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THE REFORMATION
패트릭 콜린슨 지음 | 을유문화사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동방 기독교 산하의 여러 교회에서는 각각의 역사를 집필할 정도로 흥미로운 일이 많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교회들의 역사에는 혁명적인 것은 고사하고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조차 결핍되어 있었다. 서방의 기독교와 비교해볼 때, 동방교회 중 어떤 교회도 종교개혁이나 그 반동인 반종교개혁을 경험하지 못했다. 단지 1667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러시아의 복고신앙파(Old Believers:러시아어로 스타로버 Starover라고 한다)가 러시아 정교회에서 분리된 것이 하나의 예외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 모든 기독교 신앙의 형태 속에서 -더 나아가 일반적이고 세계적인 의미에서 종교 전체 속에서- 우리는 개혁과 변화라는 영원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중세 교회와 그것의 개혁에 대하여 말해보는 것이 유익할 듯하다.
통상적인 의미의 종교개혁 the Reformation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누구든지 그 시초의 중대한 의미를 인정하고 있다. 영국의 사학자 존 보시J. Bossy는 16세기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의심하지 않으며,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그 중요한 사건에 대한 안내자로서 훌륭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용어는 될 수 있는 대로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 용어가 좋은 형태의 기독교가 나쁜 형태의 기독교를 대체했다는 생각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개혁은 '종교개혁'의 여러 요소와 관련이 있고 유사하다는 이유로 정관사 the없이 그냥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고 불릴 뿐이다(저자는 정관사 the를 붙인 the Reformation을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종교혁명이라고 보고, 정관사 the를 뺀 reformation을 일반적 의미의 세계 종교에 공통된 종교개혁으로 구분하고 있다. 번역에서는 별도의 표시를 하지 않고 다만 문맥상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인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이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10세기에 일어난 개혁 사건, 12세기에 일어난 개혁 사건, 혹은 오늘날 해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항상 일어나고 있는 개혁 사건 등에 그처럼 두루뭉술하게 쓰이지는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중세 후기의 교회와 그 개혁루터는 기존 교회에 대하여 점차 저항이 커지고 있는 분위기에서 그 당시 종교 관행의 상당 부분을 규탄했다. 루터의 역설은 이런 것이다. 그의 가톨릭 비난이 바로 그 전통(가톨리시즘)의 심층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치 루터가 어떤 것이 참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이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참된 것이 되었다는 말과 같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빌헬름 딜타이 W.Dilthey(1833~1911, 독일의 철학자)는 '믿는 자의 독재'라고 불렀다. 근대인이라면 그런 마음의 상태를 가졌을지 모르지만, 루터는 근대인이 아니었다. 루터의 모든 양심은 신의 말씀the word of God의 성서, 다시 말해 교회의 신앙을 떠받드는 오직 하나의 바른 기초인 성서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은 그 자체의 시각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이 아니었음을 이해하는 것이 지혜의 시초이다. 종교개혁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이란 근대 몇 세기 동안 진리로 통했던 중세의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벗어난 것을 뜻했다. 이렇게 볼 때 루터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중세의 가톨릭 교도였던 것이었다.
'개혁Reform'은 종교개혁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다소 진부한 주문呪文이었다. 라틴어 레포르마티어reformatio의 또 하나의 번역어인 '개혁Reformation'은 개혁Reform과 뚜렷하게 차이가 나고 다소 구체적인 표현의 어구였다. 그래서 16세기에도 개혁Reformation을 그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이해했다. 16세기 초에 벌어진 많은 '개혁Reforms' 중 하나는 프란키스쿠스 수도회의 새로운 개혁 분파인 카푸치노(카푸친) 수도회의 설립이었다. 이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과거의 프란키스쿠스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띠를 두르고 샌들을 신었다. 15세기와 16세기 초에 활동했던 거의 모든 교단들은 자체 내에 '계율엄수파'(오늘날의 '근본주의자')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루터가 속했던 아우구스투스 수도회도 마찬가지였다. 중세 후기의 교회는 '종교'인지 '미신'인지 구분이 애매한 관행을 많이 묵인했는데, 이것은 교회가 '두들겨팰 수 없으면 함께 어울려라'는 당시의 속담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고상한 예배와 천박한 미신이라는 모순적인 두 형태가 공존했다.
근대의 기독교인들은 개혁reform을 16세기 초의 강렬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형태와 동일시하고, 이것이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종교에 자양분을 댔다. 잉글랜드에서는 신성한 이름 예수에 대한 숭배의식이 유행했다. 이 시기에 지었거나 재건된 많은 교회에는 IHS(예수의 그리스어 중 처음의 세 글자를 도안화한 것)라는 신성한 이름의 모노그램식 기장記章이 장식용으로 점점이 박혀 있었다.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을 전후해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의 과업이었다. 15세기 네덜란드와 인접한 라인란트의 개혁은 준準수도원적 형제회인 '공동생활형제회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가 실행한 '새로운 헌신New Devotion'이라는 종교운동의 형태를 띠었다. 이것은 16세기에 들어와 억압적인 종교적 엄격주의로 전락했다. 에라스무스와 칼뱅과 라블레는 이 종교적 엄격주의에 기울었다. 그러나 '새로운 헌신'은 신비적 헌신의 실천 방법을 온건하고 적절하게 수정하여 채택했으며, 범신론과 엘리트주의에 빠질 위험이 많은 신비주의를 구해서 교회 전체의 값진 자원으로 삼으려고 애썼다.
