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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의 재발견

장 뤽 엔니그 지음 | 예담
아파렌시스 (Afarensis)

엉덩이의 기원은 머나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엉덩이는 인간이 두 다리로 일어서서 그 자세를 유지하려고 생각하면서부터 나타났다. 엉덩이의 근육이 이때부터 상당히 발달하게 되었으니 가히 우리 인간의 진화에 중대한 순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장류에 속하는 193종 가운데 오직 인류만이 항상 돌출되어 있는 반구형 엉덩이를 갖고 있다. 고대 생물학자인 이브 코팡에 따르면, 이 시기는 300~4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은 대지 위를 달리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손은 해방되었으며, 두개골이 척추 위에 얹히는 방향으로 자세가 바뀌었다. 이 같은 변화 덕분에 인간의 두뇌는 각별히 발달할 수 있었다. 이 흥미로운 개념을 다시 곱씹어보면, 인간의 엉덩이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두뇌가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된 기원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인간과 비슷한 원숭이에게는 엉덩이가 없었다. 그들로서는 엉덩이가 없다고 안달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암컷 원숭이는 수컷 원숭이에게 '성적신호'를 보내려고 할 때 보란 듯이 엉덩이를 내민다. 암컷 원숭이들은 배란기가 임박하면 엉덩이가 유난히 부풀어오르고 빨갛게 물드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교미는 대개 암컷이 최대치로 팽창한 엉덩이를 내보일 때 이루어진다. 침팬지나 비비원숭이 수컷들은 암컷의 빨간 엉덩이나 쫓아다니며 평생을 보내고, 그 일로 자기네 불행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 여성의 경우는 다르다. 여성의 엉덩이는 변화하지 않으며 항상 돌출된 상태로 있다. 그러기에 항상 남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



데스먼드 모리스는 엉덩이에 지방질이 많이 축적된 이유에 대해 한 가지 가설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도 다른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후배위로 성교를 했고, 여성의 성적 신호들은 원숭이들처럼 둔부를 통해 나타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둔부가 풍만하면 풍만할수록 여성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풍만한 둔부는 매우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이리하여 인간은 정상위 성교로 넘어오게 된다. 그 결과 젖가슴은 부풀고 엉덩이는 펑퍼짐한 반구형을 닮게 되었으며, 이로써 여성은 좀더 균형 잡히고 민첩한 몸매를 갖기에 이르렀다.



목욕 (Bain)

인간은 엉덩이를 자주 씻었다. 게다가 이 행위는 족히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그래서 <이탈리아식 잠자리>를 그린 자콥 반루 같은 화가, 특히 19세기 후반기의 화가들은 우리에게 엉덩이를 씻는 모습에 대한 장대한 파노라마를 제시한다. 왜 화가들은 목욕 장면 그리기를 즐겨했을까? 아마도 작가이자 비평가인 질베르 라스코가 지적했듯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꿈은 대부분 액체성 꿈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림 속의 여성들은 자신의 엉덩이를 들켰을 때, 흔히 생각하듯 그렇게 소스라쳐 놀라는 태도만 보인 것은 아니다. 장 클르에의 <목욕하는 디아나>라는 작품을 보라. 여성의 엉덩이는 풍만하고 교태가 어려 있으며 아주 편안해 보인다. 배경이 숲 속이고, 그녀를 보고 즐거워하는 시티로스들에게 빙 둘러 싸여 있는데도 말이다.



여러 사실들을 요약해보면, 1850년부터 1940년까지 대체로 엉덩이는 목욕 중이었다. 심지어 거의 유일한 관심사였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 후 사람들은 아마 이제 됐다고, 더 이상 이 주제만 붙잡고 늘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리하여 엉덩이는 침대로 들어오게 된다. 이때부터 침대는 엉덩이가 항상 진정으로 지향해야 할 곳, 진정으로 머물러야 할 곳인 것처럼 보였다.



