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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땀 눈물

리처드 던킨 지음 | 바다출판사
노동의 기원



중절모를 쓴 네안데르탈인

과연 인류는 진보했는가?
: 노동 자체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아득히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가능하다면 원시 인류가 아프리카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인류의 여명기까지 더듬어 보아야 한다. 탄자니아 올두바이 협곡에서 부싯돌과 석기 공작물 같은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인류의 조상들이 250만 년 전부터 초보적인 도구들을 다룰 줄 알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초기 원시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고통스럽게 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50만 년 전 인간의 활동을 보여 주는 유물들이 계속 발굴되면서 그런 증거들이 충분히 확보됐다. 어쩌면 우리는 진보와 퇴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케이프요크 반도의 콜맨 강 어귀에 살고 있는 이르-요론트족은 1930년에 유럽 선교사들과 접촉하기 전까지는 돌도끼 이상의 기술을 가지지 못했다. 이르-요론트족에게는 노동과놀이 사이에 그다지 큰 구분이 없다. 그들은 잡다한 일과 허드렛일을 나타내는 데 'Woq'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자질구레한 일들을 뜻하는 이 말에 사냥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수렵, 채집 사회에서 가장 근본적인 활동인 사냥을 노동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 사회에서의 노동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인 듯하다. 이 같은 개념, 다시 말해 '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이 우리가 가장 쉽게 노동을 인식하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진보가 아니라 변화 : 그런데 그런 인간이 어떻게 해서 서류 가방을 들고, 복장에 대한 까다로운 규정을 따르며, 키보드 단추를 누르는 데까지 이르게 됐을까? 1950년대에 칼턴 쿤 Carleton Coon은 중절모를 쓴 네안데르탈인을 그렸다. 그 용모가 현대인과 얼마나 닮았는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초기 시대들을 되돌아보면 언어와 관습, 유행이 시대를 관통해 변화하듯이, 노동 그 자체도 본질적으로 변화하고 이해되는 하나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구석기 고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문명의 역사가 한결 같이 진보되어 온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진보의 의미를 야만으로부터의 향상으로만 이해했다면 진보 그 자체도 신중하게 정의돼야 한다고 생각되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몇몇 사회는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공존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차츰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인의 조건

노예제가 꽃피운 고대 문명
: 대평원에서 버펄로 사냥을 했던 북미 인디언들에게는 노예제도라는 전통이 없었다. 이웃부족과 싸워 잡은 포로들이 있었다면 그들을 살해하거나 풀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노예제도가 존재할 만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었다. 적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에 노동을 시킨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역사가 모제스 핀리는 노예제가 발달하는데 필요한 세 가지 조건으로 지속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토지의 사적 소유, 상품 생산과 시장의 발달, 그리고 내부적인 대체 노동력의 공급 부족을 들었다.



그리스와 로마 등 가장 위대한 고대 문명도 인류의 가장 야만적인 상태인 노예제에 기초한 것이다. 수백년 동안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노예 노동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육체 노동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노예들이 숙련된 노동 뿐만 아니라 의사나 교사 같은 전문 영역에 고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 노동은 주로 농업에서 이용되었다. 이것은 역사상 노예노동을 이용했던 어느 곳에서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노예제가 그리스와 로마라는 위대한 고대 제국의 토대가 됐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들 노예 사회는 지속될 수 없었다. 노예들이 군대와 의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의 사역을 담당하게 된 바로 그 노예제의 성공이야말로 로마 붕괴의 근본 요인 중 하나일지 모른다.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이 한 때 가졌던 노동 윤리를 망각하고 말았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너무나 부패하고 쾌락주의에 물들어서 비대해진 제국을 더 이상 지켜나갈 능력이 없었다.



자유와 굴종 : 물론 오늘날의 고용계약은 노예제와는 다르다. 노예제는 주로 정복의 산물인 데 반해 오늘날의 장시간 사무 문화는 자발적 의지에서 생겨난 습성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는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려면 장시간의 고된 노동쯤은 불가피한 일로 감수해야 하는 심리적, 사회적 체제 안에 갇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일의 노예가 되어 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고는 자신을 해방시킬 엄두가 나지 않도록 그 열쇠를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갈수록 가혹해져만 가는 노동에 대한 불신은 우리의 이러한 오랜 확신들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는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보면서 노동에 우리를 옭아매는 심리를 분석하는 일에 착수했고 그 결과 자유와 굴종은 노동의 양과 음을 이루는 상대적인 힘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의식있는 고용주들은 일터에 자유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강제적인 시간 규정이나 경영의 통제수단인 구속장치들로부터 사람들을 풀어주고 있다. 앞으로 전통적인 노사 관계와 계약을 고집하며 변화하려 하지 않는 기업은 결코 번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노동자 역시 마찬가지로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직업의 탄생

