥락과는 크게 동떨어진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1898년의 중추원 개편 논의는 일제하 자문기구로서의 중추원과 달리 의회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좌절되고 결국 이듬해 '대한국국제'를 제정했으므로 1899년 이후에도 종전의 중추원관제 개정이 이어졌다는 이태진 교수의 설명 또한 합당하지 못하다.
갑신정변에서 독립협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개화파의 개혁운동이 일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들을 친일파로 매도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민족주의적 판단과 관계없이 근대개혁과정에서 일제와 친일 정치세력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할 것인가? 이는 과거사 청산의 과제와 맞물려 있다고 하겠다. 최근 한국 경제사학계는 19세기의 생산력이 정체적 위기를 겪었다는 점에서 대한 제국의 근대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 차원의 근대화 지상주의란 결국 자민족의 억압과 민중적 삶의 해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깨달아야 한다.
누가 근대화 지상주의자인가? : 김재호우리는 식민지화라는 역사 과정을 두 가지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는데, 하나는 이민족에 의한 지배라는 차원과 다른 하나는 구체제의 종식이라는 차원이다. 이 두 가지 차원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식민지시대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복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도달한 문명은 현재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자양분의 보고(寶庫)임에 분명하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은 근대 경제성장이 식민지기에 개시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식민지 경제성장도 우리 역사의 일부이다. 따라서 식민지시대에 개시된 근대 경제성장 과정을 우리 역사에서 소거할 것이 아니라 우리역사의 일부분으로 통합해야 한다.
논쟁일지 2
대한제국 근대화 성과, 경제 지표로도 읽힌다 : 이태진지금까지 내재적 발전론에는 민중 중심적 역사관에 선 연구들이 많았다. 나는 민중도 중요하지만 정부나 군주를 도외시한 발전론은 반쪽 역사가 될 위험성이 크다고 보고 고종황제와 그의 정부에 의한 개혁 노력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광무개혁처럼 일본의 침략으로 단명에 그친 경우, 그 자료가 부족하다고 하여 이를 발전 부재론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근래 광무개혁의 근대성을 입증해 주는 지표들이 통계적 연구들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2004)에 실린 인구 변동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19세기 말부터의 인구 증가율 상승은 사망률의 하락으로 인한 결과라고 했다. 그리고 『맛질의 농민들』(2001)에 따르면, 1905년 이후 가작답(家作畓)에 수확량이 상승되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1901년의 대흉년 때는 내장원이 안남미 수입으로 쌀값 안정을 유지해 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종두법 실시 등 근대 의술의 보급으로 인구도 증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905년은 통감부가 설립되기 전이므로 이 변화는 광무개혁의 성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외에도 내장원 수륜과(관개ㆍ관수 등을 맡아본 관청)의 황무지 개간과 제언정비 사업도 경제 안정에 기여한 것으로 나타난다. 1896년 이후의 이러한 경제 지표상의 새로운 동향은 곧 대한제국 정부의 근대적 농정 추진의 결과였다.
금융 분야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보면 광무정권이 일시 부족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백동화를 남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1898년 외자를 도입해 금융 근대화 정책을 본격화하는 한편, 1899년 대한천일은행을 출범시켜 백동화 유통지역을 확대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의 폐단을 극복하고 금융자본 형성으로 한국 상인들의 상업 경쟁력 제고에 새로운 전기를 만든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의 화폐정리사업(일본인 재정고문이 화폐유통의 혼란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1905년에 실시한 사업으로 이 화폐조례에 따라 금본위제가 채택되면서 백동화와 엽전이 정리되고 일본의 제일 은행권을 본위화폐로 사용하게 되었음)으로 금융시장이 붕괴되었다.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넘어서 : 김기봉그동안 한국사의 최대 과제는 식민사관 극복이었다. 식민사관이란 한마디로 조선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룩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 식민지가 됨으로써 근대로 이행할 수 있었다는 역사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해서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한국사 인식의 패러다임이 대두했다.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은 '조선후기에 서구와 비슷한 자본주의 경제가 형성될 조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종시대의 재조명』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반격이라 할 수 있다. 이태진 교수의 연구는 정치제도사 측면에서 대한제국의 근대성을 밝히고자 했다. 고종 시대는 중세 '봉건왕조'가 퇴조하고 근대 국민국가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 시대였다. 고종이 지향했던 것은 '왕이 있어도 군림할 뿐 통치하지 않는' 근대 입헌국가가 아니라 '짐이 곧 국가'가 되는 절대주의 국가였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절대주의 국가 프로젝트는 실패했고, 이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와 같은 민권운동에 의해 몰락한 것이 아니라 일제에 의한 병합에 의해 소멸했다.