성교 (Baiser)

사탄에게 엉덩이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쟁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데스먼드 모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악마에게 엉덩이가 없다는 전통적 믿음 덕분에 우리가 엉덩이만 내 보여도 사탄은 자기 약점을 깨닫고 다른 데로 눈을 돌린다고 한다. 이것은 마틴 루터가 자주 써먹었던 전략이기도하다. 루터는 자신이 끊임없이 악마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532년 루터는 <탁자의 담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악마는,내가 도둑이며 많은 성직자들의 재산을 빼앗았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내가 '내 똥구멍이나 핥아라'하며 대꾸했더니 악마는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데스먼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덧붙여 지적한다. 중세 독일에서는 유난히 거센 폭풍우가 몰아칠 때 번개를 몰아내고 악령을 내쫓기 위해 문 밖으로 엉덩이를 내밀곤 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거울이 '악마의 진짜 엉덩이'임을 확인했다. 그만큼 거울은 허영심,관능,오만함을 자극하는 도구로 여겨졌다. 엉덩이를 가진 악마의 전통은 대단히 확고했다. 숭배자들에게 강요되었던 악마 엉덩이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 -숭배자들이 거기에다 입을 맞추어야했다.- 은 이를 잘 전해준다. 그 행위들은 우리에게 악마의 엉덩이가 그의 손이나 정액과 마찬가지로 아주 차가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항문성교에는 분명히 황홀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살 속에 파묻히고 이 어두운 구멍으로 완전히 빨려든다. 말하자면 눈을 멀게 하는 성교랄까. 무엇보다 위의 구멍과 아래의 구멍을 혼동할 수 없다. 위의 구멍(입)은 빨아들이고, 아래의 구멍(항문)은 내뱉는다. 바로 이 때문에 항문성교는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항문은 교회의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같은 성교에는 영혼이 개입할 수 없으며, 영혼이 성교를 통해 항문과 결합해서도 안 되었다. 그 덕분에 결과적으로 항문성교는 영혼 따위를 개의치 않는 강심장들에게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사태는 어떻게 진전되었을까? 악마는 마녀들에게 '순결을 더럽힌 죄'를 시인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표시로 자기 항문을, 혹은 때때로 그 항문을 덮은 가면에 입을 맞추게 했다.



블라종 (Blason)

엉덩이는 사는 동안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엉덩이가 주체(주어)로 실존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엉덩이는 없어서는 안 될 보조어, 즉 형용어만을 갖는다. 우선 엉덩이가 있고, 형용어는 거기에 여러 가지 뉘앙스만을 더해줄 뿐이다. 형용어는 엉덩이를 조각하고 시적으로 만들지만 그게 다이다. 우리는 이 같은 조건에서 엉덩이가 무엇보다 엑스터시를, 숭배를, 극도의 사랑을, 혹은 그 반대로 보복을 담은 빈정거림과 가혹한 처사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엉덩이에 자연스럽게 어떤 문학적 장르가 부여되었다는 사실 또한 이해하게 된다. 그 장르가 바로 1535년경에 유행했던 에로틱한 풍자시, 즉 '블라종(Blason)이다. 블라종은 16세기 전반에 대단히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블라종으로 다루지 않은 소재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여성의 엉덩이를 블라종으로 다루었던 모든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한 문제는 블라종이라는 장르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문학사조가 된 이상 주로 어떻게 그 엉덩이를 묘사하느냐였다. 엉덩이는 아주 내밀한 부분일뿐더러 극도로 불안정하고 쉽게 달아나 버리는, 이를테면 '수은'같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사드(Marquis de Sade,1740~1814) 역시 엉덩이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사드에게 엉덩이는 사랑의 밀어가 아니라 오히려 경배의 대상이다. 그는 이 아름답고 귀여운 엉덩이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고 주무르고 벌려보며 황홀경에 빠진다. 그러나 이 황홀경을 어떻게 묘사할까? 신성한 엉덩이의 황홀경? 관능의 극치인 항문의 황홀경? 사드는 그것을 묘사할 수 없었다. 수많은 블라종으로 노래한 엉덩이는 결국 해부학적, 물신숭배적 작업이라기보다는 그저 변변찮은 테크닉, 아무리 보잘것없을지언정 현실을 알려주고 그 현실에 절대로 다다를 수 없다는, 고통을 덜어주기에도 벅찬 테크닉일 뿐이었다.



