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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자크 아탈리 지음 | 웅진닷컴
1. 노마드적 인간의 기원



노마드의 탄생


35억 년 전 생명이 지구에 생겨난 이래로, 선천적으로 이동성인 이들 생명체는 이 유기체에서 저 유기체로 옮겨 다녔다. 꿀벌, 비버, 연체동물과 같이 일부는 반(反) 정주성(定住性)을 갖고 있긴 해도, 박테리아에서 벌레, 파리에서 조류에 이르는 대부분의 동물은 움직이며 산다. 1억 5천만 년 전에 나타난 포유류는 그들의 생존조건을 결정짓는 다양한 형태의 방랑 속에 자리 잡았다. 어떤 동물들은 기후의 변화에 따라 짐승의 시체나 과일들을 찾아서 정처 없이 이동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대형 영장류의 경우로, 그들 중에서 나온 인간은 지배적인 종(種)이 된다.



영장류는 5천 5백만 년 전 당시 그들이 생존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던 남아프리카에서 생겨났다. 이들은 3천만 년에 걸쳐 포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에서 살고 있던 원숭이류에서 분화된 종들이다. 약 6백만 년 전이나 7백만 년 전에 원숭이들은 서로 다른 두 방향으로 진화하였는데, 한편으로는 피그미침팬지, 침팬지, 고릴라로 진화하게 될 폰지드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그리고 한참 후에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르가스테르, 이어서 하이델베르크인으로 이어지는 호미니드가 있었다. 호미니드가 오늘날의 인간으로 이어진다. 4백만 년도 더 이전에 늘 서서 걷는 최초의 포유류이며, 여행을 많이 하고 다른 어떤 종보다 환경에 잘 적응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탄생했다. 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은 모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명백히 노마드들이다. 그 집단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멀리 멀리 갔다. 275만 년 전쯤, 이번에도 역시 동아프리카에서 더 수직에 가깝게 설 수 있는 영장류인 호모 하빌리스가 나타났으나 인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호모 에르가스테르는 인간이다. 다른 종들이 사라져버리는 동안 호모 에르가스테르는 언제나 같은 지역에서 나타났는데, 200만~180만 년 전이었다.



호모 에르가스테르는 아프리카 땅을 떠나는 데 성공했지만, 지구 정복의 진정한 출발을 장식하게 되어 인간이라는 종이 된 것은 그 이후에 나타난 호모 에렉투스이다. 더욱 지구력 있고, 민첩하게 걸으며 더 큰 뇌를 가진 호모 에렉투스는 약 2백만 년 전에 출현했다. 이들은 큰 변혁을 가져왔다. 생존하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수렵인이 되었다. 큰 원숭이들이 그들보다 앞서서 아시아로 간 적이 있지만, 아프리카를 처음으로 확실하게 떠난 것은 호모 에렉투스이다. 발견된 흔적들에 따르면, 수천 세대를 거쳐 인류는 우선 아프리카 전체를 횡단하여 지중해 연안에 이른 뒤 아시아를 통과하는 대행진에 참여하였다. 식량을 찾아 나선 것이라는 등의 이유만으로는 이 오랜 행진을 설명할 수 없다. 그보다는 호기심과 모험에 대한 욕구가 그들을 더욱 자극하였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만능의 노마드

150만 년 전에서 50만 년 전 사이에 후손 없이 멸종되어가던 호모 에렉투스 외에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다.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로서 호모 에렉투스의 사촌이다. 이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유럽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 되고, 다른 데에서는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된다. 이들은 방랑 생활 속에서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어마어마한 진보를 하게 된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만이 유일하게 긴 자연선택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그 이유는 가장 뛰어난 노마드들이였기 때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저 자연에 의존해 사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이어 정주성이라는 것을 발명해낸다.



