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5대 제국 흥망의 역사
유아사 다케오 지음 | 일빛
<시대를 읽는 열쇠, 대국의 흥망>인류가 등장한 이래 3백만 년 동안 가장 큰 혁명은 농업을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농업의 도입만으로는 인류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킬 수 없었다. 약 1만 년 전부터 시작된 후빙기의 기후 변화에 따라 서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드넓은 평원이 건조해졌고, 이 건조화가 문명의 발생을 촉진하였던 것이다. 수렵과 채집에 의존해 살던 사람들은 수풀이 줄어들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물이 있는 큰 강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많은 인구를 노동력으로 동원함으로써 치수 관개 시설을 건설할 수 있었고, 여기서 조성된 막대한 농지에서 생산된 식량 덕분에 여러 곳에 도시 국가가 생겨났다. 이러한 도시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많이 생겨난 것은 기원전 4000년 무렵이었다. 그 도시들은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고 동맹을 맺고 합병되기도 하고 분열하기도 했다. 사방으로 트여 있던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보다 늦은 기원전 2,400년 무렵,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한 유목민 셈족의 사르곤 1세가 이룩한 아카드 왕국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것이 대국 흥망의 시작이었다.
세계 제국이란 한 민족, 한 지역을 넘어선 거대 국가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를 지배했던(오리엔트를 통일한)아시리아, 그리고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더 큰 제국을 이룩한 페르시아는 세계 제국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제국으로 비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철(제철)과 말(기마)을 다루는 기술이었다. 페르시아 제국도 영토가 지나치게 커지자 이민족 용병에 의존하게 되면서 쇠퇴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충격을 가한 것은 그리스 인이었고, 특히 그리스계 마케도니아 사람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시아 제국은 유럽에게 타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세계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주화의 발명을 들 수 있다. 알레산드로스는 화폐의 힘을 잘 알았던 만큼 정복 전쟁을 하면서 귀금속을 약탈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짧은 기간에 전례 없는 대제국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3년에 열병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국가로서의 생명은 짧았지만 세계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원정을 하면서 각지에 약 70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가운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유명하지만 아시아 여러 곳에도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건설되었다. 당시 그리스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면서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결합된 독특한 문명이 생겨났다. 헬레니즘은 불교를 통해 극동 아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헬레니즘과 불교가 융합된 간다라 예술은 특히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 때 크게 번성했고 서역과 중국을 거쳐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세계 제국의 흥망과 문명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1장 - 로마 제국 흥망의 수수께끼로마 제국의 흥망대국의 흥망 하면 먼저 로마 제국부터 떠오를 것이다. 로마 제국의 몰락은 곧 유럽과 서아시아가 이끈 고대사회의 몰락에 커다란 분수령이었을 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세계사에 커다란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일대 사건이었다. 로마 제국은 1천 년을 헤아리는 오랜 시간동안 온갖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하며 발흥하고 몰락해갔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연안 전체를 정복하였으며, 나아가 북으로는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 세계, 동으로는 오리엔트의 대부분을 삼켜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로마 제국의 흥망에 관심을 두는 바탕에는 아메리카 제국, 아니 더 나아가 5백 년에 걸친 백인의 세계 지배가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민의를 반영한 정치 체제기원전 1,000년쯤 동쪽에서 이주해온 아리아족의 일파인 이탈리아인이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해 왔을 때, 라틴인이 몇몇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티베리스(지금은 테베레Tevere)강 하류에 자리 잡은 한 집단이 이탈리아인의 일파인 사비니인과 합쳐서, 카피르리누스, 파라티누스를 비롯한 일곱 언덕을 중심으로 모여 만든 것이 로마다. 오늘날 추정하기로는 기원전 600년쯤의 일이다. 전설에 따르면 5대, 6대, 7대 왕이 에트루리아인의 이름인 타르퀴니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아 로마가 한때 이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때의 일이다. 로마인의 젊은 아내 루크레티아가 왕의 아들 섹스투스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인의 억압에 맞서 일어서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는데, 이는 기원전 6세기 말의 일이다.