길드의 등장
: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회에서 갖는 가치에 따라 산업과 직업을 위계적으로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맨 위가 농업, 그 다음이 수공업, 상업이 맨 아래를 차지했다. 길드는 이러한 새로운 지위를 통합, 발전시키고 조합원들을 보호하며 직업으로서의 가치를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동업자 조합 겸 동업자 조직인 길드guild는 '지불하다'라는 의미의 색슨어 동사 'gildan'에서 파생했다. 각 조합원이 수수료를 지불한 데서 유래한 길드는 중세 런던에서 그 본질이 가장 철저히 구현됐다.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의 형태의 길드들은 작업 공정을 통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세계 각지에서 무역 활동도 전개해 나갔다. 길드가 노동의 진화에서 중요한 집단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그들이 작업 공정뿐만 아니라 사업 방식도 철저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임금을 안정되게 관리하고, 모조품이나 속임수로 인해 상거래 질서가 교란되지 않도록 표준화하는 데 힘썼다. 수공업에서는 아직 장인만이 자신의 기술에 대한 비법을 효과적으로 전수할 수 있다. 런던의 정식 길드 조합에서는 7년간의 도제 수습 기간을 마치면 직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로써 공민의 지위를 얻을 수 있을 만큼 지위가 올라가게 된다. 공민은 군대 징집을 면제받을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되게 일할 수 있었다.



봉건제와 농노 : 한편 로마가 몰락하고 다시 국가 통치 기구가 출현하기까지 서구 유럽의 노예제는 점진적으로 봉건제로 대체되었다. 이는 육체노동 집단을 손쉽게 관리하고 유지하는 또 다른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아침에 밭을 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을 했던 것이다. 봉건제 하의 농노는 노예처럼 거래되지는 않았지만 영주 소유의 토지와 장원에 묶여 있었다. 농노와 예농(隸農, villain)은 사실상 거의 같은 존재였다. 예농은 하층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으로, 범죄자를 뜻하는 'villain'은 중세시대에 속박당했던 노동자들을 부르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이것은 손을 더럽힐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이 시기를 거치면서 가장 천한 부류의 사람들과 관련됐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15, 16세기에 도시가 생성됨에 따라 영주들이 지나치게 가혹한 통제 방식을 고수할 경우 농노들은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도시로 떠났기 때문에 농노제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 : 1450년 금속활자 개발로 대량 인쇄술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유럽 전역에 걸쳐 다른 언어로 번역된 성서는 활발한 논쟁과 이의 제기, 충돌의 도구가 됐다. 이로 인해 종교의 새로운 전형을 위한 토대도 마련되었다. 하나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욕을 버리고 열심히 일하는 미덕을 찬미함으로써 신에게 헌신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아드리아노 틸게르는 "루터는 노동자의 땀 흘리는 이마에 왕관을 얹었다"라고 찬양했다. 루터가 새로운 종교 윤리의 문을 열었다면 칼뱅은 그것을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었다. 경제사학자 리처드 헨리 토니의 말에 따르면 칼뱅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고리대금에 대한 비난과 자본주의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켰기 때문에 "경제의 가치를 인정하고 후원한 최초의 체계적 교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니는 또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로마 교회는 사치와 겉치레를 조장해온 데 반해 개혁 교회는 절약과 절제를 필수적 요소로 삼았다. 또한 전자는 위선적 자선을 무차별적으로 베푸는 것을 인정해온 반면 후자는 허위 의식을 배제하고 근면과 검소의 미덕을 견지해 왔다." 결국 칼뱅의 교리 안에서는 기도와 사업이 모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가 이후 400년 동안 유지되며 서구 산업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쳐왔다. 한마디로 프로테스탄티즘은 문화적이고 지적인 혁명이었다. 특히 그 위력과 강렬함은 18세기 산업혁명과 기술혁신 시대에도 그 가치를 인정할 만큼 대단했다. 전자가 없었다면 후자는 결코 생겨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산업 혁명의 시대



노동이라는 새로운 종교

퀘이커교도의 성공
: 17세기에 가장 박해를 받은 신흥 교파들 중에 '프렌드회'가 있었다. '퀘이커교Quakers'라는 별칭은 영국의 한 치안 판사가 이 운동의 창시자이자 영적 길잡이였던 조지 폭스로부터 신앙적 권유를 받던 중에 주의 이름을 말하는 대목에서 '전율quake'을 느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폭스는 잉글랜드 북부의 농촌 공동체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강경한 태도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설교는 반목과 혼란을 가져왔다. 그것은 저항의 가장 위험한 형태였다. 그의 설교는 많은 개종자들을 얻은 반면 박해라는 새로운 파란을 몰고 왔다. 1689년에 관용법이 제정되고 난 이후에야 퀘이커교도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 때까지 그들은 많은 분야에서 길이 막혀 있었다. 그들에게는 대학에 입학하거나 전문직을 가질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독립 면허장이 발부돼 상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오래된 자치도시에서도 전통적인 상업이나 공업에는 종사할 수 없었다. 퀘이커교도는 십일조의 헌납을 거부했기 때문에 성직자도 될 수 없었다. 그들은 법정에서 선서하는 것도 거부했으므로 법조계로부터도 배제됐다. 같은 이유로 그들은 군 입대나 정치 참여도 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퀘이커교도들은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러 방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소수 분파의 구성원들이 산업과 사업 분야에서 그토록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먼저 그들의 근면성을 들 수 있다. 근면은 프로테스탄트 윤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다른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은 빈틈없이 운영됐을 뿐만 아니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그들 사회에는 신용과 공정성이 미덕이 되는 뿌리 깊은 상호주의와 자립이라는 특질이 있었다.