2만 년 전쯤에 빙하는 줄어들고 기후는 다시 더워졌다. 지구의 모습은 오늘날의 모습으로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1만 8천 년 전에서 1만 년 전까지 마지막으로 완전히 노마드적인 시기가 펼쳐진다. 그들은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따기 위해 일주를 하면서 정기적으로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기도 했다. 지구의 기후가 점차 안정되자,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의 어떤 집단들은 익숙한 사냥감을 쫓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갔다. 또 어떤 집단들은 더 대담하게 남쪽으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새로운 동물들과 더욱 편리하고 쉬운 생활 형태를 찾기도 했다. 세계 각처에서 인간은 점점 더 오래 지속되고 복잡해진 집단을 형성해 서로 점점 더 다양한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점점 더 먼 거리의 집단과도 물물교환을 하였다. 요르단 강 계곡은 당시 지구에서 가장 기후가 좋고 비옥한 땅이었다. 처음으로 노마드들은 한곳에서 평생 동안 먹을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은 그곳에 자리 잡아서 염소를 길렀는데, 이웃 공동체가 방목지를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제한되는 영역에서 여름 방목지와 겨울 방목지를 오가며 이동목축을 하였다. 이 수렵-가축사육인들은 거주지 가까이에 콩, 팥 등의 곡식을 심었다. 그러나 아직 농업이라고 할 수는 없는 단계였다.



식물을 길들이는 법을 알게 되면서 농부들은 잡은 동물들을 번식시킬 생각도 하게 되었다. 지구상에는 당시 수천만 명의 인간이 살고 있었는데 근동의 어떤 목축민들은 염소와 양들을 데리고 떠나서 발칸 반도와 지중해 연안에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기도 하고 중앙아시아, 중국, 아프리카까지 가기도 하였다. 목축이 전해지자, 중앙아시아 평원에서는 노마드 부족들이 수렵채취인의 신분에서 여전히 노마드였던 목축민들의 신분으로 곧장 넘어갔다. 노마디즘이 그 어느 곳보다 발전하게 되는 곳은 아시아이다. 현대인들이 물려받게 되는 문명 대부분이 거기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유럽의 숲에는 기원전 5천년경이 되어서야 다뉴브 강에서 온 농부들이 이미 가축으로 길들여진 동물들을 데리고 파리 분지로 와서 목축민이 되었다. 사막이 된 아프리카 일부에서는 목축민들이 동물들을 데리고 와서 정착했다. 기원전 5천년쯤에는 지구에 사는 인간들 중 3분의 2 이상이 여전히 수렵인, 채취인, 목축민 또는 가축 사육인으로서 노마드에 속해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농부가 되었다.



2. 제국의 말(馬)Ⅰ



제국의 말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고, 수레를 끌며, 병사들을 태울 수도 있는 동물들을 목축민들이 사육하는 바람에 세계는 큰 혁신을 맞게 된다. 이때부터, 유라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횡단하는 일이 몇 년 동안에 할 수 있는 일, 곧 이어서 몇 달 내에 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말의 사육은 인간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말과 바퀴 덕분에 인간은 무거운 짐도 실어 나르고, 수레에서 살수도 있었으며, 먼 데 가서 많은 양의 물건을 교환할 수도 있었고, 또 말을 타고 사냥이나 전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이 그렇게 유라시아에서 사육되던 때, 순록은 북아시아, 쌍봉낙타는 중앙아시아, 단봉낙타는 근동에서 사육되었다. 여행자들이 보기에 이 동물들은 공통적으로 아주 중요한 특질을 갖고 있었다. 한번 자기가 다녀본 길은 꼭 기억해서 중앙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단조로운 사막이든 사바나 초원이든 스텝 초원이든 어디든 다닐 수 있었다. 순록, 말, 쌍봉낙타와 단봉낙타는 그렇게 해서 오늘날 '연결망'이라 불리는 연쇄 고리를 이루었다. 이 문화적, 인간적, 호전적, 상업적인 연쇄 고리는 곧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바꿔놓게 된다.



이때부터 노마드가 아닌 자들은 노마드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소아시아 농민들은 밭에서 언덕으로 올라가 나무와 돌로 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가 은둔해 있었다. 성벽 문은 먼 오아시스로부터 물품을 싣고 오는 대상들에게만 열어줬고, 교환은 마을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원시 도시들' 중에서 잉여 물품을 가장 잘 처리하고 일을 잘 분배하는 도시들이 '조직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를 둘러싸고 주변의 시골 생활이 굴러갔다. 천혜의 기후, 수로(水路), 옥토의 땅인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로 이런 식으로 여러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2370년경, 마지막 대홍수가 났을 즈음에는 아카드, 우르, 바빌론이라는 세 도시국가가 그렇게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기원전 587년에 아시리아인들은 예루살렘과 유다왕국을 탈취하여 바벨탑이라 불리는 신전을 완성하지만, 이들 또한 기원전 539년에 키루스 2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기사들에 의해 무너진다. 그들의 몰락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위대한 제국들이 종말을 맞게 된다.