이렇게 시작된 로마의 역사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재능이다. 그들은 예전부터 있던 귀족의 원로원과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 위에 두 명의 집정관을 두었다. 왕 대신에 등장한 두 명의 집정관은 임기가 1년으로 귀족들 가운데 선출되었는데, 그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문제는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었다. 기원전 494년 평민으로만 이루어지는 평민회와, 집정관과 관리의 행위나 원로원 결의 등에 거부권을 갖는 호민관을 두게 되었다. 이어서 기원전 450년에는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법률을 공개함으로써 귀족이 법을 독점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도시 국가 로마의 내부를 안정시켜 주었고, 이는 로마가 밖으로 발전해가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기도 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포에니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이제 일개 도시 국가가 아니라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품은 거대한 제국이었다. 로마가 대국이 된 결과 한편에서는 대토지 소유자가 번영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군대의 주력인 소농민이 몰락했다. 이것은 곧 도시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을 뜻한다. 이에 그라쿠스 형제가 나서서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공동체의 해체를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 형제는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그 결과 로마는 제정(帝政)이 확립되기까지의 1백여 년을 커다란 혼란 속에서 보내야 했다. 로마의 정치는 귀족파와 민중파라는 두 흐름으로 분열되어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로마를 뒤흔드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검투사 노예 스파르타쿠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노예의 반란이었다. 로마가 대국이 되면서 노예들도 점차 늘어갔는데 그들이 해방을 요구하며 일어섰던 것이다. 반란에 가담한 노예의 수는 한때 4만 명이나 되어 로마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단락 되자 노예 반란을 진압한 크라수스, 시리아를 정복한 폼페이우스,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제휴한 제1차 삼두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때가 기원전 60년의 일이다. 삼두 정치는 로마 사회가 전쟁으로 큰 부를 축적한 장군과 그들에게 매수된 민중, 곧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집단들로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뜻한다.
군사비 팽창과 로마 사회의 변질원로원은 네르바를 황제로 삼았고 뒤이어 네 사람의 황제가 모두 양자로 들어와 차례차례 제위에 올랐다. 이 시기를 5현제의 시대라 부르는데, 이때가 로마의 최고 전성기였다. 이 시기(서기 2세기)에 도처에 식민 도시가 건설되었다. 최고 전성기에 로마는 30개 군단의 군대를 갖고 있었다. 1개 군단의 규모는 정규병 6,800명에 속주민으로 이루어진 보조병을 더하여 약 1만 2,5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밖에 근위병이나 해군을 합치면 로마의 총병력은 약 45만 명이었다. 그 무렵 로마 인구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약 2천만 명, 그밖에 속주민과 노예가 약 1억 명으로 총 약 1억 2천만 명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정규군 20만 명은 시민권을 갖고 있는 시민의 1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셈이다. 보통 병력 부담은 인구의 1퍼센트를 넘으면 과중하다고 본다. 당시 로마는 과중한 군사비를 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3세기에 들어서자 로마는 두 방면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군사력의 쇠퇴를 피할 수 없었다. 북부 전선에서 게르만족의 침공이 차츰 격해지는 한편, 동부 전선에서도 사산 왕조를 수립한 페르시아의 공세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제 개혁이 시도되었는데, 그 해결책으로 기존의 중장 보병 중심에서 페르시아식 중장 기병으로 보강하는 한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취하여 게르만 족을 로마 군대로 대거 끌어들였다. 이는 로마 시민이 나약해지자 어쩔 수 없이 취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군대의 용병화는 군대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로마 사회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로마가 제국이 된 뒤에도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공화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점차 비로마적인 요소들이 강화되기 시작한다. 193년에 즉위한 셉티무스 세베루스는 트리폴리 출신으로, 최초의 비유럽인 황제였다. 엘라가발루스 황제는 즉위하기 전까지 태양신의 대사제였으며, 즉위한 뒤에는 태양신의 신체를 로마로 옮겨 팔라티노 언덕에 신전을 짓고 이 신을 로마 최고신으로 받들려다가 실패하고 암살당하였다. 그 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235년에 암살당하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 뒤로 50년 동안 군대가 적당한 인물을 옹립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암살해 버리는 소위 '군인 황제의' 시대가 이어졌다.