15세기에는 누구나 교회 하면 '개혁'을 말했다. 이 말은 때때로 체계화된 어구인 '교회의 머리와 지체의 개혁'으로 표현된다. 이런 측면에서 개혁의 대상은 교회의 전체 조직이었으나, 보다 구체적으로 최고의 지위에 있는 계층을 가리키기도 했다. 교회가 개혁을 추구하는 동시에 그것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분열Great Schism에 의해 더욱 분명해졌다. 한 세대가 다 지나도록(1378~1417) 교회는 두 명의 교황, 때로는 세 명의 교황으로 분열되었다. 이에 앞서 70년 동안 교황은 로마가 아니라 아비뇽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이렇게 되자 로마는 자체적으로 교황을 세우려 했다. 유럽의 정치 판도에 따라 교황의 추종 세력이 갈라졌다. 결국 일련의 협상 끝에 위기를 해소했지만, 이 과정에서 세속의 권력과 체결한 협정에 따라 재산권과 성직임명권 등 교회의 많은 특권이 세속의 권력으로 넘어갔다. 장기적으로 볼 때 16세기의 반종교개혁의 과정을 겪은 후대의 교황들은 새로운 종류의 교회, 과거보다 세속 군주에게서 더 초연한 교회를 창안함으로써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다. 그 반면 교황 자신은 중소 규모의 한 이탈리아 공국(교황청)을 다스리는 세속 군주가 되었다(1523년에서 1978년까지 교황은 모두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이 중앙집권의 정신적 국가는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지속되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오늘날에도 존속하고 있다.
역사상에는 수많은 대립교황이 있었다. 이것은 바로 최선의 교황을 선출하는 일이 불가능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따라서 지성인들, 특히 당대의 파리 지성인들은 공의회의 결정을 교황의 권위보다 위에 두고 교회의 통합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의회주의conciliarism'라는 신념을 지닌 '공의회주의자conciliarist'라고 부르게 되었다. 1414년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는 '지극한 성스러움Gaec Sancta'이라는 법령을 제정했다. 여기에 따르면 전체는 부분보다 크며, 몸 전체는 머리인 교황보다도 더 크다고 선언했다. 이런 갈등의 운명적인 결과로, 그 후 1세기 동안 교황주의와 공의회주의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다.
이렇게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다 보니, 교황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시간을 질질 끌 수밖에 없었다. 1543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최되었을 때 가톨릭교가 신교에게 줄 수 있었던 유일한 답변은 교회의 분열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획기적인 대책이 아니라, 신교를 부정적인 이미지로 몰아 박해하는 것이었다. 공의회주의자들이 대분열보다도 더 위험한 요소를 지닌 불화(종교개혁의 초기 사태)를 일거에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머리와 지체의 개혁'은 훌륭한 슬로건이었으나 그저 슬로건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개혁은 1378년에서 1514년 사이에 열린 모든 종교계 정상회담마다 단골 메뉴였으나 성취된 것은 거의 없었다. 교황과 세속 군주, 주교와 성직자, 종교 교단과 대학 등이 서로 갈라져서 다투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개혁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너는 개혁되어야 한다."
루터의 도전은 무엇이 달랐을까? 다른 도전들이 외부에 보이는 기존 체제의 폐해를 공격한 반면, 오직 루터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신의 말씀으로 가톨릭교회의 부패한 신학을 공격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1세기 동안에 무수한 개혁의 화두가 나왔지만 그것은 종이 위의 말words에 지나지 않은 반면, 말씀word에 대한 루터의 집요한 탐구는 실제적이고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루터는 복음을 발견하고 교회에 도전하다마르틴 루터의 인생은 인간의 허약함이 하느님의 힘으로 강건해진다는 성서적 신화의 복사판이었다. 루터의 스승들은 유명론Nominalism을 지지하는 신학 교수들이었는데, 현대의 해체주의자들과 약간 닮은 구석이 있는 유명론자들은 '보편자' 또는 '종種'의 존재를 부인했다. 이런 개념은 그것들을 구성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말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자신의 종교를 확립하게 된 것은 스승들 덕분이 아니었다. 그의 신앙이 시작되는 곳은 대학의 강의실이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어머니의 품이었다. 루터는 신학을 배운 뒤 구원이 신의 은총과 관련된 것이지, 미덕의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 문제에 거의 유아론唯我論에 가까울 정도로 몰입했으며 은총을 받으려고 정말 애타게 분투했다(유아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인식하는 주체는 바로 '나 뿐이다'라는 입장으로, 여기서는 루터가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애쓴 노력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 뿐이다라는 뜻으로 썼다).
