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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1부. 가해자와 희생자



성조기와 태극기


테러와 전쟁의 차이는 무엇일까? 테러 행위의 주체가 비공인 소수 집단이라면, 전쟁 행위의 주체는 공인된 국가이다. 전쟁과 테러의 경계는 결국 국가 권력에 의해 공인된 테러와 공인받지 못한 테러, 공적 테러와 사적 테러의 사이에 놓여있다. 미국의 시민들은 9월 11일에 일어난 사적 테러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9.11테러 이후 고양된 미국 민족주의의 능동적 피해자이자 공적 테러의 참여적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테러 당일 펜타곤 빌딩에 걸린 거대한 성조기는 원초적이고 공격적인 미국 민족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불길한 전조였다. 전세계를 향해 "우리 편에 설 것인가, 그들 편에 설 것인가"라고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부시의 연설을 계기로 미국의 시민 사회가 전개한 이미지 전쟁은 곧 민족주의 담론과 결합했다. 그것은 미국식 '국민 만들기'의 21세기 판본이었다.



이제 미국의 국가 권력은 행복하다. 시민 사회의 적극적 동의 아래 마음껏 헤게모니를 행사한다.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전쟁'을 위해 시민적 권리는 무시될 수 있다. 국가 권력이 규정한 미국 국민의 전체적인 이해 앞에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비애국적인 일이다. 특권적 시민조차 시민의 권리를 포기하는데, '소수자'의 권리를 고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적지 않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좋은 헤게모니라고 믿고 있는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의 통일 담론에 대한 나의 회의도 같은 맥락에 서있다. 남북의 국가 권력이 담합하여 통일의 명분을 선점하고, 다양한 채널을 통해 시민 사회에 그 명분을 시달하고 강제하는 방식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우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의 지배 담론 때문에 이중으로 억압받는 한반도 주민들의 편에 서야 한다. 동시에 통일/반통일의 대립 구도를 진보/보수의 이분법으로 파악하는 단순한 발상에 대해서는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심판할 수 있는가?

1922년 부다페스트의 한 강연에서 영국의 역사가 홉스봄은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든 역사가는 예기치 않게 정치가가 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변이었다. 학교의 교과서에나 갇혀 있음직한 '역사'가 정치의 장으로 끌려나오고, 홀로코스트 재판처럼 언론의 화제를 모으며 재판정에 서게 되는 것도 실은 역사학의 정치성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진리의 정치성'에서 역사학도 예외는 아니다. '역사는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사실상 '진리는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포섭된다. 심판 가능성에 대한 내 답은 부정적이다. 심판한다는 것은 법이 절대 진리를 구현한다는 전제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법의 정통성이 곧 진리라는 그 전제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심판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역사적 진실의 정치성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드러냄의 대상이다. 법정의 심판을 통해 과거를 단죄하고 청산한다는 방식을 넘어, 과거를 드러내서 살아 있는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 때 과거는 극복될 수 있다. 사법적 심판이 아무리 추상같다고 해도, 과거를 망각하는 한 불행한 과거는 되풀이 되게 마련이다. 사법적 처단처럼 카타르시스는 제공해 줄 수 있지만, 과거에 대한 뼈아픈 기억과 성찰은 법적 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세습적 희생자 의식

한국 역사학의 입장에서 '현재로서의 과거'에 얽힌 역사의 실마리를 먼저 풀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식민주의의 '세습적 희생자'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도 식민주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자기 성찰을 새로운 준거 틀로 정립하자는 것이다. 더 이상 식민지 세대의 역사적 고통을 빌미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정당화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의 집단적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세습적 희생자라는 자기규정은 잠재적 혹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는 식민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자기비판을 근원적으로 가로막는다.



세계사적 근대의 궤도에 편입된 이상, 그 어떤 역사주체도 잠재적 식민주의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식민지 시대의 세습적 희생자라는 자기규정에 갇혀 있는 한, 잠재적 식민주의에 대한 내부 비판은 좀처럼 기대하기 힘들다.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축으로 형성된 집단적 기억은 강력한 민족 국가에 대한 갈망을 낳고, 결국 시민 사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헤게모니를 강화시켜주는 기제였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저항조차 자연스레 세습적 희생자 의식에 근거한 한반도의 전후 역사학은 국가 권력의 공범자였다. 최선의 경우에도 수동적 공범자에 불과했다.



고구려사가 어떻게 한국사입니까?