극도의 혼란 상태에 마침표를 찍은 사람이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그는 일개 병졸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황제의 호위대장을 지내다가 군대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다. 그는 그때까지 원수(元首:프린켑스princeps)에 불과했던 황제의 지위를 전주(專主:도미누스dominus)로 바꾸고, 오리엔트풍 의례를 도입하는 등 철저하게 동양적인 전제주의를 꾀했다. 이는 곧 로마공화제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음을 뜻하였다. 그는 제국을 빈틈없이 지배하기 위해 293년, 영토를 동서로 나누고, 각각에 황제와 부황제를 둠으로써 결국 제국을 넷으로 분할했다. 또 부황제가 황제의 후계자가 되도록 하여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새로 생겨난 동로마 제국은 점차 아시아에, 서로마 제국은 유럽에 영향을 받으며 발전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영토는 각각 다른 역사를 갖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로마와 기독교로마를 잠식한 것은 다만 동양적 전제주의만이 아니었다. 기독교 또한 로마의 전통을 파괴하고 로마 사회를 변질시켰다.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는 서기 4년쯤 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 제국이 속주였던 유대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곳에는 친로마파와 반로마파, 종교에서도 개혁파와 보수파를 비롯한 여러 당파가 뒤섞여 있었는데, 예수는 그 속에서 복음을 설파하다가 서기 30년 무렵 신을 모독한 죄로 십자가형을 받았다. 예수의 복음은 곧 민족과 신분의 울타리를 넘어 각계각층으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네로 황제 시대인 64년에는 로마에서 방화죄를 뒤집어쓰고 박해를 받을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어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도가 박해를 받은 것은 그들이 황제 숭배를 비롯한 국가 제사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치 혼란과 퇴폐한 세태가 초래한 정신의 공동화가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게 한 토대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여 기독교 박해 정책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한다는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완전히 굴복했다. 어쨌든 로마 제국이 후세에 남긴 최대의 유산이 기독교라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게르만족의 침입문명은 주변의 미개한 사회를 침략함으로써 확대되고 발전해 가지만, 어떤 단계를 지나면 미개한 사회나 야만적인 사회가 중심적인 문명을 침입하여 선진 문명을 쇠멸시키기도 한다.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게르만족이었다. 서기 375년 무렵부터 시작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평온한 상황을 깨뜨리고 로마를 뒤흔들었다.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한(漢)나라가 서방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자 유라시아 대륙의 유목민 사이에 연쇄 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 몰려오자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쫓기듯 남하함으로써 마침내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서고트족은 도나우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고, 나아가 그리스와 이탈리아 반도를 휩쓸었다. 또한 410년에는 로마를 점령했으며 마침내 남프랑스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밖에 프랑크족은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에 침입하고, 앵글족과 색슨족은 브리타니아로 이주하는 등 거의 모든 게르만족이 이동했다. 그리하여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대부분 여러 게르만 부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476년,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를 폐위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이 476년이야말로 로마 제국이 멸망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서유럽에서는 그 후 잉글랜드(영국), 서프랑크(프랑스), 신성로마제국(독일)이 성립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그 뒤로도 1천 년이 더 지속되지만, 이는 따로 비잔틴 제국이라 일컬어야 옳을 것이다.
2장 - 중화 제국 흥망의 수수께끼다인종 국가로 출발한 중화 제국중국 문명은 은(殷)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2천 년대 중엽, 몽골 고원에서 남으로 뻗어나간 산서고원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황하가 갑자기 동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화북 평원으로 흘러들게 되었고, 그 지점에 많은 도시 국가가 성립했다. 그곳은 고지의 수렵민과 저지의 농경민이 만나는 시장 도시였으며, 이 도시를 바탕으로 성립한 국가가 은이었다. 은의 국가 구조는 다름 아닌 이 도시와 지배 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많은 종속민이 살고 있었다. 중국인은 이런 식으로 형성되었으며 원래부터 다인종 국가였다. 중국의 출발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민족이 중국의 문명과 언어, 특히 한자 속에 포섭됨에 따라 중국인은 점점 팽창해왔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시황제기원전 221년 진(秦)나라 왕은 황제에 즉위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진시황제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일국의 지배자에 그치지 않고 천하(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선언이요, 중화 제국의 출발이었다. 진은 원래 서쪽 지방의 유목민이 바탕이 되어 무(武)를 숭상하는 기풍이 상하게 남아 있는 나라였다. 주가 도읍을 동쪽의 성주로 옮긴 이후의 춘추(春秋) 시대에는 그다지 두드러진 강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차츰 강대해져서 다른 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때는 전국(戰國) 시대로 수많은 병법가와 전략가가 활약하고 있었다. 해문왕은 다른 제후들을 상대로 연횡책(진나라와 그 동쪽에 있던 6개국을 동서로 연합하려던 외교 정책)을 주장하여 각국이 진과 동맹을 맺고 타국에 맞서도록 조종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합종책(合從策)을 주창한 것이 소진(蘇鎭)이었다. 그는 조(趙)·연(燕)·위(魏)· 제(齊)·한(韓)·초(楚)의 여섯 나라가 동맹하여 진에 맞서자고 제후들을 설득하였다. 이리하여 한때는 연횡책이 성공하고 한때는 합종책이 성공하는 식으로 두 전략은 불꽃을 튀기며 대립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60년, 진이 장평(長平)에서 조의 병사 45만 명을 생매장해 죽이자 여러 나라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진에 저항할 기세를 잃고 말았다. 이리하여 기원전 246년, 진나라 왕 정(政)이 즉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