필그림 파더스 : 영국의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내내 불순분자로서 지목받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 사회가 변혁될 가능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자, 청교도들은 압제로부터 벗어나 신세계에 프로테스탄트 유토피아를 건설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1620년 12월 11일 메이플라워 호를 탄 한 무리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윈스럽은 자신의 항해를 약속된 땅으로 가기 위한 모세의 이집트 탈출에 비유했다. 그곳에서 게으름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고 실제로 1648년, 매사추세츠에서 통과된 법령에 의하면 게으름은 처벌받아 마땅한 죄악이었다.



퀘이커교도와 미국의 노동 윤리 : 새로운 윤리의 특성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국가 형성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조지 폭스를 계승한 퀘이커 운동가 윌리엄 펜은 근대 미국 사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천의 영국인 퀘이커교도들과 다른 비국교도들은 연이어 이 새로운 땅에 모여들었다. 자유의 종이 처음 울렸던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 의사당 뜰에서는 독립 선언서가 조인됐고 나흘 후 공표됐다. 퀘이커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무장한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권리는 이 독립 선언서에 소중하게 간직돼 있다. 퀘이커교도들과 비국교도들은 "근면과 수고의 자생적이고 고결한 순환"이라는 아메리칸 드림 안에서 노동이 숭배되고 구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퀘이커교도의 사업에서 자본주의는 산업의 윤활유로, 그리고 그들의 노동 윤리인 '고결한 순환'을 더 빠르게 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자리매김했다.



공장시계

산업혁명
: 18세기까지 산업은 유럽 전역에서 발전했다. 영국의 사업가와 발명가들은 여러 분야에서 기술을 혁신했다. 특히 에이브러햄 다비1세에 의한 철광석 용해에서의 코크스로(爐) 제련법의 개발은 철과 석탄 시대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기술혁신이었다. 이밖에도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제임스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리처드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등 18세기 후반까지 영국은 갖가지 발명으로 넘쳐났다. 이러한 발명들을 토대로 급격한 산업발전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산업시대의 핵심 장치, 시계 :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들은 출근 시간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계는 노동 시간을 관리하고 수당을 배분하는 데 있어서 차츰 중요성을 더해가기 시작했다. 수력으로 기계를 움직였던 공장들은 양면 시계를 사용하곤 했다. 한 쪽면은 현재 시간을 알려 주고 다른 면은 개인이 일한 시간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이 같은 '공장 시간'은 강물의 흐름에 의해 조절됐기 때문에 강물의 흐름의 느려지면 생산도 더뎌졌다. 강물의 속도에 맞추어진 시계는 급료를 지불하는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계산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초창기 공장 체제에서 시간은 작업 시간을 점검하는 공장장의 손에 달려 있었다. 역사학자 톰슨 E.P. Thompson에 따르면 공장장들은 시계를 아침에는 빠르게, 밤에는 늦게 맞추어 놓는 방법으로 노동자들을 속이기도 했다고 한다. 1800년대 초반에는 출근시간 기록제가 도입됐다. 미국의 사회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공장 생산라인에서의 정확한 시간 관리는 성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해 내려온 것이었다고 지적하며 "산업 시대의 핵심적인 기계 장치는 증기 기관이 아니라 시계였다"고 결론지었다.

산업혁명의 그늘

기계화된 대규모 공장
: 17세기가 끝나 가면서 공장주들은 대규모로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특혜를 베풀었으며, 그들의 공장 공동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주들은 증기력을 갖춘 기계를 설치하여 자신들의 힘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 후 5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독립적인 기술공과 상인들은 산업 현장에서 거의 사라졌다. 1820년에 25만여 명에 달했던 수직 직공의 수가 1856년에는 2만 3,000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공장의 기계화와 생산 집중이 이들을 휩쓸어 버렸던 것이다. 공장주들은 확고한 지배권을 갖게 됐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많은 조건들이 준비돼 있었다. 대부분의 작업이 기계화되면서 여성이나 어린아이도 작업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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