카니발 (Cannibal)

엉덩이를 어떻게 씹을까? 간단하다. 비어卑語를 참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엉덩이가 항상 과일가게 혹은 빵가게와 멋지게 어우러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엉덩이를 표현하는 이상적인 과자는 스웨덴 케이크, 일명 '공주님 케이크'로 대변된다. 이 과자는 제누아즈(스펀지케이크 혹은 그 반죽), 샹티이 제과용 크림, 설탕에 조련 사과를 한데 섞어서 만든다. 이 촉촉하고 가벼운 엉덩이 모양의 과자를 절단하면 흰색, 노란색, 붉은색 층들이 섬세하게 교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과자는 소비뇽처럼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과 잘 어울린다.



뛰어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롤랑 토포르는 완벽한 경쾌함과 시치미 떼는 태도를 앞세워 모든 신체 부위들에 대해 가공할 만한 식인 요리를 상상해냈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먹을거리는 바로 인간이다."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이러한 상상을 전개시켰다. "철학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방식은 그것을 먹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의 말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만약 나의 갈라(Galla)가 죽는다면, 그래서 갑자기 올리브처럼 작아진다면 나는 그녀를 먹어버릴 테다." 우리는 이것을 엉덩이에 대한 식인귀적 관점이라고 평할 수 있다.

1981년 6월 11일 파리에서, 이세이 사가와라는 이름의 일본인이 한 네덜란드 여대생의 머리에 총을 쏘고, 그녀를 강간한 뒤 시체를 토막 낸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시체 토막의 일부는 날것으로 먹었고, 일부는 프라이팬에 요리를 해서 먹었다. 그는 정신병자로 취급받고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어 도쿄의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그때부터 이 살인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우윳빛의 촉촉한 여성 엉덩이가 접시에 놓여 있고, 캔버스 한구석엔 포크와 나이프가 그려져 있는 그런 그림을. 과연 '다다이즘의 영감이 가득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86년 4월,그는 한 신문기자에게 그 여자를 죽이자마자 엉덩이를 먹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했다. 더욱이 이세이 사가와는 자전적인 책『안개 속에서』를 통해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여자의 엉덩이 살은 참치 살코기처럼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고.



곡선미 (Chirurgie)

사람들은 여전히 곡선미가 두드러진 엉덩이를 선호한다. 헤라클레이코스가 이미 말했듯이 "리라나 활처럼 어떤 때는 팽팽하게 긴장했다가 어떤 때는 이완되곤 하는" 곡선의 엉덩이 말이다. 이처럼 엉덩이가 곡선으로서 정의되는 이유는 엉덩이가 바로크 미학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로크 미학은 구름, 너풀대는 화환, 조가비, 둥근지붕, 소용돌이 장식 등을 수반한다. 독일 수아브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제단에 새겨진 성인들의 조각은 물결치는 엉덩이, 억누를 수 없는 쾌활함이 분출하며 요란한 환호로 두드러지는 엉덩이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산치오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1483~1520)의 <파리의 심판>(1530)에서부터 여성의 누드가 회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여체야말로 굽이치는 타원형, 꿈틀대는 뱀처럼 물결치는 곡선을 사용하기에 딱 들어맞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엉덩이는 그 자체로 여체에서 둥글게 굽이치는 모든 형태들, 머리카락, 외음부, 눈, 손톱 등을 요약해서 보여주지 않는가? 엉덩이는 육체에서 조가비 형태를 가장 이상적으로 보여주는 은유이다. 엉덩이가 흐물흐물한 연체류의 이상적인 은유이기도 하듯이 또한 엉덩이는 풍만하게 몸집이 불어난 조가비 모양을 보여주는 과장된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엉덩이의 곡선이 존재 이유를 찾는 것은 어디까지나 운동 상태에 있을 때이다. 왈츠의 불규칙한 움직임 속에서 엉덩이는 물수제비를 뜨듯 출렁이곤 한다. 이 희한한 꿈틀거림이 여성에게 S자 형태의 움직임을 부여한다. 알프레드 델보는『에로틱 사전』(1864)에서 여성은 남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기 위해 그 앞에서 "엉덩이 효과"를 충분히 발휘한다고 허심탄회하게 토로한다. 또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는 여자들이 둔부를 "선정적으로 배배 튼다"고도 말했다. 페오 페레는 좀더 서정적으로 "그대의 스타일, 그것은 그대의 엉덩이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둔부 (Croupe)