기원전 3500년부터 동아프리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장인들로부터 도기 굽는 가마 속에서 광석과 목탄을 섞어 녹여서 청동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해서 남쪽의 상이집트왕국과 북쪽의 하이집트왕국이 세워졌다. 기원전 32세기에는 상형문자가 출현했고, 초기 도시들과 초기의 큰 공동묘지들을 둘러싼 두 이집트가 하나의 왕조로 통일된다. 그로부터 1300년 뒤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도 기마 문명이 기존 권력을 전복시킨다. 이러는 동안 이 제국들 주변에서 제국에 얹혀살던 많은 유랑 종족들 중 지중해 연안에 살던 인도유럽어족, 즉 이오니아인, 도리아인, 페니키아인 등은 새로운 노마디즘을 만들어냈다.



적어도 3만 년 전부터 인간의 주요한 자원은 물가에 있었다. 초기 중동의 제국들도 시리아에서부터 인도까지 이어지는 해안을 따라 퍼져 있는 상관(商館)들에 상인들을 잘 배치해 놓았다. 이들 중 페니키아 상인들은 이집트와 아나톨리아에서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콘월까지 갔다. 이들은 교역을 위해서 다른 언어들을 이해하고, 말하고, 쓸 줄 알아야 했다. 그 언어들을 잘 해석하기 위해 기원전 1500년에 새로운 문자 체계인 알파벳이 고안되었다. 이 주요한 발명 역시 노마드적 필요에 따라 탄생했다. 소아시아 제국들이 쇠약해지자 교역은 지중해의 서쪽으로 옮겨갔다. 이오니아인, 헬레나인, 아카이아인 그리고 도리아인은 선원이 되어 섬들과 대륙 가장자리에 도시를 세웠다. 헬레니아인들은 페니키아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바로 지중해 주변에 상관을 창설했다. 아테네는 흑해로 가는 길의 관리를 맡게 되었고, 흑해에 농산물 창고들을 설치했다. 무역항이면서 동시에 망루이기도 했던 이 작은 도시들에서 새로운 유형의 여행자가 생겨났으니, 그는 동시에 선원, 군인, 상인, 철학자이면서 '꾀바른 오디세우스'를 모델로 한 여행자였다. 이 새로운 노마드가 기원전 7세기 경에 발명한 민주주의와 화폐는 교역 확대의 원동력이 되었다.



유일신주의와 약속의 땅

당시 그리스에서 유행하고 있던 사상의 주역들인 스토아학파와 키니코스학파처럼 유태인(헤브라이인, 히브리인, 헤브루인 등으로도 불린다)도 짐가방 없이 여행하였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와 달리 헤브루인은 연대감으로 묶인 노마드였다. 헤브루인은 자기들이 통과하는 지역의 신들을 자신들의 신들이 공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신은 하나뿐이라고 공표했다. 그리고 그 신은 자신들을 받아들여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애쓰는 신이며, 모든 인간들의 신이라고 설명했다. 교환의 노마드들이었던 그들은 책을 한 권 쓰는데, 그 책 속에서 신을 향한 자신들의 여행을 이야기한다. 헤브루인은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역사를 쓴 최초의 인간 집단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전의 모든 제국들처럼 로마제국도 노마드들이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에 트로이 출신의 쌍둥이가 건국했다고 한다. 신화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로마는 그 즈음에 건국되었다. 그 지역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전에 그곳에 정착해 있던 다른 민족들을 굴복시키면서 아시아에서 온 민족들에 의해 세워졌다. 로마제국이 가장 멀리 뻗어나간 때는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 재위 때였다. 로마제국은 당시 브리타니아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게르마니아에서 아프리카까지 팽창되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로마가 동쪽에서 온 노마드들에 의해 포위되어 흔들리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시아의 시베리아인