루터를 정신적 곤경에서 구해준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선배이며 정신적 지도자였던 요한 슈타우피츠였다. 그는 루터에게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신설된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임하여 신학을 가르치라고 고집스럽게 권유했다는 것이다. 슈타우피츠 자신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부 학장이자 성서신학 교수였다. 루터는 신학박사가 되었으며 슈타우피츠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성서 해석학에 관한 지속적인 강의를 통해서 그는 성서 텍스트의 의미를 캐는데 온 힘을 쏟았다. 1517년 10월의 일이었다. 루터는 바로 이 가을에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항거하는 95개 논제를 써서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 앞에 붙였다. 살아있는 자나 이미 죽은 자의 속죄를 위해 연옥에 있는 시간을 단축해 준다는 면죄부는, 독일인 추기경의 빚을 갚고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대대적인 재건축 경비의 조달을 목적으로 판매되었다.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을 통해서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라는 루터의 교리는 인류를 도덕으로부터 해방시켰고 동시에 인류를 진정으로 해방시켜 더욱 도덕으로 나아가게 했다. 당시 신자 개인이 몸을 낮추어(자신의 참회와 고행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낮은 곳으로 내려가자는 것은 중세 후기 기독교의 강력한 주제였다. 95개의 논제는 인쇄업자의 손으로 들어간 지 얼마 후 독일 전역의 대중에게 라틴어뿐만 아니라 독일어로 널리 읽혔다.
공평한 관찰자라면 그 사건(95개 논제를 교회 기둥에 붙인 것)은 당초에는 두 수도사 집단 사이의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리라. 그 두 집단은 루터가 속한 교단(아우구스투스 수도회)과 도미니쿠스 수도회를 가리킨다. 그러나 곧 로마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루터는 이단 용의자로서 해명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유럽 정치에서 교황과 황제 사이의 미묘한 작용 덕분에 루터는 살아남아 교회를 파괴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루터는 1520년에 두 편의 다른 선언문을 출판했다. 그것은 일종의 전쟁 선포였다.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신분 개선에 관하여 보내는 글>은 '로마파'를 위시하여 통치자의 권력 남용을 전체적으로 개선할 것을 요청했다. 청원의 신학적 기초는 새롭고 혁명적이었다. 또한 사제직priesthood이 아니라 목사직ministry을 강조하는 신교의 특징이 나타나게 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전반적 체제에 대하여 이보다 더 파괴적인 것은 또 다른 책, <교회의 바빌론 유수에 관한 서곡>이었다. 이는 교회의 7성사聖事(세례(洗禮), 성만찬(聖晩餐), 고해(告解), 견신(堅信), 임직(任職), 결혼(結婚), 종유(終油)를 말한다)에 관한 것이었다. 마침내 교황의 칙령이 독일에서 공포되었고 루터의 책들은 불태워졌다. 비텐베르크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루터는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교황의 파문칙서를 던졌다.
그 후 4개월이 지나 1521년 4월 루터는 단지 자신의 이단을 철회하라는 일방적 명령만 받아들여야 했다. 황제는 루터와 그 지지자와 사주자들을 모두 불법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황제는 루터의 확고한 태도를 존중했으며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돌아오는 도중에 루터는 친구들에게 선의로 납치되어 실종자가 되었다. 친구들은 바르트부르크의 한 성에 은신시켰다. 그곳에서 그는 신약성서를 번역했다. 이제 곧 기묘한 해로 기록될 1525년(농민전쟁이 일어난 해)이 올 터였다.
칼뱅과 칼뱅주의종교개혁의 신화는 장 칼뱅과 제네바의 경우 또 다른 형태를 취했다. 당시 이 도시는 인근의 사보이 공국에서 막 독립한 상태였다. 베른 시는 1536년 제네바의 성공적인 혁명을 지원한 뒤 사이가 벌어진 후원자였으며, 제네바 시의 배후 지역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다. 독립 과정에서 제네바 사람들은 베른 시를 모델로 하여 외관상 신교도가 되었으나, 그 결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했다. 제네바는 프랑스에 속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스위스에 포함된 것도 아니었으며, 유럽의 도시국가로서는 유일하게 16세기에 독립되어 1798년까지 유지됐다. 장 코뱅(Jean Cauvin, '칼뱅'은 코뱅의 라틴어 형태)은 피카르디(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옆의 지방) 출신이었다. 부모는 칼뱅에게 성직을 밟게 할 의도로 파리에 유학보냈지만, 집안 사정으로 그는 부르즈 대학으로 옮겨 법학을 공부했다. 다른 계기로 인해 그는 법학을 포기하고 파리로 돌아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등 인문학에 몰두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그는 프랑스 혁명사가들이 말하는 '예비혁명'의 지도자들과 어울렸다. 이들이 벌이는 운동은 관념적인 만큼 안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있었으며 이단에 대한 고발이 빈번해졌고 몇 사람이 화형을 당했다. 칼뱅은 슈트라스부르크로 간 다음에 바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우연히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때가 1536년 7월로 그 도시가 '신성한 계율인 복음에 따라' 살기로 서약한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제네바의 설교자 중에는 기욤 파렐이 있었다. 파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