동물에게도 엉덩이가 있을까? 아니, 몇몇 동물들의 뒤를 가리켜 엉덩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전을 찾을 때 이 점은 매우 혼란스럽다. 동물의 경우에는 대개 '둔부', '후부' 혹은 '뒤'라고 지칭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둔부'라는 말은 '엉덩이'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마르셀 에메는『이동 촬영기』(1941)라는 소설에서 "둔부는 여성과 동물에게만 사용된다. 사람들은 '암말의 둔부'라고 말하듯 '여자의 둔부'라는 표현을 쓴다. 결국 여성의 신체는 동물의 신체에서 남성의 신체로의 전이 과정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아기 엉덩이 (Cucvl)

왜 우리는 조그만 엉덩이, 아기의 조그맣고 어설픈 엉덩이 앞에서 그토록 황홀해할까? 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치는『페르디두르케』(1973)에서 이렇게 말한다. "땅위에, 그리고 불타는 천상의 엉덩이 아래에 이 희미한 모성적 열기, 이 행복과 신뢰로 가득 찬 숭배와 포옹만큼 해로운 것이 있을까?"물론 인간에게서 어린 아기의 볼기보다 더 보드랍고 신선하며 감미로운 엉덩이를 찾을 수 있는 순간은달리 없을 것이다. 아기 엉덩이와 엄마의 관계는 버터와 프라이팬의 관계이다. 매순간의 친밀함, 보채며 우는 소리에서 우리는 그 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다. 엄마에게 아기 엉덩이가 없다면 그녀는 이미 엄마가 아니다. 그런 엄마는 탈선하고 삐뚤어진 엄마이다. 그러므로 아기 엉덩이는 엄마를 만든다. 엄마는 결코 아기 엉덩이 앞에서 몸을 사릴 수 없으며, 그저 축복할 따름이다.



아, 아기 천사의 귀여운 엉덩이! 아기 엉덩이는 귀여움을 받고 사랑 받고 숭배되기에, 어머니는 갑절로 위대해진다. 엄마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아기의 엉덩이다. 이로써 엄마는 대단한 존재가 된다. 아기 엉덩이를 통해 엄마는 이상적인 어머니가 된다. 마치 성모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엄마는 아기의 엉덩이를 가장 절대적인 엉덩이로 삼는데 몰두한다. 아기는 엄마에 의해 엉덩이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이 설익은 풋풋함, 이 서투른 공감, 인생을 모르는 무지 혹은 무력함. 아기 엉덩이의 이러한 덕목들은 순전히 엄마 덕에 얻어진 것이다.



춤추는 여인 (Dansevse)

춤은 엉덩이에 관해 경이로운 요소를 창조했다. 그것은 바로 '요동'이다. 요동, 그것은 엉덩이의 폭풍우와도 같다. 간단히 말하자면, 춤과 더불어 엉덩이는 드디어 엉덩이임을 행복해하게 되었다. 춤의 리듬 속에서 엉덩이는 더욱 방종해지고, 더욱 풀어지며, 더욱 필사적으로 변한다. 춤추는 엉덩이는 고통스러우면서도 야기할 수 있는 위험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래서 1212년 파리에서 열린 가톨릭 공의회는 일요일에 밭을 경작하는 것보다 춤을 추는 것이 더 큰 죄라고 선언했다. 그 이유는 춤이 '음욕에 불을 지르기' 때문이었다.



엉덩이 고랑 (Fente)

이탈리아의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바라보는 남자』에서 우리에게 관음증 환자는 금지된 것을 엿볼 뿐 아니라 미지의 것도 엿본다고 말해 준다. 그가 균열과 틈새를 통해 '열렬한 호기심과 독신瀆神적인 도전'의 감정 속에서 엿보는 대상은 마치 학자가 연구하는 대상과도 같다. 또한 그는 분열(fisson),과 '갈라짐(fente)'을 비교한다. "원자 에너지의 발견을 이끌어낸 과학적 연구 작업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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