최근 들어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고구려사 귀속을 둘러싼 양국간 논쟁이 불거지고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시대착오적이고 비역사적인 싸움이다. 사실 고구려사를 놓고 한국사냐 중국사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건 2000년 전의 이야기이다. 당시에 중국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국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있었던 것은 그저 고구려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존재했던 고구려에 (근대 동아시아의 경우) 20세기에서야 등장한 근대 국민 국가라는 개념을 그대로 투영시켜 버리는 것이 지금의 논쟁 구도인데, 이건 시대착오다. 인식론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비역사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한 논리를 역사학자들이 전개하고 있다는 아주 코믹한 상황인 것이다.



근대 국민 국가의 개념으로 고구려사에 접근하면 안 되는 것은 명확하다. 고구려사가 한국사라 주장하는 이들은 고구려인이 한민족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생겨난 게 고작 100여 년 전이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경우 민족이라는 말이 처음 쓰였던 건 20세기 초였다. 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마음대로 의역을 해서 '민족'이란 말을 뽑아내곤 하지만 사실 민족이라는 개념어는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에야 생긴 개념을 고대사에 대입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사는 국사적 틀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변경사Border history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구 대상이 어느 하나의 국민이나 민족 국가의 단위에 포섭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하는 장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 안에서 문화적 긴장이 생기고 거기서 역동성도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200년 동안 근대 역사학이란 게 국사의 틀로 짜여져 온 것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완벽한 대안이 나올 수는 없다고 본다. 지금은 그 단초가 될 수 있을 법한 것들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 방법론으로는 변경사적 관점이 적절하다고 본다. 한편 이성시 선생은 발해에 대해서도 변경사로 보고 있으며, 김한규 선생은 요동사라는 컨셉으로 고구려를 보고 있다.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2부. 적대적 공범 관계



9.11 이후의 민족주의

정치적 민주화가 역사적 과제이던 시절, 국민은 곧잘 국가 권력의 대립항으로 설정되곤 했다.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라는 세 가지 발전 단계론에 20세기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꿰어 맞추거나, 보수주의와 대비하여 시민 민족주의와 민중 민족주의를 진보주의로 규정하는 시각 등에서 그것은 잘 드러난다.



독자적인 국가 권력을 갖지 못한 식민지 상황이나 정치권력이 정당성을 갖지 못한 전후 현대사의 현실에서는 때때로 민중이 국민을 대체하기도 했다. 식민지 지배 권력이나 비민주적 국가의 국민으로 구성되기를 거부하고, 변혁의 전망을 가진 민중을 국민 국가의 구성 주체로 상정한 탓이다. 비민주적 지배의 제한된 그물망을 뚫고 공동의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참여의 폭을 넓힌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 민주주의를 향한 일정한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진 조건 속에서 국민이 배치되는 방식은 이미 민주주의와 길을 달리 한다. 민주화를 향한 길 위에서 국민이 대중의 정치 참여를 의미했다면, 정치적 민주화 이후의 국민은 국민 국가의 지배 장치에 의해 구조화되고 조작된 대중을 의미한다. 한 국가의 국민으로 호명될 때, 그 개인은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리고 국가에 의해 획일적으로 주조된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한다. 여러 개인들이 갖는 다양한 이해와 주체적인 욕망 및 주장들이 '국민의 뜻'으로 정당화된 국가의 욕망으로 환원되고 종속되는 것이다. 즉 민족 국가의 목표와 규율을 내면화한 국민적 정체성이 정점을 차지하는 국가주의적 가치의 위계질서가 국민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상호 침투의 논리적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국민의 배치방식의 변화에 주목한다면, 국민 참여가 더 이상 진보의 코드를 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열린 민족주의와 닫힌 민족주의, 시민 민족주의와 혈통 민족주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이들의 상호 침투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보면, 열린 민족주의자들은 젠더, 계급, 세대, 종교 등등의 다양한 정체성을 수용함으로써 인식론적으로도 열려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주의의 한 변형일 뿐이다.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조건과 분단이라는 정치 상황을 빌미로 민족을 정점에 놓고 젠더, 계급, 세대 같은 것들을 그 하위 범주로 배치하는 정체성의 완강한 위계질서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민족 본질주의의 사고 틀은 그대로인 것이다.



민족 본질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계급 본질주의나 젠더 본질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우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다양한 정체성을 포섭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포섭의 방식과 구조인 것이다. 민족을 정점에 놓는 정체서의 위계질서는 주류와 비주류, 다수자와 소수자의 현재적 구성을 승인하면서, 비주류와 소수자를 그 기성의 질서 속에 편입함으로써 기존의 주류적 질서를 재생산할 뿐이다.



