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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짧은 역사

A.N. 윌슨 지음 | 을유문화사
머리말 : 런던의 역사



런던 전체를 한 눈에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에 올라 팔리아먼트 힐Parliament Hill에서 런던을 내려다 보는 것이다. 북쪽에 위치한 이 확 트인 지점에서 런던을 바라보면, 청명한 날 우리의 시야는 북적거리고 정신 사나운 너른 공간을 가로지르며 뻗어나간다. 동쪽으로는 카나리 워프Canary Wharf에서 빛을 반짝거리는 거대한 고층 빌딩이나 세인트 폴 성당St. Paul's Cathedral의 돔이, 서쪽으로는 웨스트민스터 궁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시야에 포착된다. 이 높이에서는 바로 발밑에 놓인 켄티시 타운Kentish Town과 캠든 타운Camden Town 등의 런던 북부의 광역도시들이 보이고, 나무들이 점점이 박힌 리젠트 파크Regent's Park와 하이드 파크Hyde Park도 보인다. 또한 저 멀리 템스 강의 남쪽으로는 런던 남부로 불규칙하게 뻗어나가는 교외 지역과 그 지역의 계단식으로 지어진 주택, 빌라, 고층빌딩, 교회, 극장들을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일한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된 도시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거의 통제가 이뤄지지 않은 사회적, 건축적 무질서 속에 존재하면서도 활력과 원기가 팽배한 자치도시와 왕년의 촌락 집단이다.



런던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집합적인 역사이며, 숱한 사연이 집약된 만화경이다. 게다가 거주 인구의 규모와 유동성 때문에, 그리고 꾸준한 런던의 대부분의 삶과 마찬가지로 망각 속으로 사라져갔다. 우리가 그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선택한 사연들은 임의적으로 선정한 사연들이 될 것이다. 개천들은 우리의 시야에서 감춰졌거나 말라버렸고, 그도 아니면 플리트 강Fleet river처럼 땅 아래로 숨어들었다. 플리트의 물줄기를 따라가면, 런던 역사의 거의 모든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플리트의 서쪽 수원은 활력의 계곡(Vale of Health, 1665년에 유행한 대역병의 영향을 받지 않은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이고, 동쪽 수원은 오늘날에 켄우드 하우스Kenwood House로 불리는 공원에 있다. 켄티시 타운과 가스펠 오크Gospel Oak를 지나쳐 흐르는 플리트는 1840년대 무렵에만 해도 확 트인 전원을 흐르는 개울이었다. 런던의 사연과 비슷하게, 플리트도 오늘날에는 지하로 흐르고 있다.



플리트는 리젠트 운하Regent's Canal를 아래로 가로지르고 강물은 세인트 판크라스 교회의 남쪽 지점에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배틀브리지Battlebridge라는 지명은 플리트를 가로지르는 단선單線 벽돌 구조물에서 유래되었다. 조지 4세가 서거한 1830년, 배틀브리지 주민들은 조지 4세를 항상 지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를 기념하는 벽기둥이 장식된 팔각형 건물을 세웠다. 건물은 1836년 무렵에 완공되었다. 지붕에 설치된 십자가 풍향계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 건물을 보아디케아스 크로스라고 불렀고, 다른 이들은 세인트 조지스 크로스라고 불렀다. 또 어떤 이들은 고인이 된 하노버 왕가의 왕에게 까닭 모를 존경심을 부여하기 위해 킹스 크로스라고 불렀는데, 그 지명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 건물은 철도가 들어오면서 1845년 헐렸다. 플리트는 요즘 킹스 크로스 로드라고 불리는 곳을 가로질러 패링던 로드Farringdon Road로 흘러내려간다. 여정의 이 단계에서, 플리트는 홀번Hol-bourne, 또는 힐링 스트림(Healing Stream, 치유의 냇물)이라 불린다. 리버 오브 웰스River of Wells라고도 알려져 있다.