동쪽으로 더 가면,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교역을 위한 사거리인 북중국과 헝가리 사이에 펼쳐진 스텝 초원과 사막들에서 기마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이들은 기마술과 천신(天神)을 기반으로 한 이동성 융합 문명을 이루었다. 그들은 캠프와 수레 안에서 또는 천막 아래에서 살았으며 복잡한 위계질서에 복종했고, 광대한 연락 체계 덕분에 상당한 물자 지원 체계를 관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가축사육인, 목축인, 장인, 수렵인이었다. 그들은 대서양과 태평양,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최초의 교역망도 형성하였다. 또 그들은 전사들이기도 했다. 기원전 1500년부터는 그들을 언어와 기원지, 종착지에 따라 두 개의 주요 집단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하나는 알타이족인데, 기원지인 시베리아의 산맥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다른 하나는 인도유럽어족인데, 그들의 지리적 영역을 가리키는 근대적 용어이다.



- 몽골족 : 적어도 5천 년 전 지금의 내몽고에 상당히 진보된 문명이 있었으니, 이 문명의 주인공은 수렵인으로 한때 농경민이 되었다가 말을 길들인 뒤 다시 노마드가 된 몽골족이다. 몽골족은 광대한 이동 캠프에서 살았고, 건국 중이던 중국과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원거리 교역의 담당자로 그 위치가 확고하였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칸'들은 그들을 동쪽으로 이끌고 가 중국에서 권력을 잡고 십여 개의 왕조를 세웠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갔다. 또 어떤 몽고인들은 스스로를 아바르족이라 명하였는데, 그들은 중국의 북쪽으로 돌아가 220년에 그곳에 새로운 중국-몽고제국을 세우고 만주에서부터 바이칼 호수까지 뻗어나간다. 웨이(위나라)라고 불리는 이 왕조는 552년에 투르크어를 쓰는 노마드인 돌궐족에 의해 무너진다. 아바르족 중 일부는 이때 유럽으로 떠난다. 686년에는 카라 키타이족(거란족) 또는 키탄족이라 부르는 다른 아바르족 사람들이 북중국으로 다시 가서 살다가 697년에 다른 몽골 왕조인 당나라인들에게, 그리고 돌궐족에게 짓밟힌다. 이 아바르족은 그들이 정복한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라를 세웠다가, 3세기 뒤에 당나라가 몰락한 것을 이용해 역시 투르크족인 키르기스족에게서 몽고를 재탈환해 936년에 요(遼)나라라는 새로운 중국-몽고 왕조를 세웠다. 유럽인들은 이 카라 키타이족의 나라에 '카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그로부터 천 년 동안 중국을 카타이라 불렀다.



- 인도유럽어족 : 알타이족에서 유래된 수렵인들 중 두 번째 집단은 뽀족한 대안이 없어서 '인도유럽어족'이라 불린다. 이들은 적어도 6천 년 전, 몽골족과 같은 시대에 현재 러시아 동남부에 있는 비스툴레와 드네프르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이유는 같은 방언 때문이다. 이 방언은 후에 발전해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인도, 유럽의 대부분 언어들로 분화된다. 그들 간에는 종종 갈등이 생겨 기원전 제4 천년기 말쯤에 이주 방향에 따라 4개의 주요 집단으로 나뉜다. 첫 번째 집단은 몽골의 침략으로 비스툴레 강가에서 쫓겨나 도나우 강과 볼가 강 계곡에 성벽 마을을 짓고 은거한다. 이들은 도끼로 무장하고 우크라이나, 발칸, 그리스, 다뉴브 계곡, 폴란드와 독일 평원으로 다시 떠났다. 이들은 조금 뒤에 켈트족, 슬라브족, 게르만족으로 분화된다. 서유럽의 거의 모든 초기 민족들, 또는 적어도 일부는 이 집단 출신이다. 그동안 인도유럽어족의 두 번째 집단이 시베리아를 향해 동쪽으로 떠나서 몽고의 중심에 있는 알타이 산맥까지 간다. 그들 중 일부는 위구르족이 되고, 일부는 인도로 가서 드라비다족이 된다. 기원전 2300∼2000년에 세 번째 집단은 남쪽으로 내려가 수메르, 히타이트, 바빌론을 세운 뒤 페니키아와 지중해로 가서 첫 번째 집단의 다른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그리스에 융화된다. 기원전 1900년경에는 아리아 또는 아리안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될 네 번째 인도유럽어족도 볼가 강을 떠나 카스피 해를 빙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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