급진적 민주주의의 다원성이 요구하는 정체성의 정치학은 특정한 정체성을 고정된 우위에 놓는 본질주의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매 순간 다양한 정체성들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모순된 긴장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주류의 정체성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는 인식론적 전환인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페를 패러디한다면 요구되는 것은 고정된 국민적 공동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유동적 경계를 지닌 '봉합되지 않은 공동체'인 것이다. 열린 민족주의에서 포스트 민족주의로 전환을 촉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반도 민족주의와 권력 담론

20세기 한반도 민족주의는 해방의 담론이었는가? 권력의 담론이었는가? 제국주의의 야만에 맞서는 이론적, 정서적 무기였던 일제시기 저항 민족주의와 해방 후 한국 민족주의는 연속성 속에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단절로 볼 것인가? 전자의 경우라면, 그 연속성은 양과 질에서 어떠한가? 또 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완전한 질적 단절을 의미하는가? 해방 후 한국 민족주의가 저항 민족주의의 적자라면, 그것이 해방과 저항의 담론이라는 명제는 자동적으로 성립하는가?



만약 그것이 권력의 논리를 담보한다면, 그것은 저항 민족주의 전통과의 단절 때문에 그러한가? 혹 저항 민족주의 자체에도 이미 권력의 담론이 해방의 담론 밑에 은폐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20세기 한반도 민족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해방과 권력의 역학 관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식민지와 분단국가라는 역사적 조건의 차이는 일제하 저항 민족주의와 해방 후 민족주의의 연속과 단절이라는 구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이 질문들은 20세기 한반도 민족주의의 지형을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는 이 기본 전제에 대한 검토를 생략한 것으로 보여진다. 민족주의가 한국 사회의 규범적 잣대로 존재하는 이상, 해방 담론으로서의 민족주의라는 명제는 분석을 불허하는 전제였다.



민족주의는 해방과 저항의 이념이라는 전제가 확고한 만큼, 권력 담론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경우에는 사이비 민족주의로 낙인찍는 것이 최근까지의 관행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가 규범적 인식의 틀에 갇혀 있었던 것은 발생론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식민지와 독립 후의 참혹한 내전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지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민족은 사실상 국가의 공백을 채워주는 신화적 실체였다. 민족주의가 도덕적 정언 명령이자 사회적 규범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이 점에서 당연하다.



서유럽 사회학의 화두였던 개인과 사회, 개인과 민족,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변증법적 긴장이 폴란드 사회학에서는 낯선 주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한 폴란드 사회학자의 통렬한 지적은 한국의 사회 과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식민지 통치와 내전 그리고 분단의 연속된 고통은 한반도 주민들의 집단적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민족으로 대변되는 집단적 삶과 개인적 삶의 대립은 충분히 지적 사치로 느껴질 법했다. 공동체주의 혹은 집단주의가 사회적 삶의 원리로 자리잡은 것은 이 점에서 당연하다.



정통성 있는 국가가 부재한 상태에서 이 때의 공동체 또는 집단은 물론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사실상 개체적 삶에 대한 총체적 규정력을 지니면서 민족이라는 집단적 삶 속으로 편입을 강요했던 사회 이념이자 실존 철학이었다. 민족의 실존은 이렇게 개인의 실존에 우선되었다. 추상으로서의 민족주의는 이처럼 민족의 실존을 우선한다는 이념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민족의 실존을 우선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 변혁이나 정치적 행위에 특정한 지침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가 자기 완결적 논리 구조를 갖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자체로서 불완전한 민족주의는 흔히 여타의 사회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민족주의의 이념적 가변성에 주목하고 그것을 '이차적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가 언제,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 사회 이데올로기들과 결합하느냐는 것이다. 그 양상은 물론 지역에 따라 또 같은 지역이라 해도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민족주의가 특정한 사회적 교리를 완강하게 고수하기보다는 역사적인 변화에 열려 있는 이데올로기임을 의미한다. 격렬한 운동성을 지니는 민족주의는 따라서 이데올로기이자 동시에 사회 변동을 주도하는 정치 운동이며 사회 운동인 것이다.



이처럼 운동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남과 북은 다 같이 의장된 형태의 민족주의이다"라는 지적은 쉽게 이해된다. 서로가 표방하는 체제 이념이나 정책의 팽팽한 대치선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사실상 권력 담론으로서 민주주의적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이나 천리마 운동이 모두 주민들의 근로 의욕을 부추겨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는 의도였다는 김정일의 평가가 별반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한국적' 혹은 '우리식'이라는 수식을 벗기면,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10월 유신과 주체 사상이 실은 민족주의의 동일한 권력 담론으로 짜여져 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현실 정치의 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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