산업화와 과밀 인구를 수반한 철도 시대가 오랫동안 이어진 런던의 독특한 과거를 파괴하고 은폐하면서 런던을 완전히 바꿔놓은 게 어느 정도였는지를 플리트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리버 오브 웰스를 따라 템스로 나아가다보면, 우리는 런던 역사의 다른 측면과 마주치게 된다. 홀번(플리트)을 작은 개천들과 이어주는 램 수도관을 보면서 우리는 튜더 시대 길드들의 부유함을 떠올리게 된다. 인접 지역에 물을 대기 위해 한때 물냉이가 울창했던 이 조그만 수로를 건설한 사람이 피륙 직공 길드의 윌리엄 램(헨리 8세 치하 왕실 예배당의 시종)이기 때문이다. 인근의 클러컨웰Clerkenwell에서 우리는 튜더 시대 상인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이면서 탈바꿈시킨 초기 런던의 모습을 상상해낸다. 상인들이 반대한 것은 예루살렘의 세인트 존 기사단의 수도원장과 교인들과 베네딕트회 수녀들이 이 우물의 정화능력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훗날 오염된 플리트는 타락과 부패를 가리키는 별칭이었으며 수도首都의 도덕적 악취를 대표하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플리트의 물줄기처럼 오래된 담에서 런던의 역사를 읽을 수 있었던 유서 깊은 플리트 감옥도 1840년대에 사라졌다. 정복왕 윌리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감옥은 중세 시대에는 재판을 기다리는 재再구류 죄수들을 가두는 곳이었다. 우리는 메리 여왕 치세인 1553년 9월에 이곳에 마일스 커버데일이 수감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번역한 성경의 시편은 영국의 성당과 칼리지에서 오늘날에도 날마다 읊어지고 있다. 가톨릭을 믿던 메리가 신교도의 영웅들을 박해한 반면,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동생 엘리자베스는 이곳에 가톨릭교도들을 감금했다. 유서 깊은 플리트 감옥은 1666년의 대화재 때 소실되었다. 재건된 감옥은 영국의 역사에서 범죄와 처벌의 가장 위대한 세기였던 18세기를 목격했다. 중세 시대에 플리트로 끌려오는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는 계약을 둘러싼 상대적으로 사소한 의견 불일치였다. 그리고 튜더 시대에 플리트에 갇힌 남녀들은 시대가 강요한 종교의 희생자들로 가톨릭교도나 신교도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위대한 교역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빚 때문에 플리트 감옥에 갇혔다. 빅토리아 시대의 플리트는 넘쳐나는 자원에 몰입한 시대상, 즉 개량하고 확장하고 개선하고 정화하려는 빅토리아풍 욕망을 반영했다.



빅토리아 시대 공학 기술의 가장 독창적인 위업인 런던 하수도에 통합되는 것이 플리트의 숙명이었다. 1854년에 존 스노박사가 콜레라가 물을 매개체로 해서 창궐하는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자, 시급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랬음에도 1858년까지 이 시스템은 구축되지 않았다. 템스의 '대악취'는 여전히 참을 수 없었고, 회기 중에 의원들이 숨을 쉴 수 있게 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의 강 쪽으로 난 창문에는 표백분을 적신 커튼을 쳐야만 했다. 그래서 로마 군단과 최초의 기독교 전도자들, 십자군과 중세의 수녀들, 튜더 시대의 상인들과 18세기 시티의 무역업자들이 눈길을 던졌던 플리트의 강물은 네트워크에 통합되어 결국에는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런던의 역사는 런던의 잃어버린 강물들처럼 오늘날의 거리와 철길, 사무실과 가게, 아파트와 저택의 거죽 밑에 감춰진 개울이다. 런던의 역사를 파악하는 방법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런던을 여행하면서 런던의 풍부한 유물을 알아채지 못하는 아주 둔감한 사람조차, 최근 들어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잃어버린 강물처럼 그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런던이 스스로에게 가한 짓으로 인해 역사는 지워져 버렸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런던의 부富는 두 가지 주요한 재원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제조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의미의 시티 오브 런던'에 소재한 증권거래소, 사설은행과 보험회사, 시티의 증권투자자들로 이뤄진 시티의 탁월한 금융기관들이었다. 런던의 제조업이 창출해낸 막대한 부는 오늘날에는 부활할 거라는 조금의 희망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한때 영국의 재정적, 경제적 독립의 보루였던 시티 오브 런던은 이제는 해외 자본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런던의 나머지 지역의 주된 '산업'은 관광산업이다. 해마다 카메라를 목에 걸친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타워, 세인트 폴 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지금의 런던은 관광안내센터가 되어버렸고,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런던의 역사적 성격은 상당 부분 망가졌다. 예를 들어, 타워 오브 런던은 이제 더는 요새가 아니다. 타워의 기능은 관광객을 유인하는 것이다. 타워의 진정한 역사와 기능은 관광객들 때문에 디즈니월드의 대용품으로 전락해버린 듯하다.