만약 일제와 같은 외부세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고종의 대한제국은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갔을까? 고종이 절대 권력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제정한 대한국국제는 근대적인 수단을 통해 봉건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보수개혁의 모순을 내포했다. 역사에서 그 모순이 타파되는 것은 근대혁명을 통해서였다. 고종은 자주적 근대개혁을 위해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방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자주적 근대화와 식민지 근대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종의 근대개혁의 목표가 일본의 근대화를 복제하는 것이었다면 내재적 발전론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종이 추구하는 개혁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각과 조명이 필요하다.
대한제국 재정 정책은 주먹구구식 : 김재호 이태진 교수가 인구ㆍ지대ㆍ임금의 시계열이 보여주는 연구결과를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의 결과나 근대 경제 성장의 증거로 해석하는 것은 사실 부족과 해석의 과잉이다. 개항기는 거대한 전환기였고 1905년 이후의 식민지화 과정을 통해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정점으로 '구체제'가 해체되고, 토지조사 사업으로 근대적 재산권 제도가 확립됨으로써 근대 경제성장이 개시될 제도적 환경이 갖춰졌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해서 근대 경제성장의 모든 조건이 식민지시대에 돌연히 제국주의에 의해 창조됐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비역사적이라 하겠다. 이하 왜 '해석의 과잉'인지 몇 가지 좀 더 구체적으로 답하고자 한다.
지대량은 토지조사사업이 끝나고 산미증식계획(조선을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1920년 ~ 1934년에 일제가 실시한 농업 정책)이 시작되는 1920년대가 돼서야 18세기 말의 수준을 회복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장경제의 발달 정도를 보여주는 시장통합이 이뤄진 것도 식민지 시대 이후였다. 18세기에 국가의 재분배 시스템에 힘입어 상당 수준으로 통합돼 있던 미곡 시장은 19세기에 분열돼 지역 간 동조성이 낮아졌으며, 본격적인 시장통합은 식민지기에 교통ㆍ통신 기반이 갖춰지면서 시작됐다. 또한 높은 이자율은 1910년대까지도 연 40퍼센트 수준으로 경직되어 있었는데, 이자율이 낮아져 산업발달 조건이 유리해진 것은 1920년경부터였다.
대한제국의 제도는 지대추구적(정경유착과 관치금융에 힘입은 재벌 등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이윤을 획득하면서 사회전반에 고비용과 저 생산 현상을 낳는 등의 행위) 성격이 너무 강했다. 대한제국기에는 황실 재정이 팽창해 내장원의 수입은 1904년에 탁지부(국가 재정을 총괄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가 관장하는 정부 세입의 과반을 점할 정도였다. 내장원은 국왕직속기관으로서 정부관할에서 벗어난 국왕재산의 관리 기관이었다. 이는 국왕을 둘러싼 신흥계층의 재분배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내장원의 국가 재원의 대부분이 인건비와 사치재 구입과 선물 등의 희사로 낭비되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국왕이 매관매직의 중앙에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지방 수령 등의 관직은 공공연히 판매되었으며 내장원의 봉세관으로 활동한 자가 거부를 축적한 사례도 잘 알려져 있다. 지방 재정으로 거둬들인 조세금은 사적으로 유용돼 상업 자본으로 투하되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이렇게 황실에서 허가 받은 다수의 회사는 진정한 산업 활동이나 상업 활동이 아니라 유통을 독점해 군소 상인들을 수탈하는 수세회사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만연한 관료사회의 부패와 관기 문란으로 인해 탁지부에 세금이 납부되지 않아 재정 운영은 극히 곤란했다. 이러한 구체제의 극복 없이 근대 경제성장이 개시되기를 바라는 것은 근대에 진입하기도 전에 탈근대를 꿈꾸는 것만큼이나 초현실적이지 않겠는가.
근대의 그늘에도 관심을 가져라 : 김동택개항 이후 한국의 근대 경험에서 특징적인 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돼 급격하게 변화한 사회와 그러한 변화에 제도적인 뒷받침을 해주는 데 실패한 정치체제 사이의 불일치라고 생각한다. 대한제국은 왕권의 절대성에 대한 강조가 매우 강했다. 보수적 근대화의 추구는 개항이후 식민지시대에 이르기까지 갑오정권, 동학농민군, 독립협회, 광무정권, 심지어 1905년 이후의 계몽운동 세력들까지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인민주권을 주장한 정치세력은 거의 없었다.
독립협회가 주창한 중추원 관제 개혁에서도 하원을 배제했고, 1905년 이후 계몽운동기의 다양한 협회들도 참정권의 제한을 옹호했다. 한국의 근대경험에서 지배층의 일관된 보수성은 인민주권의 배제라는 측면에서는 놀라운 일치를 보여주었다. 이는 근대화를 추구할 계급이나 계층적 이해를 공유하는 정치세력의 부재이다. 과거제가 폐지되고 새로운 관료 충원제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황제가 의존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