런던의 경제적 분위기와 도시 구성에서 이런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한편에서, 다른 두 가지 크나큰 변화도 일어나고 있었다. 히틀러의 루프트바퍼(Luftwaffe: 나치 시대의 독일 공군)가 문을 열고 두 세대에 걸친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기쁜 마음으로 명맥을 이은 옛 런던의 파괴와 재건이다. 햄스테드 히스에서 런던을 내려다보면 엄청나게 많은 돈이 투입되었지만 쓸데없이 따분해 보이는 빌딩들만 발아래 펼쳐진다. 이런 건물들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영국 여권 소지자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점차로 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런던은 세계 그 어느 도시도 견주지 못할 정도의 규모로 망명객들이 몰려들었다. 오늘날 수십만 명의 런더너Londoner는 동유럽과 그 외 지역에서 별다른 인가를 받지 않고 런던에 온 방문객들이다. 그들의 도래는 범죄의 어마어마한 증가와 동시에 일어났다. 그러나 런던의 역사를 살펴본 일부 사람들은 경제, 건물 구조, 인구통계학 분야에서 우리가 묘사했던 거대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영혼은 불가사의하게도 계속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노르만 런던



런던에 온 관광객들은 타워 오브 런던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보고 싶어한다. 현재의 사원 예배당이 헨리 3세 치하인 1245년에 건축이 시작되긴 했지만, 두 곳 모두 노르만족이 만들었다. 정복왕 윌리엄이 런던에 입성하기 전, 참회왕 에드워드(재위 1042~1066)는 손즈(Thorns, 소니Thorney) 섬에 베네딕트회 수도원을 세웠다. 에드워드의 친가는 영국 혈통이고, 외가는 노르만족 프랑스 혈통이었다.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노르만의 정복은 에드워드의 치세에 그가 이 수도원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에드워드가 서거하던 해에 정복왕 윌리엄은 영국을 정복했다. 그는 신앙심 깊은 그의 친척(에드워드)이 진행하던 성당과 예배당 같은 장대한 건축 사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정복자인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영국 왕위에 오를 곳으로 웨스트민스터를 선택한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 웅장한 수도원은 두 명의 에드워드(어린 나이에 타워에서 살해된 에드워드 5세와 왕위를 포기한 에드워드 8세)를 제외한 영국의 모든 왕과 여왕의 대관식 무대가 되었다.



대관석戴冠席의 등장은 에드워드 1세 치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그는 웨스트민스터의 갓스 하우스God's House에 '성스러운 돌'을 올려놓을 의자를 디자인했다. 정복당한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이 돌은 대단히 중요한 유물이었다. 돌은 극도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남쪽으로 운반되었다. 그 이후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은 돌을 강탈당한 것에 분개해왔다. 옥좌玉座와 돌은 한 덩어리가 되게끔 디자인되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스코틀랜드 왕들의 찬양의 대상이었던 오래된 돌은, 지금은 참회자 성 에드워드의 제단 옆에 놓인 (성스러운 의자 자체이기도 한) 성골함의 일부여야만 했다. 스코틀랜드 의회가 권한을 넘겨받아 1999년에 개원했을 때, 찰스 1세 치세에 사원을 습격했던 청교도 약탈자들과 어깨를 겨룰 만한 현대의 인습타파주의자 존 메이저 총리는 별다른 의식도 거행하지 않고 돌을 뜯어내어 스코틀랜드로 돌려보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 예배당의 하나이자, 영웅적 인물과 정치가, 시인, 음악가들이 다수 묻혀 있는 국립묘지로 이어져 온 장대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보물을 잃었다. 사원은 성당으로서의 명줄이 끊어진 채 관광객을 유인하는 유물이 되어버렸다.



노르만 통치가 시작될 때부터 국정의 중심지는 웨스트민스터였다. 당시 이곳은 버드케이지 워크Birdcage Walk에서 그레이트 조지 스트리트Great George Street로 접어드는 지점에 있는 좁다란 지협을 통해 본토로 연결된 섬이었다. 웨스트민스터 궁이 궁전이라 불리는 것은 왕들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왕들이 종교계(주교들)와 속세의 중요 인물들로 구성된 의회를 소집했던 곳도 이곳이다. 노르만의 수도였던 웨스트민스터가 런던이 국정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준다면, 타워는 런던이라는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상기시켜준다. 로마인들이 떠난 후, 강변에 제대로 된 항구를 건설할 기술이나, 지금은 타워 힐로 불리는 전략적 요지에서 항구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노르만족이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타워는 요새였다. 타워의 내성內城 또는 아성牙城은 화이트 타워였고, 캉석재로 쌓은 성벽의 두께는 4.5미터였다. 여러 건물들로 이뤄진 타워의 장대한 구조와 해자, 강변의 공터는 그 자체로 런던의 역사에서 일어났음직한 일들을 가장 뚜렷하고 풍성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곳은 항구를 수비하는 요새였을 뿐 아니라, 왕궁이자 보고(寶庫, 지금도 왕관이나 홀 등의 寶器들을 보관하고 있다)였고 초창기에는 조폐국이었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위대한 중세 건물이 템플 처치Temple Church다. 템플 기사단은 그들이 교황을 제외한 모든 사법권에서 면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빨간 십자가가 장식된 흰색 상의를 입었다. 그들의 임무는 성지로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1162년에 런던에 첫 교회를 세웠는데, 템플 처치는 1185년에 세워졌다. 라운드 처치Round Church는 예루살렘의 성묘(聖墓 :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까지 누웠던 곳)를 모방해서 지어졌다.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에 손상을 입었지만 운 좋게도 건물의 대부분은 살아남았다. 절반은 잊혀진 영국의 과거를 웅변하고 있는 이곳은 상당히 강한 분위기를 풍긴다. 우리는 지금까지 런던이 중세의 아주 초창기부터 웨스트민스터에 자리잡은 정부의 핵심이라는 것을 살펴봤다. 런던은 타워를 통해 수호되는 거대한 무역항이었고, 의술과 또 다른 전문직인 법률의 위대한 중심지였다.



왕정복고와 복구



파리는 1789년의 혁명을 분수령을 전후가 갈린 도시다. 1848년, 1870년, 1940년에 거대한 파국이 잇따르면서 파리에서는 옛 상처들이 불거졌고, 상처에서는 지금도 피가 흐르고 있다. 청교도혁명 동안 공화주의자의 본거지였던 런던은 귀족들의 과두정치가 행사하는 권한과 시티가 가진 권한으로 인해 권한이 제한된 군주제로의 회귀를 환영했다. 빈틈없고 붙임성 있는 군주인 찰스 2세는 혁명 이전의 과거에 대해서는 등을 돌린 채,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묻어뒀다. 부왕의 처형을 지지했던 이들을 상대로 앙갚음을 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1666년의 대화재는 중세 시대 런던의 목재 가옥, 골목길, 교회를 송두리째 파괴했다. 1671~1677년에 대화재와 시티의 재건을 기념하여 건설된 황금빛 불덩어리를 얹은 기다란 기둥 대화재 기념탑에는 대화재와 그로 인해 생긴 피해에 관한 내용을 라틴어로 새긴 명문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1681년에 "그토록 큰 공포를 불러일으킨 천주교 놈들의 광란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문구가 덧붙여졌다. 대화재가 방화의 결과라는 증거는 없다. 가톨릭 방화범이 한 짓이라는 증거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도 사회의 편견을 진압하는 일은 화재를 진압하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오늘날 이슬람과 테러리즘 사이를 손쉽게 연관짓는 대중의 의식처럼, 의회를 날려버리려는 음모가 좌절된 1605년 11월 5일을 기억하는 17세기의 런던에서 가톨릭과 파괴 행각을 동일시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기념탑에 덧붙여진 모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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